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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옛 이름 ‘達句伐’

예인짱 2016. 3. 30. 12:02

대구의 옛 이름 ‘達句伐’은 어디에서 유래된 것일까?      

 

우리가 살고 있는 대구(大邱)는 고대부터 다벌(多伐),

달구벌(達句伐), 달구화(達句火), 달벌(達伐), 달불(達弗) 등으로 불렸다.

큰(大) 언덕(邱)이라는 대구의 옛 지명 달구벌은 오늘까지도 우리에게 익숙하게 들리는데,

 어떤 유래를 가지고 언제부터 문헌상에 나타나고 있을까? 다음의 기사를 살펴보자.

 

 

                                          1512년 정덕본(보물제723호)

1. 二十九年 …遺兵伐比只國 多伐國 草八國幷之 - (AD108) 三國史記1 新羅本紀1 婆娑尼師今

2. 十五年 春二月 築達伐城 以奈麻克宗爲城主 - (AD261) 三國史記2 新羅本紀2 沾解尼師今

3. 九年 …王欲移都達句伐未果 - (AD689) 三國史記8 新羅本紀8 神文王

4. 大丘縣 本達句火縣 景德王改名今因之 - (AD757) 三國史記34 雜誌3 地理1

5. 二年 春閏正月 晝夜兼行 十九日 至于達伐之丘 - (AD839) 三國史記10 新羅本紀10 閔哀王

6. 開成己未 閏正月 爲大將軍 領軍十萬 禦淸海兵於大丘敗績 - (AD839) 三國史記44 列傳4 金昕

7. 大丘縣 本新羅達句火縣 景德王改名爲壽昌郡領縣 - 高麗史57 志11 地理2 京山府

8. 大丘郡 本達句火縣 景德王改名大丘爲壽昌郡領縣 高麗顯宗戊午屬京山府任內… - 世宗實錄地理志150

9. 建置沿革本新羅達句火縣[一作達弗城] 景德王改今名爲壽昌郡領縣… - 新增東國輿地勝覽26 大丘都護府

 

1은 A.D. 108년『삼국사기』소국 정복 기사로, ‘多伐國’이 파사이사금에게 정복되어 신라에 병합되었다는 기록이다. 이 다벌국에 대해서는 대구로 보는 견해와 포항 흥해로 보는 견해 등 이견이 있지만 ‘다벌(多伐)=달벌(達伐)’로 본다면 대구의 초기 지명 중 하나로 생각할 수 있다.

 

2는삼국사기』신라본기에 보이는 ‘달벌성을 축조하고 나마극종을 성주로 삼았다’는 내용으로, 2~4에는 대구가 ‘달벌, 달구벌, 달구화’ 등으로 불리다가 경덕왕16년(757) 지방행정단위의 명칭을 개혁하면서 ‘大丘’라는 새로운 명칭을 얻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5와 6에서와 같이 동일한 사건의 기록에서도 대구의 명칭이 ‘達伐’과 ‘大丘’로 달리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지명 개정 이후에도 계속하여 신ㆍ구 명칭이 함께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7~9의 기록에서 보듯이 ‘大丘’라는 명칭으로 통일된 것은 고려시대 이후인 듯한데, 조선 세종 원년(1419) 대구현(大丘縣)이 대구군(大丘郡)으로 승격, 세조12년(1466) 대구군(大丘郡)이 대구도호부(大丘都護府)로 승격 등 ‘大丘縣→大丘郡→大丘都護府’로 명칭상의 변화 없이 지위의 승격만이 거듭되는 급격한 발전을 보인 것을 알 수 있다. 이 후 영조 26년(1750) 대구의 유생 이양채가 대구의 ‘丘’자가 공자의 이름과 같은 자이므로 성현에게 누를 끼칠 우려가 있다하여 이를 바꾸자는 상소가 있었으나 영조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점차 ‘邱’로 바꾸어 쓰기 시작하여 정조실록 정조3년(1779) 처음으로 ‘大邱’라는 표기가 나타났고, 그 후에도 혼용되어 사용되다가 철종(1850~1863) 이후에는 ‘大邱’로만 쓰게 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을 종합하면 大邱의 옛 지명은 ‘多伐, 達伐, 達句伐, 達句火, 大丘’ 등으로 확인된다. ‘달구벌’과 ‘대구’의 언어학적 관련성 여부를 떠나 여기서 ‘達句’가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첫 번째는 달구벌을 달벌이라고도 한 것을 봤을 때 ‘달구’와 ‘달’은 서로 같이 쓰일 수 있고, ‘達’은 『삼국사기』지리지 여러 군현의 명칭에서 ‘山’과 대응되는 것으로 확인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達’은 ‘높다, 크다’라는 의미이고 伐은 ‘평야, 언덕, 촌락’을 일컫는 우리말의 한자표현이라 달구벌이란 ‘큰 언덕, 넓은 평야, 넓은 촌락’을 뜻하는 것으로 보았다.

 

두 번째 견해로는, 달구벌의 ‘달구’는 실제로 ‘닭’이 경상도 방언에서 ‘닥, 달구’로 쓰이고 있는 점에 주목해 ‘달구’의 원형을 ‘닭’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이것과 관련하여 경주(신라)와의 관련성을 제기한 것이다. ‘닭’은 경주의 김씨집단이 자신들의 조상으로 여겨 숭배하고 신성시한 토템으로, ‘닭’집단 또는 ‘닭’집단의 거주지역을 의미하는 ‘계림(鷄林, 닭수풀)’이라는 국호를 사용하였다.

 

즉, 경주에 왕궁이 있던 곳을 月城이라 하는데 ‘月’을 훈독하면 ‘달’이 되므로 월성은 곧 ‘달성’이 되며, 경주에 월성이 위치한 곳도 신라 六村 중 ‘닭’의 의미를 가진 ‘梁部’에 있고, 고고학적으로도 대구 달성과 경주 월성의 구조나 입지가 비슷하다는 사실 등에서 대구와의 연관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경주와 대구가 지명상, 고고학상으로 서로 유사한 점은 후일 신문왕대 신라가 달구벌로의 천도를 시도하는데 있어서도 하나의 이유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참고문헌

권인한, 2002, 「俗地名과 국어음운사의 한 과제 - ‘大丘’와 ‘達句火’의 관계를 중심으로」『국어학』40.

대구시사편찬위원회, 1973, 『大邱市史』

대구직할시, 1982, 『대구의 향기』

윤용진, 1975, 「大邱의 沿革과 關聯된 古代記錄小考」『동양문화연구』2

이병도, 1976,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이희준, 2000, 「대구 지역 고대 정치체의 형성과 변천」『영남고고학』26

정호완, 2001, 「달구벌(達句伐)의 형태와 의미」『우리말글』21

주보돈, 1999, 「신라의 달구벌천도 기도와 김씨집단의 유래」『백산학보』52

주보돈, 2003, 「사로국을 둘러싼 몇 가지 문제」, 『신라문화』21

천관우, 1989, 『고조선사ㆍ삼한사연구』, 일조각

대구향토역사관, 2007, 『달성(達城) 잊혀진 유적의 재발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