열매의 삶/기독교 자료

수라구사, 레기온, 보디올.^^ 사도 바울의 로마 여행.

예인짱 2020. 3. 7. 16:30

시칠리섬 수라구사 지도    

 

시칠리아 섬 동부 해안에 있는 항구 도시이다. 고대에 지진으로 인해 본토에서 갈라져 나온 섬으로 여기고 있는데 오늘날(2002년)에도 화산이 폭발하고 있다. 이 도시에는 다이아나 신전,미네르바 신전,총독관저가 있었고 유명한 샘인 아데투사가 있다. 그리고 아크라디나라고 불리는 본토지방에는 광장 공회당 원로원 의사당 유테피네신전 등이 있다. 그리고 3∼4세기에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한 카타콤 등의 유적이 있다(행 28:12)  바울을 압송하여 로마로 항해하던 알렉산드리아 배는 풍랑을 만나 14일만에 난파된 채 멜리데(몰타)섬에 도착한다. 그리고 그곳 추장 보블리오의 대접을 받은 후 다시 배로 오늘날 시칠리아 섬의 수라구사(Syracuse)에 도착하여 다시 레기온과 보디올을 거쳐 육지로 올라 아피아 가도를 따라 로마로 향했다(행 27:27,28:1∼14) 

 

수라구사 항구 (현재명  시라쿠사 (Siracusa) 

 

이탈리아 시칠리아섬 시라쿠사주(州)의 주도(州都). 인구는 12만 5673명(2000)이다. 그리스 시대에 건설된 옛 도시로, 구시가는 시칠리아섬과 좁은 해협으로 격리되어 있는 오리티지아섬에 있으나, 신시가는 시칠리아섬까지 펼쳐져 있다. 비누·시멘트·올리브유·포도주의 제조 및 어업의 중심지로 제염업이 성하다. 아폴로 신전, 그리스식 극장 등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유적이 많으며 관광지로서도 유명하다. BC 734년 무렵 코린토스인이 이곳에 시칠리아섬 최초의 그리스 식민시 시라쿠사이(Syrakusai)를 건설하여, 선주민을 농노(農奴)로 삼은 뒤 지주가 귀족이 되어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들은 오래지 않아 농업과 무역으로 번영을 이루었으며, BC 480년 참주(僭主) 겔론이 히메라의 싸움에서 카르타고군(軍)의 침입을 격퇴한 이후 서쪽의 그리스 세계에서 주도권을 굳히고, 그 세력을 신장하였다. BC 3세기 후반부터는 친(親)로마파와 친카르타고파의 분쟁이 일어나자 이에 편승하여 로마가 간섭하게 되어 BC 211년 아르키메데스 등의 방위전(防衛戰)도 보람 없이 로마에게 굴복하였으나, 이후 로마의 시칠리아섬 통치관의 주재지로서 번창하였다. 286년 무렵에 프랑크 해적의 침입으로 황폐해졌으나 이른바 민족 대이동의 물결에는 휩쓸리지 않았고 5세기에는 아프리카로부터 반달족의 침략을 받았다. 6세기에는 그리스인도 이주했으며, 7세기에는 한때 비잔틴 제국(帝國)에 소속되었다. 이 무렵부터 사라센 세력이 아프리카로 뻗어 시라쿠사는 그리스도교 세계의 방위선의 일환을 이루었으나 878년 결국 사라센의 지배에 들어갔으며 다시 11세기에는 노르만인의 침입을 받아 비잔틴·사라센·노르만의 문화가 혼재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슈타우펜가(家)와 아라곤 등의 지배를 받아오다가 19세기 후반 이탈리아 왕국에 통합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연합군의 폭격을 받았으며, 1943년에는 미국·영국군에게 점령되었다

 

수라구사 항구

 

수라구사 두오모성당

 

로마에 도착한 바울(행 28:11-15)


11 석 달이 지난 후 우리는 그 섬에서 겨울을 보낸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뱃길에 올랐습니다 그 배의 앞에는 쌍둥이 신 표시가 있었습니다

12 우리는 수라구사에 배를 대고 삼 일 동안을 지냈습니다

13 그 곳을 떠나서는 레기온에 도착했습니다 그 이튿날 남풍이 불어 와서 그 곳을 쉽게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틀만에 우리는 보디올에 닿았습니다

14 거기서 우리는 신자들을 만나 그들의 초청을 받고 일 주일 동안 그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그런 뒤에 마침내 우리는 로마에 도착했습니다

15 로마에 있는 형제들은 우리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압비오 광장과 세 여관 까지 우리를 마중하러 왔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보자 용기를 얻었으며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수라구사 두오모성당 

 

수라구사 두오모성당 

 

수라구사 두오모성당

 

수라구사 두오모성당 

 

 수라구사 두오모성당

 

수라구사 두오모성당 , 미네르바 신전 흔적 

 

수라구사 두오모성당  

 

수라구사 

 

시라쿠사 고고학공원 입장권

 

시라쿠사 고고학공원 그리스극장

 

수라구사 고고학공원 그리스극장

 

시라쿠사 고고학공원 디오니시오의 귀 

 

시라쿠사 고고학공원 

 

시라쿠사 고고학공원

 

수라구사 고고학공원 유적   

 

수라구사 고고학공원 유적

 

수라구사 고고학공원 유적

 

수라구사 고고학공원 유적 

 

수라구사 고고학공원 유적

 

수라구사 고고학공원  유적 

 

시라쿠사 고고학공원 무덤동굴

 

수라구사 고고학공원 아폴론신전    

 

시라쿠사 아폴론신전           

 

시라쿠사 아폴론신전

 

시라쿠사의 비너스 (고고학박물관)   

 

수라구사 동전

 

레기온, 레기움 (R(h)egium) , 현재명  레조 칼라브리아  

 

레기온, 레기움 (R(h)egium)    


고대 그리스시대 이탈리아 칼라브리아 지방에 있던 식민시(植民市). 현재의 레조디칼라브리아에 해당한다. BC 720년경에 그리스의 도시 칼키스의 식민자(植民者)들에 의해 건설되었다. 전제군주 아낙실라스 때 시라쿠사의 디오니시우스 1세에게 패배한(BC 387) 후 한때 파괴되었으나 재건되었다. 로마와 동맹관계를 맺고 포에니전쟁 때에는 로마에 충실하였으며, BC 90년 이후 고대 로마의 지방자치 도시인 무니키피움으로 승격되었다. 몇 번이나 지진(地震)을 겪었으면서도 인구는 줄지 않고, 로마제정기를 통하여 계속 번영하였다. 그 후 410년에 서(西)고트의 라리크 1세(재위 395∼410)에게, 918년에는 사라센에게, 1060년에는 노르만족에게 정복당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포격 등으로 손상을 입었다

 

레기온

 

레기온 

 

레기온 두오모성당

이탈리아 남부의 한 항구도시로 오늘날에는 레조 디 칼라브리아라고 부른다. 이곳은 메시나 해협에 위치해 있었는데 이 해협은 레기온에서 이탈리아 본토와 시칠리아 섬을 11㎞ 정도의 폭으로 갈라놓고 있다. 항구에는 바울과 관련된 기념교회가 세워져 있지 않았다. 다행스러운 것은 산 중턱에 바울을 기리는 기념교회가 있었다. 교회 안에는 모자이크된 많은 성서 관련 그림들이 있었다.

 

레기온 (레조 칼라브리아)의 두오모 성당

 

1908년의 지진으로 도시를 재건해야 했기 때문에 이 교회 역시 최근에(1930년대) 지어진 것입니다. 새로 지어진 건물이지만 이 지역의 특성에 맞춰 노르만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크지 않은 장미창과 작은 블라인드 아케이드로 장식된 파사드, 기둥으로 나눠진 좁고 긴 창문 등에서 그런 특성을 찾아볼 수 있죠. 입구에 서 있는 두 조각상은 성 바울과 성 스테판이다.

 

레기온 성


<보디올 바울기념교회>


보디올 바울기념교회 

보디올은 나폴리 북쪽으로 있는 항구도시로서 B.C. 6세기경에 그리스의 식민도시로 세워졌으며, 곧 중요한 항 구도시로 발전하였다. 이 도시에 이미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아마도 오순절에 로마에서 예루살렘에 갔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이 방언으로 전한 복음을 듣고 그 이후에 로마로 돌아온 이들에 의해 이탈리아 반도에 복음이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항구 옆 해안가에는 바울이 이곳에 기착한 것을 기념하는 바울 기념교회가 세워져 있는데 교회 앞에서 바울이 보디올에 도착했다는 사도행전 28장 13절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보디올 바울기념교회 


보디올 바울기념교회 

보디올 바울기념교회 

보디올 바울기념교회 


 


보디올 원형극장

이 도시를 들어가자마자 커다란 원형극장(Flavio Ampheatre)을 발견할 수 있는데 A.D. 1세기 베스파시안(Vespasian) 황제치하에 세워졌다. 이 가공할만한 규모는 당시 40,000석으로 콜로세움과 산타마리아 카푸아 베트레에 있는 원형극장에 이어 이탈리아 전역에서 세 번째로 큰 것이었다. 아직도 지하는 완전하게 보전되어 있으며 이 지하는 검투사들이 검투를 준비하기 위 한 방, 그리고 맹수들을 관리하는 곳으로 쓰여졌다. 아마도 사도바울은 이 당시의 가 공할만한 극장이 세워지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보디올 화산지대

 

보디올(Putheoli)은 오늘날 포추올리(Pozzuoli)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어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보디올은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만에 위치한 항구 도시이다. 그리스 사모스 섬 출신의 이주민들에 의해 세워진 이 도시는 고대에 유황을 수출하는 지역에 있었으며 일찍이 철공업이 발달하여 무기에서 농기구에 이르기까지 각종 철제품들을 대량 생산했던 곳이다. 특히 곡물을 실어나르는 대형 상선들이 이곳을 드나드는 동서 교통의 요지중 하나였다. 따라서 이곳은 은행이 발달하여 소아시아의 5개 도시의 금융권을 장악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지금의 이탈리아 이름은 뽀쪼올리(Pozzuoli, 영어로는 Puteoli)이다. 뽀쪼올리는 샘물, 온천이라는 뜻이 있으며, 실제로 이 지역은 아직도 유황가스, 160도 이상의 뜨거운 증기가 솟아나오고 있으며, 모래와 진흙이 끓어 오르고 있다.  

  

보디올 압비오 가도

이곳의 유적으로는 아고라(시장) 건물과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신전,원형극장 등이 근래에 발굴되어 번영했던 옛 모습을 말해주고 있다. 바울은 수라구사를 떠나 배로 이곳 보디올에 도착하여 이곳에서부터 육로인 아피아 가도를 따라 로마에 들어갔다(행 28:13).

 

보디올 압비오 가도

 

보디올 압비오 가도 

 

보디올 제우스 신전,  항구 옆에는 BC 5세기께 그리스 제우스 신전 유적이 있다. 

 

보디올 제우스 신전 입구

 

보디올 제우스 신

 

보디올 제우스 신

 

보디올 제우스 신

 

보디올 미센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