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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주거지 청동기부터 요새로…달구벌 역사의 뿌리

예인짱 2016. 3. 30. 11:40


고대 주거지 청동기부터 요새로…달구벌 역사의 뿌리

대구의 DNA, 대구의 상징 건물을 논할 때 제일 먼저 달성 토성을 떠올린다. 달성은 선사시대부터 지역민들의 거주 터였고 원삼국시대엔 고대국가로의 도약을 꿈꾸던 거점이기도 했다. 신라에 복속되면서 웅비의 꿈을 잠시 접었지만 얼마 후 영남의 맹주로 화려하게 부활하면서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사진은 헬기에서 내려다본 달성 토성. 매일신문 DB

 

“대구의 모태(母胎)는 무엇일까요?” 오래전 은퇴한 한 고고학자에게 물었다. 무엇(something)과 장소(where) 사이에서 잠시 혼란에 빠진 듯하더니 이내 질문의 뜻을 간파하시고 주저 없이 ‘달성’(達城 )이라고 답한다.

대구의 원형질, 대구의 뿌리를 논할 때 많은 후보군이 경합한다. 물론 각자 관점이나 입장에 따라 개인차는 있을 수 있다. 역사적 상한(上限)으로는 월성동 구석기 유적, 파동 바위그늘 유적이, 유물의 상징성으로는 서변동 빗살무늬토기나 신천변 고인돌군이 경쟁 구도를 이룬다.

그러나 대구의 선사문화를 하나로 아우르는 중심, 즉 고대사 유적의 상징 건물을 논할 때 결론은 자연스레 달성으로 모인다. 지역 역사는 고대, 중세를 거쳐 현대에 이르지만, 그 역사의 정점엔 항상 달성이 있었던 것이다. 

 

◆성벽 둘레 1.3㎞, 대구 고대사 타임캡슐


1천800년 역사를 가진 국내 최고의 성곽, 달성 유적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잘 정돈된 타임캡슐쯤 될까. 우리가 발 딛는 어디든 역사 공간이 아닌 곳이 없지만, 달성은 역사의 흐름에서 특이한 이력과 의미가 있다.

우선 외형부터 살펴보자. 성벽의 둘레는 1.3㎞, 성곽의 높이는 5~15m에 이른다. 청동기 이전엔 넓은 구릉지였고 1세기 무렵에 대규모 마을이 들어섰다. 삼국사기에 261년 ‘달벌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 초기에 지금의 성곽 형태가 완성된 것 같다.

달성은 이제까지 3, 4번의 발굴조사를 거쳤다. 성의 맨 밑 토층에서 초기 청동기시대 조개 더미 유적이 발굴됐고 1970년대 연못 발굴 때는 삼국시대 토기류와 얼레빗, 철기들이 대량으로 출토됐다.

토성의 시대별 용도는 더 재미있다. 부족 간 전쟁이 본격화되었던 청동기시대에 달성은 훌륭한 요새였다. 이 천혜의 성터를 선점한 부족장은 인근을 아우르는 수장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토성이 축조된 후 삼국시대엔 관아, 병영이 들어서고 주민들이 들어와 살았다. 이런 ‘민관군(民官軍) 동거’는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조선 초기엔 군창(軍倉)이 설치되었으며 후기엔 정규군 지원 조직인 ‘보’(保)가 들어섰다. 임진왜란 때 잠시 경상감영이 들어서면서 점차 지역 행정의 중심이 되기도 했다.

공적(公的) 용도 외 사적(私的) 거주 영역으로 이용된 적도 있었다. 고려시대부터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이곳은 달성 서씨(徐氏)들의 세거지였다.

달성이 대구의 뿌리로 자리 잡지 못하고 왜곡과 폄훼의 길로 들어선 것은 순전히 일제 탓이다. 일제는 먼저 대구의 뿌리인 달성을 훼손시킬 궁리에 골몰한다. 대구 지리의 좌표이자 정신의 자양인 달성이 그들에겐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일제의 대구 정신 훼손 음모는 달성의 ‘공원화’로 구체화한다. 역사 보고(寶庫)를 먹고 마시는 오락장, 위락장화하려는 의도였다. 1905년 달성 토성 안에 신사(神社)를 설치하고 요배전(遙拜殿)이 들어서면서 공원은 일제 황국신민화 선전장으로 변질하였다. 이후 달성에 동물원이 들어서면서 대구 역사 성지는 동물들이 하품하고 분뇨 냄새가 풍기는 공원으로 전락해버렸다. 

 

◆초기 철기시대 대규모 정치체제 등장


그러면 달성이 왜 대구의 모태인가 접근해보자. 구석기, 신석기를 거치고 청동기시대에 이르러 인구가 급격히 증가한다. 청동기 후기, 초기 철기시대에 이르러서 이들은 대규모 집단을 형성하게 된다. 국가 단위 규모는 아니었지만 소국(小國) 수준의 정치체제가 들어섰다. 학계에서는 이 시기를 ‘대규모 정치체제’라고 부른다.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대구엔 4개 정치체제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신천 상류지역엔 위화(渭火), 대구 중심부의 달구벌, 북구 칠곡 일대의 팔거리(八据里), 달성군 다사 일대의 다사지(多斯只), 달성 화원 일대의 설화(舌火) 등이 그것이다. 네 집단은 어느 정도 정치적 독립성을 가진 것으로 보이지만 전체적인 역학관계로 볼 때 달성 토성 세력의 지휘를 받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경산대 김세기 교수는 “부장품으로 볼 때 달성 토성 집단은 주변 고분군을 훨씬 압도하는 지위에 있었음이 분명하다”고 말하고 “이런 우월한 지위를 바탕으로 주변 세력들을 리드해 나갔다”고 분석했다. 달성 세력이 씨족, 부족사회 리더를 넘어 이제 대구 역사의 주인으로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비산, 평리, 내당동이 달성 세력 근거지


고분을 통해 달구벌 세력의 베일을 벗겨보자. 달성고분군의 공간적 영역은 토성에서 서쪽 와룡산으로 연결되는 비산동, 평리동, 내당동 지역으로 추정된다. 지금의 중구, 서구, 북구 일부를 아우르는 대규모 지역이다. 일제강점기에 봉분이 확인된 것만 87기. 대략 100기 이상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중 37호분을 포함하여 7기가 발굴 조사되었다.

달성고분군은 지역의 리더급 위상답게 규모부터 다른 지역과 큰 차이를 보인다. 봉분이 가장 큰 것은 30m에 달하며 평균 10m급이다. 고분에서는 다수 토기를 비롯하여 금동관, 금귀걸이, 은제장식, 환두대도(環頭大刀)와 재갈 등 마구류(馬具類)들이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달성 세력이 웬만한 소국이나 성읍(城邑)국가 정도의 문화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달성 세력의 비상을 가로막는 더 큰 기운이 있었으니 바로 신라였다. 

 

◆고대국가로 도약하지 못하고 신라에 복속


달성 세력이 지역의 정치체제를 아우르며 소국 단계까지 성장했으나 고대국가 단계까지 이르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주변에 가야나 신라가 주변 세력을 정복하며 고대국가 단계로 성장해 간 것과 대조를 이룬다.

4, 5세기 무렵 신라가 급격히 팽창하면서 달구벌 세력은 신라 수하(手下)의 길을 걷게 된다. 혹자는 달성세력이 두 강국 틈새서 안주하다 너무 일찍 비상의 꿈이 좌절된 점을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이미 한반도의 강자로 훌쩍 커버린 신라에 달성 세력이 복속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다음 세기에 이르러 달성 세력은 ‘역사적 우울’을 털어내고 영남의 맹주로 다시 한 번 비상하게 된다. 신라가 들어선 후 왕조의 서진(西進)정책 거점으로, 영남 국방의 전략적 요새로 거듭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