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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인의 땅의 歷史] (152) 세상을 바꾼 서기 1543년 ⑤ 세종, 천재의 시대와 칠정산역법

예인짱 2019. 3. 20.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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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처럼 사라져버린 세종의 '과학 시대'

1392년 개국한 신생 왕국 조선에서는 50년 만에 찬란한 과학의 시대가 꽃피었다. 천재 집단이 창조한 시대였다. 지도자도 천재였고 그 조직원도 천재들이었다. 15세기 세종과 그 학자들 이야기다. 1543년 코페르니쿠스가 세상을 뒤집어엎기 100년 전 일이었다. 일본 작은 섬 도주 다네가시마 도키타카(種子島時堯)가 세상 반대편에서 온 신무기를 손에 쥐기 100년 전 일이었다. 그런데 그 많은 천재들은 어디로 갔는가. 그들이 피운 꽃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는가.

세종의 신무기 시스템 구축

'각 지방 육해군 사령관(절제사(節制使)와 처치사(處置使))에게 문서 한 권을 보낸다. 무기 주조 방식과 화약 사용법이 세밀하게 기록돼 있다. 군국(軍國)에 관한 비밀의 그릇이다. 항상 비밀히 감추고 하급 관리 손에 맡기지 말라. 임무 교대 때는 이 문서를 직접 인수인계하라.'

집권한 지 만 30년 한 달 되는 1448년 음력 9월 13일, 조선 4대 군주 세종은 신무기 시스템 구축 완성을 선언했다. 3년 전 넷째 아들 임영대군 이구 감독하에 진행해온 군사 프로젝트였다. 전달된 문서 이름은 '총통등록(銃筒謄錄)'이다. 화약 제조법과 무기 제작법을 담은 기밀 문서다.

등극 14년(1432년) 한 번에 화살 두 개를 쏘는 쌍전화포(雙箭火砲)를 시작으로 세종은 꾸준히 무기 개량 작업을 벌여왔다. 이미 3년 전에도 개량된 무기들은 소비되는 화약 양은 동일하고 사정거리는 두 배가 될 정도며 적중률도 만족스러웠다. 그때 세종은 "이제는 옛 무기가 우스운 일임을 알게 되었다(而今乃知其爲可笑也)"며 옛 무기들을 모두 파기하라고 지시했다.(1445년 3월 30일 '세종실록')

고려 말에 도입된 화약 무기를 계승, 발전시킨 신무기 시스템은 15세기를 강병의 시대로 만들었다. '총통등록'을 육해군에 전달한 것은 지방에서도 중화기를 제작하라는 의미였다. 여진족을 정벌한 군사력은 강병(强兵) 기술이 기초가 됐다.

농업 진흥, 역법과 천문 기구

국부(國富)와 민생(民生)을 위한 정책은 과학이었다. 주된 산업인 농업에는 천문(天文)과 기후 측정이 필수적이었다. 이를 위해 세종은 이슬람과 원나라 첨단 과학을 계승한 역법(曆法)과 천문 관측기구를 만들었다. 대표적인 산물은 칠정산역법과 일성정시의와 옥루(玉漏)와 측우기다. 칠정산역법은 원나라와 이슬람 역법을 응용한 역법이며 일성정시의는 해와 별을 통해 낮밤으로 시각을 알 수 있는 시계요, 옥루는 기화요초와 인형들이 튀어나와 소리로 시각을 알리는 물시계였다. 대륙의 신흥 제국 명나라에도 없고, 일본에도 없던 첨단 기구들이었다. 이제 이들의 생멸(生滅)을 본다. 탄생은 장엄했다. 멸망 과정은, 괴담(怪談)이다.

칠정산역법의 탄생

칠정산(七政算) 역법은 세종 14년부터 10년 동안 연구해 나온 작품이다. 명나라로부터 받아오던 역서(曆書)가 조선과 차이가 나 각종 행사나 농사 시기 조절에 쓰기 위해 자체 제작한 조선의 역서다. 내외편으로 구성된 이 역법은 일곱 별(해, 달,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의 운항, 일식과 월식 원리를 수학 계산으로 정리했다. 내편은 정인지가, 외편 제작은 산술(算術)에 통달한 이순지(李純之)와 후배 김담(金淡)이 맡았다.

칠정산에 따르면 한 해 길이는 365일 5시간 48분 45초다. 현대 역법에 1초 모자란다. 실록에는 '역법에 더 아쉬움이 없다 하겠다(曆法可謂無遺恨矣)'(세종실록 156권 '칠정산내외편' 서)는 평이 붙어 있다. 단순한 지적 호기심 차원이 아니었다. '위로 천시(天時)를 받들고 아래로는 민사(民事)에 부지런한(上以奉天時 下以勤民事)'(1437년 4월 15일 '세종실록') 의지가 만든 실용적 작품이었다.

앙부일구에서 흠경각까지

1437년 4월 15일 과학 프로젝트팀이 세종에게 일성정시의 완성을 보고했다.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는 이름 그대로 낮에는 해를, 밤에는 별을 관측해 시각을 정하는 천문시계다. 하나는 고정식, 셋은 이동식이다. 장영실이 실무 기술을 맡은 이 시계는 고정식은 궁궐에, 이동식은 기상청인 서운관과 함길도, 평안도 군부대에 배치했다. 또 군 작전(行軍) 시 이동에 편하도록 작은 일성정시의도 만들어 배치했다.(1437년 4월 15일 '세종실록')

이보다 3년 전 프로젝트팀은 물시계 '자격루'와 해시계 '앙부일구(仰釜日晷)'를 만들었다. 자격루는 복잡하고 거대했고 앙부일구는 밤에는 무용지물이라, 이를 보완한 시계가 일성정시의였다.

앙부일구는 백성을 위한 해시계였다. 세종은 앙부일구를 혜정교(현 서울 광화문우체국 옆)와 종묘 앞에 놓고 백성이 시각을 알 수 있도록 했다.(1434년 10월 2일 '세종실록') '시각이 정확하고 해 그림자가 명백하다. 길가에 놓아두니 구경꾼이 모여든다. 백성도 만들 줄 알게 되었다(民知作也).'(김돈(金墩), '앙부일구명·仰釜日晷銘') '民知作也(민지작야)'. 제작 기술을 공개했다는 뜻이다. 7년 뒤인 1441년 제작한 측우기 또한 백성의 생업을 위한 기구였다. 일성정시의 완성 이듬해 나온 흠경각(欽敬閣)은 걸작 중의 걸작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흠경각에 설치된 물시계 '옥루(玉漏)'는 자격루를 개량한 물시계였다. 옥루는 정확성은 물론 귀신과 옥녀와 무사, 십이지신이 사계절 동서남북 산속 기화요초 사이를 들락거리며 시각을 눈과 귀로 알려주는 기계였다. 흠경각은 세종 침전인 경복궁 강녕전 옆에 설치됐다. 15세기 동아시아 최고의 원나라 과학과 유럽을 포함한 서반구 최고 아라비아 과학이 조선 왕실 한복판에서 융합된 것이다.

이제부터, 괴담(怪談)이다. 그 과학의 시대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만 것이다.

성리학과 과학의 충돌

1550년 11월 흠경각 수리 공사가 있었다. 물을 받는 그릇 하나가 문제였다. 관상감 책임자 이기(李?)가 공사를 마치고 명종에게 보고했다. "(이 그릇은) 옛날 성인들이 권계(勸戒)하던 기구이니 언제나 옆에 두고 물을 부으며 살피고 반성하는 것이 좋겠나이다."(1550년 11월 6일 '명종실록') 어느 틈에 실용을 목적으로 만든 기계가 '덕목 수행(勸戒)'용으로 용도 변경이 된 것이다. 때는 7년 전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을 소수서원이라고 사액한 지 8개월 뒤였다.

같은 시대 폴란드 가톨릭 사제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이 유럽과 인류사를 주도한 이유는 학문적 후배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추종자를 용인하는 지적 관용과 포용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5세기 조선의 천재들에게는 없었다. 수양대군 세조의 격동과 연산군의 폭압에 이어 곧바로 성리학으로 중무장한 지식인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과학적 전통은 단절됐다. 이순지는 딸이 양성애자인 노비 사방지(舍方知)와 놀아난 추문이 드러나 파직과 복직을 반복하다가 죽었다.(1465년 6월 11일 '세조실록' 졸기) 장영실은 세종이 타는 가마를 불량으로 만든 죄로 장 80대를 맞고 사라졌다. 장영실은 노비 출신이었다.(1442년 5월 3일 '세종실록')

성리학이 질식시킨 과학

"역법을 교정한 이후 중국 역서와 비교할 때 털끝만큼도 틀리지 아니하니 내 매우 기뻐하였노라."(1432년 10월 30일 '세종실록') 독자적인 조선역법이 아니라 중국 역법에 맞는 역법이 목적이라는 뜻이다. 1442년 12월 26일 세종은 경회루 옆에 있던 천문대를 궐 북쪽으로 옮기게 했다. 이듬해 1월 사헌부 관리 윤사윤이 이유를 물었다. "중국 사신이 보지 못하게 하려 한다."(1443년 1월 14일 '세종실록') 고질적인 사대주의였다.

1505년 11월 24일 연산군은 물시계를 창덕궁으로 옮기고 관천대를 뜯어버렸다. 임진왜란 직후인 1598년 12월 22일 선조는 "명나라에서 알면 화가 미치니 우리나라에서 만든 역서는 사용하지 말라"고 명했다.('선조실록') 50년 뒤 관상감은 "칠정산역법을 미처 전수해 배우지 못하였으므로 청나라 새 역법을 배워오겠다"고 왕에게 청했다.(1652년 9월 4일 '효종실록')

1613년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한성 백성이 불태웠던 흠경각 중건에 착수했다. 공사는 "불필요한 토목공사"라며 명-청 중립주의자인 광해군과 갈등하던 관료들 반대 속에 강행됐고, 결국 완공됐다. 광해군은 폭군 혐의로 축출됐다.

왜란, 호란 양란 후 취임한 효종은 흠경각을 허물고 대비전을 지었다. 대동법을 실시한 실용주의자 김육이 반대했다. 북벌파인 효종은 "폭군이 만든 것"이라며 철거를 강행했다. 잔해는 대비전 부재로 사용됐다. 광해군 때 만든 흠경각영건의궤(설계도)는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관돼 있다가 1866년 병인양요 때 불탔다.

조선 말 철종이 이리 묻는다. "종묘 앞에 아직 앙부가 있느냐." 1852년이다. 세종 때 설치했던 앙부일구 2개는 흔적 없이 사라졌다. 대신은 "종묘 문 앞에 네모난 돌이 있는데 전하기로 앙부일구를 안치하던 대석"이라 답했다.(1852년 6월 7일 '승정원일기') 1930년 6월 초 경성 종로 4정목 45번지 국숫집 앞 인도 지하에서 바로 그 네모난 대석이 발굴됐다. 경성부 부사편찬계 편찬원 안규응이 찾아냈다.(1930년 6월 8일 '매일신보') 1898년 대한제국 때 종로에 전차 궤도를 부설하며 땅에 묻어버린 것이었다. 대석은 탑골공원에 전시됐다가 2015년 종묘광장 입구로 옮겨졌다.

일본, 조용히 움직이다

1643년 서얼 출신 선비 박안기가 조선통신사 멤버로 일본을 찾았다. 에도(江戶·현 도쿄)에서 천문학자 오카노이 겐테이(岡野井玄貞)가 박안기를 찾았다. 박안기는 오카노이에게 칠정산역법을 가르쳐주었다. 1682년 오카노이의 제자 시부카와 하루미(澁川春海)는 칠정산 연구를 거듭해 에도 막부 공식 역법인 '정향력(貞享曆)'을 완성했다.(정우봉, '일본통신사 박안기의 생애와 에도 지식인과의 교류에 대하여', 2015년)

1713년 숙종이 이렇게 한탄한다. "텅 빈 궁궐 안 옛 기기들이(…)그 용법을 아무도 모르니 심히 애석하다(空闕內亦有古圓器(…)今則有器而不知所用甚可惜也).'(1713년 윤5월 15일 '승정원일기')

조선이 성리학 절벽에 막혀 한 걸음도 나가지 못했다. 이웃 일본은 그 기술을 가져와 스스로 전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