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의 삶/역사,추억이야기

[박종인의 땅의 歷史] 서기 1543년, 무슨 일이 벌어졌나

예인짱 2019. 3. 20. 11:37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15세기 유럽은 대항해의 시대였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경쟁적으로 동서로 배를 띄워 무역로를 개척했다. 동아시아에서는 1405년 무슬림 환관 정화가 이끈 명나라 함대가 아프리카까지 진출했다. 세계는 연결되고 있었다.

16세기가 왔다. 1000년 유럽 지성사를 억누르던 천동설이 폐기됐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적 탐구와 탐험의 시대가 도래했다. 동아시아의 끝, 일본에 마침내 유럽인이 상륙했다. 일본은 그들로부터 철포(鐵砲)를 손에 넣었다. 지구는 고속으로 돌고 있었다. 그 지구 위에서 조선은 성리학 교육기관이자 사대부 정치의 본산, 서원을 설립했다.

이 모든 일이 같은 해 몇 달 차이로 벌어졌으니, 서기 1543년이다. 이후 20세기까지 유럽, 일본과 조선 역사는 다른 길을 걸었다. 21세기 대한민국이 알아야 할, 그 역사 속으로 들어간다.

***

지구가 움직이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1543년 3월 25일 유럽 발트해에 맞닿아 있는 폴란드 북쪽 작은 도시 프롬보르크에서, 프롬보르크 성당 사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 해 전 겨울 뇌출혈로 오른쪽 몸이 마비된 상태였다. 그의 제자 예르지 레티크가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출판한 논문이 프롬보르크에 배달됐다. 제목은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다. 저자는 코페르니쿠스 자신이다. 몇 년을 망설이며 미루다 발표한 논문이었다.

라틴어로 쓴 논문 서문에 코페르니쿠스는 이렇게 썼다. '그들이 아무리 제 연구에 대해 비난하고 트집을 잡더라도 저는 개의치 않을 것이며, 오히려 그들의 무모한 비판을 경멸할 것입니다.' 비난을 예상하고도 그가 내뱉은 주장은 '지구는 돈다'였다. 이미 의식을 잃은 코페르니쿠스는 자기 논문을 보지 못했다. 5월 25일 코페르니쿠스가 죽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자기가 봉직하던 성당 안에 묻혔다.

지구가 돈다! 신이 지배하던 중세(中世) 1000년 동안 감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주장이었다. 저자가 죽고 73년이 지난 1616년 논문은 교황청 금서(禁書) 목록에 올랐다. 불과 4년 뒤 논문은 금서에서 해제됐다.

그리고 1839년 2월 19일 코페르니쿠스가 태어난 폴란드 토룬 시청 앞 광장에 그를 기리는 동상이 건립됐다. 동상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Terrae Motor Solis Caeli Que Stator'. 독일 과학자 알렉산더 훔볼트(1769~1859)가 썼다. 뜻은 이러했다. '지구를 움직이고 태양과 하늘을 멈춘 사람'. 바티칸은, 세상은, 지구가 돈다는 사실을 더 이상 감출 수가 없었다. 더 이상 인간은 신에 속박되지 않았다. 지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섯 달 뒤 일본, 철포를 구입하다

다네가시마 도키타카
다네가시마 도키타카

코페르니쿠스가 논문을 발표하고 정확하게 다섯 달, 그가 죽고 석 달 뒤 명나라 상선 한 척이 일본에 도착했다. 1543년 8월 25일이다. 일본 가고시마 남쪽에 있는 다네가시마(種子島)라는 작은 섬이었다. 선장 이름은 명나라 사람 오봉(五峯)이고, 100명이 넘는 선원은 모두 외모가 기이했고 말도 달랐다. 오봉은 이들이 '서남만인(西南蠻人)'이라고 했다. 동남아시아보다 더 서쪽, 유럽에서 왔다는 뜻이다. 다네가시마 도주(島主) 다네가시마 도키타카(種子島時堯)는 이들이 가지고 있는 물건에 호기심을 보였다. 도키타카는 열다섯 살이었다.

포르투갈 사람 프란시스코 지모로와 크리스토 페로타가 속이 뚫린 두세 척(尺)짜리 막대기를 보여줬다. 술잔을 멀찍이 바위에 놓고 막대기 끝에 불을 붙이니 번개 같은 빛과 천둥소리가 터지며 술잔이 박살났다. 은산(銀山)도 부수고 철벽(鐵壁)에 구멍을 낼 수 있을 정도였다.

도주 도키타카는 거금을 주고 철포 2자루를 샀다. 한 자루는 대장장이 야이타 긴베(八板金兵衛)가 역설계해 1년 만에 국산화에 성공했다. 한 자루는 당시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에 헌상했다. 또 1년 뒤 도주 도키타카는 오사카에서 온 상인에게 철포 제조법을 공개했다. 철포는 삽시간에 일본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1555년 음력 5월 21일 왜인(倭人) 평장친(平長親)이 총통(銃筒) 한 자루를 들고 부산으로 와 귀화를 요청했다. 그 정교함과 파괴력을 본 대신들이 "낡은 종을 녹여 총통을 제작하자"고 왕에게 건의했다. 13대 조선 국왕 명종은 "옛 물건은 신령한 힘이 있다"며 거부했다. 1589년 대마도주 평의지(平義智)가 조선 정부에 조총(鳥銃)을 헌상했다. 정부는 무기고에 조총을 집어넣고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1590년 철포로 무장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세력이 일본을 통일했다.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했다. 다네가시마 도키타카의 아들 히사토키(久時)도 참전했다. 지구는 격렬하게 회전 중이었다.

조선 '성리학의 나라'가 되다

주세붕
주세붕

유럽에서 신의 권위가 추락하고 이웃 일본은 그 세상과 접촉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날짜는 기록에 없다. 조선 영주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서원(書院)을 세웠다. 성리학 성현을 제사하는 사당이며 선비를 가르치는 교육기관이라고 했다. 이름은 송나라 주희(朱熹)가 세운 백록동서원 이름을 따서 백운동서원이라 했다. 부임한 지 2년째, 흉년이 내리 3년 지속되던 날이었다. 누군가가 물었다. "학교가 있는데 어찌 서원을 세울 필요가 있으며, 흉년을 당하였으니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주세붕이 이리 대답했다. "주자가 백록동서원을 세울 때는 금나라가 중국을 함락하여 천하가 피비린내로 가득하였고 남강 땅은 큰 흉년으로 벼슬을 팔아 곡식으로 바꿔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였다. 위태로움과 곤궁함이 그토록 심하였는데도 그가 세운 서원과 사당이 한둘이 아니었다. 교육은 난리를 막고 기근을 구제하는 것보다 급하다."

이후 조선은 성리학(性理學)의 조선이 되었다. 주자(朱子)의 조선이 되었다. 성리학은 나날이 발전하여 조선 정신문화는 찬란하게 꽃을 피웠다. 대신 주자와 성리학에 반하는 학문은 암흑기를 맞았다. 자기 발로 걸어온 철포를 팽개쳤고 예고된 전쟁에 손을 놓았다. 하늘이어야 할 백성의 경제활동을 탐욕이라고 규정하며 상업과 공업을 억압하고 조선 팔도에 널린 금·은광을 폐쇄했다. 대신 중국을 하늘로 섬겼다.

세계사 연표

'왜놈' 일본은 조선에서 도입한 은 제련법으로 세계 2위 은 생산국이 되었다. 유럽 학문을 수용해 강병을 하고 부유한 나라가 되었다. 지구는 전속력으로 광대무변한 우주를 날아갔다. 유럽도, 일본도 목적지는 부국강병이었다. 그 흔적은 지구 곳곳에 남아 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1/02/201901020033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