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의 삶/기독교 자료

아펜젤러기념관/ 추모비 비문

예인짱 2018. 8. 15. 14:08

그는 185826일 미국 펜실베니아에서 태어났다.

1885년 드루신학교를 졸업하고 결혼과 동시에 조선을 향해 떠났다.

아펜젤러는 마치 조선을 향해 전력질주하여 달려오는 사람같았다.

그가 목사 안수를 받은 것도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선행 배를 기다릴 때였다.

그렇게 아펜젤러가 제물포 항에 도착한 날은 188545일 부활절 아침이었다.

한국에서 감리교 선교를 부활절 아침에 시작했다는 사실은 아펜젤러에게도 특별한 감동이었다.

마치 하나님께서 부활절을 맞춰 조선에 이끄신 것 같았다.

그날 아펜젤러는 이렇게 기도한다.

오 하나님! 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여기 도착하였습니다.

이 아침에 사망의 쇠사슬을 부수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이 나라 백성들이 얽매여 있는 쇠사슬을 끊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광명과 자유를 얻게 하여 주소서.

이렇게 간절히 기도했지만 아펜젤러 부부는 잠시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아펜젤러가 도착하기 4개월 전 갑신정변이 일어났는데

이 혁명으로 조선은 극심한 혼란가운데 있었다.

선교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은 상황에서 부인까지 데려와 선교를 시작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미국공사는 판단했다.

아펜젤러는 그해 53일 단신으로 조선에 입국한다.

가슴속의 열정은 조선이라는 낯선 나라를 녹일만큼 뜨거웠으나 현실은 간단치 않았다.

그 속에서 아펜젤러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다.

이런 아펜젤러를 존스선교사는 이렇게 소개한다.

아펜젤러는 아주 예의 바른 사나이였다. 그는 친절하고 관대한 사람이었다.

그는 언제나 먼저 인사하는 사람으로 겸손하면서 그 활력을 불어넣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친구들에게 용기와 격려의 태도를 잃지 않았다. 그는 친구들에게 존경받았다.

친구를 유난히 좋아했던 그는 언제나 친구곁에 있었다.

친구하나가 특별한 사업하나를 성취하면 축하의 글을 쓰는 것을 무척 좋아했으며

친구가 어떤 재난이나 슬픔을 당했을 때는 동정과 인정을 쏟아 부어주었다.

아펜젤러는 어린이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우리는 그의 집에서 또는 남이 집에서 어린이들을 데리고 놀며

무릎위에 어린이들을 앉혀 놓고 이야기꽃을 피우는 광경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친구를 좋아했던 아펜젤러에게 조선은 필생의 친구였다.

그는 조선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아펜젤러가 조선에 와서 우선한 일은 교육사업이었다.

선교의 자유가 없는 상황에서 아펜젤러는 교육자로 조선사람에 다가왔다.

그 결과물이188668일 배재학당의 창설이었다.

배재학당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근대교육기관이다.

배재(培栽)라는 이름은 고종황제가 직접 지어주었다.

인재를 길러내는 학문의 요람이 되라는 뜻이었다.

이 학교의 교훈은 크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는 마태복음 2026-28절의 말씀이었다.

 

하지만 학생들의 수준은 미약했다.

시골에 잠깐 불일이 있어 다녀오겠다 하고 갔다가는 영영 오지 않거나

오뉴월 삼복중 너무 더워서 잠깐 쉬겠다고 하며 갔다가 영영 오지 않고

집에서 초상이 나서 학교에 나올 수 없다 하며 갔다가 영영 오지 않는 둥,

배재학당은 개교 초기에 어려움을 겪었다.

낯선 서양인들의 친절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리속에서 깊이 우러나온 사랑에서 시작된 것을

조선의 학생들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듬 해부터 배재학당은 놀라운 발전을 이루기 시작한다.

배재학당은 연령과 신분을 초월하여 배우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다 공부할 수 있었다.

양반과 상민, 어른과 아이들이 함께 공부했다.

양반들은 하인들을 대동하고 학교에 다녔는데 아펜젤러 목사는 하인의 도움을 받지 않는 것이

교육의 시작이라며 하인없이는 아무 것도 할수 없는 양반들에게 자립심을 심어주었다.

배재학당은 서당과 달리 근대학문을 공부했다.

생리학, 역사, 지리, 예술 등 전반적인 학문을 모두 다루었다.

특히 아펜젤러목사는 군사학을 가르쳐 조선의 독립의지를 고취시켰다.

모든 수업은 영어로 진행되었다. 시대의 흐름을 읽은 많은 젊은이들이 배재학당으로 모여들었다.

이승만초대대통령, 한글을 집대성한 주시경선생, 민족 시인 김소월, 청산리 대첩의 영웅 지청천장군, 독립신문 서재필박사, 근대 문학 대표소설가 나도향 등이 이 시절 배재학당에서 공부했다.

아펜젤러목사는 배재학당을 설립하고 조선사람들에게 신망을 얻은 후

1887109일 정동감리교회를 창립한다.

정동감리교회는 새문안교회와 더불어 한국 개신교의 어머니 교회이다.

아펜젤러 목사는 1889년부터 한국 감리교 최초의 감리사가 되었다

.

처음 네사람이 예배를 드리며 시작된 정동감리교회는 18961026

근대 건축물로 교회를 건축한다.

 

교회는 부흥했다.

당시 교인 수는 입교인 128, 학습교인 224명 도합 352명이었다.

 

 

 

아펜젤러는 한국을 사랑했다.

그는 한국의 풍속과 인정을 파악하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 안간데가 없었다.

18888월 그는 서울에서 원주를 거쳐 대구 부산까지 대한민국을 일주했다.

그는 천주교 신부들처럼 방갓을 쓰고 신분을 숨기지 않았다.

솔직대담하게 스스로를 개방하고 조선사람들을 만났다.

그의 한국사랑은 자연스레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육성하는데 이르렀다.

배재학당에서 협성회를 조직했는데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학생회였다.

이때의 멤버가 서재필, 윤치호, 신흥우, 오긍선, 여운형이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독립협회가 창설되었을 때 아펜젤러는 그 중심에 있었다.

당시 독립협회 창설 기념예식순은 이렇게 진행되었다.

 

조선노래는 배재학당 학생이 하고, 기도는 교사 아펜젤러씨가 하고

연설은 회장 안경수씨가 하고 어찌하면 독립을 영구히 보존할 수 있는가라는 연설은

한성판윤 이채연씨가 하고 독립가는 배재학당 학생들이 하고

조선에 있는 외국사람을 위한 영어와 조선말은 독립신문사장 서재필씨가 하고

진보가는 배재학당 학생이 하고 체조는 영어학교 학원이 하고 그 끝에 차와 실과가 있다더라.

아펜젤러는 독립협회의 든든한 배후가 되어주었다.

쫒기는 자를 위해 은신처가 되어주고 옥고를 치를 때는 다정한 친구가 되어주었다.

아펜젤러는 탁월한 성서번역가였다.

영어성경을 한문으로 번역하고 다시 한문 성경을 한글로 번역했다.

일반 민중이 당시 즐겨 사용했던 우리말을 우선하여 번역했다.

당시 조선사회에서 한글은 언문이라 천대받았으나

아펜젤러는 한국 민중들에게 가장 겸손하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한글로 성경을 번역하는데

진력을 다했다. 이는 한글을 창제했던 세종대왕이 백성을 향해 품었던 바로 그 마음이었다.

아펜젤러가 세상을 떠나게 된 것도 성서번역때문이었다.

1902년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번역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배를 탔다가 추돌사고를 당해

하나님의 부름을 받게 되었다.

그때 아펜젤러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화학당 여학생을 대동하고 있었다.

배가 침몰할 때 생존자들은 아펜젤러가 1등석에 있다가

급히 2등석을 향해 뛰어 내려갔다고 증언했다. 여학생을 구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아펜젤러는 그토록 사랑했던 조선의 바다에서 비석도 하나없이 잠들었다.

 

아펜젤러의 자녀들은 아버지의 조선을 향한 사명과 사랑을 보고 배웠다.

45세에 세상을 떠난 그의 선교는 그 자녀들에게로 이어졌다.

아펜젤러 2세는 1889116일 서울 서대문구 정동 23번지에서 태어났다.

10세 때에 아버지 아펜젤러가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갔을 때 동행했다가

교육받기 위해 남았고 아버지만 조선으로 돌아왔다. 바로 그 시기에 아펜젤러는 순직하고 만다.

아버지를 잃은 아펜젤러의 자녀들은 미국에서 공부한다.

아펜젤러 2세는 교육가가 되어 다시 조선을 찾는다.

1920년 제4대 배재학당 교장이 된다.

그해는 3.1운동이 벌어진 바로 다음 해로 교내외의 분위기가 험악했다.

특히 3.1운동 2주년을 맞이하여 일본경찰은 배재학당을 엄중 경계했다.

하지만 배재학당 학생들은 학생전원이 등교를 거부하고 동맹휴학을 하는 동시에

독립만세 운동을 펼쳤다.

이 일로 일제는 아펜젤러 2세에게 책임을 물었다. 학생들을 처벌하라고 압박했다.

아펜젤러 2세는 학생들을 끝까지 보호했다.

그는 학생들의 양심과 자유까지 간섭할 순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아펜젤러 2세는 교장인가를 취소당했다.

그러나 아펜젤러 2세는 굴하지 않고 배재학당을 크게 길러냈다.

1939년, 일제는 결국 아펜젤러 2세를 추방한다.

 

그렇게 사랑했던 한국을 떠난 뒤

아펜젤러 2세는 1953121일 뉴욕 감리교 병원에서 세상을 떠난다.

그의 유언은 내가 죽으면 한국 땅에 묻어 달라는 것이었다.

1954년 그 유해를 맞이하여 2천명의 조객이 정동감리교회에 모였다.

양화진에 묻힌 그의 묘비에는 이렇게 써있다.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 신명기 3327절 말씀이다.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노라라고 쓰인 묘비가 양화진에 있다.

그 무덤의 주인은 아펜젤러 2세의 누나 엘리스 아펜젤러이다.

그녀는 아펜젤러 선교사의 맏딸로 한국에서 태어났다.

그녀도 미국에서 학위를 마친 후 자진하여 한국으로 돌아왔다.

평생 독신으로 살며 이화학당을 섬겼다.

 

이화학당이 이화여자전문학교로 승격되며 초대 교장이 되었다.

그녀는 그 해에 신촌대지를 매입하고 새 교사를 건축하는 계획을 세웠다.

192812월 건축비 45만 달러를 모금하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

그녀는 2년간 모금활동을 펼쳐 성공했다.

1931년 동창회가 베푼 환영회 석상에서 그녀는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2년 전 미국을 향해 떠날 때에 어찌나 짐이 무겁고 감당키 어려웠던지

어떤 큰 힘이 나를 누르는 것 같아서 내가 타고 가는 배가 차라리 파선을 했으면

시원하겠다고까지 생각했습니다."

이후 앨리스 아펜젤러는 이화에 몸담아 일하기를 25년을 지내면서

말그대로 이화의 상징이 되었다.

 

이 민족을 위해 헌신했던 그녀는

1950220일 반석 위에 집을 지으라는 설교를 하던 중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아버지가 사랑한 조선을 그 자녀들도 사랑하여 죽도록 충성하는 일은

사람은 할수 없는 일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아펜젤러 가문은 하나님의 열정으로 뜨거웠다.

아득한 태평양도 낯선 나라의 풍토병도 일제의 폭압도 이들을 막을 수 없었다.

살아 살아 한국인 한 사람, 한 영혼에게 다가왔고 사로잡았다.

지금 한국의 기독교인은 천만을 헤아린다.

"사망의 쇠사슬을 부수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이 나라 백성들이 얽매여 있는 쇠사슬을 끊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광명과 자유를 얻게 하여 주소서."

아펜젤러가 처음 이땅에서 드렸던 기도는

이렇게 응답되었다.

왜 하나님은 아펜젤러 집안으로 하여금 이렇게 대를 이어 한국을 사랑하게 하셨을까?

그리고 왜 나를 감리교인이 되게 하셔서 이 위대한 이야기로 감동케 하시고

전하게 하실까?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놀랍다.

 

 

 

 

아펜젤러 추모비 비문 

‘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이곳에 왔습니다.
그날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유와 빛을 주시옵소서.’
 

1885년 4월 5일 (제물포에 상륙하신 첫 기도) 
1989년 1월 10일 배재총동창회 세움(앞면) 

‘H. G. 아펜젤러(1858. 2. 6~1902. 6. 11)는
미국 북감리회 해외선교본부에서 한국에 최초로 파견된 선교사로 배재학당 설립자이시다.
선교 활동중 목포 앞바다 전복된 배에서 한국소녀를 구하려다 당신이 익사하시었다.’
 

배재총동창회 세움(뒷면) 

1902년 아펜젤러는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번역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비서 겸 서기로 있었던 조한규와
목포에 집이 있는 정신학교 여학생을 데리고 제물포에서 여객선으로 목포를 향해 출발했다.
이때 아펜젤러는 운산광산에서 기술자로 일하던 미국인 보올비와 함께 일등선실에 승선했다.

그날 밤 10시경, 군산 앞바다를 지날 때 보올비(J. E. Bowlby)는 아펜젤러와 함께 차와 비스킷으로
가벼운 식사를 마치고 각기 자기 방에 가서 잠자리에 들었는데, 몇분 후에 갑자기 “쾅!”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여객선에 큰 충격이 전해졌다고 한다. 보올비는 바닥에 쓰러졌다. 아펜젤러가 “무슨 일이냐?”라고 소리쳤다.
그들은 급히 옷을 입고 계단을 향해 나갔다.
 

짙은 안개 속에서 배가 675톤짜리 일본 상선과 충돌하는 소리였다. 들이받은 상선은 무사했으나 받친 여객선은
곧 침몰하기 시작했다. 그때 멀리 배의 앞부분 반쯤은 이미 침수되었고 고물(배 뒤)은 수면에 높이 솟아있는 상태였다.
잠시 후 여객선이 가라앉을 때 아펜젤러는 허리까지 물에 잠긴 상태였다. 보올비는 곧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쳐서
구명선에 의해 구조되었으나 아펜젤러는 그의 비서 조한규와 그가 책임지고 목포까지 데려다 주기로 약속했던
여학생을 구해내려다가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 결정적인 마지막 순간인 2분 동안 그는 마음만 먹었더라면 자신의 생명을 능히 건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수영에 능숙했을 뿐 아니라 시간 여유도 충분히 있었다. 사람은 이런 극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
그 사람됨의 본성을 나타내기 마련이다. 그는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자신의 생명에 연연하지 않았고
의연하게 자신을 포기했다. 그의 희생정신은 마지막 순간까지 유감없이 발휘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7년 동안 한국에서 전심전력을 다하고 땀과 눈물과 목숨까지 바친
아펜젤러 선교사의 헌신과 봉사의 생애는 44세를 일기로 끝나고 말았다.
 

이 비보가 감옥에 갇혀 있던 독립협회 회원들에게 전해지자 저마다 통곡했다고 한다.
특히 평소에 아펜젤러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던 이승만(李承晩)은 땅을 치며 통곡하고
하루 한 나절을 단식하고 울면서 그의 죽음을 애석해 했다고 한다.
 

이승만은 감옥 중에서도 가장 험악한 지하감방에서 쇠사슬에 묶여 목을 쳐들지 못하게 눌리었고,
발은 무쇠덩이에 매이는 형고를 겪고 있었다. 그때 그는 아펜젤러가 배재학당에서 전해 주던 복음의 메시지를
새삼 되새기며 영혼의 발길을 돌렸으며, 신앙에 깊이 젖어들어가 마침내
“나의 하나님, 내 조국과 내 영혼을 구하소서”라고 최초의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그는 벙커(A. D. Bunker) 목사 부부가 차입해 준 신약성서와 존 번연(J. Bunyun)의
『천로역정』(天路歷程, The Pilgrim’s Progress), 그리고 부흥사 무디(D. L. Moody)의 책들을 읽으면서
신앙의 깊이를 쌓았다. 그 방에 교회가 조직되고, 애국지사 여럿이 함께 입교하기 시작했다.
1902년 6월에 새로 투옥된 이상재(李商在), 남궁억(南宮檍)이 이승만의 전도에 기울어져
기왕의 반기독교적인 행동을 버리고, 교회의 반열에 참여하였다.
 

길원필 목사님(사랑의 교회, CO) 글에서 발췌함 
(http://www.kcj777.com/index_new.cgi?action=detail&number=3411&thread=24r01r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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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전의 역사를 되새겨 보면서, 하나님께서 그 당시에 예비하신 사람들의 "관계"에 대해서 잠시 묵상해 봅니다. 

아펜젤러, 언더우드, 그리고 2007년의 평양대부흥, 길선주, 한일합방, 독립과 건국, 이승만, 이상재, 남궁억, 김구...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한국사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었기에, 그 당시 긴박하게 돌아가던 국제정세와
국내정세,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한 이해를 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함은 물론,
오히려 왜곡시키는 경우가 많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미국이 아주사에서 시작된 부흥의 불씨를 전세계로 뿌리기 전에,
하나님은 정치분야에서 링컨이라는 하나님의 사람을 준비하셔서 미국의 노예제도라는 죄악을 바로 잡으시고
압제받던 영혼들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셨음을 봅니다 (전광 목사님 "백악관을 기도실로 만든 대통령 링컨" 참조).
미국을 깨끗하게 하셨음을 봅니다.

그리고 경제분야에서 현대 마케팅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워너메이커를 세우셔서,
미국이 선교를 감당할 부와 재물을 주셨음을 봅니다 (전광 목사님 "성경이 만든 사람 워너메이커" 참조).
워너메이커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혁신적인 비즈니스 아이디어들은 본인을 큰 부자로 만들었음은 물론,
미국 전체의 비즈니스 관행에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특히 워너메이커는 한국의 YMCA를 세웠습니다.
그곳에서 미국의 선교사들과 한국의 차세대 정치지도자들이 만남을 가졌고, 주님 안에서 사랑의 관계를 발전시켰습니다.
그리고 시카고에서는 열정적인 전도자 무디를 세우십니다. 무디는 워너메이커와도 깊은 친분이 있었으며,
그의 설교를 들은 많은 미국인들이 세계 선교에 헌신하게 됩니다.
 

이들이 바로 자기 분야에서 왕으로 부르심 받았고, 또 그 부르심을 믿음으로 성취한 믿음의 선진들이었음을 봅니다. 

언더우드가 보았던 조선땅- 그 황량하고 척박한 땅에 지금 우리가 발을 디디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정복해야 할 황량하고 척박한 땅들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중에서 "7개의 산"을 정복하고
만왕의 왕 예수님을 영화롭게 할 바로 그 "만왕"이 될 사람들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왕의 영향력을 행사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황량하고 척박한 땅을 기름지고 비옥한 땅으로 개간할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 땅에 대한 주님의 꿈과 언약을 이루는데 참예할 사람들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정말로 흥분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Dum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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