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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칼빈의 목회적 특성과 독립교회의 목회에 대한 연구

예인짱 2015. 11. 2. 08:20

요한 칼빈의 목회적 특성과
독립교회의 목회에 대한 연구


지도  강  창  희  교수

이 논문을 풀러신학대학원 목회학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함


1997년 12월
풀 러 신 학 대 학 원
박     정     희
A Study of John Calvin's Pastoral Features
and The Ministry of Korean Independent Churches

A Dissertation
Submitted to the Faculty of
The School of Theology
Fuller Theological Seminary

In Partial Fulfillment
of the Requirements for the Degree
Doctor of Ministry

by
PARK, JUNG HEE
December  1997
박정희의 목회학 박사학위 논문을 인준함.


주 심                      
부 심                      
부 심                      




풀 러 신 학 대 학 원
서기 1997년  12월   일

THE APPROVAL SHEET
This thesis, entitled
John Calvin's Pastoral Features and The Ministry
of Korean Independent Churches

Written by
PARK,  JUNG  HEE
and submitted in partial fulfillment
of the requirements for the
Degree of Doctor of Ministry
has been read and approved by the
undersigned members of the Faculty
of Fuller Theological Seminary

                                                                        
                                                                        
                                                                        
목  차
Ⅰ. 서  론 1
1. 문제제기  1
2. 연구의 방법 및 범위 3
Ⅱ. 칼빈의 생애와 목회 4
1. 칼빈의 목회 생애 4
  1) 칼빈의 출생 4
  2) 칼빈의 성장 5
2. 제1차 제네바 목회 6
3. 스트라스부르크 목회 9
4. 제 2차 제네바 목회 10
  1) 신앙생활의 문제 10
  2) 신학사상과 목회 11
  3) 이상실현의 목회 12
  4) 그의 말년 목회  13
Ⅲ. 칼빈의 목회철학 15
1. 형이상학적 목회 16
  1) 칼빈 목회의 신학적 특징 17
  2) 칼빈 목회의 형이상학적 특징 21
2. 목회 철학의 구조 22
3. 목회와 교회 직분 24
Ⅳ. 칼빈의 목회실천 26
1. 설교와 목회 26
  1) 순수한 목회자 26
  2) 목회자는 설교자여야 함 27
2. 교육과 목회 28
3. 인격과 목회 30
4. 영성과 목회 32
Ⅴ. 칼빈의 교회정치 35
1. 칼빈의 교회정치 원리 35
  1) 교회의 분리와 통일에 관한 문제점 36
  2) 교회자율성 문제 38
2. 칼빈의 교회 행정원리 39
  1) 신앙고백서 39
  2) 성찬참여 40
  3) 예배시 시편의 찬송 40
  4) 자녀교육 41
  5) 혼인 개정 41
  6) 장로회의 직제 41
3.  칼빈의 목회와 세속정치 43
  1) 칼빈주의와 교회형태 43
  2) 칼빈주의와 세속정치 44
  3) 교회의 개혁업무 44
4. 칼빈과 교회제도 목사역할 문제 45
  1) 칼빈과 장로제도 45
  2) 칼빈은 감독교회론도 찬성 47
  3) 목사 역할 문제 51
Ⅵ.독립교회에 대한 일반적 이해 55
1. 성경신학적 교회론 55
  1) 하나님 나라와 교회  58
  2) 교회의 본질과 사명 60
  3) 교회의 형태와 정치 64
2. 칼빈주의적 교회론 66
  1) 칼빈주의적 교회론 이해 67
  2) 한국교회의 교회이해 74
  3) 칼빈주의적 교회형태와 정치 78
3. 독립교회의 타당성 81
  1) 어원적 고찰 81
  2) 성경적 근거 83
  3) 신학적 근거 93
  4) 역사적 근거 106
Ⅶ.독립교회의목회 138 1. 각 교회 설립의 공통적 의의 139
2.  독립교회의 교회관 140
3. 타교회들과의 상호협력 142
4. 독립교회의 예배 143
5. 독립교회의 신앙고백 144
  1) 대동교회 144
  2) 성약교회 146
  3) 아현교회 147
  4) 신촌교회
     5) 염천교회    
     6)부산서부교회  
     7)신앙고백에 대한 평가 148
6.  독립교회의 정치와 행정 148
  1) 독립교회의 정치와 행정비교 152
     2) 독립교회 행정에 대한 견해 154
Ⅷ. 독립교회의 가능성 156
1. 독립교회의 단점 156
  1) 교단과의 관계문제 156
  2) 목회자의 문제 158
  3) 지나친 구별의식 160
2. 독립교회의 장점 162
  1) 21세기를 대비한 독립교회 162
  2) 말씀중심의 목회 164
  3) 개인구령의 관심 166
  4) 교회의 자율성과 자치성 168
3. 한국교회의 현황과 독립교회의 가능성 169
  1) 신학적인 토대의 필요성 169
  2) 보다 강력한 교회의 필요성 171
Ⅸ. 결 론 176
참고문헌 180


Ⅰ. 서  론


1. 문제제기


한국교회의 성장은 한때 구미교계의 연구의 대상임과 동시에 선망의 대상이었다.  선교 1백주년을 갓 넘긴 한국교회가 양적으로 전국민의 25%까지 성장했다는 것은 세계교회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하였다.  그리하여 한국교회의 선교와 성장론을 배우자는 소리까지 한때는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988년 기점으로 한국교회 성장이 둔화되고 급기야는 교회 숫자는 늘어나면서도 교인의 수는 늘어나지 않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 교인 수의 증가가 곧 교회 성장 내지는 목회 성공으로 인식되어 교인 수 늘리기에 온갖 방법을 동원하던 한국교회에 이러한 현상은 실로 큰 의문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 원인을 교회 외적 요소에서 찾으려는 시도가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동안 한국 교회 성장의 이면에는 이미 많은 교회 내적인 문제점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 중에 하나는 1970년대 이후 한국사회와 경제가 고도성장의 기치아래 급속한 산업사회로 이끌려 왔고 또 이에 따른 세속화와 물량화, 그리고 소비 만능주의가 사회 전체를 주도해온 때에 교회도 이에 편승하여 대형화, 물량화, 외형화에만 치중해서 교회 본연의 모습을 너무 많이 상실해 버린 데 따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교회의 대형화 일변주의는 저급한 신비주의와 세속적 기복신앙을 양산시켰고 여기에 교파 문제에다가 가당치 않은 교권주의까지 가세하여 그야말로 한국교회는 말할 수 없는 영적 피폐상을 드러내고만 것이다.  이는 한마디로 어떻게 하든 교인 수를 늘려 대형 교회를 만들어보겠다는 목회자들의 연민스런 집념과 이를 목회 성공으로 인식하는 교계 풍조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교회 성장이라 하는 것은 교인 수가 늘고 헌금액이 불어나고 교회 사업의 규모가 커졌다고 해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없다.  교회 성장에는 성도의 수가 증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성도의 영적 성장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 교회의 이러한 외형적 성장 지상주의는 필연적으로 교단의 부패와 교회 정치의 부패로 이어졌고 이는 곧바로 교회들을 병들게 했다는 데에 대부분의 학자들이 공감하고 있다.


이러한 시류의 흐름이 틀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많은 목회자들은 시류에 영합하여 같이 흘러갔지만, 종교개혁자 칼빈의 예에서 보듯이 그 시류를 거부하고 성경적 관점에 서서 참된 의미로서의 교회 성장을 위하여 힘써온 몇몇 교회가 있다.  소위 한국내의 독립교회가 그것이다.  이들 독립교회들은 한결같이 대부분의 기성 교단에서 추구하는 양적 성장주의를 탈피하고 소수 질적 성장을 이루기 위해 소속 교단을 탈퇴, 혹은 새로 개 교회를 설립하여 목회자 스스로 소신 목회를 추구해 왔다.  이에 본 연구자는 기성 교단의 정치의 그늘에 가리워져 그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여 왔던 한국의 독립교회들을 살펴봄으로써 21세기의 새로운 한국개신교회의 정체성과 발전의 가능성을 고찰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2. 연구의 방법 및 범위


개혁교회의 자랑은 아무래도 성경중심의 사상일 것이다.  이러한 사상의 선구자는 역사적으로 볼 때 칼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칼빈 이전에 루터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었지만 오늘날 개혁교회의 전통은 칼빈에게서 영향을 입은 바가 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 연구자는 목회자로서의 칼빈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다루어 볼 것이다.  그는 신학자였지만 제네바에서 직접 목회를 담임하였던 목회자였으며 교회를 통한 세상구원의 가능성을 믿었던 사람이다.  그러므로 본 연구자는 그의 개혁교회 사상에서의 목회관, 그리고 그의 교회 행정과 운영 등을 살펴볼 것이다.  


다음에,  한국교회 내에서의 독립교회의 현황들을 고찰해 볼 것인데 여기서는 한국내의 독립교회들 전부를 다루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김현봉목사에게서 영향을 받았던 독립교회들을 중심으로 살펴본 후 이를 칼빈주의 개혁교회관으로 분석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 독립교회가 다음세기의 한국교회의 문제를 치유하고 또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는 대안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보도록 할 것이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성경신학적, 역사신학적, 그리고 목회신학적인 방법이 사용될 것이며 현재 독립교회로 대표되고 있는 교회들 가운데 5개는 김현본목사에게서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교회를 한 교회는 김현봉 목사와 비슷한 시기에 독립교회를 시작하였던 한 개의 교회 도합 6개의의 교회를 표집해서 분석해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본 연구의 한계는 본 연구의 목적과 관련된다.  즉 칼빈주의적 입장 안에서 독립교회를 조명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 내의 다양한 출발점을 가지고 있는 독립교회 전체를 다룰 수 없는 제한을 가진다. 본 연구는 몇개의 교회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Ⅱ. 칼빈의 생애와 목회


1. 칼빈의 목회 생애


죤 칼빈(John Calvin), 그는 신학자로서, 대학교수로서, 그리고 위대한 저술가로서 일생을 살았지만 어디까지나 그의 주 활동영역은 목회자였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28년간 목회를 했으며, 성베드로교회의 담임 목사로서 많은 영향력을 미쳤다.  이와 같은 일생의 목회에도 불구하고 신학적인, 그리고 책을 통한 그의 업적이 너무 크기 때문에 목회자로서의 칼빈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것이 사실이다.  주지하다시피 그는 그의 개혁주의적 신학의 이론을 교회의 실제목회에 적용하고 정직하게 실천하려고 했던 위대한 실천가였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실천적인 삶에도 불구하고 자칭 칼빈주의자라고 이야기하는 사람 가운데도 칼빈의 신학과 목회원리를 무시하는 사람이 많은 것을 우리는 주위에서 흔히 보게 된다.  그러므로 개혁교회의 신앙전통을 회복하기 의해서는 칼빈에 대한 연구가 보다 집중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1) 칼빈의 출생
칼빈은 1507년 7월 19일 프랑스의 북부 삐칼텐주 노용시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제랄코반 이었는데 그는 노용시의 유력인사로서 교회에서 오랫동안 서기와 회계의 직분을 맡아 봉사했다.  특히 그의 아버지는 판단력이 예리하고 지혜가 특출하여서 그 지방의 귀족들 및 교직자들과 교분이 있었으며 신임도 받는 편이었다.  그리하여 칼빈은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영향으로 지혜와 총명이 빨리 싹트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출생을 보게되면 그의 말처럼 보통사람들 가운데 한사람에 불과하다는 말이 틀림이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쟌누루푸랑 이었고 그의 아버지와는 비교되는 경건과 조용함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모르긴 해도 칼빈의 경건은 그의 어머니에게서 물려 받은 바가 클 것이다.


아뭏든 칼빈은 어려서부터 주위의 경탄을 자아낼 만큼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으며, 기억력 또한 대단하여 일생을 통해 한번 본 사람은 평생동안 잊지 않으며 학과 공부 역시 한번 기억하면 잊어버리지 않는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어머니께로부터 물려받은 경건과 사려 깊음까지 있었다.


2) 칼빈의 성장
칼빈의 부친은 그를 교직자로 만들고 싶어했다.  이에 따라 그는 12세 때부터 그곳 교회의 신부를 보좌하는 일을 했고 아울러 14세 때에는 파리에 있는 말쇄대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몬테이구 대학으로 옮겼는데 그곳에는 기독교사의 또 다른 거물들인 에라스무스와 로욜라 등이 있었다.


칼빈은 이곳 몬테이구 대학에서 신부가 되기 위한 본격적인 수업을 받았다.  물론 그의 주된 과목은 성경연구와 스콜라주의 철학이었다.  그리고 실천신학으로서 토론학을 배웠는데 이는 수사학과 더불어 후일에 그의 종교개혁 변증을 위한 훌륭한 도구가 되었다.  그런데 그가 19세가 되자 그의 아버지는 돌연 법학을 공부할 것을 권했다.  그 배경에는 아버지의 일신상에 중대한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노용의 교권자와 충돌이 있었고 이로 인해 큰 파문이 일게되자 그는 아들을 세속적으로 출세시켜 보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결국 칼빈은 올레온 대학을 거쳐 부느제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게 된다.  그러나 칼빈은 오히려 이때 배운 법학과 헬라어를 통하여 조직적인 종교개혁과 주석을 쓸 수 있는 기초를 형성하게 되었고 또 교회의 정치와 행정, 제도에 대하여서도 개혁할 수 있는 전문가가 될 수 있었다.  1531년 그의 아버지가 갑자기 위독한 가운데 별세하게 되자 그의 진로도 다시 바뀌게 된다.  1532년 그는 갑작스런 회개와 회심의 체험을 한 후에 위대한 종교개혁자의 길을 걷게 된다.


     그는 너무나 완고하게 이 로마교의 미신에 몸과 마음을 바쳤기 때문에 그 깊은 수렁에서 빠져 나오기가 실로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하        나님께서 갑작스런 회개를 통하여 완악하기로는 누구보다 더 강하였던 나의 모든 생애를 정복하여 복음을 가르치려는 마음으로 불붙게           하였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 그는 극적인 회심을 통하여 복음의 종으로 인생이 전환된 것이었다.


2. 제1차 제네바 목회
칼빈이 신학자 혹은 복음 변증가로서의 삶에서 목회자로의 삶으로 바뀐 곳은 스위스의 수도 제네바였다.  그는 기독교강요로 인하여 핍박을 받다가 파리를 떠나 제네바를 통과하여 스트라스버그에 가려고 하였다. 도중에 그는 제네바에서 하룻밤을 묵어 가려고 여장을 잠시 풀었다.  그때 제네바의 종교개혁자 화렐이 아침 일찍 칼빈을 찾아온 것이다.  화렐은 바젤, 모우, 스트라스브르크, 베른 등지에서 종교개혁을 주도하다가 제네바에 돌아와 있었는데 종교개혁에 있어서는 선배인 그가 기독교 강요의 저자를 만나기 위해 온 것이었다.  칼빈을 만난 화렐은 제네바에서의 종교개혁운동을 도와줄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처음에 칼빈은 학구적인 성격과 앞으로의 연구계획, 그리고 자신의 내성적인 면 등을 들어 사양하였다.  여러 번 간청해도 칼빈이 고사하자 화렐은 벌떡 일어서서 큰소리로 외쳤다.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너에게 선언한다.  당신은 자기공부를 구실로 하나님의 일을 거절하고 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은 노하실 것이다.  당신은 그리스도일은 생각지 아니하고 자신의 일만 생각하고 있다"고 벼락같은 소리를 한 것이다.  이일을 두고 후일에 칼빈은 회고하기를 "그때 마치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내게 손을 펴시고 나를 사로잡는 것과 같았다"고 하였다.  결국 그는 화렐의 간청을 따라 그곳에서 그 위대한 개혁자요 목회자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당시 로마가톨릭교의 사교도시였던 제네바는 화렐의 생명을 건 활동으로 로마 가톨릭 미사가 폐지되고 시민들은 복음에 순종하는 생활을 하겠다는 서약까지 받아놓은 교회개혁의 성공지였다. 이때가 칼빈의 나이 27세 때였고 1536년 7월 하순경이었다.  
제네바의 종교개혁은 칼빈을 만남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정성구의 말처럼 제네바는 날개 없는 새가 날개를 가진 셈이 되었다.
당시 제네바의 사회상은 신앙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도덕적으로도 극도로 타락하였다.  너무 많은 공창, 그것을 구별하기 위해 특별한 복장을 입혀야 했고, 심지어 교직자 중에도 첩을 몇씩 두어서 사생아가 많았고 민간재산을 강요해 음란한 생활에 소비해 버리는 일이 많았다. 정치적으로는 신성로마제국의 영도하에 극히 복잡한 정치적 입장에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 개혁운동이 일어났지만 그 운동이 반대파로 인해 무너질 위기게 놓였을 때 화렐은 칼빈에게 성경강해를 부탁했다.  말씀교육을 통한 개혁을 지속적으로 벌이기 위한 계획의 일환이었다.  1536년 8월말 산 파엘교회에서 바울서신 강해를 시작으로 제네바에서의 칼빈의 목회는 조용하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틈이 나는대로 복음의 토론을 하였고 이로 인해 로잔과 그 주변의 주민들은 신교신앙을 택하게 되었다.
로잔의 토론회와 베른의 루터파 대표자들과의 회의에서 명성을 얻은 칼빈은 설교자로 임명받아서 제네바교회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때 칼빈은 세 가지의 구체적인 작업에 들어갔는데 첫째는 자녀들의 종교 교육이었다.  즉, 모든 어린이들에게 복음적 신앙의 요점을 철저하게 가르치고 다음 세대까지 종교개혁이 이어지는 데에 역점을 두었다.  둘째는 도덕적 훈련을 시켰다.  새로운 교회와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시민들 중에는 이것을 방해하는 사람도 있었기 때문에 칼빈은 모범적인 인물들을 뽑아 장로회를 조직하고 시민의 행동을 감시하도록 했다.  교회의 도덕 규율에 따르지 않는 자를 수찬 정지시켰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이런 교회 형성을 출발점으로 하여 참된 신교 신앙 고백과 새 교회 건설을 할 것인가, 아니면 거부할 것인가를 시민 하나 하나에게 결단케 하여 거부하면 제네바시에서 추방하고 시인하는 자만으로 제네바시를 구성하자는 '신앙고백'을 제정했다.
개인의 정신 자립이라는 원리를 세우는 반면에 전 시민이 따를 신앙고백을 규정하여 따르지 않으면 추방한다는 중세 공동체적 사고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모순도 있었다.  이로 인해 많은 반대와 저항에 부딪히게 되었고 시민 자치회의 결의에 의해 급진적 개혁이 좌절되게 되었다.  결국 시 의회의 가결에 의해 칼빈은 제네바시에서 추방을 당하게 된다.  그 때가 1538년 4월, 제네바에서 목회를 시작한 지 만 2년이 채 못되는 때였다.


3. 스트라스부르크 목회
18개월의 제네바목회에서 칼빈은 매일매일 긴장과 보람의 연속이었다.  제네바를 떠난 칼빈은 스트라스부르크에 이르렀는데 그곳은 주로 루터파 사람들이 개혁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부쳐가 유력한 지도자로 활약하고 있었다.  칼빈은 친구 부쳐의 초청으로 불란서 피난민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 약 400명 정도의 교인들이 있는 그 곳이 칼빈에 의해 개혁파의 센터가 되었다. 그는 그 곳에서 연구와 저술활동에 힘을 쏟았다.  그리하여 1539년에는 기독교강요 2판을 내고 로마서 주석도 내었다. 또 1540년 9월 이델렛본뷰렌이라는 과부를 만나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  세 자녀를 얻게 되지만 9년 후에 사별하게 된다.


4. 제 2차 제네바 목회
그러나 한편 칼빈을 추방한 제네바 시는 거의 무정부상태로 돌아갔으며 날로 부패하고 신교는 구교의 세력에 다시금 힘을 잃을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의식이 있는 사람들은 칼빈의 초청을 다시금 요구하게 되었다.  결국 시의회는 1540년 칼빈을 재 초청하기로 결의하여 초청한다.  이에 대해 처음에는 칼빈이 선뜻 응하지 않았으나 화렐의 간곡한 권유 때문에 1541년 9월 제네바에 다시 들어가게 된다.  칼빈의 제 2차 제네바목회가 시작된 것이다.  이때부터 1564년 5월 그의 마지막 때까지 23년간 철저한 개혁운동가로 목회하며 지내게 된다.


1) 신앙생활의 문제
1541년 9월 13일, 3년 전에는 그를 거부했던 이 제네바시가 그가 돌아오던 날에는 기마대까지 출동해서 그를 맞이하였다. 칼빈은 돌아옴과 동시에 예배모범을 기초하고 교회법 제정 위원회를 만들어 11월 20일 초안이 의회에 제출되었다.  이는 1537년의 각서를 발전시킨 것이었다.  이것이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또 이를 시행감독하는 기관으로 톤시스토리움이라 하여 24명으로된 위원회를 만들었다.  톤시스토리움은 매 목요일에 정기회를 가졌는데 구성원은 교회직에서 12명, 소의회에서 2명, 60명인회에서 4명, 200인회에서 6명으로 구성했다.  위원장은 시의 최고이사가 맡았다. 이로써 시가 직접교회를 지배 경영하던 것이 폐지되고 1543년 부터는 콘시스토리움의 징계권이 생겨 칼빈은 이전의 실패를 면할수 있게 되었다.  
콘스트리움의 임무는 '형식주의를 피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그의 심판 앞에 서게 됨을 느끼게 하는데 있다.'는 것이며 우상파괴주의의 극단으로 나아감을 경계하는 것이다. 이로써 신앙과 생활의 순결을 지키고 댄스와 연극 등의 향락생활을 배격하고 특히 성도덕의 순결을 지키는데 비상한 노력을 하였다.  이로써 신앙생활에 있어 엄격함을 강조하고 준수케 하여 교회의 순결이 유지되도록 하는 데에 최선을 다했다.  이 신앙심의 엄격주의로 인해 자신의 지지자들이 돌이켜 오히려 반대자가 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2) 신학사상과 목회
제네바에서 2차 목회하는 동안 신학적인 문제로 두 번의 충돌이 있었다.  반대파중의 일부는 칼빈을 '하나님 말씀의 사역자, 복음의 해석자'로서의 권위를 의심하고 그를 향해 공격했다.  즉 칼빈이 주장한 예정설에 대해 그것은 하나님을 인간 죄의 책임자로 삼는 것이며 이것은 성경에 대해 배치되고 전통적 해석에 반하는 것이라고 한 비난이 있었던 것이다.  또 한가지는 세르베투스에 의해 받은 비난이다.  세르베투스는 20세에 '삼위일체의 잘못에 대하여'라는 책을 출판하여 기독교의 기본적 교리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또 '기독교의 복위'라는 책을 통해 노골적으로 기독교강요를 비판했다.  그의 저술 안에는 범신론적 우주관과 재세례파 사상과 경건주의와 신비주의가 함께 들어있었다.  세르베투스는 특히 삼위일체론에 대하여서는 성부, 성자, 성령의 교리는 '머리 셋을 가진 신', '악마의 환상'이라고 조롱하는 자였다.  칼빈은 그를 신성모독죄를 지은 자로 낙인을 찍었고 결국 그는 1553년 8월 상순에 나폴리로 가던 도중 체포되어 의회의 다수가결과 타지방교회들의 사형안 지지로 화형을 받게 되었다.  옥에 있는 그를 찾아가 칼빈은 회개할 것을 촉구하였으나 불응 하였다. 칼빈의 신학과 목회는 이처럼 언행일치의 행동이었다.  물론 이로인한 비판의 소리도 없지는 않았으나 목회자로서 사력을 다하여 교회의 사상적, 생활적 순결을 유지하고 강조하고자 했던 그의 열의와  견고한 의지는 우리의 공명과 경의를 받아 마땅하다 할 것이다.  
  
3) 이상실현의 목회
세르베투스의 화형으로 인해 칼빈은 심적인 고통이 컸지만 이로 인해 개혁에 대한 그의 투지는 더욱 강렬해졌다.  이후 그는 정치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더욱 확고한 기반을 갖추게 되는데, 이 여세를 몰아 칼빈은 교육기관을 세웠다.  이는 후배양성을 통해 개혁이 다음세대에도 변함없이 지속되게 하자는 데에 있었다.  칼빈은 대학을 건립하고 그의 동지 베자를 학장으로 취임케 했다.  이 대학출신은 5년간에 약 300명이나 되어 유럽각지에서 종교개혁운동을 펼쳐 나갔는데 그 중에는 스코틀렌드의 유명한 종교지도자 낙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칼빈은 이상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성경의 이상에 따라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자 노력하였다.  현재 한국교회가 성속을 분리하는 극심한 이원론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과는 반대로 칼빈의 목회는 만유를 굴복시키시고 통일시키시는 그리스도의 이상에 가까이 가려는 노력이었다.  그는 한주간에 7, 8회 정도 설교하고 교육했으며, 또 심방하고 연구와 저술에 힘썼다.  그가 크게 존경을 받게 된 것에 대해 한경직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째 그의 투철한 신앙이요, 둘째는 경건한 생활 곧 신행일치의 생활          이요, 셋째는 온전한 헌신과 희생정신이요, 셋째는 그의 해박한 학식          이요, 다섯째는 조직력과 행정력을 겸비한 그의 재능으로 볼 수 있           다.


4) 그의 말년 목회
1564년에 이르러 악화된 건강으로 인해 몸져누울 수밖에 없었던 그는 설교를 중단하게 된다.  제네바 시 전체가 그의 회복을 위하여 기도하였지만 그의 마지막의 때는 점점 가까워 오고 있었다.  로마 카톨릭측에서는 이 정보를 접하게 되자 쾌재를 불러 대었다.  유럽 전역에는 칼빈이 벌써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었다.  거기에다 칼빈이 죽고 나면 불란서가 제네바 시를 침공해 올 것이라는 소문을 로마 카톨릭측에서 퍼뜨렸다.  이로인해 제네바 시는 일시에 공포의 분위기가 조성되었으나 칼빈은 아픈 몸을 이끌고 시의회에 나가 하나님과 동맹함으로 걱정할 것이 없다고 격려하여 제네바 시민들을 굳세게 하였다.  이후 얼마동안은 건강이 호전되어 걸어다녔으나 그해 부활절에는 걸을 수가 없어서 의자에 실리어 성만찬을 하였다.  그러나 1개월 후에 극도로 쇠약해져서 결국 1564년 5월 27일 토요일에 하나님께로 갔다. 그의 원대로 묘비없이 평토장되었고 공동묘지에서 평범한 사람들과 같이 부활을 기다리는자가 되었다.  
이와같이 칼빈은 말년까지 개혁자로서 그리고 대적에게 맞서서 양떼를 지키는 목회자로서 최선을 다했다.  이와같은 칼빈의 실제적인 목회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많은 귀감이 되며 우리의 지향할 바가 되는 것이다.


Ⅲ. 칼빈의 목회철학


한국교회는 장로교회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장로교회는 칼빈의 신학과 목회이념을 전수한 교회이다.  스코틀랜드의 언약자들(Covenanters)과 영국의 청교도들(Puritans)은 칼빈의 영향을 받아서 장로교회를 건립했다.  청교도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을 제정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을 가장 잘 요약한 것이라 생각하고, 그것을 그들의 신앙과 신학의 표본으로 삼았다.  그 이후의 장로교회들은 이 모습을 따랐고, 한국장로교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렇게 한국장로교회는 선교사들을 통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청도교들의 신앙 색채를 받아들였다.  한국교회는 칼빈신학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좋은 영향도 많이 받았겠지만 왜곡되고 편협하게 칼빈신학을 이해하고 있는 부분은 없는가?
일반적 평가는 항상 위험부담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은 입장이 얼마든지 있고, 예외가 항상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필자는 한국교회의 다양한 입장과 형태를 무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왜곡된 부분을 연구분석함의 당위성은 있다고 본다.
16세기의 종교개혁은 교회의 개혁과 개신교의 태동이라는 면에서 중요한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교회의 신앙과 신학의 역사적 발달과정에서 볼 때는 지, 정, 의가 균형을 갖추게 되었다는 점에서 또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신학적으로는 성경을 근거로 중세의 그릇된 교리들을 바로잡았으며, 신앙적으로도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뜨거운 열정이 있었다.  윤리적인 면에서 또한 로마 가톨릭의 부패와 타락을 시정하려는 부단한 노력이 있었다.  많은 어려움과 시행착오도 없지 않았지만 종교개혁은 많은 열매를 맺었다.
16세기 초반에서 중, 후반을 걸친 약 반세기의 종교개혁 시기가 지난 뒤 이른바 정통주의 시기가 도래했고, 이러한 개혁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16세기 후반과 17세기에 걸쳐서 이성주의가 성행하면서 신학도 이러한 영향을 받아 지적이고 논리적인 면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많은 경우 루터교회와 개혁교회 안에서 신앙의 열정과 헌신은 식어갔고 교리논쟁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


1. 형이상학적 목회

점에 반대할 의사가 없다." 고 마틴 루터는 종교개혁자의 1세로서 개신교의 근거를 내린 사람이라면, 존 칼빈은 그 근거 위에 성경의 내용으로 더욱 명확히 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한 사람이다.  그는 지, 정 의가 균형잡힌 신학과 신앙을 보급한 사람이다.  그의 역작인 [기독교 강요]가 이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의 [기독교 강요]는 당시 로마 가톨릭의 그릇된 교리를 바로잡고 개신교의 신학을 성경적으로 잡아나가는 과정에서 성직자, 신학도 그리고 성도들에게 경건을 촉구하고 성경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기술한 책이다.  이 책을 통하여 칼빈은 교리적으로 변증적이고 체계적이면서도 성도들의 실제적 삶 가운데 유익을 주고, 목회에도 도움을 주고자 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원종천 박사는 칼빈신학에 나타난 그의 특징을 몇 가지로 정리해 준다.


1) 칼빈 목회의 신학적 특징    
   (1) 성경의 절대적 권위 인정
루터와 칼빈을 포함한 모든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의 권위를 개혁운동의 핵심으로 보았다.  이것은 로마 가톨릭의 교황과 교회조직 중심의 권위 체제를 무너뜨리는 필수적인 요소였다.  성경이 근거가 되어 교회가 그 위에 서는 것이지, 교회가 근거가 되어 성경이 그 위에 서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권위의 우선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요, 하나님이 계신 성경이 바로 그 권위의 표시라는 것이다.
칼빈은 루터와 마찬가지로 교회 중심적이고 교회직분의 권위 체제 아래 있는 로마 가톨릭의 권위체제를 거부했다.  또 한편으로는 재세례파의 입장인 성령을 통한 직접계시를 반대하여, 성경의 권위와 성경을 통한 하나님 계시의 객관성을 중시하였다.  
   (2) 예배의 설교 중심성
말씀의 절대적 권위는 예배의 설교 중심성을 자연스럽게 초래한다.  강단에서 흘러나오는 설교도 성경 중심으로 해석하고 이해하고 그리고 전달된다.  칼빈의 설교는 당시 종교개혁자들의 추세와 마찬가지로 성경의 각 책을 1장부터 순서적으로 강해하는 강해설교였다.  본문을 설명하며 그것을 당시의 상황에 적용하는 간단한 방법이었다.  
    그는 설교를 인위적으로 흥미있게, 또는 자극적으로 전달하려고 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의 심령을 꿰뚫는 능력이 있기 때문          에 단순하고 직접적인 설교를 했던 것이다.
   (3) 하나님 중심적 구원론
교리적으로 칼빈은 구원론에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로마 가톨릭의 구원론은 물론 잘못되었고, 일부 개신교의 구원론의 가르침 가운데도 문제가 있었다.
성경을 근거로 구원론의 신학을 정리하는 칼빈에게 있어서 일관성있는 신학은 매우 중요했다.  [기독교강요]는 교회를 위하여 이 구원론을 정립하기 위한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작업이라 할 수 있으며 또한 창조주 하나님의 사역,구속주 하나님의 사역, 성령하나님의 사역, 그리고 교회의 사역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구원을 이루시는 우리 하나님의 사역을 정리한 것이다.  [기독교강요]에서 칼빈은 이외의 여러 분야에 대한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작업을 했다.  오늘날 조직 신학의 거의 모든 주제들이 [기독교강요]에 총망라 되어있다.
회개와 중생을 강조하고 성화를 중시하는 한국교회의 영성은 칼빈의 신학과 유사하다.  그런데 회심의 체험을 강조하는 것은 칼빈보다는 청교도적인 신앙에 더욱 가깝다 회심체험의 강조는 청교도에서 발전된 것이다.  칼빈은 회심에 있어서 성령 하나님의 사역으로 강조했다면 청교도들은 그 사역이 인간체험 가운데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는 가시적인 차원으로 표현했다.  
   (4) 하나님 주권 사상의 절대화
칼빈에게는 '하나님의 주권' 사상과 '하나님의 영광 사상'이 강하게 나타난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체적인 지배와 통치를 의미하며, 인간에게는 삶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이 이루는 것이다.  창조주이시며, 만물의 통치.  운행자이시고 구속주이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이루어지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존재하고 발생한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예정하시고 부르셔서 구원하시며 거룩케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다는 것이다.  어느 한 부분도 인간이 스스로 이루는 것이 없다.  죄행은 물론 인간의 책임이요, 그 결과를 달게 받아야 한다.   
   (5) 하나님 주권 사상의 예정론
하나님 주권 사상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 예정론이다.  칼빈은 예정과 유기를 포함하는 이중예정을 고수한다.  
그러나 이 예정론을 기계적이고 무자비한 하나님의 작정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이것은 칼빈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경험하면서 생기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주기 위하여 성경적인 답을 찾으려는 노력으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도, 복음이 문제가 있어서도 아니다.  구원은 오로지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뜻에 달려있는 신비스러운 영역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 내용을 완전히 이해해서도 아니고, 충분히 이해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바울과 함께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비밀에 경이할 뿐이고, 누가 하나님과 논쟁하겠는가 라고 반대자들에게 반문할 뿐이다.
   (6) 성만찬의 신비 체험 강조
[기독교 강요]를 보면 교리 정리가 경건을 유발하도록 되어있다.  사색적이거나 철학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을 바로 이해하기 위하여 집필되었으며, 성경의 보조 역할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교제가 구원론의 중심을 이루면서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그리스도와 믿는 자들과의 신비적 연합과 지속적인 교제가 성도들의 영성을 도모한다.
믿음을 통한 구원이란 자체가 신비로서 우리에게 신비스로운 체험이 일어나는 것이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되게 함으로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죄와 의의 교환이 있고 그리스도의 모든 유익이 하나의 것이 되게 하는 것이다.
   (7) 치리권 강화
칼빈 신학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성화'에 대한 강조이다.  루터는 이신칭의가 그의 신학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물론 그에게도 성화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나, 성화의 강조는 칼빈에게 와서 집중적으로 연구되었다.
칼빈은 칭의와 성화를 순서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둘 다 성령 사역의 직접적인 결과로 보았다.    
그의 제네바 사역은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에 대한 대단한 관심과 추구를 보여준다.  그의 목회는 감독들의 통해 성도들이 철저하게 거룩한 삶을 살도록 관리했고, 교회는 치리의 중요성을 보여주었다.  의로워진 자는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의로워진 자는 거룩한 삶을 통하여 그의  의로움을 입증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2) 칼빈 목회의 형이상학적 특징


위필드 (B. B. Werfield)는 칼빈에 대하여 말하길 "칼빈은 삼위일체의 교리사에서 제2위이신 성자의 존재가 스스로 계신 분이라고 주장한 것이 가장 위대하다.  즉 철학적으로 말한다면 형이상학론은 하나님이 중심이라는 주장이다.  그래서 그의 인식론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중심이었다.  그래서 그를 말씀의 신학자라고 부른다." 고 하였다
특히 그는 성령의 신학자라고 할만큼 성령의 역사에 깊은 교리를 교회에 주었다.
기독교 전통 속에 표현되어 있었던 형이상학론은 칼빈에게 있어서도 문제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것은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관계개념으로 궁극적인 요소이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그것은 천상적 현상과 지상적 현상으로 설명하였다.  칼빈의 형이상학론은 중세 교회인 카톨릭 교회에서 주장된 사상과 대립적인 입장이다.  카톨릭 교회는 천상적인 것으로 지상적인 국가가 천상적인 교회에 종속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칼빈은 세속적 국가의 정치의 권한은 종속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하에 신성화 될 수 있음을 고조하고 있다.  그에 의해 주장된 이러한 사상은 특별 은혜와 이에 대비할 일반 은혜와의 관계성의 문제에서 밝히고 있는 것이다.  칼빈은 두 개념을 비교하여 하나님의 주권인 예정론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주권을 약화시키거나 인간의 주권을 극대화시키는 것을 부정하는 입장인 것이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인간 자체에는 영적 지배와 시민적 정치적 지배의 두 가지 요소가 있다고 한다.  영적 지배의 요소는 신령한 영적 생활이고 시민적 정치적 지배의 요소는 현세적 육적 생활을 말하는 것이다.  이 양자에 대하여 칼빈은 항상 별개의 것으로 구별시키고 양자를 혼동시키지 아니하였다.  또한 그는 양 개념의 공존과 양 개념은 신주권 하에 종속되어 있음을 주장하였다.  즉 그는 양 개념을 무엇보다도 대비상황으로 보았다.  그것은 실제적으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인간 이성에게도 가장 합리적이라는 것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그의 형이상학론을 확실히 밝히고 있는 단면이다.

2. 목회 철학의 구조


칼빈의 목회 철학에 있어 근간이 되는 것은 인식론적 측면에 있어서의 성경의 절대권위 사상이라 하겠다.  칼빈은 절대적 권위가 있는 말씀의 이해는 인간 이성의 판단을 중심할 때 이해력을 높이는 실제적 연구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칼빈은 성경의 권위에 있어서 루터보다 더 명확했다.  루터는 성경 66권 가운데 야고보서와 요한계시록 등 성경의 일부에 대하여는 신학적 비평을 하면서 정경성을 의심하였으나, 칼빈은 성경66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정경으로서의 절대 권위를 부여했다.  즉 성경은 선지자와 사도들이 영감, 곧 성령의 감동을 받아 기록되었다고 생각하며 칼빈은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성경에 부여한 것이다.  
칼빈은 또한 기자들을 영감하여 성경을 기록케 하신 바로 그 성령께서 성경 독자의 심령에 역사하여 내적 증거로 확신을 주며, 성경의 권위가 인식됨을 주장했다.
한국교회가 성경을 중시하고 성경66권의 절대적 권위를 강조하는 것은 칼빈신학의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청도교들도 이점에 있어서는 이의가 전혀 없다.  칼빈의 성경관이 축자영감이냐 아니냐에 대하여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다.  물론 이것은 근본주의, 자유주의, 신정통주의의 성경관의 갈등 가운데서 제기된 문제이다.  칼빈 시대에 이런 문제는 제기되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칼빈은 성경의 영감을 고수했다는 것이다.
그는 사람의 이성도 이미 타락으로 인해 부패되었기 때문에 진리를 깨닫고 그것을 이해하는 것도 오직 성경말씀 안에서만 이해되는데 부패한 이성이라도 그 성경을 읽는 중에 깨달음과 함께 믿음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조화성이 있어서, 오랜 세기를 걸쳐서 많은 저자들에 의해 씌어 졌지만 이성으로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경 이해는 그의 목회 사역에서 폭넓은 성경 해석과 성경강해를 가능케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깊은 성경 연구를 통해 나온 그의 식견은 교회 내에서 뿐만 아니라 제네바시의  정서 문화에까지 영향을 미쳤고, 나아가 유럽의 전 개혁교회로 퍼져 나가게 되는 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3. 목회와 교회 직분


칼빈의 교회는 직분을 중심한 교회이다.  칼빈은 말씀과 성례와 권징은 교회의 직분자들에게 맡겨진 일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교회의 기본적인 요소가 말씀과 성례이기 때문에 즉 말씀을 올바로 듣고 성례를 올바로 행하며 그리고 권징에도 올바르게라는 개념을 적용하여 시행될 때 직분은 이 세상에서 교회의 존재를 위하여 그 역할을 다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직분의 의미를 지나치게 강조한다고 할 정도이다.  교회의 직분자들은 하나님 자신의 인격을 대변하는 자들이라고 한다.  칼빈은 하나님에 의하여 주어진 직분은 고결하며 동시에 필요한 기능이라고도 하였다.
1541년과 1561년의 교회헌법에 보면 칼빈은 네 가지 형태의 직분을 말하고 있다.  즉, 목사, 교사, 장로, 집사이다.  이에 대한 신학적인 설명은 기독교 강요 1543년 판에서 발견할 수 있다.  직분의 제일 첫 형태는 목사이다.  칼빈은 목사직을 에베소서 4장 11절의 주석에서 처음으로 언급하고 있다.  칼빈은 이 해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목사란 양무리를 돌보는 일이 맡겨진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또 그는 "나는 목사들이 교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생각한다고 하였다.


Ⅳ. 칼빈의 목회실천

칼빈은 근대 서양사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이다.  맥그래스가 근래에 쓴 칼빈전인 [존 칼빈의 생애: 서양문화 형성에 관한 연구]는 그 제목이 말해주듯이 칼빈의 생애를 연구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맥그래스는 이렇게 말했다.  "칼빈은 서양문명이 그 특징적 형태를 가지기 시작한 근대의 여명기에 개인과 제도의 전망을 변화시킨 유럽사의 배자적(胚子的) 인물임이 입증되었다."고 했다.  말하자면 근대서양문화는 칼빈이라는 씨에서 싹이 트고 성장했다는 것이다.


1. 설교와 목회    
  
칼빈의 이러한 영향력은 그의 삼위일체 하나님 중심적 신학, 교회 중심적 활동, 천상에 대한 경건한 명상에서 왔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이러한 관심들이 시대와 환경에 매이지 않는 구원(久遠)의 사상을 형성하는 동인이 되었다.

1) 순수한 목회자
칼빈의 영향력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 뻗쳐졌지만, 그는 제네바교회의 목회자였을 뿐이다.  장 다니엘 브노와(Jean-Daniel Benoit)의 다음과 같은 칼빈평은 매우 적절하다고 하겠다.  
    우리는 그를 제네바의 개혁자로 말하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아마 그          를 제네바의 목회자라고 말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칼          빈은 그의 영혼 속에서 목회자였으며, 그의 개혁활동은 많은 면에서          그의 목회활동의 결과와 연장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칼빈이 제네바교회의 순수한 목회자였기 때문에 그는 그만큼 큰 영향력을 서양 문화에 끼칠 수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칼빈은 하나님 중심적인 순수한 목회자로서 그 시대의 정치논리, 그 시대의 경제논리 등 그 시대의 논리를 뛰어넘는 사상을 피력했으며, 이것이 그의 영구적 영향력이 되었다.


2) 목회자는 설교자여야 함
첫째로 칼빈을 위시한 종교개혁자들이 생각한 목회자상은 무엇보다 먼저는 설교자였다.  칼빈은 교회의 두 표지로 말씀과 성례를 드렸다.  말씀이 순수하게 선포되고 성례가 바르게 집행되는 곳에 교회가 있다.  그러나 칼빈에게 있어서 성례는 '보이는 말씀'이었다.  그래서 칼빈을 위시한 종교개혁자들에게 있어서 목회자는 하나님 말씀의 사역자(minister verbidivini)였다.
칼빈은 카톨릭교회의 성직자들이 성례를 집행할 때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큰 소리로 선포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이 선포의 말씀이 성례를 성례되게 하는 것이다.  칼빈은 성례를 집례할 때 성례에 관한 설교를 할 것을 권고했다.    
    칼빈은 설교자가 설교를 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그의 말씀 속에 빛          남으로 그의 종들을 통해 말씀할 때마다 마치 그가 우리와 대면해 가          까이 있는 것처럼 그것에 의해 감동되는 것이 마땅하다." 고 말했다.          또한 그리스도는 "그들의 입이 자기의 입으로 간주되고 그들의 입술          이 자기의 입으로 간주되기를 원한다." 고 말했다.  그래서 목회자의          직임이야말로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 최고의 직임이다.  "하나님이          인류에게 준 많은 중요한 은사들 가운데 독특한 특권은 그가 사람들          의 입과 혀를 자신을 위해 성별하고 그것들 안에서 자신의 음성이 울          리게 한 것이다." 하고 칼빈은 말했다.  그러면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          시지 않고 왜 목회자들을 사용하시는 것인가? 칼빈은 그 이유를 이렇          게 열거했다.  우선 우리 인간들을 하나님의 사신으로 사용한 것은           우리 인간에 대한 존중을 선포한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 인간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듣는 자들을 시험하기 위한 것          이다.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직접 말씀한다면 지체 없이 받아들일            것이다.  


2. 교육과 목회
칼빈에게 있어서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종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성경을 부지런히 연구하는 학자가 되어야 했다.  칼빈은 "만약 무엇보다도 먼저 학자가 되지 않는 다면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좋은 사역자가 결코 되지 못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  
예언이란 성경에 대한 단순한 해석이 아니라 현재에 적용할 수 있는 지식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선하고 신실한 목자의 직임은 단순히 성경을 설명하는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힘과 능력을 더하기 위해 진지함과 예리함을 가져야 한다." 하고 말했다.  칼빈은 병석에 누워서도 제자들에게 구술하여 저작활동을 계속했다.  병문안을 왔던 사람들이 안타깝게 여겨 좀 쉬라고 권면하면, 마지막 숨을 쉴 때까지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대답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중세교회의 성직자들이 입던 제사장 예복 대신에 샤우배(Schaube)라고 하는 세속 학자의 가운을 입기 시작했다.  쯔빙글리는 1523년 가을에 이 가운을 입기 시작했으며, 루터는 1924년 10월 9일 오전에는 수도사의 옷을 입고 설교했으나 그날 오후부터 샤우배를 입고 설교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샤우배, 즉 학자의 가운이 프로테스탄트 목회자의 예복이 되었다.
둘째로 칼빈에게 있어서 교회는 죄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학교였으며, 이 학교의 교과서는 성경이었고 이 학교의 선생들은 목회자들이었다.  칼빈은 "가르치는 직임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그는 교회의 참된 목회자가 아니다." 라고 말했다.  제네바 교회의 교리문답 서문에서는 교회는 항상 아동들을 기독교 교리 안에서 바르게 교육하는 일을 힘써 행해 왔으나 로마 가톨릭교회는 이것을 전복 시켰다고 비판하고 교회교육의 회복을 강조했다.  
이 교리 문답 308항에서 목사가 "그리스도인은 자기 목사로부터 한번 교육을 받는 것으로 충분한가, 아니면 평생 동안 이 과정을 받아야 하는가?"하고 묻고 아동은 "계속하지 않는다면 시작한 것으로 별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끝까지 혹은 더 낮게 말해 끝없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여기서는 평생교육이 강조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칼빈은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는 것을 교회 안에서 모든 사람의 의무로 생각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우리 자신의 평가에 있어서 바보들' 이 되며 '그리고 아동들처럼' ,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게' 되기를 요구하신다고 말했다. 어떤 목회자가 회중에게 가르칠 것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회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르침을 잘 받아들일' 자세를 가짐으로써 '하나님을 위한 경건한 순종'을 나타내야 한다고 칼빈은 주장했다. 그렇다고 해서 회중이 목사의 잘못된 가르침까지 받아들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3. 인격과 목회
  
칼빈은 목회자를 영혼의 인도자로 보았으며, 그 자신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적 상담을 해주었다.  그 상담 대상자들은 왕이나 제후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실로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칼빈은 내담자들에게 용기와 애정을 가지고 상담해 주었다.  목회자는 "왕들과 왕후들은 자유롭게, 그리고 용기를 가지고 책망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민중들이나 낮은 사람들에게 국한되어서는 안 되고 가장 작은 자로부터 가장 큰 자에까지 모든 사람을 복종시키기 때문이다." 하고 칼빈은 말했다.
또한 칼빈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설교를 하고 나면 우리의 직무가 다 끝나서 쉬기만 하면 될 정도로 우리의 직무가 극히 제한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우리의 피를 책임져야 할 사람들에게 최대한 직접적이고 쉬임 없는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필수 적이다.  왜냐하면 그 피를 잃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의 태만 때문일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다.
    칼빈은 목회자로서 교인들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었다.  그는          생존한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교인들을 자녀처럼 생각했다.  "하나님          은 나에게 작은 아들을 주셨다가 데리고 가셨다.  그러나 내게는 전          (全)기독교 세계에 무수한 자녀들이 있다."  칼빈은 아들을 역병으로          잃은 아버지에게 이렇게 위로의 편지를 보냈다.  "클로드 선생과 귀          하의 아들 루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처음으로 접했을 때 나는 너무 정          신이 산란하고 당황해서 며칠동안 우는 일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          었습니다."          
칼빈은 목회자의 삶은 사랑을 가르치고 실천하는 삶이며, 그래서 가난한 삶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칼빈은 감독은 가난한 자들이 가지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가지지 않는 것을 바람직하게 보았다.  교회법은 교회의 수입을 네 부분으로 나누었는데, 하나는 교직자를 위해, 하나는 교회 및 다른 건물들의 보수를 위해, 하나는 가난한 나그네나 가난한 본토민을 위해서였다. 그래서 칼빈은 교회 수입에서 '적어도 절반'은 가난한 자의 몫이 된다고 주장했다.  
칼빈을 포함한 종교개혁자들은 카톨릭교회의 성직자 독신주의를 비판하고, 목회자는 모범된 가정을 이끌어가야 한다고 보았다.  칼빈은 서른 두 살에 결혼하여 9년동안 모범된 가정생활을 했다.  칼빈은 자녀가 하나였는가 아니면 둘 이상이었는가 하는 것은 칼빈 연구가들 사이에서 큰 논쟁거리이다.  


4. 영성과 목회
칼빈은 중세교회의 사효성(事效性)을 부정하였기 때문에 목회자의 내적 소명을 강조했다.  내적 소명은 목회자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의식하는 것으로 본인 이외의 아무도 그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는지 확인 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내적 소명없이 목회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칼빈은 주장했다.
칼빈은 이렇게 한탄했다.  "목회자의 직임을 신실하게 수행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도 힘드는지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오늘날 백 명중에 거의 한 명도 없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목사의 직임을 하찮고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면서 그 직임을 시작한다.  그리고 후에 경험에 의해서 그들이 얼마나 어리석게 알지 못하는 것을 열망했는 지를 알게 되지만 너무 늦다.  한 목사들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 중에는 보수를 목적으로 하는 용병들이 있다."  
외적 소명은 교회가 목사로 부르는 것인데, 여기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있다고 칼빈은 말한다.  즉, 건전한 교리와 거룩한 삶을 구비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칼빈은 기도와 성령의 역사를 강조했다.  칼빈 연구의 대가였던 워필드(Benjamin B. Warfield)는 칼빈신학을 연구하고 난 다음 칼빈을 "성령의 신학자"라고 규정했다.
     "그의 손에서 교회 사상 처음으로 성령론이 제자리에 왔다.  어느 누
    구의 마음 속에서 보다 그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비젼이 빛          났으며, 그리고 그는 누구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않          으려고 했다.  어느 누가 그보다 자기를 피로 산구주에게 헌신했는           가?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칼빈의 모든 사상을 특징짓는          것은 성령의 전능한 능력에 의한 구원의 주권적 역사에 대한 의식이다.          그러므로 그는 무엇보다도 '성령의 신학자'라는 위대한 이름을 받을 만          하다."
칼빈은 말씀을 강조했지만, 말씀 그 자체로는 외적 말씀, 문자에 불과하고 그 말씀에 성령이 역사해야만 살아있는 말씀이 되는 것으로 보았다.  "성령의 역사가 하나님의 말씀에 결합된다.  그러나 구별된다.  이는 외적 말씀이 성령의 힘에 의해 생명이 불어 넣어지지 않으면 그 자체로는 무용하다는 사실을 우리로 알게 하기 위함이다." 라고 칼빈은 말했다.  그러므로 칼빈은 "하나님이 그의 사역자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면 그들에게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고 말했다.
칼빈의 예정론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칼빈의 예정론이 기도를 불필요하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칼빈은 누구보다 기도생활을 강조했다.  칼빈은,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어려운 처지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기도는 불필요하다고 말한다고 비판했다.
칼빈은, 우리의 기도에 의해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를 위해 준비해 놓은 보화에 이른다고 했으며, 또한 "우리의 기도에 의해 보물을 파낸다." 고 했다.  우리는 필요할 때 기도함으로 하나님 앞에 겸손을 배우고, 필요한 것을 받을 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고, 계속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명상하게 된다고 칼빈은 말했다.  
칼빈은 이렇게 말했다.  "만일 죽음 후에 영원에 대한 희망이 우리에게 남아있지 않다면...  우리는 부끄럽게도 야수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게 될 것이다." "육체에 눈멀고 우둔한 욕망이 저항하지만 주님의 오심을 모든 것 중 가장 행복한 것으로 여겨...  고대하기를 주저하지 말자.  그는 구속주로서 우리에게 오실 것이며, 모든 악과 고통의 밑없는 심연으로부터 우리를 구출하시고 그의 생명과 영광의 복된 유산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죽음의 날과 마지막 부활을 기쁘게 기다리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진급하지 못한다."  
칼빈은 이처럼 그 마음이 하늘나라에 있었기 때문에 소신 것 목회를 할수 있었다.  하늘나라에 마음을 둔 사람이 현세에서 훌륭한 목회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역설같지만 진리이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주일에 두 번, 그리고 매주 월, 수, 금요일에 한번씩 설교했던 것 같다.  제네바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상담에 응해야 했고, 시의 각종 회의에 참석하여 조언을 해야 했다.  또한 유럽 각지에서 제네바대학으로 유학 온 학생들에 의해 칼빈의 사상과 정신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어 갔다.  오로지 하늘나라에 마음을 둔 그가 국제적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제적 인물이 되었다.


Ⅴ. 칼빈의 교회정치  
칼빈은, 목회자는 교회의 일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칼빈은 당시 재세례파 지도자들의 분파적 경향을 비판했다.  "하나님의 양떼로부터 제외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  우리가 신자들과의 일치를 이룩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로부터 단절된 것으로 본다."고 하였다.  
칼빈은 당시 분열되어 있던 개신교회의 연합을 위해 노력했으며, 영국교회 대주교인 크랜머에게 보낸 편지에서 교회의 일치를 논하는 자리라면 "그것은 내게 대단히 중요하므로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그 일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열 개의 바다라도 건너가기를 싫어하지 않을 겁니다." 하고 말했다.  칼빈은 실로 근대교회의 에큐메니칼 운동의 창시자였다.


1. 칼빈의 교회정치 원리
정치적으로 제네바의 자유독립을 위한 투쟁을 관찰해 보면 정치적 입장이 매우 복잡했으나 결국 종교적 논쟁으로 해결함으로서 정화되었다.  사실1520년까지 제네바시에 소수의 개혁파주의적인 복음주의자들이 있었으나 1530년 초기까지 종교개혁자들이 제네바교회를 지배할만큼 그들의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그 당시 제네바시에 거주하고 있었던 소수의 종교개혁자들은 주로 맨드, 화렐, 윈그레, 비레트, 그리고 로보드 등이었다.  이들에 의하여 여러 사정을 거쳐 1528년 1월에 종교개혁을 선언하게 되는데 당시 이들은 배른시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1536년 5월 26일 드디어 제네바 시의회는 복음대로 사는 개혁운동을 결정함에 따라 그 시는 복음주의적인 종교개혁의 규정대로 운영되는 시정국가가 성립된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제네바는 신앙에는 말할 것도 없이 도덕적으로도 형편이 없었다.  너무나 음탕해서 시의회에서 한 남자에게 첩 한사람만 두자는 결의까지 할 정도였다.  로마교회 성직자 중에도 첩을 몇씩 두어서 사생아가 많고 민간재산을 강요해서 음탕한 생활에 소비한 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1) 교회의 분리와 통일에 관한 문제점
칼빈은 교회분리와 통일에 관한 문제점을 논함에 있어서 그 기준을 교회의 본질과 순결에 직결시켜 생각한다.
   (1) 교회의 본질
교회의 본질에 관한 교리는 반드시 모든 역사에 대한 신앙의 주관성의 교리를 동시에 취급함으로써 종교개혁을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밝히 분석할 수 있고 여기에 교회의 통일과 분리 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옳게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칼빈에 있어서 "신의 주권"의 문제는 그의 모든 해석원리의 열쇠와 같이 되고 있다.  그는 그의 기독교강요 제1권 제17장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그의 집으로 선택하였기 때문에 교회를 다스림에 있어서 아버지로서의 간섭과 배려를 특별한 증거를 통하여 나타내신다."고 증거함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이 자기 시대에 직면하고 있는 교회의 개혁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칼빈에 의하면 교회의 기본요소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선택으로 설립되었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2) 교회의 순결
칼빈은 속사도 시대의 교회에 대하여 신약교회와 동등지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고대교회의 신약적 형태는 무지한 인간들의 무감각한 성격으로 말미암아 점차 오염되고 마침내는 결과적으로 중세기의 부패 교황권과 같은 데까지 이르게 된 것이라고 칼빈은 인식하고 있다.  이때의 기독교는 기존교회의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이들과 분리되면서까지 복음에 충실한 사도들로 말미암아 활기를 띄게 되었고 이와 같은 신앙의 대중화와 신도들의 교회로부터의 이탈은 역설적으로 교회의 순결성이 훼손되는 현상을 가져왔는데 즉 이들 이탈 성도들은 당시 교회의 열성교역자들과 마찰을 일으켜 때로 교회 안에는 이들을 잡아가려는 불순자들이 함께 혼재하는 오염된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그들을 투옥하는 외식자와 이단자들이 교회 안에 들어옴으로써 여기서 교회의 개혁으로의 종교개혁에 대해 로마교회로부터의 분리의 정당성을 부여한 칼빈의 사상적 근거를 우리는 발견한 셈이다.
   (3) 교회의 통일
그러나 이러한 분리는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교회가 그 본래 사명에서 이탈된 변절자로 그 복음의 지위를 포기하여 버렸을 때에 일어나는 운동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의 기관으로서의 교회에 대한 신의 주권적 간섭에 의하여서만 이루어져야 정당하다는 것을 칼빈은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않된다.
칼빈은 교회의 통일을 강조함에 있어서도 또한 특출한 인물이었음을 우리는 그의 저서를 통하여 인정하게 된다.  그의 기독교강요 제4권에 나타나 있는 교회통일의 개념은 그가 얼마나 그 시대의 교회의 통일을 갈망하였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2) 교회자율성 문제
   (1) 칼빈의 정치관(교회정치)
루터는 교회의 정치를 정부의 손에 위임하였지만, 칼빈은 정치적 세력으로부터의 교회의 독립을 위한 교육에 노력하였다.  그가 교회정책의 근본착안점으로부터 생각한 것은 첫째 모든 선택의 하나님에 말씀에 표현된 대로 되어야 하며 둘째 사도적 초대교회의 본을 따르려는 것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2) 칼빈의 교회자율권
제네바 실정에 대해서 칼빈이 무엇보다도 강조한 것은 교회의 자율성이었다.  교회는 그 위탁된 일을 수행함에 있어 성례전에 대한 하나님 말씀의 선포와 그것에 필요한 교회훈련의 실시에 대해서 완전히 자유로운 자율성을 가질 뿐이라는 것이 칼빈의 불변의 신념이다.  신앙 사항에 관하여는 교회가 최후 결정권을 가진다.  이것이 칼빈의 근본적인 주장이며 오직 그 때문에 그는 책벌권, 교역직 선출권, 교리의 결정권 등을 둘러싸고 시의회와 격렬한 대립을 계속한 것이다.  1541년 이래로 교회법규도 결국 칼빈이 의도한 바대로 중세로마교회와 같은 국가에 대한 교회의 계층적인 상위우월을 부정하는 것으로 작성되었다.  그러나 그는 교회가 신법의 구상화로서 자연법을 기본으로 하는 국가에 대해 교회의 신성불가침권을 말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오히려 국가는 교회를 보호하며 지지하는 기관으로 마련되었음을 인정하고 있었다.  이 범위 내에서는 칼빈이라 할지라도 아직도 정교의 완전한 분리라는 사상에 도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칼빈이 기도한 것은 실은 국교회의 범위 내에서의 교회의 자율성이었다.



2. 칼빈의 교회 행정원리
1) 신앙고백서
권징조례는 시민의 신앙적 일치를 꾀하여 전 시민이 공적인 선서를 하게끔 마련했으나 이 요구는 1941년 4월 14일 21조의 신앙고백이 의회에 제출되어 승인되었다.  3개월의 예고를 둔 후 시정부의 감시 하에서 전 시민의 선서가 마련되는 것에 의해서 실현되었다.  이와 같은 방법은 칼빈에 대해서 친구와 적을 구별하기 위하여 부득이한 방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시민의 당연한 반발을 사는데 충분하였다.  최후까지 선서를 거절한 시민도 시 정부의 압력 하에 결국 굴복하였으나 이 선서문제는 책벌 문제와 함께 칼빈의 실각의 원인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2) 성찬참여
기독자의 공중이 회집할 때마다 이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신자가 수찬하는 것이 초대교회의 규정이었으나 이 규정 대신에 한 사람이 대표로 미사를 봉헌하는 것이 중세교회가 도입한 성찬의 규정이었다.  그리고 성찬의 근본 뜻이 경시되는 일이 없도록 자주 베풀던 것을 매월 한번 행하도록 했다.  그런데 성찬에 대해서도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그 지체인 신자가 성령에 의해 하나로 되는고로 만약 악하고 불미한 생활에 의해서 전혀 예수그리스도와 만나고 싶지 않은 자까지 성찬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하는 일이 있을 경우 이것은 성찬의 모독이므로 여기서 수찬정지라는 징계와 훈련이 필요하다는 이유가 이야기되었던 것이다.
3) 예배시 시편의 찬송
시편의 찬송을 공식예배에 준비하여 제창토록 하였으며 모든 사람의 마음에 감동이 되도록 마음을 합하여 드리는 기도처럼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을 제창케 하는 것은 교회의 건덕을 위하여 매우 적절한 것이다 라는 교회 규정을 두었다.
4) 자녀교육
칼빈이 친히 집필한 "제네바 신앙교육 문답서"는 개혁파 교회에 대한 최고의 정신적 소산이며 어린 아동을 기독교의 교리로 교육하는 것은 항상 교회가 특별히 유의하여 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5) 혼인 개정
1561년 11월 13일 승인 공포된 50개 항목의 이 규정은 보호자 없이 결혼의 가능과 불가능에 관한 것, 혼인 취소의 이유, 약혼과 그 공포, 근친혼인의 금지, 이혼할 시 아내의 권리는 결코 남편의 권리와 평등하지 않다는 것 등이다.  그러나 사도의 증언에 의하면 의무는 상호적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제네바 시에서는 부인이 남편에게 대하여, 남편이 부인에게 대하여 사도의 증언과 상이한 처지에 있었다.  만일 남편에게서 간음의 죄상이 드러나 부인이 남편과 이혼할 것을 요구한다 해도 남편이 이혼을 거부하면 그 이혼이 성립되지 않았다.  만일 부인이 언쟁이 있을 경우 제소하는 규정이 있는점 등은 매우 흥미를 끌고 있다.
6) 장로회의 직제
4종류의 직제 인데 즉 목사, 교사, 장로, 집사의 직제이다.  가장 성경적이요 이상적 직제라고 볼 수 있다.  
   (1) 목사직
목사의 사역은 말씀 선포와 교화, 훈계, 권고, 성례의 집행 및 형제애적 교정의 실시에 있음을 말하였다.
   (2) 교사직
신학을 가르치는 직은 목사직에 아주 가깝다.  또한 교회의 통치에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교사의 교회적 지위는 아무것도 주어져 있지 않았다.
   (3) 장로직
장로는 1561년의 교회 헌법 규정에 의해서 시정 당국으로부터 노회(장로회)에 파송된 위원(총대)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이같은 장로직은 교권과 국권이 접촉하는데 해결될 수 있는 직제였다.  
    ① 장로의 직무: 교인의 생활을 감독하며 정로에서 벗어나 탈선한 자들을 친절하게 훈계하며, 필요에 따라서 형제애가 결핍되었을 때 징계를 하는데 있다.  
    ② 장로의 선출: 장로의 선출 수는 소의회(시의회) 2명, 60인회에서 4명, 2백인의회에서 6명 모두 12명을 선출하였다.  
    ③ 장로직의 임기: 1년이고 특별한 이유가 없는 경우에는 유임하는 것이었다.  목사와 장로는 당회를 구성하였다.  
   (4) 집사직
교회헌법 규정에도 초대교회에서 빈자를 구제하며 재산을 관리하는 직무와 병자를 돌보는 직무가 있었다.  집사는 평신도들 중에서 선출하였다.


3.  칼빈의 목회와 세속정치
1) 칼빈주의와 교회형태
칼빈주의와 장로주의를 동일한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으나 이들은 전혀 다른 것이다.  또한 칼빈을 장로회주의나 장로교회의 창설자로 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으나 장로교회의 창설자나 장로회주의의 창시자는 칼빈 이전 모세부터 그 기원을 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장로교회"라는 이름 또한 칼빈이 지은 것이 아니다.  장로교회는 칼빈이 죽은지 반세기가 지난 1620년경에 영국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그러나 16세기의 종교개혁자 칼빈만큼 장로교회적인 교회체제나 직제를 말한 개혁자가 없음으로 그를 장로회주의나 장로교회의 설립자로 보는 경향이 많다.  보다 구체적인 원리는 칼빈에게 영향을 받은 존 낙스와 스코틀랜드교회가 더 장로회주의적이었다. 스코틀랜드교회는 1천년 이상을 유지한 교황교회와 감독교회에서 장로회체제를 회복하여 사도당시의 사도교회를 재구축하였다.  즉, 사도교회가 회당체제의 장로회주의를 도입하여 당회와 노회와 대회와 총회 등 연속처리회의 의회제도인 장로회주의를 적용한 것을 영국 장로교회가 이를 다시 채택 확정하고 영어권과 더불어 세계성을 띠게 된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칼빈주의가 혹 장로회주의라는 주장은 옳지 않으며 칼빈은 오히려 우리에게 성경적인 테두리 안에서 보다 자유로운 교회형태를 가질 수 있는 길을 터주었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2) 칼빈주의와 세속정치
칼빈은 목사로서 한 교회에서 일하였거나 장로교회를 위한 체계적이거나 직제적인 개혁을 주장한 개혁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제네바시 개혁에 임한 개혁자로서 그는 의회 민주주의를 고수하면서 장로회주의에 입각한 의회주의를 적용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각종 의회에서 자기는 그 속에서 선출되지 않고 그 위에서 보내심을 받는 사도와 목사와 같은 입장을 취하였다.
그는 성경의 원리대로 사도를 부르시고 그 아래 장로들을 세워 사도들로부터 지도와 편달을 받아 전체를 다스렸던 것처럼 제네바시의 개혁을 위해서도 12장로들을 세웠다.  물론 교회에서 세운 것이 아니라 2인은 16인 의회에서 4인은 60인 의회에서 6인은 200인 의회에서 임명이 되었고 비준이 되었으며 이들의 업무와 권한은 1년직으로 정하여졌다.  그리고 시정아래에 종속이 되어 지도를 받게 하였다.  이들 12명의 장로들은 목사들의 연맹과 치리회를 함께 열었으나 칼빈이 의장이 되거나 목사가 사회자가 된 것이 아니라 시정 가운데 한사람이 사회를 보게 하였다.
3) 교회의 개혁업무
칼빈 당시 제네바에는 불과 1만여 명의 시민들밖에 살지 않았다.  그곳은 로마 교황청의 손길이 잘 닿지 않았다.  그곳이 산간 오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찍부터 발달한 상공업 덕분에 시민들은 경제적 안정과 함께 자유를 구가하는 도시였다.  그러다보니 종교적 자유를 찾아 피난 오는 사람들에겐 더없이 좋은 장소가 되었다.  제네바시는 유럽의 별 사람들이 다 모인 난잡한 도시이기도 했다.  1536년 5월 21일 칼빈이 제네바에 온지 두 달이 채 되지 않았을 때 그곳에서는 우상종교를 모두 버리고 경건하게 살기로 작정하는 총회가 열렸다.  그 결과 칼빈은 제네바 개혁의 칼자루를 쥐게 되었다.  그동안 교황과 교회법만 믿으면 되는 명목상의 교인들이 모두 개신교인으로 거듭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이는 세상의 개혁에 대한 책임이 교회에 있다고 생각한 칼빈의 의지의 결과이며 이러한 개혁의 의지를 그는 죽을 때까지 굽히지 아니하였다.
4. 칼빈과 교회제도 목사역할 문제
칼빈은 개혁자 가운데 가장 방대한 개혁신학을 저술한 자이다.  그는 제네바 교회보다 제네바시를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개혁한 개혁자로서 말년에 장로제를 실시한 것 등을 통틀어 칼빈주의라 한다.  그리고 칼빈은 목사나 장로교 교회에 일한 것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는 제네바시의 정치, 종교와 사회 개혁에 역점을 두었던 개혁자였다.  그런 칼빈을 한교회에서 목회하는 목사로 안수를 받았느냐 하는 이야기는 무모한 것이다.  그는 개혁자로서, 제네바시의 시정을 하는 통치자와 같은 위치에 있었다.
1) 칼빈과 장로제도
칼빈과 장로제도 에 있어서는 먼저 그의 [기독교강요]에 언급된 장로회주의에 관해 살펴보아야 한다.  칼빈은 제네바시에 오기 전 그가 26세 때 쓴 [기독교강요] 제4권 3자의 4항에서부터 교회의 체제론과 직제론을 언급하였다.
그가 언급한 교회론은 자기가 별도로 교회론을 주창한 것이 아니며 신약교회 또는 사도교회의 교회론을 회복한데 있다.  그 중요 부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3장 4항에서 칼빈은 바울의 에베소서 4장 11절을 가지고 사도와 선지자가 복음 전도자와 목사와 교사를 언급하였다.  앞부분의 세 직분은 주님 당시에 있었던 특별직이며 임시직인데 비하여 목사와 교사는 교회의 항상 불가분의 항존직으로 임하는 것이며 교사직은 공식으로 훈련이나 성레전을 집례하거나 교훈을 하거나 훈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성경을 해석하거나 가르치는 정도였고 복음의 깊은 교의적인 사역은 목사직이 하는 것이라 하였다.
3장 5항에서는, 주님의 교회를 치리하기 위하여 영속적으로 계속 임명되어야 할 직분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복음전도자보다는 목사직을 언급하였다.  그는 "우리의 목사는 사도와 꼭 닮을 것이며(For our pastors bear the same resemblance to the apostles)", "교회의 모든 목사들을 사도라 불러야 하는 이유는 그들은 모두가 주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주님의 사자들(All the ministers of the Church may be Called apostles, because they are all sent by the Lord, and His messengers)이기 때문"이라 하였다.
3장 6항에서는 사도인 목사가 해야 할 사명은 사도의 사명임을 천명하였다.  사도들의 사명은 무엇보다도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주며 성만찬을 집례하고 죄사하는 일을 하게 하는 것을 강조하였다.
3장 7항에서는 목사들이 사명을 감당하는데 있어서 보조사(Assistants)를 필요로 하였는데, 바울과 바나바와 디도 등이 장로들을 세웠고(행 14:21, 23 ; 딛 1:5 ; 엡 20:17), 감독들을 세웠고(빌 1:1 ; 골 4:17), 나아가 집사도 세운 사도교회의 모습을 언급하였다.  이것이 칼빈의 교회론이었다.
2) 칼빈은 감독교회론도 찬성
칼빈의 교회관은 사도교회를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폴란드 쪽에서 교회 체제론에 대한 자문이 왔을 때 감독교회(Episcopal Church)도 성경적이라며 찬성한 경우도 있었다.  사도교회에서는 사도들이 장로직을 세웠을 뿐 아니라 감독직도 세웠기 때문이었다.  감독직은 바울 라인에서 세운 직분인데 바울이 성전교회와 회당종교에서 결별을 하고 교회종교를 시작하면서 성전종교와 회당종교에서 떠나 독자노선을 걸으며 장로직보다는 감독직을 세운 것이다.
이것이 신약교회이며 사도교회이나 이는 곧 바울 노선의 교회였다.  즉 장로교회는 사도 아래 장로직을 두는 교회를 말하나 감독교회는 사도 아래 장로가 아닌 감독직을 두는 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1) 장로회주의는 칼빈주의와는 다른 것
칼빈주의는 칼빈의 신학사상이나 개혁사상을 말하는 것이며, 장로회주의는 신학이나 사상이 아닌 교회의 정치체제나 직제나 제의제도나 의회제도나 치리제도의 원리와 원칙을 말하는 것이다.
원래 장로주의는 기원전 2천여년부터 시리아나 이집트나 그리이스나 로마의 원로회 제도(Presbytery System 또는 Senate System)에 그 기원을 둔다.  그러나 성경적으로는 모세시대의 출애굽과 함께 실시된 장로회제도에서 비롯된다.  특히 모세의 "70인의 장로들(출 24:1, 9 ; 민 11:16)"울 중심한 의회제도가 이스라엘의 70인 의회, 곧 산헤드린 공회 또는 예루살렘 산헤드린 의회로 발전이 되었다. 성경은 장로들의 지도체제하의 교회제도가 이미 구약시대부터 있었고 초대교회에서도 시행되어 온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산헤드린 공회는 장로들만이 아닌 24 제사장들과 24 장로들과 24 서기관원들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에 유의하여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 산헤드린 공회는 반드시 당시의 대제사장의 직권으로 의장이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한다.  이스라엘의 최고회의인 산헤드린 의회에서는 의장을 의회에서 선출하지 않았고 대제사장이 직권으로 의장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예루살렘 산헤드린 공회는 산하에 지방노회를 두었고 이 지방노회 아래는 전국의 회당(Synagogues)이 종속되어 있었다.  이것은 당회나 노회나 대회나 총회제도나 다름이 없다.  이런 대의제도나 의회제도의 조직과 운영과 활동과 관리 등의 원리를 장로회주의(長老會主義)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오늘의 지방법원과 고등법원과 대법원제도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사도교회 이후의 로마교회는 교황직과 감독직 등으로 교회의 직책과 체제를 바꾸고 장로직과 집사직은 모두 감독직 아래로 종속을 시켰으나, 개혁자들은 그런 로마교회에 항거하여 사도교회의 것을 회복하였다.  그러면서 목사와 장로와 집사직을 항존시키며 당회와 노회와 총회제도로, 교회를 치리회로 하는 장로회주의의 장로교회를 세운 것이다.
칼빈에 영향을 입은 죤 낙스에 의하여 스코틀랜드교회로 들어간 칼빈주의는 보다 장로주의 쪽으로 발전하였다.  감독체제의 교회라도 상관이 없다는 칼빈 보다는 교황체제는 물론 감독체제를 완전히 배제하고 장로직이 목사를 보필하는 장로회주의로 정착이 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어서 잉글란드가 정치적으로 왕정이냐, 의회제도이냐를 놓고 심한 갈등을 하며 웨스트민스터에서 열린 역사적인 총회(1643∼48)에서 스코틀랜드교회가 장로회주의의 헌장을 초안하게 된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헌장은 신앙고백과 대 소요리문답과 장로교회체제의 교회헌장과 예배모범과 권징을 설정한 것이다.
   (2) 현재의 장로직제는 한국만의 것
장로교회는 성직자들의 교권지상(敎權至上)에 항거하여 개혁한 교회이지 또 다른 성직자들의 교회를 위하여 개혁한 교회가 아니다.  장로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와 그의 사도들의 교회를 회복하되 장로회체제의 교회여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장로교회가 한국에 들어와서는 매우 기이한 현상을 창출하고 있다.  '목사도 장로'며 '장로도 성직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목사와 장로는 같은 안수를 받은 자이며 목사와 장로는 헌법에 동등직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설교도, 축도도, 당회장도, 노회장도, 총회장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장로교회는 교회가 대의정치와 의회정치를 하는 교회를 말하나 반드시 당회와 노회와 총회를 통하여 입법과 사법과 행정과 정치를 하는 교회를 말한다.  그러므로 당회나 교회나 총회 그 밖에는 어떠한 기구나 기관이라도 교단의 입법이나 사법이나 행정이나 목회에는 관여를 하거나 간섭을 할 수 없게 되어 있는 교회를 말한다.
장로교회는 정당정치를 하는 교회가 아니며 공화정치를 하는 교회가 아니다.  장로교회는 목사당이나 장로당이나 집사당으로 작당을 하여 정견(政見)으로 교회나 노회나 총회에서 정당정치를 하는 교회가 아닌 것이다.  또한 장로교회는 당회장이나 노회장이나 총회장을 교회의 통치자들로 여기어 교인들이나 제직들이나 장로들이 주권자가 되어 그들을 선출하는 교회가 아니다.  교회의 주인은 교인들이나 장로들이 아니라 주님이시라는 데서부터 시작된 것이 장로교회이다.
장로직은 이미 자기 직업을 교회 밖에서 가진 자들이다.  장로직은 교회의 직업직이 아니며 전문적이 아니다.  대외적이고 의회적이며 치리적인 것이다.  장로직은 세상직이 아닌 교회의 성직이나 성직자는 아닌 것이다.  장로는 교회에서 성도들이 자기들을 대신해 참정직으로 뽑아 줄 때 대의직을 수행하며, 목사와 함께 각종 의회를 구성하여 치리를 하거나 정치를 하는 의회직이나 비상근(非常勤)으로 정시제(Part Time)로 봉사하며 임기제로 봉사하는 직분을 말한다.
한국적 장로교회론은 결코 성경적이지 못한 것으로서 세계 어느나라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오늘의 한국 장로교회는 칼빈주의도 장로회주의도 영국 장로교회도           미국 장로교회도 아닌 한국의 장로교회론이 되어 있다.  침례교회나          회중교회나 감리교회에서도 장로직을 세우는 한국교회이다.  이렇게          한국교회는 장로 만능주의에 있다.  이는 성경적이지 못한 교회인 것          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교단의 지도자들과 교단 신학교의 책임자들          이 장로교회론의 원리를 모르는 탓이며, 무시한 탓이며, 장로들의 세          력을 무서워 한 탓이다.  한국 장로 교회는 개혁되지 않으면 안되며          교단 총회의 교육부나 신학교에서 장로교회론을 바로 교육하지 않으          면 안될 때가 온 것이다.
3) 목사 역할 문제
한국 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신앙고백이나 요리문답, 예배모범, 권징은 알아도 '장로회체제의 교회정치'는 잘 모르고 있다.  왜냐하면 한국 장로교회는 미국 장로교회의 헌법을 그대로 도입을 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 장로교회도 웨스트민스터 헌장을 도입하였으나 2백년 뒤에는 미국 장로교회가 자기들의 구미에 맞게 헌법을 개정한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잘 모르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헌장의 장로회 체제의 헌장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직제론을 열거하여 보기로 한다.
"교회의 공직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의 독성 함양과 성도들의 완성을 위하여 임명하셨다.  그러나 사도들(Apostles)이나 전도자들(Evangelists)이나 선지자들은 임시직으로 끝이 났다.  항존직이며 영속적인 공직자들은 목사들과 교사들과 치리자와 집사직이다.
이상과 같은 웨스트민스터 헌장이 한국 장로교회에 도입이 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아 있다.  한국 장로교회가 도입한 미국 장로교회의 헌법에는 웨스트민스터 헌장과는 전혀 다른 '두 종류의 장로직'에서 목사직이 파생된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칼빈은 거의 독학으로 [기독교강요]를 쓴 사람이었다.  그런데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칼빈이 주해한 직제에 관하여 질의가 나왔다.  그것은 디모데전서 5장 17절이었다.  이 본문에서는 "잘 다스리는 자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로 되어 있는데 이를 칼빈은 이 본문 주해에서 아마도 그 당시에 '두 종류의 장로"가 있었지 않았나 하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는 칼빈이 주해한 디모데전서 5장 17절의 '두 종류의 장로설'은 거절되었다.  칼빈의 주해를 볼때, 바울 당시에 두 종류의 장로가 있었는데 한 종류의 장로는 이른바 "치리장로"였고 다른 종류의 장로는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장로"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는 이런 '두 종류의 장로설'을 일축하며 디모데에게 편지를 쓴 바울은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보다 더 존경할 자로 알아야 할 자들은 말씀을 전하고 교리를 가르치는 이들인데, 그들은 장로가 아니라 바울이나 디도나 실라나 유다나 마가나 요한 등의 목사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는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의 헬라어 '호이 코피온데스'는 단순히 수고하는 이들이 아닌 육체적으로 중노동을 하고 노임을 받거나 임금을 받는 자들에게 사용하는 말로서 디모데전서를 쓸 바울 당시의 장로들 가운데 말씀 사역을 사례비나 임금을 받아가며 할 정도로 장로제도가 되어 있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즉 바울이 이런 편지를 쓸 당시는 교회가 불과 열 손가락 안팎이었고 교인도 불과 몇 명밖에 안되는 개척당시의 교회에 이렇다할 장로의 존재가 불가능한 시점에 이미 "두 종류의 장로제도"가 있었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웨스트민스터 헌장이 채택된 지 200여년이 지난 1830∼40년에 이르러 미국 장로교회에서 '두 종류의 장로직'이 크게 대두가 되었다.  그리고 어처구니 없는 것은 역시 디모데전서 5장 17절에 근거하여 목사직도 이 두 종류의 장로직 가운데 하나로서 곧 가르치는 장로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비로소 교회사에서 장로임직에 안수가 있었고 목사 임직에 장로가 가담하였다.  그리고 그후 장로가 노회장이 되기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목사 임직에는 장로가 가담할 소관이 아니라며 장로는 삼가하였고 장로직의 강화로 오는 부작용을 막기 위하여 '장로 임기제'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장로 안수와 장로가 목사 안수에 가담을 하는 문제 때문에 결국 미국 장로교회는 공식적으로 1879년 미북장로교와 남장로교로 갈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 갈라진 미국 장로교회가 1986년에 다시 합하여 그들 헌법에 많은 수정이 있었다.  '가르치는 장로'와 '치리하는 장로'라는 말을 삭제하고 "말씀사역자들과 성례와 장로들"이라 하였다.  그리고 미국헌법에서는 전부터 항존직이란 말도 삭제하였고, 이제는 목사직이 장로직에서 파생된 것으로는 언급치 않으며 목사와 장로로 표기하고 있다.


Ⅵ.독립교회에 대한 일반적 이해



    독립교회라는 명칭이나 이에 대한 이해가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 장에서 독립교회는 어떤 성경적, 신학적,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는지 살펴보고 한국내 독립교회의 상황을 분석하는 기초로 삼고자 한다.


1. 성경신학적 교회론
한국교회는 날이 갈수록 중세로 돌아가 Roman Catholic 교회를 닮아 가는 듯한 인상을 점점 강하게 풍긴다.  한 교회나 한 교역자가 특정한 교단에 소속되는 것이 중시되거나, 한 신자(信者)가 어떤 특정한 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도 이러한 조짐이라 할 수 있다.  성경위주의 신앙생활이 아니라 특수한 신학사상 중심의 신앙생활로 변모해 간다.  장소로서의 교회, 건물로서의 교회가 강조되고 있다.  직무중심의 교역자 상이 퇴조하고 한 인간이 신성시되며 그의 권한이 거룩한 위력을 발휘하는 듯이 행동하는 예를 자주 보게 된다.  교회는 보이지 않는 고유의 힘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공동체, 그 구조, 조직에 의해 유지되는 것 같다.  특히 조직으로서의 교회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며 스스로 군림하기도 하고 세속적인 세력과 자주 야합하기도 하며 어마어마한 힘을 마구 이곳 저곳에 뿌리고 돌아다닌다.  이 구조는 또 스스로 굴러가며 개인의 특성과 자유,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통제, 억압하기도 한다.  정치력이, 금력과 권력이 어느 틈엔가 교회에 밀려와 떠나지 않고 교회를 지배하고 있다.  공리주의적 사고 방식이 교회에 팽배해 있다.  역사의 흐름은 어차피 이렇게 이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흐름을 아무도 막을 수 없고, 또 무엇으로도 방해할 수 없을찌라도, 억지로 시발점으로 돌아가 보는 것은 우리 시대를 이해하는데 약간의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용기만 있다면 물길을 잡아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상의 과제와 병행하여 적절한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신학적 연구의 출발점은 항상 언어, 문법적 고찰임은 자명하다.  우리에게 이것은 신약성경에 사용된 에클레시아란 단어를 찾고 그것이 사용된 문맥과 그 배경을 따져 에클레시아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또 칠십인경(LXX)에서 이 단어가 주로 '카할(   )'이나 '에다(   )'의 번역어 임을 확인하고 이 두 단어의 문맥과 배경을 살피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과정으로 말해진다.  교회론은 또 통상적으로 신.구약성경 모두를 통하여 동일한 방법으로 설명해 낼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한 단어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전혀 다른 개념으로 사용될 수도 있고, 전혀 다른 요소를 내포할 수도 있다.  'E       가 비록 LXX에서 '카할'의 번역어로 사용되었다 하더라도 에클레시아와 '카할'을 동일시해서는 안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는 개념은 일단 교회의 존재를 예상하고 그것이 과연 어떤 성질을 가졌고 어떤 역할을 하는가를 보여준다.  
이에 대한 답변을 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의문점들이 우선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  첫째, 어디를 교회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하는가?  둘째, 이 출발점에 이르는 필수적인 경과 과정이 있는가?   셋째, 이 교회는 구약성경과 (혹은 구약 공동체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
교회란 용어가 여러 가지 의미로 일정한 지역의 지 교회나 교파 교회나 기독교 전체 혹은 신자들이 예배를 위해 회집하는 건물 등에 사용되는 바 교회론은 구속받은 성도들이 서로 교통하는 교회의 단체적 종교 생활을 지도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대신하는 곳이다.  이로 인해 교회는 그리스도와 그 안에 있는 구원의 축복들에 참여하는 자들로 구성이 되어 있는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사역에 의해 사람들을 그 자신에게 연합시키며 성도에게 참된 신앙을 주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것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不可見的 敎會(불가견적 교회)를 두고 말하는 것이지만 캐톨릭 神學(신학)에서는 可見的 敎會(가견적 교회)를 지칭하고 있다.  
그 주장은 "우리를 교회로 인도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며 교회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하신다.  더욱이 교회는 모든 초자연적인 은혜의 분배자이다." 라고 언급하고 있다.  저들의 강조점은 성도의 교통으로서의 무형교회가 아니라 성도의 어머니로서의 유형교회에 있는 것이다.  
종교개혁은 이 로마 교회의 교회관을 깨뜨려 버리고 다시 한번 영적인 유기체로서의 교회에 주의를 집중하였다.  그리고 이 종교개혁은 그리스도의 구속적인 사역과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활동을 떠나서는 교회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교회의 본질은 언제나 역사적 형태 안에서 보아야 하고 역사적 형태는 항상 본질을 출발점과 목표로 해서 이해해야한다. 특히 교회의 설립은 예수께서 친히 예언하셨고 (마 16;18) 그 예언은 오순절에서 실현되었으나 교회의 감추어진 비밀은 바울을 통해 계시되었다.  교회라는 낱말만도 바울서신에 60회 이상 나타났으며 바울서신 중에도 고린도 전서는 실제적이고 기능적이며, 은사적인 몸인 교회의 입장에서 취급하고 있다.
당연히 교회의 뿌리는 구약에서 찾아야 한다.  믿음의 조상 아브람의 선택받은 교회, 출애굽의 광야교회(행 7;38), 아브람 후손의 민족교회 등, 그러나 이는 다 옛 언약에 의한 성전제도하에 제사를 드렸던 모형과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다.(히 8;5)
그러나 신약교회는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친히 교회의 머리로 도성인신 하셔서 땅위에 오셨고 또 그 주님으로 인해 물과 피로 거듭난 주의 백성들이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지체를 형성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관,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의 교회관을 살펴보고자 한다.


1) 하나님 나라와 교회
"하나님 나라가 이땅에 임하옵시며"라는 기도는 예수님의 선포요 사역의 핵심이며 아울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이요 또한 기도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친히 가르치신 기도에서 이것을 강조하셨다.
예수님께서 공생애에 들어가시면서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신 후 세레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그리고 처음으로 선포하신 말씀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말씀이었던 것이다 실로 예수님의 메시지, 그리고 그분의 삶 전체는 이 땅위에 하나님 나라의 기초를 놓는 것이었다.
즉 교회의 지상에서의 선교적 사명은 하나님나라 실현이란 말이다.
이럴 때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 그리고 교회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 땅위에 태어나고 부름받아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기위해 살아야하고 도한 이를 위해 충성과 헌신을 다해야 할 것이다.
   (1) 하나님 나라의 건설
이 최고의 목적 즉 이 땅 위에 하나님 나라를 회복시키기 위해 주님은 이 땅에 성육신 하셨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교회를 탄생시켜 그 나라의 초석을 놓으셨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성숙을 위해 세우신 역사적 교회이며 하나님의 경륜 속에 일어서고 부흥한 하나님의 도구인 것이다.  한국교회의 성장원인에는 교회 내적인 요인보다도 교회 외적 환경적 요인들이 더 크게 작용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는 것이다.  한국을 이러한 상황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경륜을 우리는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마태복음 13장에서 말씀하신 천국 비유 중 "천국은 마치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리러 나가는 것과 같은 것" 인데 모든 교회성장에는 복음의 씨앗 뿌리는 일과 아울러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기에 합당한 좋을 토양이 되도록 하는 일은 하나님께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역교회는 씨를 뿌리기에 앞서 자신이 속해있는 지역의 특성을 먼저 이해하고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교회란 일정한 지역이라는 토양 위에 한 그루의 나무와 같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젠킨스(D. T. Jenkins)의 말대로 복음이 선포되고 있는 오늘의 상황을 그 속에서부터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이 삶의 상황에서 종교적 도덕적 및 지적 배경의 전체로 이해하도록 해야 한다.
  
   (2) 하나님 나라의 이해
사복음서 중 요한복음을 제외한 공간복음서에서 일관되게 주장하는 예수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나라" 였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외침과 삶이 "하나님 나라" 였던 것이다.  
그런데 마태는 그것을 "천국"이라고 했고(The Kingdom of Heaven) 누가는 "하나님의 나라" 라고 했다.(The Kingdom of God) 예수께서 일관되게 가르쳤던 마태의 "천국"이던 누가의 "하나님의 나라"이던 그것이 예수님의 주된 관심사였음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그러면 제자들이 주장하던 "그 나라"는 무엇인가?
첫째, 이 나라는 이미 구약에 예언된 나라였다. 다니엘은 영원히 망하지 않는 한 나라가 설 것이라고 예언했다.(단 2:44) 그것은 인자의 한 나라이다.(단 7:13. 14) 성도가 장차 갖게될 나라이며(단 7:18. 22), 종말적인 전쟁을 수행할 것이며(단 7:23. 25), 궁극적으로 승리가 보장된 나라이다.(단 7:26. 28)
둘째, 이 나라는 이미 다윗에게 계시되었고 솔로몬에게 확증된 것이다.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려고 나단에게 말했을 때 (삼상 7:13) 우리가 흔히 "나단의 신탁"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다윗이 성전을 지으려 했으나 솔로몬이 지었다.  그러나 성전은 앗수르와 바벨론의 침략으로 무너졌다.  이로서 나단의 신탁은 솔로몬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 메시아를 지칭한 것이라는 소망이 생겼다. 이 약속에 따라 예수가 오셨으니 곧 예수님이 성전이요 교회의 기초이신 것이다.  
2) 교회의 본질과 사명
하나님 나라의 개념 이해와 교회의 사명, 교회의 성장을 이해하려면 성전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유대교에 있어 '우주'라는 추상명사는 없다.  단지 하나님 창조의 두 부분은 하늘과 땅이다.  하늘은 하나님의 거처이고 땅은 사람의 거처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땅에 거처를 둔다면 그곳이 성전인 것이다.  그래서 성전은 하늘과 땅, 즉 우주의 두 부분을 연결하는 기능, 다시 말해 땅에서 하늘로 들어가는 관문 역할을 하는 곳이다.  그래서 성전에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다.  이 보좌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의 복사이다.  그래서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 거처의 모조품이 지상에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이다.  이 때문에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는 표현을 제일 많이 사용하신 것이다.  
들어간다 라는 것도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의 장소의 뉘앙스를 가지고 있음을 시사하지만 그것과 더불어 대문(마 7:13; 눅 13:24)" '문(눅 13:24)' '열쇠(마 16:19, 23:139, 눅 11:52)' 등의 그림언어들을 쓴 것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집'으로 상징하는 것과 연관하며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흔히 쓴 '잔치'의 그림언어를 생각하여야 한다.  이런 모든 것을 감안할 때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적어도 일면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이 '아버지'로 '잔치'를 베풀고 그의 백성, 자녀들이 '대문'의 '문'을 열고 그의 '집'의 '방(요 14:2)' 으로 '들어가' 그 '잔치'에 참여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성전을 부수고 새로운 성전을 짖겠다고 주장했다는 이유로, 그 죄목(막 14:58)과 메시아 곧-다윗의 아들/하나님의 아들로서 유대인의 왕이라 주장했다는 죄목으로 기소되어 로마총독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성전으로 인식했을 뿐 아니라 그 성전을 구체적으로 자신이 세울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로 보았다.  예수는 실제로 새로운 성전을 짖겠다고 한 것이다.  마 16:13∼19에 있는 예수의 교회건설에 대한 말씀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 대로라면 성전이 원래 가지고 있는 의미인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집은 이제 교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안에서 또는 예수를 통해서 실제화 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종말의 하나님 나라와 구원을 역사속으로 들여온 분이라고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곧 바로 예수의 성전되심을 완성시키는 것으로서 예수의 죽음이 새 언약을 세우는 제사로서의 의미를 갖는다면 부활은 이러한 예수의 제사가 하나님의 인정하심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했지만 제자들은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을 선포한 것이다.  예수의 구원의 사업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대권자로 높임을 받는 '주'라는 신앙고백과 케뤼그마가 발생한 것이다.  예수 안에 이렇게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이 온 인류를 위해 이루어졌다는 소식이 곧 "복음"이다.  그러므로 이 복음을 듣고 모여진 사람들, 즉 세상에서 불려나온 사람들이 교회('E       )인 것이다.  이 교회란 말은 주님께서 쓰신 말이다.(마 16:16이하) 곧 이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싹이요, 눈인 것이다.  이때 교회는 복음전도와 성장이라는 사명을 가지게 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그의 제자들에게 맡기신 우선적 임무는 복음 전파이다(막 16:15, 눅 24:45∼47, 행 1:8).  하나님의 목적은 택함받은 자들의 단체가 계속 불어나 궁극적으로는 그 數(수)가 다 차게 됨이다.  이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교회는 "복음을 전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처음에는 이 명령이 열한 제자에게만 주어졌지만 그 후에 제자들의 더 큰 무리에게 주어졌고 그리하여 전 교회가 곳곳에 흩어진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야하는 이 하나님께로서 온 임무에 다같이 참여하게 되어진 것이다.  福音(복음)은 하나님께로 났으나 화해의 사역과 메시지는 둘 다 人間(인간)에게 맡기셨다(고후 5:18∼20).  하나님의 대속받은 백성들의 첫째 임무가 예배하는 것이라면 둘째 임무는 증거이다(벧전 2:9).  어떤 교회도 그리스도의 택함받은 도구로서 그 위치한 지역에서 그의 이름을 나타내고 그의 메시지를 전파해야 할 이 하나님이 주신 책임을 회피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이 그 사회에서 소금으로 방부제역활을 하여야한다고 하시고 동시에 어두운 세상에서 빛이 되어야하며 거룩한 소명 때문에 산 위에 동리로 숨지 못하고 도리어 본이 되어야함을 말씀 하셨다(마 5:13∼16).  교회는 지상교회와 천상교회로 지상에 있는 교회는 계속적으로 흑암의 권세와 싸워야하기 때문에 전투적인 교회라 불리울 수 있다(엡 6:10∼17).  이와 반면 천상교회는 전쟁을 끝냈으므로 승리한 교회로 불리울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제림하시고 택함받은 자의 수가 차고 모든 신자가 재연합 될 때에야 교회는 그 목적의 완전한 성취를 누릴 것이다.  바로 그때에야 교회가 온전히 순결할 것인데 이는 나쁜 것이 좋은 것으로부터 분리되고 거짓된 것이 참된 것으로부터 분리될 것이기 때문이다(마 13:39, 41, 42, 47∼50, 24:31).  바로 그때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들의 영광스런 부활과 변화에 몸을 받아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고 (고전 15:20∼23, 51∼54, 살전 4:6, 시 103:5)  여기에서 이십사 장로와 하늘에 천군 천사들과 함께 세세에 살아계신 성삼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계 4:10∼11, 5:9, 12, 13).
3) 교회의 형태와 정치
오늘의 한국장로교회는 양적으로는 단연 세계적이다.  그러나 한국 장로교회가 과연 성경적이며 역사적인 장로교회인가 하는 데 의문이 간다.  오늘의 장로교회는 심각한 문제점들을 안고있는 교회가 되었다.
한국의 장로교회론은 칼빈주의나 장로회주의나 웨스트민스터 헌장이나 미국장로교회의 헌법과는 거리가 먼 한국적인 장로교회론이다.  이는 주체성이나 정체성이 있는 한국 장로교회론이 아니라 변질된 교회론이다.  그 중에 중요한 몇 가지만 언급하여 보고자 한다.
한 세기 동안의 한국 장로교회는 매우 특수한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한국장로교회는 교황교회나 감독교회에서 개혁된 장로교회가 아니라 유교적 관료주의와 불교적 극락주의와 일본의 군국주의와 식민주의에서 수난을 받았으며 이어서 공산주의와 군정치하와 사회주의와 각종 이데올로기에서 장로교회의 본분을 지키기보다는 성장일변도 위주의 교회였다.  그런 와중에서 한국장로교회는 민주적인 교육과 훈련 없이 장로회 주의가 오용되어진 것이다.
당회와 제직회와 공동의회는 물론 노회와 총회에서도 장로회체제의 원리와 원칙보다는 서로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고 대결하는 때가 많았다.  특히 교회가 성장하면 장로부터 세워야 하는 것이었고 그러므로 장로는 교회마다 많이 늘어났다.  한국장로교회는 고위성직제를 방불케하는 "장로들의 교회"를 이루었다.
그러나 한국 장로교회는 장로들이 해야할 교회의 정치적, 사법적, 행정적, 입법적, 대의적, 의회적인 본분과 사명에 대해서는 교육과 훈련을 공식적으로 전무하다 시피 하였다.  왜냐하면 그런 한국적 장로교회론을 비판하거나 근본적인 원리의 교제를 쓰거나 세미나를 하거나 교육프로그램을 실시하지 못하고 신학교에서도 그렇게 하지를 못했다.  
그리고 한국 장로교회의 대부분의 장로들은 교회를 자기들의 전문업처럼 여기며 주주적(株主的)인 사고방식으로 교회와 목사를 대하고, 그들이 교회의 주권자처럼 교회와 목사를 대하였다.
그러므로 칼빈주의가 곧 장로회주의라고 생각하는 것은 크나큰 모순이다.  오히려 칼빈은 로마교황정치의 폐단을 피하기 위해 당시의 시민 민주주의 체제를 교회에 도입하려 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칼빈주의에 공감한 자들은 스위스의 시민들이었으며 프랑스의 휴그노, 스코틀랜드의 프레비테리안, 화란의 씨 베거스, 잉글랜드의 퓨리탄, 미국의 뱁티스트, 그리고 폴란드, 항거리, 독일 일부의 리폼드처치 였다.  엄하고 율법적이며 경건을 겸비한 칼빈주의는 19세기까지 확장되어 갔다.
특히 화란의 아브라함 카이퍼와 헤르만 바빙크와 프랑스의 아우그스트 르셀프, 미국에서는A.A 핫지와 챨스 핫지, 워필드 등으로 그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리고 칼빈주의가 영국 웨일즈에서도 칼빈주의적인 메도디즘으로 번창한 경우도 있었다.  한편 세계 장로교회는 '세계장로교회연맹'을 창설하였는데 그후 1875년 이것을 '세계개혁교회연맹'으로 발전시켰다.  꼭 장로교회가 아니어도 장로회체제나 대의제도나 의회제도를 실시하는 개혁교회라면 교파에 상관없이 세계의 민주화를 위하여 기여할 수 있는 연맹에 가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세계장로교회연맹과 세계개혁교회연맹은 교회뿐 아니라 온 교회가 정치적으로 행정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대의제도와 의회제도를 실시하는 민주적인 사회를 지향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것이 또한 세계교회협의회의 모체가 되기도 하였다.  
이로 보건데 칼빈의 교회정치론은 보다 민주적이었고, 민주적이라 함은 대의제도와 의회제도를 지향했다고 봄이 타당하다 하겠다.  
2. 칼빈주의적 교회론
옛 언약에서나 새 언약하에서나 항상 이 세상에는 하나님께 성별된 가시적인 사람들이 존재해왔다.  구약시대에는 이 사람들이 이스라엘 민족이었으나 신약에 와서는 교회가 "새 이스라엘"이 된다.  옛 언약 하에서는 할례와 유월절이 외형적 표시인 반면에 신약에 와서는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베푸는 세례와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교회의 지체된 외형적 표시가 된다. 예수께서 선택한 새 공동 사회의 첫 구성원들은 제자들이었다 그들은 새 이스라엘의 핵심이었다 주께서는 그의 윤리적 교훈을 그들에게 가르치셨고 그 자신의 메시야 되심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그들에게 제시하였다.  여기에서 오순절 사건으로 신자된 자들이 이 새 공동사회의 일원으로 불어났던 것이다.  한 사람을 기독교 공동체의 일원으로 만드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며 세례 때에 그가 고백함으로 분명하게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자일지라도 반드시 하나님과 산 교제를 가진다고 볼 수는 없다.  개혁자들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부름받은 선택된 많은 사람들로 구성된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비 가시적교회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공언하는 전 세계에 존재하는 가시적교회 사이에 분명한 구별을 두었다.  주님의 교훈과 신약성경 전반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하나님 백성들의 가치적 공동체는 그 구성원 전체가 온전히 순수한 것이 아니고 불순한 것과 섞였다는 것이다.  복음의 초청에도 모든 사람이 다 순응하여 진실한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마 13:47∼49, 22:9∼14) 주님은 단순히 자기를 인정한다거나 자기 사역에 참여하는 것만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진실하고 근본적인 수납이 된다는 보증을 하시지 않았다.  (마 7:21∼23, 눅 13:23∼30) 최후의 심판에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자기 백성이 누구인가를 아신다.  가시적 교회는 가능한 한도까지 그 회원들 전체가 진실한 신자가 되도록 불가시적 교회의 안정성을 깨달아 알고 있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1) 칼빈주의적 교회론 이해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4권에서 교회론을 다루고 있다.  칼빈은 당시 종교개혁을 비방하는 무리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로마 카톨릭교회의 우상 숭배를 멀리하고, 또 한편으로는 열광주의자들의 잘못도 염두에 두고 그의 교회론을 전개해 나갔다.
   (1) 칼빈은 먼저 교회를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기관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의  기독교강요 제4권 1장의 시작부분에서 교회의 필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앞 책에서 설명한대로, 그리스도가 우리의 것이 되는 것과, 또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져온 구원과 영원한 축복에 참여자가 되는 것         은 복음을 믿는 신앙으로 말미암는다.  그러나 우리의 무지와 태만으         로 인하여(나는 이것들 외에 마음의 허망을 하나더 첨가한다.), 우리          안에 신앙을 일으키고 증진시켜 또한 그 목적지까지 나아가기 위해 우         리가 외부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을 채워줄         수 있는 이러한 도움을 하나더 마련해 주신 것이다.    
칼빈은 교회의 설립을 사람의 일로 돌리지 아니하고, 우리 인간의 약함 때문에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기관임을 말하고 있다.  칼빈은 계속하여 교회 설립의 필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또한 복음의 설교가 넘쳐나기 위해 하나님은 교회안에 이 보물을 위          탁하셨다.  하나님은 "목사와 교사"(엡 4:11)를 제정하시고, 그들의 입          술을 통하여 자기 백성을 가르치시고, 그들의 권위로 옷입히시고, 마          침내 신앙의 거룩한 일치와 바른 질서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어느           것 하나라도 빠트리지 않으셨다.
칼빈은 이 땅에서 교회가 신자들의 어머니로서 가지는 역할에 대해 강조하고, 동시에 교회를 통해 자기백성을 모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지적했다.
    하나님은 그 [교회의] 품안에 자기 자녀들을 모으기를 기뻐하시며, 저          들이 어린 아이로 있을 동안 교회의 도움과 목회로 말미암아 성장할          뿐만 아니라, 저들이 어른이 되고 마침내 신앙의 목적지에 도달할 때          까지 그 어머니 같은 돌보심으로 말미암아 저들은 인도함을 받게 된          다.    

   (2) 칼빈은 또한 바로 이 교회 안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하는 사역자들을 두셨으며, 이들이 멸시를 받지 말아야 할 것을 말하고, 또한 교회교육의 가치와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본 주제에 관련된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바울이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충만케 하기 위하여,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엡 4:10-13)라고 하였다.  한순간에라도 자기백성을 온전케 하실 수 있으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저들이 오직 교회의 교육을 받고 성인으로 자라나기를 바라고 계신지 우리는 알게된다.  이를 위해 방편을 세우셨으니, 곧 천상교리의 설교가 목사들에게 부과되어 졌다.
(3) 칼빈은 또한 교회가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기관으로 이 땅위에서 성도의 교통의 장소로서의 막중한 역할을 강조했다.
칼빈은 먼저 교회의 본질을 성도의 교통에서 찾는다.  그는 기독교 강요 제4권에서 교회의 본질을 다루고 있다.  사도신경에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는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들로 이들이 형제로 하나가 되며 또한 교회의 정당한 권위를 승인 해야한다는, 간단히 말해서 우리각자가 양무리에 속한 한 마리의 양같이 행동해야 한다는 점에서 가견적 교회에도 어느정도 적용된다. 교회의 일치와 순결을 위한 칼빈의 열심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교회의 제도에 대항하여 기존교회의 하나됨을 파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참 교회를 재정립 하자했다.  그는 참교회의 표지로서, 설교된 말씀과 귀로 듣는 말씀 외에 그리스도께서 제정하는 성례의 바른 시행을 말했다. 그리고 이러한 표지가 보이지 아니하고 성례가 올바르게 시행되지 않는 곳에는 반드시 교회의 파괴가 뒤따를 뿐이라고 말했다.
칼빈이 교회를 성도의 교통으로 말한 것은, 그가 불가시적 교회만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고, 사실 불가시적 교회를 교회의 두 표지와 연결시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그는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교회는 존재해 왔으며……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우편에서 다스리시는 한 그의 교회는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나타나 보이는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데도 교회의 형태가 늘 나타나 보인다는 점은 이율배반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외적인 화사함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이미 말한바와 같이 말씀과 성례의 두 표지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칼빈은 다시 가견 교회를 보편적인 교회와 개별적 교회로 구분하고, 이 경우 보편적 교회는 공간적으로 나뉘어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참된 교회에 동의하고 같은 신앙의 매는 줄로 뭉쳐있는 교회"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보편적인 교회는 개교회들이 상호관계 속에서 철저하게 교회의 표지를 지향하는 데서 도모될 수 있다고 보았다.
칼빈은 교회들 사이에 비본질적인 요소 때문에 분리하고 반목하는 일을 금지하고 교회의 평화와 일치를 추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세르벳이 "우리의 모든 종교적 원리를 근원부터 전복시키는 자"라고 말했다.
또한 삼위일체를 반대했던 마태오 그리발디에 대해서도 "우리의 가장 중요한 신앙의 원리를 파괴하는 자"라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성도의 교통이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의 교통이요 교제였다.  그리고 기독교의 가르침에는 비본질적인 요소가 있으나, 본질적인 또한 근본적인 조례도 있었음을 말하고, 그가 신앙의 "근본적인 조례"를 제쳐놓고 교회의 일치를 추구하지 않았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4) 칼빈은 교회를 어머니로 말하였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 4권 1장에서 가견교회를 신자들의 어머니로 칭하고 있다. 교회를 어머니라고 한 표현은 칼빈 자신의 창작이 아니고 어거스틴 이후 로마교회에서 교회의 절대권을 주장하기 위해 사용해오던 용어였다.  그러나 칼빈은 로마교회에서 사용하던 그런 의미로 이 용어를 사용한 것이 아니고, 신자들의 신앙의 훈련소로서 교회의 교육적 사명을 강조하여 이 용어를 사용하였으며 가부장적 권위를 가진 교회와는 달리 어머니로서 자식을 보호하고 훈련하듯 신자들의 신앙을 훈련하는 곳으로 교회를 어머니라고 표현하였다.
이처럼 교육훈련을 강조한 칼빈의 교회관은 제네바 교회뿐 만 아니라 그 후 개혁파 교회의 특징을 이루는 동기가 되었다.
   (5) 칼빈은 교회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렀다.  칼빈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 곧 교회라고 하였다.  교회는 성도들의 단체 곧 피택자 전체를 말하는 것이라고 칼빈은 말한다.  그러나 참으로 적은 수 의 사람이 수많은 군중 속에, 그리고 밀알이 쭉정이 속에 묻혀 있다고 말하고 교회는 바로 하나님의 은밀하신 선택과 내적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구성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은밀하신 선택과 내적인 부르심은 매우 신중히 생각하여야 할 문제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만 자기백성을 아시며(딤후  2:19) 그들을 인치심으로 둘러 지키시기 때문이다(엡 1:13)" 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 은밀한 선택에 기초한 교회를 아는 일은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고 말했다.
칼빈은 택함을 받은 자들만이 속한 불가견교회와, 참신자와 위선자를 다 포용하는 가견 교회를 구분했다.  그러나 누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속에서 선택함을 받았는지 또는 버림을 받았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고 했다.  칼빈은 신자가 이 땅에 사는동안 실제로 가견교회와 불가견교회를 구분한다는 것을 불가능한 일로 보고 있음이 분명하다.  또한 그가 다루고 있는 교회가 주로 가견교회였으나, 그는 가견교회만이 실제적인 교회가 아니라는 것을 잘알고 있었다.  가견교회와 불가견교회는 두 교회가 아니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누일 수 없는 두 면인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칼빈에게 가견교회와 불가견교회는 두 교회의 대칭이 아니라, 오히려 가견교회는 불가견교회의 필수적이며 유용한 표현이요, 우리가 금생에서 머무는 한 가견교회가 우리의 교회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그는 말하였다.  그러므로 이 땅위의 삶 속에 우리가 알도록 주어진 유일한 교회는 바로 이 유형교회이며, 이 땅위에서 택자들의 불가견적 교통의 표지가 되는 관계이다.  이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불가견적 몸의 회원이 되기 위한 핑계로 가견교회를 버리면 안된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와 신자의 성화를 위해 가견교회를 세상에 외적방편으로 두신 것이라고 하는 칼빈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1537년 파렐과 더불어 "제일 제네바 신앙 고백서"에 대한 서약을 제네바 전 주민들에게 요구한 일이나, 또한 바젤에서 "제일 헬베틱 신앙고백서"에 대한 서약을 요구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야할 것이다.
(6) 계속해서 칼빈은 교회의 표지에 대해서 말하면서 칼빈은 교회의 표지로서의 말씀의 올바른 선포와 성례의 올바른 시행을 들고 있다.
칼빈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이 진지하게 전해지고 그리고 그것이 들려지는 곳과 또한 성례가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그대로 시행되는곳이라면 어디라도 하나님의 교회는 존재하는 것이며 이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인 것이다." 이와같이 칼빈은 말씀의 사역과 성례의 사역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이것으로 참된 교회와 거짓된 교회를 식별하는 표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여러차례 강조했다.
그는 말하기를 "말씀에 대한 순수한 봉사와 성례전 시행의 바른 의식은 충분히 보증이 되며, 이 두 가지 표적을 가지고 있는 공동체를 우리는 확실하게 교회로서 받아들일 수 있다." 말했다.
이리하여 교회를 식별하는 표지인 말씀의 선포와 성례전의 준수 는 반드시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의 축복으로 말미암아 번성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 경우 말씀이 전해지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열매가 생긴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받아들여지고 말씀이 확고하게 자리를 차지하게 된 곳에서 말씀이 그 열매를 맺지 않는 경우는 없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교회를 일컬어 "진리의 기둥과 터" 라고 불리어지는 것은 작은 의의를 갖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아무튼 참된 교회의 인식을 위해서는 말씀과 성례를 본질로 보았다는 것이 칼빈주의 교회론의 핵심이라 하겠다.
2) 한국교회의 교회이해
종교개혁의 배경은 우리가 아는대로 "내가 어떻게 하면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가?" 하는 것과 "내가 어떻게 하면 진정한 교회를 발견 할 수 있는가?" 그것이었다. 이 두 가지 질문은 서로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구원의 문제라는 16세기 인들에게 무엇보다 우선되는 관심사였던 두 측면들을 구성한다.  왜냐하면 중세의 교부들은 말하길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해왔기 때문이다. 자명한 진실로 받아들여졌던 교회의 절대적인 권위가 1300여 년을 지배해 왔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하여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찾는 것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았다.  종교개혁의 두 기둥 루터와 칼빈은 교회론의 조직신학의 체계를 우리에게 제공해온 아주 중요한 신학자들이다.  루터는 좀더 관념적으로 그리고 이상론 적으로 교회론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그것을 좀더 외적이고 조직적으로 체계화 시켰다고 볼 수 있다.  루터와 칼빈은 진정한 교회의 표징으로서 말씀과 성례전을 최우선으로 꼽았다.  그러나 루터는 말씀을 복음에 한정시키는 반면, 칼빈은 말씀을 정확한 교리 및 직제까지도 가르치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칼빈의 교회론도 기독론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의 작업은 기독론 중심의 조직신학을 발전 시켰고 우리에게 유형교회와 무형교회, 가견적교회와 불가견적인 교회를 식별할 수 있는 깊은 안목을 심어 주었다.  하지만 이들 종교개혁자들의 교회이해는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만 매달려 있었기 때문에 '교회의 진정한 목표는 무엇인가?'하는 선교론적인 교회론과 '진정한 교회의 형태는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는 깊은 해답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면 한국교회는 전통적으로 어떤 교회론을 견지 해 왔을까? 한국신학의 뿌리요 조직신학의 거두라고 할 수 있는 박형룡은 이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했는가? 박형룡의 교회관은 루이스 뻘콥의 조직신학과 대동소이한데, 그것 역시 칼빈의 기독교강요에 영향받은 바 큰 것이다.
박형룡의 교의학은 교회론을 칼빈의 기독교강요의 최종판(1559)의 순서를 따라 삼위일체 하나님께 대한 신앙고백 다음에 놓고 있다.  그는 트리니티의 화란 개혁교회, 스콧틀랜드 장로교회의 저명한 신학자들도 칼빈의 사상을 따른다고 덧 붙였다.
박형룡은 칼빈의 교회론의 신학적 위치에 따라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는 개개인들에게 적용시키는 데, 교회만이 이러한 은혜를 교회를 통하여 주신다고 말하고 있다.  그의 신학적 특징은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과 "성도의 교제"에 역점을 두어 교회론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 특색이다.
이러한 조직신학에 있어서의 교회론은 '교회의 표식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귀결된다.  즉 그것은 박형룡과 화란개혁교회의 신도게요서 등에서 강력하게 이야기되고 있는데,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교회의 표시로서 '말씀설교, 성례전, 그리고 권징'이라고 보았다.  종교개혁이 로마카톨릭 교회의 제도중심적인 교회론에서 탈피하고자 했던 것이라면 개혁자들의 교회론은 교회의 유기체적인 국면의 의미를 재삼 강조하려 했다고 결론 지을 수 있겠다.
역사적 기독교회는 항상 두 국면을 지닌다.  그것은 유기체적인 국면과 제도적인 국면으로서 전자는 성령으로 연합된 신자들의 모임이요, 후자는 신자들을 양육시키기 위한 구원의 수단으로서의 신자들의 '어머니'이다.  전자는 각종 은사와 재능을 통한 봉사가 그 목적이요 후자는 제도적 형식으로서 존재하며 하나님의 정하신 직임과 수단들을 통하여 질서유지와 양육을 그 목적으로 한다.  양 국면은 모두 다 교회의 본질에 속한다. 그러나 교회의 역사속에서 나타난 현상 중 상호배타적 관계로 양자의 관계가 오해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면 개혁자들과 박형룡의 영향을 많이 받은 한국교회의 상황은 어떠한가? 한국교회의 교회론은 유기체적인 국면보다는 제도적 국면을 강조하여 왔던 관계로 교권화가 심하였다.  그 결과 교단주의와 교단 경쟁주의가  그 어느 나라보다 심하게 되었다.  이는 교회론이 조직신학적인 측면에서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던 관계로 목사라는 직분이 은사적 측면에서보다는 제도적 측면에서 강조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이에 대하여 옥한흠은 "교회에서의 전도, 양육, 심방, 예배인도 등의 봉사들이 오로지 목사들의 것이 되고 평신도는 단지 구경꾼으로서 자신들의 맡은 직분을 헌금과 교회 출석하는 것으로만 이해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그 결과 평신도들은 훈련되지 못하고 교회의 여러 가지 봉사직에서 제외되며 교권주의는 더욱 심화되었다.  이것은 종교개혁자들의 땀흘리고 피흘린 수고의 결과를 다시금 중세로 되돌려 놓고 있는 무서운 일이다"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교회론을 신학교에서 배운대로 조직신학적인 입장에서 다루는 데에는 익숙해 있다. 따라서 교회론을 대부분 존재론적인 입장에서 다루게 된다.  뿐만아니라 신론, 기독론, 창조론 등의 위대한 다른 교리에 가리워 빛을 보지 못하고 지나가게 되기가 싶다.  우리는 교회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각성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제도론적인 교회론에 묶여 보다 다양한 형태의 교회에 대하여 논의조차 하기 힘들게 되기 때문이다.  
이에 본 연구자는 이태웅의 주장처럼 예배에의 목적과 선교에의 목적에만 적합하다면 얼마든지 다양한 형태의 교회론을 개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에 다음 페이지에서는 칼빈주의에 준하는 교회형태의 가능성과 교회정치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3) 칼빈주의적 교회형태와 정치
칼빈은 말씀과 성례와 권징은 교회의 직분자들에게 맡겨진 일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교회의 기본적인 요소가 말씀과 성례이기 때문에 즉 말씀을 올바로 듣고 성례를 올바르게 행하며, 그리고 권징에도 올바르게라는 개념을 적용 할 수 있다면, 올바르게 권징이 시행 될 때 직분은 이 세상에서 교회의 존재를 위하여 그 역할을 다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주님께서는 직분을 통하여 교회를 다스리시기 원하시는데, 그 직분은 ……"하고 말한다.  이것은 기독교강요 4권 3장 1절의 서두에 나오는 말로서 1539년 판에서부터 1559년 판까지의 사이에 나온 가장 중요한 1543년 판에서부터 칼빈은 말하고 있다.
칼빈이 "교회의 공동체라는 의미에서의 교회"에 관하여서 따로 한 장(章)을 할애하지 않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그렇다고 그가 교인의 공동체를 간과한 것은 아니고 다만 교인의 공동체는 직분자들의 봉사를 통하여 존속하기 때문에 교회공동체를 주로 직분자의 조직을 중심해서 보고 있다.  따라서 칼빈의 교회는 "직분을 중심한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칼빈은 만인 제사장론을 언급한 적이 거의 없다.  심지어 베드로전서 1장 2절에 대한 주석에서도 칼빈은 교회를 주관적으로 보는 루터의 견해에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고 있음을 본다.  교인의 공동체는 칼빈에게 있어서 하나의 실재이다.  그러나 이 실재는 그 자체를 통하여서는 이해 될 수 없고 직분이 그 공동체의 보존을 위하여 하는 일을 통해 이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칼빈은 직분의 의미를 지나치게 강조한다고 할 정도이다.  교회의 직분자들은 하나님 자신의 인격을 대변하는 자들이라고 한다.  1541년의 교회헌법에 이미 네 직분을 말하고 있지만 그 경우 그는 다만 목사와 교사에 한하여 이와 같이 이해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직분을 사용하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육체적으로 임재하시지 않고 하나님께서는 영으로 임재하시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인간을 사용하여 교회를 다스리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설교를 매우 중요시했다.  말씀의 선포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은총이 교회에 전달되게 했고, 그 말씀이 성령 안에서 결실을 맺게 했다.  그 결실이란 회개, 죄의 용서, 성화의 역사를 일으키는 것이라고 보았다.  칼빈은 아직도 로마교회를 참된 교회로 인정하려는 사람들에 반대하여 로마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참된 교회의 표지를 구성하는 것은 어떤 제도가 아니며, 상당한 종교 단체의 존재 그 자체가 아니라 문제는 그 단체가 누구에게 예배하느냐 하는데 있다고 지적하고, "하나님의 교회가 모든 부패한 종들과 구별되는 것은 주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이고 주의 명령에 의해서만 지도 받기를 원할 때 그렇게 된다."고 강조했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 하권에서 로마교회의 잘못된 성례관을 비판하고 개혁파 성례관을 확립했다.  칼빈은 성례를 정의하기를, "성례란 주 하나님께서 우리의 약한 신앙을 북돋우어 주시고자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자녀의 약속을 우리의 양심에 인치신 일의 외면적 표지이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우리 편에서는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도 자신의 경건을 간증하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어거스틴도 성례를 일컬어 "거룩한 것의 가견적 표현이요, 불가견적 은혜의 가견적 표현"이라고 하였는데, 칼빈의 성례관은 이 점에 있어서 어거스틴의 성례관과 동일하였다. 칼빈은 로마교회의 7성례 가운데 세례와 성찬, 두 가지만 성례로 인정하고 특히 로마교회의 성찬에 대해 많이 비판했다.          
또 칼빈은 권징을 강조하였는데, 이를 참교회와 거짓교회를 구분하는 표지로 보는 말씀선포와 성례 외에 중요한 수단으로 보았다.  칼빈은 이 권징을 제3의 표지로는 여기지 아니하였지만 교회의 안녕과 질서유지를 위한 필수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칼빈 이후에 개혁파 신학자들은 이 권징을 교회의 제3의 표지로 생각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4권 12장에서 권징을 다루고 있다.  칼빈의 견해에 따르면 권징의 목적을 세 가지로 들고 있다.
이 권징에 대한 칼빈의 견해는 그것이 교회의 본질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덜 중요한 것으로 여기거나 무시될 것 이 아니라 교회의 교리의 순결과 질서를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여긴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한다.  물론 칼빈은 지상에는 완벽한 순정교회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칼빈의 이러한 생각은 1세기 후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서와 대소요리문답(1643-1647)에 잘 반영되고 있다.  "하늘아래 가장 순결한 교회들이라도 혼잡과 오류에 빠지기 쉬우며 또 심지어 어떤 교회들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 사단의 회가 될만큼 타락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을 경배하는 교회가 지상에 항상 있게 될 것이다."
칼빈은 이 지상교회에 있어서 이러한 문제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로마교회의 거대조직에 반하여 최소한으로서의 교회 조직과 최소한의 교회정치를 이야기 한 것이다.  


3.독립교회의 타당성


1) 어원적 고찰
독립교회(Independent Church)라 할 때 이 단어가 주는 의미가 생소하고 아직 이 개념이 교회사적 측면에서 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명칭에 따른 모호함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독립교회라 할 때 그 개념은 기존 교단에 속하지 않고 자유로우며 개교회의 독립성과 자율성 즉 교회의 자치권과 행정을 독립적으로 운영해가는 교회들이라고 넓게 지칭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기존의, 교단이나 교파에 치우치지 않고 독자적인 기준을 마련하여 시행해 나가고 있는 교회들로서 과거에는 회중교회로 혹은 자유독립교회 등으로 불리어 오다가 작금에 와서 독립교회라고 한국교회에서는 불리어지고 있다.  이들 교회들은 대개가 기존의 교단들이 지나친 교파주의로 개교회를 지나치게 간섭하거나 교권주의로 신앙의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파행적으로 운영되는 것에 반대하여 교단의 굴레를 과감히 벗어버리고 홀로서기 한 경우가 많다.  개혁교회의 신앙지표인 말씀의 올바른 선포와 성례와 권징을 무시 혹은 왜곡하는 것에 대하여 회의를 느끼고 자신들이 속하여 있던 교단을 탈퇴하여 독자적 행정체계를 갖거나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독립된 행정과 신앙관을 가지고 창립한 교회등이다.  이를 독립교회의 독자노선 추구 및 설립동기를 원인별로 분석해 본다면,
첫째, 교단적 잘못된 결정사항 (신사참배 결의 혹은 불신법정 고소문제)등의 자체의 범죄행위에 동참하는 죄를 범치 않기 위하여 결별 혹은 독립한 것으로 신앙적 차이로 인한 이유,
둘째, 기존교회의 이기주의, 대형화, 물질주의로 흐르는 부패된 현상을 개혁하여 교회 본래의 사명인 사회 속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되찾자는 교회 윤리적인 견해차이의 이유.
셋째, 인위적 압력의 수단화가 되고있는 거대교단조직의 경직성을 탈피하여 독자적 소신 행정을 펴기 위한 교회행정상의 이유.  
넷째, 기타 양보할 수 없는 신학적 견해차이의 이유. 등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교회들이 흔히 이단으로 치부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기존의 고정된 교회개념을 갖고 관찰하는데서 오는 오류일 수도 있다.  대개의 경우 우리나라 독립교회 설립당시의 출발은 적어도 절대적 하나님 중심의 신앙 목표하에 신앙적으로 윤리적으로 그리고 교회행정 신학적으로 정로를 걷고자 시작된 용기있는 개혁운동 이었음을 부인할 사람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독립교회가 상기와 같은 긍정적인 면만이 있는 것이 아닌 것도 사실이다.  교단교회의 많은 장점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부정할 수도 없다.  교단을 무시하여 개교회주의가 더욱 심화되거나 교회의 통일성을 해치고 중구난방으로 흩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성경절대주의의 일면으로만 흐르다가 정통신학을 간과하여 이단적 요소를 배태시킬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  그리고 실제로 나타난 현상이기도 한데 예를 들면 설립자 혹은 목회자 개인의 신앙이 성도들의 신앙을 극단적으로 폐쇄시켜 사교화할 가능성도 많다.  하지만 독립교회의 실제적인 출현은 시간이 지날수록 대세화 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더 많은 독립교회들이 출현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2) 성경적 근거
독립교회는 그러면 성경적 근거가 있는 것인가? 우리는 이에 대한 근거를 찾기 위하여 교회가 시작되었던 초기의 상황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L.  Berkhof와 박형룡은 "교회"를 세 가지 관점에서 정의하고 있다.
1. 선택의 관점에서: 교회는 피택자들의 집단(coetus electorum)이다;
2. 유효적 소명 (혹 신앙)의 관점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영으로 부름을 받은 피택자들의 단체(coetus electorum vocatorum), 효과적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의 단체(coetus vocatorum), 혹은 신자들의 공동체(coetus fidelium)이다;
3. 세례와 신앙고백의 관점에서: 교회는 세례받고 참된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의 공동체 혹은 그 자녀들과 함께 참 종교를 고백하는 자들의 단체이다.  이것은 넓은 의미의 정의인데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교회의 시발점은 멀리 구약시대, 적어도 아브라함에게까지는 올라가야 한다.  그에게서부터 하나님의 선택,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말해지기 때문이다.  A. Noordegraf는 같은 동기에서 "하나님의 백성"이란 한 층 더 구약적인 개념으로 신구약을 하나로 묶고 있다.  
에클레시아도 헬라세계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  한 도시에 살고 있는 시민들 전체나 그 일부가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공적으로 소집되는 경우에 있어서 그 모임 자체나 그곳에 모여든 사람들이  'E       였다. 그것은 정당성을 동반하지 않는 모임일 수도 있다.  그 한 예가 사도행전(행 19:32, 39, 41) 등에서 발견된다.  바울의 전도활동에 대한 반작용으로 아데미 여신의 이름 하에 소동을 벌리던 소요집단이(40절 참조) 'E       로 불리운다.  그들은 이 모임에 참가한 격노한 군중들이기 이전에 에베소에 거주하고 있었던 시민들이었다.  
물론 우리가 "교회론"을 거론할 때는 이런 종류의 모임을 상상하는 것은 아니다.  신약의 교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들의 신분, 결속력, 소속감, 특수 상황 등을 전제할 필요가 없다.   다만 "카할"이나 "에다"가 이스라엘이란 울타리 안에 또 하나의 울타리를 만드는 개념인데 반해, 'E       는 이 단어가 적용되는 사회에 최초의 울타리를 쳐서 그 사회 구성원으로부터 'E       를 갈라놓는 역할을 하는 개념이다.  물론 이 말은 "카할"과  'E       사이에 어떤 관련성이나 어떤 계속성도 남아 있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또     'E       가 "카할"이나 "에다"의 특성을 여전히 보유하고 있다는 점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질 때 신약의 교회는 구약의 회중일 수는 없다. 이점을 다음과 같이 보다 쉽게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이라고 불리운 데 반해 신약시대에는 교회라 불리운다.  전자는 육적이요 혈연관계에 바탕을 둔 반면에 후자는 이러한 구심점이 없이 에클레시아의 원리 자체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교회를 넓게 "믿는자들의 교통" 이라고 부를 때는 카할이나 에다와   'E       는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을 특징지우는 믿음이 구체적으로 어떤 종류의 믿음인가에 주목한다면 카할과  'E       를 더 이상 동일개념으로 취급하지 못하게 된다.  'E       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믿음은 그리스도를 향한 것인데 반해, -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배제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 구약에서는 이러한 믿음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신약의 교회의 의미를 더 자세히 한정하려는 사람들은 교회를 복음이나 예수와 관련지어 설명한다. 곧, 교회란 복음에 접촉했고 그로 인해 변화된 사람들의 집단이며 신약성경의 용어로 교회란 예수와의 새로운 관계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에 돌입한 사람들의 모임이다. 예수와의 관련성이 무시되거나 최전면에 내세워지지 않을 때 아무도 신약성경의 교회를 바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우리가 사용하는 신약성경에 따르면 'E       란 단어를 가장 먼저 사용한 이도 예수이시다(마16:18, 18:17).  보다 명백하게 교회를 "예수를 주로 받아들인 사람들의 공동체", 또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공동체"라고 하는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니다.  요컨대 교회는 개혁된 유대교가 아니라 예수의 사역에 의해 나타난 어떤 새로운 것이다.
'E       의 시발점을 우리는 당연히 예수와의 관련에서 찾아야 한다.  하지만 정확하게 어디를 지적할 것인가에 대하여는 일치된 의견이 나오지 않고 있다.  통상적인 견해는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오순절 성령강림을 출발점으로 꼽는다.  그것은 이 때 예수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이 교대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예수의 생애시와 유월절 이후의 예수상에 큰 차이를 인정하는 학자들도 교회는 부활의 신앙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믿는다.
    앞서 인용한 Loisy의 글 "예수는 천국을 전파했으나 온 것은 교회            였다"도 이것을 함축하고 있다.  좀 다른 입장에서 Hans Kng은 "사          람들이 모두 십자가에 못 박힌 나사렛 예수의 부활 신앙으로 하나님           의 통치의 다가올 종말에 대한 기대로, 영광 속에서 부활 하신 그          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기대로 모이자마자, 교회는 존재한다."               A. Schlatter는 또 다른 동기에 의해 - 고전 15:5∼8에 근거하여 - 예          수의 (죽음과) 부활에서 교회의 시작을 느꼈다.
교회란 단어는 예수와 관련된 것이면서도 막상 그 초점은 예수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맞추어진 표현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따져야 할 것은 위에 제시된 오순절이나 예수의 죽음, 부활이 과연 그의 제자들에게 어떠한 변화를 가져왔기에 이것을 교회의 시작으로 삼아야 하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건물 개념의 교회나 교단 교권을 상징하는 교회관 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독립교회는 초대신약교회의 모습에 가까운가? 그것도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여진 사람들이 성경의 원리와 자신들의 의견에 따라 모임을 구성하고 있다면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 있는 교회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 보아야 한다는 것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에 대한 보다 성경적인 근거를 찾기 위해 서신서를 살펴보아야 한다.  
신약성경의 각 문서들이 기록된 연대순을 따를 때 "교회"란 단어를 가장 먼저 사용한 사람은 바울 사도이다.  그는 약 50년경에 아마 고린도에서 한 편지를 쓰면서 이 편지를 "데살로니가人들의 교회에" (살전 1:1; 살후 1:1) 보낸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편지 이곳 저곳에 이 당시에 데살로니가 교회 만이 아니라 "마케도니아의 교회들"(고후 8:1), "갈라디아의 교회들"(고전 16:19)이 존재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살후 1:4은 데살로니가서를 쓰는 당시에 아가야 지방에도 여러 교회가 세워졌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말해본다면, 늦어도 50년 경에는 "'E       "란 단어가 그리스도교가 전파되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무리 없이 기독교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데살로니가人들의 교회가 최초의 교회라는 말은 아니다.  바울 사도는 살전 2:14 에서 데살로니가의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았던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언급했다(갈 1:22 참고).  그는 유대에 적지 않은 교회들이 있었음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위해 "교회"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바울 사도는 또 자신이 회심하기 이전에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었다"고 회상한다 (고전 15:9; 갈 2:13).  그가 이 말로 예루살렘교회를 회상하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바울 사도는  'E       의 존재가 서기 50년 이전에 예루살렘에도 있었다고 증언한 셈이다.  그렇다면 이 용어도 데살로니가전서를 쓰던 당시보다 더 이전으로 소급해 올라갈 수 있지 않을까?
62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사도행전에 자주 "교회"란 단어가 사용되고, 또 여러 교회가 등장한다고 해서, 사도행전은 그 내용이 보여주는 실제시대보다 훨씬 후기의 (아마 사도행전이 기록될 당시의) 시대상을 보여준다고 결론지을 필요는 없다.  18세기 이후 신학자들이 자주 제시해 온 이 시간적 간격은 그렇게 엄청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바울서신을 고려할 때 확인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바울 사도가 그의 서신에서 예루살렘공동체를 "교회"로 부르는 시기와 사도행전이 보도하는 예루살렘공동체의 탄생시기 사이의 간격은 가장 멀리 잡아도 17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50년경에 "교회"란 단어가 바울이 전도하는 전지역에서 어려움 없이 사용되고 있었음을 감안한다면 예루살렘공동체가 바울사도에 의해 "교회"로 불리는 것과 사도행전에서 "교회"로 불리는 것 사이에는 거의 시간적 간격이 없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교회란 명칭에 관해서도 사도행전은 비교적 정확한 발전과정을 보여주고 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예루살렘공동체가 정확하게 언제부터 교회로 불리는지 알아보는 것은 쉽지 않다.  
오순절에 있었던 변화를 우리는 다음의 두 갈래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원래 예수를 믿고 따르던, 그의 약속이 성취되기를 기다리고 있던 제자들에게 성령충만이 있었다.  그들은 방언으로 하나님의 크신 일을 말했다.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이 사도들의 특수한 사역으로 기록되어 있다 (행 2:14, 42).  
둘째, 이 공동체에 들어 있지 않던 사람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다가 마음에 찔림을 느끼고, "회개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는 베드로 사도의 권고를 (그리고 다른 말들을, cf. 40절) 받아 들여 세례를 받았다(41절).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이들이 베드로의 권고대로 회개했다는 것일까? 삼천명 가량의 영혼이 증가했다는 기록은 이 새 구성원들이 원래 구성원과 똑 같이 취급되기 시작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누가가 정확하게 보도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들이 회개했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면 삼천명의 증가는 신자의 증가가 아니라 (현대적 의미로) 교인의 증가라고 보아야 하는데, 이렇게 제한할 근거가 사도행전에서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죄용서"와 성령의 선물은 여기서는 명령된 것이 아니라 약속된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긍정적으로 명령에 순응했다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성취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들에 관해 더 읽을 수 있는 것은 그들도 이제 다른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동일한 구성원으로서 공동체의 삶에 끼여들었다는 점이다(행 2:42-47).
이 공동체의 삶을 누가는 단적으로 "믿는 사람들 모두가 한 곳에 있었고 모든 것을 함께 사용했으며 ..."(44-45절)라고 묘사하고 있다.  "함께 있었다", "함께 사용했다", 소유를 팔아서 "필요에 따라 모두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설명은 그들이 무엇을 했는지를, 즉 이 공동체의 삶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알려 준다.  반면에 "믿는 자들"이란 이러한 일들을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의 정체를 알려주는 말이다.  즉, "믿는다"는 개념이 이 공동체의 구성조건의 역할을 하고 있다.  위에서 우리는 삼 천 여명의 새 구성원들이 회개를 했다고 결론을 내렸었는데, 여기서는 그들도 "믿는 자들"이었다고 확정할 수 있다.  삼천 명이 첨가되어 삼천 백 이십 여명으로 불어난 이 집단은 믿는 자들의 집단이었다.  혹은 회개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의 집단이었다.  예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란 표현에서 이 믿음이 예수와 관련된 것임을 알게 된다.  47절에는 살아 계신 주님께서 이 믿는 자들의 집단에 매일 "구원얻는 자들을" 더해 주셨다는 새로운 개념이 첨가된다.  "믿는 자들" 혹은 "구원얻는 자들"이 전체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베드로사도가 앉은뱅이를 걷게 한 것이 동기가 되어, 그는 또 한 번의 설교를 하게 된다.  이 설교에서 그는 예수에 관하여 주로 말했지만, 그의 명령 (회개하라, 행 3:19)과 사람들의 긍정적 반응(믿었다, 행 4:4)은 앞의 사건과 별로 다르지 않다.  오천여 명의 새로운 "믿는 자들"이 생겼다.  이들이 별도로 있었는지 아니면 먼저 번처럼 즉시 공동체에 흡수되었는지에 관하여는 아무 기록이 없다.  하지만 이들도 곧 공동생활에 가담했다고 보는 것은, 즉 행 4:23의 표현되는 사도들에 의해 이끌리는 집단에 포함된다고 보는 것이 사건 진행 기록상 자연스럽다.  모두가 강력한 결속력을 지닌 한 집단으로 간주되고 있다.  성령 충만과 그 결과 담대한 증거생활이 있었다는 누가의 보도는(31절) 분명히 이 점도 강조한다.  이들은 "믿는 사람들의 무리"라고 불리우며, 삼 천 명이 갑자기 늘었을 때처럼 긴급한 필요에 의해 소유를 나누는 공동생활을 하게 된다. 어떤 식으로 그들이 공동생활에 가담했는가에 관한 32-36절의 기록은 이 집단의 한 역사적 실제 생활상을 보여주는 것일 뿐 공동체 자체를 설명하는 본질적인 부분은 아니다.  반면에 "믿는다"는 개념은 이 공동체의 정체를 규정하는 아주 중대한 역할을 한다.  열 한 사도들이나, 120명되는 최초의 집단이나, 후에 늘어난 삼 천 명 혹은 오 천 명을, 즉 전 공동체를 누가는 어려움 없이 "믿는 자들" 혹은 "믿는 자들의 무리"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때의 믿음이란 무엇보다 예수와 관계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행 4:8-12).  그렇다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배제된다는 것은 아니다(행 4:24-30절).  
이 믿는 자들의 집단을 누가는 자연스럽게 "교회"라고 부르며 - 내용적으로는 여기가 아니라 이미 오래 전에 교회가 탄생했다고 보아야 한다 - 서서히 독립된 한 집단으로 간주하기 시작한다.  (5:11 의 "온 교회"와 "듣는 자들"의 대조를 주의하라). 12절의 "모든 사람들"은 교회에 속한 사람들, 즉 믿는 사람들을, 13절의 "다른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지시한다고 할 수 있다.  백성들은 이 "그들을" 칭찬했다고 한다.  "주님을 믿는 자들"이 점점 증가했다는 14절의 표현은 이 교회가 커졌다는 것과 같은 표현이며 (6:1)의 제자들이 증가했다는 것과도 같은 말이다.  예루살렘교회예루살렘교회가 스데반의 순교와 더불어 시작된 박해로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을 언급하기 전에, 누가는 다음과 같은 기록으로 그 발전적인 모습을 일단 마무리 짓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큰 무리도 믿음에 복종했다"(6:7).  여기서도 우리는 교회란 개념을 형성하는 기초적인 요소로 여전히 복음전파(객관적 요소)와 믿음(주관적 요소)을 보게 된다.  예루살렘교회에는 비록 사도들이 있었고, 오순절 성령강림이 있었고, 후대의 교회들에서 볼 수 없는 많은 독특한 요소들이 섞여 있었지만, - 이러한 것들은 "교회"를 설명하는 개념이다 - 예루살렘교회를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주님을 믿는 자', 그들의 모임이었다.  이 때 동시에 분명해 지는 것은 - 믿음을 교회의 구성원리로 찾았기 때문에 - 교회의 진정한 출발점은 사도행전에서, 즉 예수의 부활과 승천 이후의 사건들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사도행전에 와서야 비로소 (사도들의 복음전파에 자극되어) 믿는 자로 변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이전에, 이미 많은 믿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최소한도 우리는 120명이, 혹은 12 사도들이 벌써부터 믿는 자들로 (따라서 교회로) 역사현장에 나타났다는 것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이상의 역사적 정황들을 볼 때 교회의 구성요소는 보다 분명 해진다.  진정한 교회냐 아니냐 하는 객관적인 평가는 오직 하나님께서만 내리겠지만 우리의 경험과 주관에 비추어 볼 때 교회는 그리스도와 연관하여 그의 복음의 말씀을 듣고 거듭난 신자들이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공동체를 형성하고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대하여 정당한 성례를 행한다면 그것을 교회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독립교회가 단순히 교단에 속하지 아니하였다거나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행정체계와 규약을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백안시 한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독립교회라 하더라도 초대교회와 서신서에 나타나는 교회들이 보여 주는 온당한 복음적인 모습이 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한몸으로 받아 들여야 하는 것이다.

3) 신학적 근거
'교회'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함에 의해서 처음으로 신약에 등장한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는 신앙고백에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16:18)라고 답하므로 신약에 '교회'가 처음으로 나타났다.  그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표기되었고 교회로는 표기되지 않았다.  그 백성의 모임이 '에다'와 '카할'로 표기되었지만 아직 교회로는 표시하지 안았다.  후에 히브리어 성경이 희랍어로 번역될 때 '카할'과 '에다'가 교회로 표기되었지만 구약 자체는 백성들의 모임을 교회, 에클레시아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구약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표기되어야 한다.
교회의 설립자인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를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므로 이 고백 위에 자기의 교회를 세우기로 약속하므로 교회가 설립되게 되었다.  따라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신앙에서만 교회가 세워지게 된다.  즉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받아 그를 자기의 구주로 고백하면 그곳에서는 언제든지 교회가 발생한다.  교회는 말씀의 선포 곧 복음의 선포에서 발생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하고 그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죽고 부활에 이르렀다고 선포하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이 생겨나고 따라서 거기에 자동적으로 교회가 발생한다.  정작 교회 설립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속 사역을 이루어 성령을 파송하므로 이루어졌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세시 그를 믿는 제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의 신앙고백이 이루어지고 성령이 파송되므로 교회가 이루어졌으니 교회는 성령이 오셔야 가능해진다.  왜냐하면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시는 자이므로 그의 예수 증거에 의해서만이 사람들이 예수 믿음에 이르기 때문이다.  성령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권세와 직임을 위임받았고 그의 증거로만이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믿는 자들이 교회를 이룰 수 있는 것은 성령께서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키기 때문이다.  로마교회의 주장처럼 교황과 연합하므로 교회가 되고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결합시키므로 교회가 된다.  그러므로 교황이 있는 곳에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되어 그를 믿는 믿음이 있으면 교회가 세워진다.
교회가 되기 위해 먼저 사람들이 불리어져야 한다.  사람들은 그냥 교회에 오도록 불리어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불리어진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믿도록 선포하는 것이 사람들이 부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교회를 만드시기 위해 언제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도록 그의 이름으로 부르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듣지 못해서는 사람들이 결코 교회를 이룰 수 없다.  이렇게 교회는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부름 받았기 때문에 교회 곧 에클레시아라고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내어 자기의 백성으로 삼으셨는데 이제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상과 죄악에서 불러내신다.  불러내어 자기의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 교회로 만드신다.
교회에 대한 위의 진술들을 종합하면 교회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불러내어 예수의 피로 구속하여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킨 공동체이다.  교회는 피로 연결된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결합된 공동체이다.  더욱 정확하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사람들을 자기에게 연합시키신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연합된 교회의 전체 공동체적 개념으로 생각해 볼 때 필자의 논하고자 하는 독립교회는 그 성격상 일견 모순이 있는 듯 느낄 수도 있다. 실제로 초대교회 당시에 나타났던 배타적 '분파주의(Sectarianism)'운동은 신약교회 형성에 많은 지장을 주었고 건전한 교회의 연합과 선교의 힘을 모으는 데 많은 장애가 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 분파주의자들은 처음부터 잘못된 신학을 갖고 다른 기독교를 지향하는 이단운동 내지는 극단의 인본주의적 경건주의 에서 기인된 것인 반면 우리가 지금 논하려고 하는 독립교회는 그러한 신학이나 교리문제가 아닌 현재 한국교회의 약점으로 지적되고 있는 교권주의나 교단정치, 그리고 교회의 순수성을 해치는 제반 교회제도에 대한 나름대로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개교회의 독립적인 자치경영을 통한 순수목회를 지향하는 개교회 운동이라는 점에서 분파주의 운동과는 차원을 달리한다고 할 수 있다.
   (1)  교회의 본질
이미 교회의 정의에서 밝혀졌지만 교회가 교회되는 것은 사람들이 모여와서 교제를 하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부름 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하므로 교회가 교회된다.  이 연합은 성령께서 역사하사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그리스도와 결합하게 된다.  이 연합은 가장 구체적이고 실재적이어서 모든 구원 은혜가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 때문에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는 키프리아누스의 진술이 타당하게 된다.  이 연합은 물질적인 것이나 실체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다.  이 연합으로 그리스도와 사람들이 한 몸을 이루고 한 피와 한 살을 이루게 된다.  이 연합 때문에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지목된다.  더욱 정확하게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백성을 자기에게 결합하사 자기의 몸이 되게 하신다.  이 연합은 신비한 연합이어서 사람의 눈에 식별되지 않는다.  따라서 누가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되었는지는 하나님만이 아신다.  그런 면에 있어서 교회에는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불가시적인 교회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한 자들만이 중생하였고 성령으로 살 수 있다.  그리스도의 생명 곧 성령의 행하심이 교회의 생활 원리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성립하므로 교회가 성령의 거소 혹은 성전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에게만이 성령이 내주하시기 때문에 교회 밖에서 성령은 없고 활동하지 않는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교회의 구성을 중보자의 설립보다 앞세우고 더 근본적인 것으로 본다.  창조시부터 하나님은 교회를 가지시려고 하셨기 때문에 선택교리를 교회 성립의 핵심으로 삼으나 교회 성립의 근본 진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이 연합이 사람들을 서로 교제하게 하고 교회로서 존속하고 활동하게 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야말로 하나님의 구원 적용의 핵심이어서 칼빈이 가장 경탄한 요목이다.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해소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번 그리스도에게 연합한 자들이 교회 밖으로 벗어나가 구원에서 탈락이 불가능하다.  이 진리가 불가항력적 은혜 혹은 은혜의 주권성으로 표현되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은 바로 그리스도의 풍성한 구원에 동참하고 성령의 주장하심을 누리며 살게 된다.
로마교회는 교황과 연합하므로 교회가 성립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교회가 교회되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사람과 연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사람과 잘 연합하여도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않으면 교회가 될 수 없다.  바로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 때문에 교회를 하나님의 구원기관이라고 한다.
개혁신학만이 교회의 핵심진리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강조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시작하고 그 연합으로 존재하며 연합으로서 마감한다.  이 연합에 의해서 성도의 교제가 나온다.  따라서 교회를 성도들의 교제라고 종교개혁은 규정하였는데 성도의 교제가 근본이 아니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성도의 교제가 귀결한다.
그러므로 독립교회가 교파나 교단에 가입 또는 소속되지 아니하였다고 교회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타당한 진술이 아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와 연합된 것을 세례와 성찬으로 고백하며 계속해서 말씀을 선포하고 있다면 그리스도의 교회의 일원이라고 하는 것을 무시할 어떤 근거도 성립하지 않는다.
    
   (2)  교회의 분류
교회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성립하면 그리스도에게 연합된 자만이 교회가 된다.  그러나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중생으로 이루어진다.  중생은 영적이어서 육체적인 눈에 식별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만이 자기의 교회를 바로 아신다.  교회에는 외식자도 있고 불신자도 있으며 비중생자도 있다.  그들은 외형적으로는 교회에 속해 있지만 참교회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은 다 하나님의 택자들이다.  이 선택자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으므로 이런 교회는 비가시적인 교회라고 한다.  그러나 교회는 교회의 신앙고백과 예배, 말씀선포와 성례에서 또 교회 조직과 정치 그리고 회집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따라서 가견교회 혹은 유형교회라고 말한다.
무형교회와 유형교회는 서로 분리되어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함께 존재한다.  무형교회가 참교회이지만 참교회는 지상의 가견교회를 떠나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말씀선포를 신실히 행하여 가견교회가 참교회가 되도록 해야 한다.
교회는 지상에 존재하는 한 전투하는 교회이다.  교회는 죄악과 싸우는 공동체이다.  개인의 죄악을 대항하여 각자가 투쟁하지만 죄악과의 연대성을 갖고 쉽게 유기적으로 번지므로 교회가 죄악과 투쟁한다.  또 나아가 교회 밖의 사회의 악에 대해서도 투쟁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교회가 자체 거룩을 유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교회가 지상에 존재하는 한은 성화가 완결되지 않으므로 계속해서 악과 투쟁해야 한다.
그러나 천상교회는 승리한 교회이다.  아직 심판이 이루어지지 안았으므로 영광의 교회라고 말할 수 없지만 지상에서 겪는 투쟁은 없고 안식하는 교회이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교회라고 통상적으로 호칭하는 이 "에클레시아"는 '개교회'(Local Church)를 지칭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개교회란 일정한 지역에 있는 신자들의 모임(육체적 연합체 : Physical unity)을 말한다.  성경은 항상 지상의 교회들을 개교회와 연관하여 언급하였다.
하나님은 개교회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업을 수행하기 위한 대행기관(agent)으로서 노회나 대회 또는 총회와 같은 상회, 병원, 고아사업, 구제보다도 가장 최우선 순위(Priority)에 두신다고 조영엽은 말한다.  그는 말하길 개교회는 하나님의 사역의 최일선(Front Line)이며, 교역자는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사역을 수행하는 가장 중요한 사람(an important person), 즉 필수요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교회들은 참된교회 곧 우주적 교회의 모형이라는 주장이 된다.
'독립교회'란 이러한 개교회 중심주의의 교회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독립교회'들이 각 개교회들의 유기적 연합이나 형제로서 혹은 지체로서의 의식이 없거나, 그리스도의 몸의 연합을 무시한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제도로서의 노회나 대회, 총회 등을 별로 중요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앞서 성경적인 근거에서도 살펴보았지만 노회나 대회, 총회, 그리고 기독교의 각 기관들이 교회의 절대적인 구성요소가 될 수 없음을 이미 확인한바 있다.  성경에서 헬라어를 사용된 명칭 "에클레시아"는 주로 '개교회'(Local Church)에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교회라는 명칭이 신약에 114회 기록되었는데, 그 중에 적어도 92회는 개교회에 사용되었음이 이를 잘 반영해 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라 할 때 일반적으로 개교회를 염두에 두고 생각해야 할 것이고 지금도 지역의 이름을 따서 교회의 명칭을 정하는 것을 볼 때 이는 당연한 주장이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지역에서 그리스도를 믿어 지역교회를 형성한 그 공동체는 당연히 특별한 지리적, 문화적, 혈연적, 민족적 연관관계 속에서 독특한 자립권과 자치권을 가지는 것이 옳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러한 신학적인 근거 위에서 '독립교회'가 탄생한 것이다.  독립교회는 어쩌면 교회의 본질에 가까우며, 신약의 교회에 가깝고, 더욱이 다가오는 다원화사회에서는 더더욱 필요한 교회의 형태임을 부인할 수 없다.  앞서 살펴 본 바 대로라면 모든 개교회는 독립교회이며, 또한 독립된 발언권을 가진 교회로서 여러 다양한 형태의 교회연합에 참여하게 되며, 편견이나 차별없이 그리스도안에서 모두가 다 하나된 형제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3) 교회의 표징
교회가 교회로 성립하고 존속하려면 다음 몇 가지의 역사가 진행되어야 한다.  그것은 칼빈의 가르침대로 순수한 말씀의 선포가 그 첫째이다.  말씀의 선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의 선포이다.  말씀이 선포되면 사람들이 예수 믿어 교회를 이룬다.  그러므로 교회를 말씀의 창조물이라고 부른다.  말씀이 선포되면 사람들이 믿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자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다.  교황이 있는 곳에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선포로 교회가 생겨나고 자라간다.  교황은 구원의 보장이 아니며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교회를 다스린다.  그 통치는 말씀과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신령한 통치이고 외형적인 통치가 아니다.
말씀이 바로 선포되면 언제나 교회가 발생하고 교회가 존속한다.  종교개혁 때 로마교회가 교회로서 지칭받기 어려운 것은 바로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가 최소수준에서도 유지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 때에라고 교회가 전혀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은 칼빈이 말한대로 여로보암 때에 교회가 다 훼파되었지만 그래도 남은자들이 있었고 아합 때에도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이 있었던 것과 같다.  말씀이 순수하게 선포되면 교회는 언제나 어디서나 존재하고 그리스도의 재림시까지도 존속할 것이다.
     로마교회는 사람들의 결정을 하나님의 말씀 윗자리에 세우므로 교회          가 교회되기 어려웠다.  말씀의 선포의 내용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          의 인격과 그의 사역이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 사역          을 빼고 다른 것을 말하면 곧 교회는 쇠락하게 되고 변질되어 구원기          관이 될 수 없게 된다.  이 말씀의 선포 때문에 교회가 구원기관이           된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자는 교회를 어머니로 가져야 한다고          키프리아누스가 말하였다.  이것을 로마교회는 자기들에게 적용하여          로마교회에만 구원이 있다고 주장해 왔다.  로마교회에 교황이 있으          므로 구원기관이 된 것이 아니고 교회에 복음의 선포가 있기 때문에          구원기관이 된다.  키프리아누스는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고 주          장하여 카톨릭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믿게 되었다.  교황이 있          으므로 교회에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고 교회에 말씀 곧 복음의 선포          가 있기 때문에 교회밖에 구원이 없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예수 그          스도와 그의 사역의 선포 없이는 구원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교회가 교회 되는 데에는 성례를 바로 집행해야 한다.
성례는 가견적인 복음이다.  귀로 듣는 복음 대신 눈으로 보는 복음이 성례이다.  성례는 하나님께서 그의 구원을 우리의 몸의 기관에 접촉하게 하시는 역사이다.  성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우리의 몸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례는 눈으로 보는 복음이다.  이 성례를 바로 집행하면 성도들이 구원의 확신에 이르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확고히 한다.  성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강화목적으로 집행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개교회의 표징들은 어떻게 나타날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조영엽은 크게 세 가지를 특성으로 든다.
  ① 개교회는 중생한 회원을 요구하신다는 것이다.
  ② 개교회는 자치를 요구한다.
  ③ 개교회는 성장하는 회원을 요구한다.
이러한 주장을 정리해 본다면, 교회 회원의 자격은 중생한 사람들을 요구한다는 것은 교회는 한 기관이 아니라, 한 유기체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생명적 연합에 참여한 자들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고전 12:13)라고 하였다.  성령세례는 중생을 가리키는 것인데 성령과 말씀으로 중생한 자들만이 신령한 영적 참 교회의 회원이 된다고 할 때에 모든 개교회의 존재요건은 그 지역(local)에서 중생(Born again)한 자들이 모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회원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중생함을 기대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앞서 칼빈의 교회관에서 살펴보았듯이 모든 유형교회의 회원이 다 중생한 자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가급적 중생한 자들로 구성되기를 소원할 뿐인 것이다. 지상의 교회는 유형교회(Visible Church)이다.  유형교회는 알곡과 쭉정이, 참 신자와 거짓 신자들이 다 섞여있기 마련이다.(마 13:24-30)  그러므로 모든 지상의 교회들은 완벽할 수 없으며 따라서  개교회, 즉 독립교회 또한 무흠할 수 없다.
    카이퍼는 기록하기를 "엄격히 말해서 유형교회의 회원은 무형교회의         회원과 일치한다.  무형교회가 중생한 자들로 구성되는 이상 그들은          유형교회의 회원으로 간주한다.  성경적 표현을 사용하자면 중생한 자         들만이 유형교회의 회원이다"(요일 2:19 참조)고 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개교회 회원들은, 모두가 다 중생한 자들만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급적 중생한 자들을 포함하도록 영혼구원에 전력해야 할 것은 사실이다.
셋째, 그 다음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개교회의 자치권 문제이다.  신약성경은 교회정치에 있어서 개교회의 자치권을 강조한다고 보는 것이다.
앞서 개교회는 결국 독립교회에 가깝고, 독립교회는 교회의 본질과 초대교회의 본질에 가깝다고 본 연구자가 주장한바 있다.  
    성경은 개교회 이상 어떠한 의미에서도 에클레시아라 칭하지 않았다.         포레스트의 선언처럼 "신약에 있어서 교회정치는 개교회들에만 적용하         였다"고 하였다.
사도 바울은 교회의 치리를 개교회에서 시행하도록 언급한바 있다.  개교회의 문제에 관한 한 개교회가 최고의 판결권을 가지고 있다.  이 점은 독립교회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한층 더 빛나게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개교회 이상 더 높은 재판소가 없다는 것인데, 우리는 교회의 머리를 이 세상에서 찾지 않는다.  그 이유는 우주적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개교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 연결되어 있으며, 그리스도를 머리로 의존한다.  그리고 그에게 충성함을 특권으로 삼는다.  교회는 세상 정부로부터 정치적 지배와 제재를 받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신자, 교회, 교회단체가 도덕적, 윤리적으로 잘못될 경우에는 합법적 제재를 받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로마 천주교에서처럼 교황이나 그와 같은 위치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대표자로 인정해서는 개교회, 독립교회의 자치, 자율권이 세워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노회, 대회, 총회와 같은 상회로부터 성경원리에 어긋난 것들을 강요당한다면 단호히 배격해야 할 것이다.
넷째. 그 다음 성장의 문제인데, 개교회는 질적 성장과 양적 성장을 필요로 한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성령 안에서 은사를 주시는데, 은사 받은 사람을 주신 궁극적 목적은 무엇인가?  엡 4:12에서 첫째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서라고 했다.  이는 성도의 질적 성장의 필요성을 말씀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엡 4:15)라고 권고하신다.  바울은 진술하기를 "나는 심고, 아볼로는 물주고, 하나님은 자라게 하신다"(고전 3:6)고 하였다.  바울은 교회를 세우고(행18:1-18), 아볼로는 교역자로서 뒤를 이었고(행 18:24-19:1), 하나님은 자라게 하신다(행 14:27 ; 16:14).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된 유기적 생명체이므로 항상 하나님을 향하여 성장해야 한다.  우리는 고린도 교회가 질적으로 성장치 못한 이유들을 알아야 한다.  이와같이 우리의 교회들도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들을 찾아서 규명하고 대안책을 강구하며 성장하도록 해야한다.
그리고 질적 성장이 양적 성장의 근원, 바탕, 근거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질적 성장만을 강조한 나머지 양적 성장을 저해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참된 질적 성장은 양적 성장을 필히 가져올 수밖에 없다.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들 중의 하나는 복음전도이며, 전도는 양적 성장을 필히 가져온다.  즉 전도는 교회를 부흥시킨다.  누가는 기록하되 "그들은 성전에서나 집에서나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전파하는 것을 쉬지 아니하니라"(행 5:42)고 하였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마 28:19)에 대한 실제적 실천 이었던 것이다.
개교회는 전도와 선교에 열쇠가 되어야 한다.  전도와 선교는 개교회에 크게 달려 있다.  개교회들과 행정적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는 독립선교단체들이 다소 있으나 그 단체들을 구성하고 있는 회원들 다수는 개교회에 적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개교회의 교역자는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중요한 사람이다.  전 교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교역자들을 지원할 때 전도는 효과있게 목적을 달성할 수가 있다.  하나님이 바나바와 바울을 이방인들을 위하여 부르셨을 때 하나님은 또 하나님의 교회, 즉 안디옥교회를 부르셨음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그때에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교회의 회원들이었으며, 안디옥교회는 이들을 이방인들을 위한 선교사로 파송하는 일에 있어서 신앙적, 재정적 책임을 분담하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독립교회는 영혼구원에 최대의 관심을 둔다. 사람들이 단지 교회의 일원이 되고 전체 공교회의 회원이 되는 것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더욱 개인구원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이로 보건대 독립교회의 중요성은 더더욱 지지되는 것이다 할 수 있다.
  
4) 역사적 근거
   (1) 키프리안의 교회관
교회는 일찍부터 교회 안팎의 이단들의 도전에 직면하여 응전적 자세를 취함으로써 그 전통적 진리를 보수하여 왔다.  에비온파, 알로기파, 케린투스주의 등 유대주의의 기독교에 대한 도전에 직면했는가 하면, 영지주의, 그리스도 가현설 등의 혼합된 이교사상의 도전에 직면하기도 했고, 말시온, 몬타니즘, 모나키아니즘(군주론 또는 일신론) 등의 이단에 직면하여 교회의 신앙을 변호하고 확립해 왔다.
또한 4세기에 이르러 그리스도의 신성의 완전성을 부인한 아리우스설이나 그리스도의 인성의 완전성에 도전한 아폴로네리우스설, 그리고 네스토리우스나 유티커스, 그리고 5세기에 이르러 펠라기우스설도 모두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교회의 일치와 순결에 대한 관심은 이미 사도시대의 관심사였다.  사도행전 15장에는 유대주의자들의 도전이 있었고, 골로새서 2장에는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즐기는 자들의 도전이 있었고, 베드로후서 2장에는 거짓선지자들과 멸망케 할 이단을 가르치는 자들이 있었음을 말씀하고, 유다서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는 이단의 도전, 요한일서 2장에는 이미 적그리스도가 일어났다고 증거하고 있다.
각설하고, 우리는 로마 감독 칼리스투스(217년 감독)와 히폴리투스와의 논쟁에서 교회의 일치와 순결에 대한 관심을 보게 된다.  이중 히폴리투스는 당시 여러 교회에서 흔히 하던 것처럼, "친족 살인, 음행, 배교" 이 세 가지 죄는 용서받지 못할 죄로 취급하고, 교회가 이 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말도록 했다.
그러나 진정으로 회개한 자에게는 교회교제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칼리스투스는 생각했다.  실제로 박해시 배교자에 대한 처리문제는 그후 키프리안(AD 250. 로마감독) 과의 논쟁에서도 재연되고 있다.
터툴리안에서 어거스틴까지 서방교회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을 꼽는다고 하면 키프리안을 들 수 있다.  키프리안은 칼타고에서 태어나 문학과 법학을 공부하고 수사학 교사가 되었고 45세의 늦은 나이로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  247년에는 장로로 선출되고, 248년에는 칼타고의 감독이 되고, 250년에는 데시우스 황제의 박해 때 사막으로 피신하여 편지로 교회를 지도했다.  251년 사막에서 돌아왔으나, 다시 발레리안 황제의 박해를 받아 다시 사막으로 귀향갔다가 258년에 돌아와서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그가 남긴 것은 「교회의 일치」(De Unitate Ecclesiae)라는 책과 81         통의 서신이 있다.  그는 생시에 3대 논쟁에 참가했는데 모두 교회에         관한 문제였다.  그가 당면한 최초의 논쟁은 박해시 변절자의 처리에         관한 문제였고, 둘째는 그와 경쟁관계에 있던 노비티안 분파에 관한          문제요, 셋째는 이단자들이 베푼 세례의 타당성에 관한 문제였다.  이         세 논쟁을 거치는 동안 그의 교회관은 확립되어졌다.
키프리안은 박해시 변절자들에게도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일은 적절한 규례에 따라 행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A.  키프리안은 박해시 변절자의 처리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① 회개를 거부하는 자는 용서하지 말 것.
  ② 증서(certificate)를 산 자는 즉시 허용할 것.
  ③ 타락자는 평생 회개하고, 임종시 또는 이후 또 다른 박해시 회개를 증명하는 자는 교회의 교제를 허용할 것.
  ④ 타락한 성직자는 폐위할 것 등을 제시했다.
B.  그리고 분파에 대해서, 추종자는 파문할 것을 명했다.
C.  또한 AD 250년경 전염병이 창궐했을 때, 구제를 시행한 자비한 일면도 보여주고 있으며, 박해시 변절자나 이단자에 의해 시행된 세례는, 개종시 재세례를 명했다.  그러나 이것은 로마 감독의 반대를 받았고, 재세례제도는 로마제국에서 차츰 사라지게 되었다.
터툴리안의 제자인 키프리안은 감독을 중심으로 하는 감독 교회의 교리를 발전시킨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생각하기를 감독은 주님께서 친히 택하여 세운 사도들의 참된 후계자라고 생각하였고, 특히 마태복음 16장 18절을 기초로하여 교회는 감독들 위에 세워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키프리안의 감독 중심의 교회관을 대체로 아래와 같이 네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키프리안에 따르면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했다.  키프리안은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교회를 떠나는 자는 타인이며 속인이며 적이다.  교회를 어머니로 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없는 것이다.  노아의 방주에 들어가지 않고 구원받는 사람이 있다면, 교회밖에 있는 사람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했다.  또한 "그가 누구이든 간에 그리고 그의 사람됨이 어떠하든 간에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있지 않은 자는 크리스챤이 아니다"라고 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하는 키프리안의 견해는 교회를 떠나는 자들에 대해서는 가혹하리만큼 엄격했다.  그는 말하기를 "감독은 교회에 있다.  교회는 감독에 있다.  감독과 함께 있지 않는 자는 교회와 함께 있지 않는 자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교회의 신자들이 감독에 대한 관계는 어린아이들이 그의 아버지에 대한 관계와 같고, 감독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는 이로써 교회와의 교제와 구원을 상실한다고 주장했다.  감독에 대한 반역은 곧 감독으로 대표되는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반역이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기 때문에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고 본 것이다.
이 때문에 교회와 감독을 떠나 분리된 교회에서 세례를 받는 것은 무효라고 선언했다.  그는 말하기를 "한 개의 세례 이상 다른 세례가 있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세례를 베풀 수 있다고 망상한다.  생명의 샘을 저버리고서라도 그들은 생명과 구원을 가져다주는 물의 은혜를 약속한다.  그들은 거기서 씻음받은 것이 아니라 더럽힘을 받는다.  그들의 죄가 사함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중된다.  그들의 신생은 하나님을 위한 자녀로서가 아니라 마귀를 위한 자식으로 만든다.  거짓으로부터 출생했으니 진리의 약속을 받을 수 없으며 불신으로부터 태어났으니 진리의 약속을 받을 수 없으며 불신으로부터 태어났으니 그들은 믿음의 은혜를 상실한다."
이 경우, 감독으로 대표되는 일치를 주장하고 교회 이외의 생활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장차 중세 카톨릭교회를 위한 준비단계를 이미 키프리안의 교회관에서 찾아볼 수 있다.
    키프리안은 또한, 감독은 사도의 계승자이며, 교회는 감독들로 말미암아 세워졌다고 하는 개념을 발전시켰다.  키프리안은 말하기를,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택하여 세운 자들로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가르치신 것을 충실하고 세밀하게 전달했으며, 또 사도들도 자기들의 계승자로서 감독들을 임명하여 이들에게 교회들을 위탁하였다고 주장했다.
이 사도적 승계의 관념은 키프리안에게 있어서는 「승계의 언약」이라는 의미로 이해되었으며, 감독은 누구나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하나님을 위하여 취임케된다고 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그 때로부터 해가 바뀌고 계승됨에 따라 감독들의 임명과 교회의 모든 의결은 이들 감독들에 의해 지배되었다"고 했다.
이와 같이 키프리안에게 교회는 사도들의 계승자로서 감독들 위에 기초하고 있으며, 교회의 관리로 감독들 위에 딛고 발전해 나간다고 주장했다.  키프리안의 이러한 주장은 결국 감독들은 하나님에 의해 임명됨과 동시에 회중들을 위해 절대권을 행사하는 신적 권위를 가지는 지도자로 내세우게 되었다.
    키프리안은 '교회연합은 감독의 연합'이라고 하는 사상을 체계화시켰다.
키프리안에 따르면, 개개의 감독은 전 감독단의 일부이나 개개의 감독은 추상적 의미에서 감독단의 전권을 소유한다고 주장했다.  감독들은 교회의 연합을 안전하게 수호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며, 감독직은 개체이면서 동시에 전체라는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교회의 연합」을 명백히 하시기 위하여 주님은 이 연합이 처음부터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도록 주님 자신의 권위로 주선하였다.  다른 사도들도 베드로의 신분과 정확히 동일하였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들도 동일한 직분과 능력을 위임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라는 것을 시위하기 위하여 교회가 있기 전에 시초부터 연합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키프리안은 로마는 베드로가 감독 일을 보았던 교좌라는 일반적 신념을 받아들임으로써, 그 시대의 교회로 하여금 성직자의 연합이 최초로 이루어졌던 곳으로 로마교좌를 향하게 하였다.  그러나 로마를 외적인 연합의 상징으로 주장하기는 하였으나, 로마의 감독을 다른 여러 지역의 감독들보다 어떤 특별한 권위가 있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런 의미에서 키프리안에게 있어서 교회의 연합은 교황 중심 하에 있지 않고 감독직의 결속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키프리안의 로마교좌를 중심한 감독직의 결속은 훗날 교황제도의 발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또한 부정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키프리안에 따르면 감독직은 신자의 제사를 유효케한다고 하였다.  죄인들은 감독과 사제를 통해서 교회에 받아들여졌고, 그리스도의 공로는 사제의 결의를 통해서 그에게 적용된다고 보았다.  또한 어떤 사람이 교회의 소속이며 어떤 사람이 교회와 교통을 가질 수 있도록 복위될 것인가 하는 것 등은 감독이 결정한다고 보았다.
키프리안에 따르면 감독은 영감받은 선지자요, 성령의 은사를 부여받은 자요, 하나님의 영감과 환상으로 인도를 받는 자라고 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키프리안은 최초로 교회론을 크게 발전시킨 교부였다.  그의 교회론은 감독들을 기초로하여 교회의 단일성을 확립하였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는 로마교좌의 우위성을 주장하지는 않았으나, 로마교좌를 중심한 감독직의 결속이야말로 교회의 연합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키프리안의 교회관은 몇 가지 단점이 있다.
첫째, 그가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말했을 때, 그는 감독들이 다스리는 교회를 말하고, 이 제도적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은 구원이 없다고 단정해 버린 것은 잘못이다.
  
둘째, 그의 교회관은 교회를 외적 연합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가견적 교회만을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영적 불가견적 교회의 성격을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셋째, 그리고 감독직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교회의 역동적인 면을 무시해 버렸다.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자들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성도의 참된 교제를 나누는 자유롭고 거룩한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모습이, 체제와 제도 속에 얽매어버린 결과를 가져왔다.
  
넷째, 또한 그의 감독 중심의 교회관이 중세 카톨릭교회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의 교회관은 박해에 직면한 교회를 보호할 책임을 맡은 감독으로서 책임을 다했다고 볼 수 있지만, 배교자에 대하여 지나치게 엄격한 면을 찾아 볼 수 있다.
   (2) 어거스틴의 교회관
아우렐리우스 어거스틴은 354년 아프리카 누미디아의 타가스테에서 태어나 어머니 모니카에 의해 어릴 때부터 신앙교육을 받으며 자라났다.  그러나 그는 젊어서 한 때 마니교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계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기도로 어거스틴은 기독교로 개종하고, 387년 33세에 암부로시우스 감독에게 세례를 받고, 392년에는 히포의 장로로 선출되고, 395년에는 히포의 감독이 되어 훌륭한 저술을 남기고, 430년에 죽었다.
어거스틴은 그의 생애 동안에 북아프리카 지방에 있었던 도나투스파의 분열에 대한 처리로 고심했다.  그로 하여금 교회의 본질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끔 만든 것도 바로 이 도나투스파와의 논쟁에서였다.  도나투스파는 도나투스로부터 시작되었다.  도나투스는 어거스틴보다 약1세기 전에 칼타고의 감독 지위에 있던 사람으로 그와 그 일파는 기독교의 계율에 관하여 대단히 엄격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말하기를 "어떤 종류의 죄를 범한 사람은 교회로부터 제거되어야 한다.  이러한 사람이 교회의 회원이 되어있는 교회는 하나님에게서 완전히 떨어져 나간 것이다.  또한 이러한 죄를 범한 교사로부터 과거에 받은 세례는 무효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도나투스파에 대한 교계 지도자들 사이의 신학적 입장은 매우 다른 양상을 보였다.  북아프리카의 중심지 칼타고의 감독이었던 키프리안은 어거스틴이 평소에 존경하던 인물인데 도나투스파와 신학적 입장을 같이하고 있었다.  키프리안은 박해시 생긴 배교자 또는 이단자가 배푼 세례의 정당성과 효과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었기 때문에, 이 때문에 도나투스파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교회에서 배교자와 이단자만을 문제 삼을 것이 아니라, 도나투스파와 같은 교회 분열자를 더욱 위험한 사람들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다음 몇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어거스틴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정의하고, 교회의 순정성이 신자들에게 달린 것이 아니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인데 달려 있다고 주장하여 기독교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도나투스파는 「참 교회(true Church)」를 정의하기를, 이단자는 물론 박해시 신앙의 정조를 지키지 못한 배교자들을 제거해 버린 흠없는 신자들만으로 구성된 교회를 「참 교회」라고 했다.  「참 교회」는 곧 「거룩한 교회」(holy Church)라고 했다.  이러한 도나투스파의 이론에 대항하여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교회의 순정성이 신자들에게 달린 것이 아니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인가의 여부에 달려있다고 주장했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리스도가 교회 안에 영적으로 임재하시기 때문에 교회는 거룩하며, 신자들은 이 교회 안에서 성화되어 거룩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어거스틴의 이와 같은 생각은 어거스틴으로 하여금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베푼 세례는 비록 배교자나 이단자의 교회에서 베푼 것이라해도 합법적이며 유효한 것으로 인정하게끔 했고, 이 문제로 인한 도나투스파의 분열을 합당치 못한 것으로 주장했다.
또한 도나투스파의 흠없는 신자들만으로 구성된 「참교회」에 대해서도 반대 입장을 취하고, 지상교회는 가견적 교회와 불가견적 교회, 또는 택자로 구성된 영적교회와 불택자가 섞여있는 제도적 교회를 구별하여 교회의 이중 구조를 주장했다.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하나의 유형적 가견교회를 어머니로 가지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하나님을 성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당시의 성례주의 방향으로 치우치지 않고 또한 도나투스파의 완전주의적 교회관에도 반대하여, 역사적 교회는 근본적으로 세속적 기관이며 따라서 의인과 악인이 함께 섞여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현세의 교회를 하나님의 도성과 동일한 것으로 보는 동시에(불가견적, 영적 공동체) 또한 상이한 것으로 보고(역사적, 제도적 공동체), 하나님의 구 속의 섭리가 역사의 영역에서 실현되어가고 있으며, 하나님의 도성이 역사적 교회 안에서 이루어져가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어거스틴에게 "역사적 교회는 하나님의 도성의 형상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도성으로 되어가고 있는 하나님의 도성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현세적 역사적 교회는 항상 현재성과 미래성 사이의 긴장과 이중 구조 속에 놓여 있다고 보았다.  이 경우 도나투스파의 사회적 이중성이 어거스틴에게는 종말론적 긴장으로 바꾸어졌다고 하겠다.
둘째, 어거스틴은 배교자나 이단자가 베푼 세례라 할지라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리고 말씀대로 베푼 세례는 유효한 것으로 인정했다.
도나투스파와의 논쟁에서 쟁점이 된 문제는 박해시 배교자 또는 이단자에 의해 베푼 성례전의 타당성과 효과에 관한 것이었다.  도나투스파에서는 박해시 배교자와 이단자들이 베푼 세례는 무효라고 주장한데 대하여, 어거스틴은 그 유효성을 인정했다.
도나투스파는 주장하기를, 세례를 비롯한 다른 성례전과 또 성직자의 목회의 타당성과 효과는 오로지 성직자 곧 성례 시행자의 신앙과 행위에 의존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하여 어거스틴은 세례의 기원은 사람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필수적인 한 부분이며, 사람이 복음을 통하여 회심 하지만 세례없이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복음과 세례는 서로 병행하는 것으로써 복음의 말씀없이는 세례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와 같이 세례의 타당성과 효과는 그것이 복음의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과 병행하기 때문에 말씀대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베푼 세례는 받는 사람의 신앙이나 행위 여하에 좌우됨이 없이 타당하며 유효적인 의식이 된다고 했다.
그러나 성례의 유효성은 그것이 시행되는 공동체에 의존하기 때문에, 분파자들 사이에서 시행된 성례는 구원을 위해 역사하지 못하고, 오직 정죄를 위해 역사할 뿐이라고 말했다.  이 경우 세례의 반복은 믿음과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유일성을 부인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박해시 배교자나 이단자가 베푼 세례라 할지라도 말씀대로 시행되었다면 세례로서 타당하다고 인정하고, 이 때문에 이들에게 재세례를 베풀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배교자나 이단자가 베푼 세례의 타당성을 그 집례의 형식과 결부하여 인정하였으나, 그 세례의 효과, 즉 사죄와 구원의 효과는 정통 카톨릭 교회에 복귀하여 연합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경우 세례는 받았지만 사랑의 유대가 없으면 그 세례는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주장하여 세례받은 자의 신앙을 중요시하였다.  어거스틴은 성례의 유효성과 타당성을 구분했다.
셋째, 어거스틴은 사도의 권위를 성경과 결부시켜 이해하고, 또한 성경의 권위를 그 사도성과 결부시켜 이해했다.  그는 말하기를 성경만이 지고의 권위를 갖게 되는데 성경만이 「고정된 사도성」을 갖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어거스틴은 교회의 제 문제에 있어서 해결 할 수 있는 권위의 소재를 성경에 두었다.  박해시 배교했던 사람들이 카톨릭 교회 밖에서 베푼 세례의 합법성과 그 효율성에 대해서 자신의 입장을 밝히면서 어거스틴은 지금까지 교회에서 시행되어 온 관례와 관습의 권위를 인정하고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에 따르면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베푼 세례는 비록 배교자나 이단자의 교회에서 베푼 것이라고 해도 합법적이며 타당한 것으로 인정한 당시의 관례를 그대로 인정하고, 유아 세례의 경우에도 성경의 진리에 어긋나지 않는 한 관습으로서 그대로 인정했다.
어거스틴의 이와같은 입장은 재세례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교회 회의의 결정도 거부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215년 칼타고에 모인 회의에서 이단교파의 세례의식을 인정하는 관습을 수정하는 결정을 내렸고, 후대에 키프리안은 동일한 문제에 부딪혔을 때 전대의 결정에 따를 것을 결의하였는데, 어거스틴은 이 경우에 키프리안과 그 회의의 권위를 부정하고 초대교회 사도들의 관례를 지지했다.  이 때문에 어거스틴은 배교자와 정통 카톨릭교회를 떠난 이단자의 세례를 부인하고 재세례를 주장하는 키프리안이나, 교회의 분리를 선언한 도나투스파에 반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회의자체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어거스틴이 교회 회의의 권위를 아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단지 교회의 회의도 오류를 범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교회의 회의나 그 결정에 최종적인 권위를 두지 않았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는 생각하기를 교회 회의와 그 결정의 합법성과 유효성을 가지는 것은 성경이므로, 성경의 증거를 탐구해서 그 결정 사항이 진리일 때 우리가 추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세계교회가 일찍부터 지켜온 관습이나 관례가 사도들의 전통에 기인하였기 때문에 권위를 갖는 것이라고 말하고, 「고정된 사도성」을 가진 성경의 권위는 심지어 초대교부들의 저서의 권위와도 비길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어거스틴의 성경관은 종교개혁시대 루터나 쯔빙글리, 칼빈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것을 쉽게 추측해 볼 수 있다.
어거스틴의 교회관은 도나투스파와의 논쟁에서 확립되었다.  어떤 특정교회가 참교회라고 하는 개념은 그에게서 찾아볼 수 없으며, 오직 영적인 것만을 강조했다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그의 교회관은 후일 칼빈에 의해 계승되었으며 칼빈의 교회관은 주지하다시피 개혁파 교회의 개교회론을 정립시키는 근거가 되었다. 하지만 중세 초기의 이러한 교회관은 부분적으로 로마교회의 탄생에도 이론적인 영향을 미친 감이 없지 않다 할 수 있다.
   (3) 로마교회
로마교회는 교황이 교리와 윤리의 가르침에 있어서 무오한 권세를 활용한다.  그러므로 교황이 있으면 교회가 있고 교회가 있으면 그리스도가 있다.  모든 것을 거꾸로 전개하였다.  교회에 연합하면 구원에 이르고 교황에 충성하면 구원이 확실하고 구원에 이른다.  그런 가르침은 성경에 없는 로마교회의 유전일 뿐이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가 자기의 피로 교회를 사셨다.  그리고 자기의 생명으로 살게 하셨다.  따라서 모든 권세는 그리스도에게 있고 그가 교회를 다스리신다.  교회의 머리일 뿐 아니라 교회의 생명의 원천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를 다스리신다.  그리스도는 자기의 피로 교회를 사서 자기의 교회로 세우셨다.  그가 교회의 설립자이다.  그러므로 그가 권세를 갖고 교회를 다스리신다.
교회를 다스림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다스리신다.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는 말씀의 봉사자를 세우셨다.  말씀을 선포하면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간다.  그리스도의 통치는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법대로 살도록 하기 위해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통치는 물리적인 세력의 행사가 아니라 신령한 은혜의 통치이다.  말씀의 선포로 사람들이 교회에 가입하고 또 거룩한 백성으로 자라간다.  이 일은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통치는 말씀과 성령으로 이루어진다.
교황이 믿음의 도리와 바른 윤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고 거기에 근거하고 있다.  교황의 통치에 순종해야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고 말씀에 순종하므로 구원에 이르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교회가 되고 교회를 구성한다.
교회의 직분자들은 이 그리스도의 통치를 구현하기 위해 세워졌다.  목사는 말씀의 선포의 직임을 지닌다.  이 말씀 선포로 사람들의 생명과 사망이 결정된다.  이것이 교회가 갖는 생명과 음부의 권세를 가졌다는 말씀의 뜻이다.
장로는 교회의 성화를 이루기 위해서 세워졌다.  선포된 말씀대로 성도들이 살도록 하기 위해 심방하고 권면하기 위해서 세워졌다.  치리는 성도들이 말씀대로 바로 살도록 권고하고 지도하는 것이지 권세를 휘두르는 것이 아니다.  집사는 교회의 재산관리와 구제를 위해 세워졌다.  그러므로 교회는 구제하는 일을 쉬면 안되고 힘써 행하여 사회정의가 교회에서 이루어지게 해야 한다.
이 모든 직분자들은 다 봉사자이고 권력행사를 위해서 세워진 것이 아니다.  교회는 권력기관이 아니고 구원기관이므로 봉사하는 것이고 모든 것이 다 그리스도의 권세 아래 매인다.
교회의 통치는 그리스도가 그의 말씀으로 행사하신다.  교회의 모든 행사는 다 이 그리스도 통치를 위해서 세워졌고 다른 독자적인 권세를 갖는 것이 아니다.
   (4) 개혁파 교회
로마교회는 성례를 구원의 은혜의 필수적인 매개로 보아서 교회가 성례를 집행하므로 마력적으로 구원을 전달한다.  성례는 집행만 하면 자동적으로 은혜가 전달된다.  그러므로 말씀과 무관하게 성례를 집행한다.  마력적으로 성례를 집행하여 집행 그 자체에서 은혜가 전달된다.  따라서 구원의 전달은 교회의 배분에 달려 있다.  사제가 식사를 하면서 성례를 집행하면 구원 은혜가 전달되어 구원에 이른다.
그러나 성례는 말씀과 분리해서 시행하면 죽은 성례가 되어서 아무런 효과를 낼 수가 없다.  성례는 귀로 듣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므로 말씀과 함께 집행될 때에만이 성례가 본래의 직임을 다한다.  말씀은 그 자체로 완전한 은혜의 방편이나 성례는 그 자체로는 완전한 은혜의 방편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선포하고서 그 구원의 확인을 위해서 성례가 집행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설립내용을 잘 밝혀야 한다.  이미 이루어진 구원을 확인하는 것이므로 성례를 구원에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 누구든지 성례를 반드시 집행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합당하게 말씀의 봉사자로 세워진 사역자가 집행해야 한다.  또 임종석에서나 병원 혹은 개인집에서 시행할 것이 아니고 언약백성들이 모이는 교회에서 시행해야 한다.
개혁교회는 로마교회와 루터교회와 달리 권징을 교회됨의 지표로 삼는다.  말씀의 선포로 거의 교회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에 권징을 교회 성립의 필수적인 구성요건으로 보지 않지만 권징이 필요하다.  권징을 하지 못하면 교리와 교회의 거룩을 지킬 수가 없다.
권징은 우선 윤리적인 면에서 시작하므로 윤리만을 그 전 대상으로 알기 쉬우나 윤리의 영역에서 권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교리도 바로 지킬 수 없다.  권징은 교회가 전투교회로서 지상에서 죄와 싸우고 있기 때문에 시행되어야 할 사항이다.  아직 완전해지지 못했기 때문에 그릇된 가르침과 윤리적으로 문제가 된 행동을 고치는 교회의 자체 정화행위이다.  권징은 권면과 수찬정지와 출교로 구성된다.  권징은 교리를 순수하게 보존하기 위해서 이루어진다.  교리가 교회의 생명이다.  말씀의 선포가 기본 교리에서 벗어나면 이단이 되거나 자유주의가 되어 기독교이기를 그치게 된다.  이단은 기독교의 기본 교리 중 일부를 합리적인 해석을 한 것이고 자유주의는 모든 교리를 다 합리적인 해석을 한 것이다.  이단은 어느 일부분에서 합리적인 해석을 하기 때문에 쉽게 식별해내지만 자유주의는 모든 교리를 다 합리적인 해석을 하였으므로 쉽게 식별하지 못해 권징을 제대로 못하게 된다.  특히 학적 방식으로 신학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므로 쉽게 넘어가고 오히려 거기에로 물들게 된다.  교회가 자기 믿음에 대한 권징이 없이는 교회로 남기가 불가능하다.  그릇된 교리를 가르치면 이 가르침을 교정하거나 버리도록 해야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출교해야 한다.
교회의 권징은 자체 정화작업이다.  성찬의 거룩을 지키지 않으면 교회가 거룩해질 수가 없다.  교회의 거룩은 성찬의 거룩에 성립한다.  성찬에 참여하는 자들이 일반 불신자들과 같은 삶을 살면 그 교회는 교회가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신자들로 하여금 죄악을 버리고 성령의 인도를 좇아 거룩한 삶을 살도록 권고하고 가르친다.  그래도 고치지 않으면 수찬정지를 집행하여 교회앞에 고쳐야 할 사람임을 분명히 한다.  그래도 전혀 고치지 않고 일반 불신자들과 동일한 삶을 계속하면 그를 출교하여 교회 밖으로 내여 보낸다.
루터교회는 권징을 하지 않으므로 교리와 거룩을 바로 지킬 수가 없다.  그들은 사랑을 강조하여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각자의 자유에 내어 맡긴다.  그리하여 교회가 거룩을 유지할 수 없고 교리를 바로 지킬 수 없어서 퇴락하게 되었다.  로마교회도 권징을 하지 않는다.  로마교회는 듣는 교회와 가르치는 교회로 나누고 가르치는 교회에 거룩성을 귀속한다.  가르치는 교회가 대표적인 교회이다.  듣는 교회인 평신도들은 간접적으로 교회이고 간접적으로 교회의 특성에 동참한다.  따라서 권징을 하지 않으므로 교회가 도덕적으로 말할 수 없이 타락하여도 아무런 제재조치를 취하지 못하게 되었다.  사제들의 윤리생활에 대해서도 아무런 규제가 없으므로 신불신간에 아무런 차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권징이 교회를 발생시키고 구성하는 요소는 아니지만 교회가 교회로 남으려면 권징이 교회에서 시행되어야 한다.  성화가 완결되지 않았으므로 교회는 언제나 권징을 행하여 교회의 거룩을 지켜야 교회가 교회로 남아 거룩한 구원기관이 될 수 있다.

   (5) 기타
재침례교나 웨슬레의 부흐운동도 교회사적으로 본다면 독립교회운동의 일환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칼빈주의 신학과는 거리가 있지만 말이다. 특히 재침례교의 성장은 괄목할만한 것이었다. 재침례교도들은 제16세기 개신교 개혁의 좌파에서 일어난 신자들의 작은 무리였다.  그 명칭은 "다시 세례받은 자들" 이라는 의미로서 그들의 대적들이 그들에게 붙여준 이름이었다. 그 당시 다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사형에 처해질 수 있는 범죄였다.  그들의 지도원리는 신약성경의 초대교회를 회복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와 개신교회 양측 모두의 많은 특징을 복음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배격했다.  그리고 그들은 진정한 교회를 재건하기 위해 작은 비밀 집회소에서 회합을 가졌다.
재침례교는 어디에서나 박해를 받았지만 구라파로 건너가 남부 독일의 거의 전지역에 퍼졌고 그 운동은 계속해서 성장하며 전파되었다.  유형받은 사람들에 의해, 또는 여행자들이나 선교사들에 의해, 재침례교는 가장 맹렬한 위협을 견디어냈고, 가장 악의에 찬 박해에서 살아 남았다.  그 박해는 교회나 국가가 힘을 결합해 가해오는 박해였다.
재침례교는 많은 후손들 중에서 각각 충성의 도를 따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재침례교를 통해 우리는 기독교의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얻을 수 있다.  서양 문명 속에서 현재 널리 받아들여진 많은 중요한 요소들은 재침례교도들에게 그 공헌을 돌릴 수 있다.  그 가운데는 종교적 사항에 대한 세상의 탄압 배제, 교회와 국가의 분리, 일반적 공동교육, 한 공동체 내부의자치 등이 있다.  우리가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다른 요소들도 있지만, 언젠가는 그것들을 받아드리는데 성공할 것이다.  그런 요소들 가운데는 비폭력, 검소함, 상호보조, 세상으로부터 자유케 된 삶 등이 있다.  물론 이러한 재침례교도들의 발흥은 너무 과격하여 그 당시나 지금에도 긍정 부정적인 논란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교회들의 잘못된 경향과 세속주의에 대한 반발로 일어나 그 당시의 교회들에 경각심을 주고 새로운 기독교 갱신운동으로 나아갔던 점에 있어서는 오늘날 우리 독립교회들의 정신과 맥을 같이 한다는 점에 있어서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웨슬레의 부흥운동도 결국 독립교회 운동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8세기에 영국은 도덕적 빈혈증을 앓고 있었다.
        가난, 사악, 술취함, 불의, 부패는 어디에나 있었다.  교회는 텅텅 비          었고 감옥은 가득찼다.  1750년에 영국에서 소비된 술은 1천 1백만           갤론이 넘었다.  
        영국국교는 그 나라 안에 1만 1천이 넘는 성직자리를 갖고 있었는            데 ( 국가 세입에서 성직자의 봉급을 지급하는 그런 성직 자리) 그           가운데 6천은 그 교구 근처에도 가지 않은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           다.  그들은 자신들의 교구를 박봉을 받는 목사보들에게 빌려주고            자신들은 런던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거나 혹은 대륙에서 살았다.  
        빵 한덩어리 훔쳤다고 교수형에 처하고 소매치기의 손을 자르는 그           런 비인간적 처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범죄는 늘어났다.  고아와          기아로 허덕이는 극빈자들은 교구 위원들의 책임이었지만 그 위원들          의 직무에 대한 성의가 어떠했는지 1750∼1755년 사이의 런던의 교           구 기록부에 의하면 많은 "구빈원"에서 입원한지 1년 이내에 모든            어린이들이 사망했다고 한다.
이렇게 침울한 환경 속에서 요한 웨슬레와 찰스 웨슬레는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사역을 시작했다.  두 사람은 영국 국교의 성직자였지만, 이들의 "감동적" 이고도 "열렬한" 설교 때문에 이들에게는 대부분의 교회의 문이 닫혀 있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은 거리모퉁이나 야외에서, 또는 감옥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다. 여하간 가난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는 없었다.
옥외에서의 이들의 집회는 종종 난폭한 자들에 의해 해산되었다.  난폭한 사람들은 설교자에게 돌을 던지기도 하고, 군중 속으로 소를 몰기도 했다.  두 형제의 생명이 종종 폭도들에 의해 위협을 받았다.  때로는 기성교회의 성난 성직자들이 폭도들을 선동했다.  그들 성직자들은 그들 자신의 교구에 웨슬레 형제가 나타나는 것을 불쾌하게 여겼다.  웨슬레 형제는 그 시대의 출판물에 의해 비난을 받았고, 만화를 통해 조롱을 받았으며, 다른 성직자들에게는 불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두 형제의 설교를 듣기 위해 떼를 지어 모여들었고 두 형제가 설립한 감리회의 회원이 되었다.
기성교회의 배척을 받은 감리교도들은 기성교회를 떠나려 하지는 않았지만 매주 "속회"로 개인 가정에서 만났다.  (그들 대부분은 가난하고 문맹이었다.) 그 모임에서 그들은 함께 찬송을 부르며 기도했으며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서로에게 의로운 권면을 했다.  회원 중의 한 사람이 속회 지도자로 지명되었는데 그의 임무는 다른 사람들의 도덕적 발전을 보살피며 매주 그들 각자를 개인적으로 권면하는데 있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절망에 처한 삶을 살던 사람들이 열성적이고 의미있는 조직체 속에서 뭉쳐지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조직체는 그들의 삶의 행동을 보살펴 주었고 그들이 시험이나 고통을 당할 때 길을 인도해 주었다.
요한 웨슬레는 그의 추종자들을 보살피기 위해 전국 어디나 다 찾아갈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비상한 노력을 했다.  그는 새벽부터 밤까지 여행을 했으며 하루에도 몇 차례씩 설교를 했고, 말을 타고, 혹은 마차 안에서 글을 쓰기도하고 읽기도 했으며, 속회 지도자들의 책임 하에 있는 영혼들의 상태에 대한 속회 지도자들의 기록을 검사했다.  웨슬레에게는 수많은 그의 추종자들의 영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일을 돕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여러 속회로 된 하나의 집단을 만들고 그 집단들을 위해서 평신도 설교자들을 세웠다.  
처음에는 그들 평신도들이 그들의 인도를 받을 사람들에 비해 별로 낫지 못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들은 그 땅에서 가장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진실한 도덕적 영적 인도자가 되었다.  그들은 많은 분야에 있어서 웨슬레의 친밀한 감독에 힙입었으며 온갖 제목(진단적인 충고를 포함하여)의 교육 서적에 힘입었다.  웨슬레는 영국 전체를 여행하는 동안 그들을 위해 그 서적들을 저술했는데 옛 주물 공장에 세워진 인쇄소에서 그 서적들을 인쇄했다.  이러한 열성적 지도아래 웨슬레 형제의 추종자들은 그들의 정직과 검약과 근면과 열심으로 인해 주목을 받게 되었다.  술꾼과 좀도둑이었던 많은 사람들이 건실하게 되었고 그들의 속회에서 부지런히 일하는 일꾼이 되었다.  우리가 이미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그들의 불신자 이웃들은 저금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그들에게 종종 맡겼다.  이웃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보다 감리교도들을 더 신임했다.  조만간에 그들은 자존심을 갖게 되었고 다른 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되었다.  절망의 압박이 사라지자 그들은 삶의 새 의미와 목적을 발견했던 것이다.
독립교회 역시 웨슬리의 부흥운동처럼 시대적 역사적 배경에서 유사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교회가 영적 도덕적으로 힘을 잃어버리고 세속의 물결에 휩쓸려 간다면 함께 휩쓸려 갈 것인지 아니면 기존의 조직에서 빠져나와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홀로 서기를 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되기 때문이다.  독립교회 역시 대세에 함께 떠내려가기보다는 그 물결을 거슬러 가는 길을 택하여 여러 가지 방해와 악의적 비방을 당했기 때문이다.  
   (7) 21세기를 향한 현대교회의 과제
지금까지 우리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교부들의 교회관을 통하여 또한 칼빈의 교회관을 통하여 개혁파 교회관을 정립 하려고 시도해 보았다.  칼빈의 제자 베자에 따르면 「개혁파 교회는 끊임없이 개혁하는 교회」라고 했다.  과연 오늘 나에게는 개혁할 부분이 없는지, 개혁은 바로 나에게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하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20세기 후반에 처하여, 앞으로 수년 후면 21세기를 바라보고 있는 우리는 개혁파 교회관을 확립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교회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고백을 했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결정한 니케아-콘스탄노플 신조는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우리는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인, 사도적 교회를 믿습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AD 381)는 교회에 대해 4가지 중요한 것을 고백하고 있다.
    하나의 교회, 곧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 하나의 교회를 고백하고 있다.  이것은 교회의 외면적 제도적 통일이 아닌, 내면적 영적 통일성을 지닌다.  교회는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 전적으로 복종해야 한다.
    거룩한 교회를 고백하고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중보적인 의로움의 효능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로서 세상에 나타나야 한다.  교회는 일차적으로 성도들의 교통이다.  거룩을 위해 힘써야 한다.  거룩의 속성을 포기한 교회는 배교한 교회로 불리워질 수밖에 없다.
  
    보편적 교회를 고백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는 어느 한 단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전 세계에 걸쳐 있다.  완전한 보편교회는 택자들의 총수에 해당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눈에 의해서만 식별되는 불가견 교회이다.  그러나 이 불가견교회도 지상의 가견교회와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으며, 가견교회를 통하여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아시고, 자기 백성을 지도하고 계신다.
    끝으로 우리는 사도적 교회를 고백한다.  사도적 교회라고 해서, 로마교회에서 주장하듯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베드로는 사도들의 대표자로, 로마교좌를 대표하는 제1대 교황이라고 하는 로마교회의 주장을 합리화할 수 없다.  우리는 사도들의 권세가 사도 이후에 계승된다고 하는 것을 성경에서 찾지 못한다.  우리가 사도적 교회라고 하는 것은 바로 사도적 말씀의 전통, 사도적 교리의 전통에 선 교회를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남기신 말씀과 그의 구속 사역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교회, 성경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사도적 말씀의 전통에 선 교회를 고백한다.  오직 성경만이 교회를 지도하고 현대교회의 표준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개혁파 교회, 정통 칼빈주의 교회의 바른 고백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천상적 교회의 지상적 형태인 개교회, 어차피 독립적인 교회라고 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교회들은 하나의 교회, 거룩한교회, 보편적교회, 사도적교회라는 의식만 가지고 있다면 어느 누구로부터도 종교적, 관습적 편견이나 행정적인 간섭을 받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독립교회는 성경적으로 보나 신학적으로 보나 그리고 역사적으로 보아도 타당한 것이며, 성경에서도 어떤 특정한 교회의 형태를 주장한 곳도 없지만 역사적으로도 지상의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성령 안에서 각 사람에게 주신 양심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한 교회의 형태와 운영방법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개교회, 독립교회들의 고유한 신적인 자율성과 자치권을 무시해 버리고 교권주의와 교파주의를 고집한다면 개혁파교회의 고유한 정신인 끊임없는 개혁의 정신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리고 로마교회의 암흑기로 돌아가는 것이며 교권주의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독립교회는 21세기의 한국교회의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Ⅶ. 독립교회의 목회


개신교 선교 1백주년을 갓 넘긴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은 실로 경이롭다할 수밖에 없다.  천만을 상회하는 기독교인수는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성장은 세계인의 이목을 끌게되었고 기독교 선교사적 모범이 되고 있으며 따라서 세계 선교의 중요한 일 몫을 담당해야할 사명 또한 우리에게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 성장의 이면에는 세속사회의 급속한 산업화와 물질 물량주의의 사조와 함께 외적 양적 성장에만 집중한 나머지 내면적이고도 영적인 면은 말할 수 없이 피폐해진 부정적인 면 또한 심각하다 아니할 수 없다.
이미 서론에서 말했거니와 교회성장에는 성도의 수가 증가하는 것보다 중요하게 성도의 영적 성장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회성장의 참된 의미를 선각하여 이를 위해 힘써온 몇몇 교회가 있는데 소위 독립교회가 그것이다.  이들 한국의 독립교회들은 양적 성장주의를 추구하기 보다 소수 질적 성장을 위해 교단을 탈퇴, 목회자 자신의 신앙의 양심을 따라 소신껏 목회를 해왔다.  본 연구는 저들 독립교회들의 외적성장이 아닌 또 다른 성장인 교회 영적성장을 위한 노력들 중에서 신앙운동의 방향성을 어떻게 설정하고 있는가를 조사함으로써 교회의 존재 의의를 알아보았고 조사했다. 물론 여기에 논의된 독립교회 말고도 더 많은 독립교회들이 존재한다. 갈보리교회(박조준 목사), 할렐루야교회(김상복목사), 성약교회(김홍전 목사), 벧엘교회(박태남목사)등등 수많은 유무명의 독립교회들이 전국에 산재해 있다. 그러나 이 장에서는 이들 한국에 있는 독립교회 모두를 대상으로 살피고자 하는 것이 아니요 과거 김현봉목사에게서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독립교회들을 대상으로 삼았다. 김현봉목사에게서 영향받은 목사외에도 서철원교수 같은 신학자도 있고 그 외의 많은 교회들잉 있지만 자료를 얻기가 쉽지 않았기에 우선 자료 수집이 가능한 여섯교회로 제한 하였음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조사방법에 있어 수많은 독립교회를 일일이 열거 할 수 없어 그 모델로 여섯 교회를 들었다. 이 교회들은 대동교회(서울 중곡동 Tel.469-7167) 성약교회(서울 동자동 Tel.754-8319) 아현교회(서울 아현동), 신촌교회(서대문구 신촌), 염천교회(서대문구 신촌), 서부교회(부산 서구 동대신동 소재)등 인데 이 교회들은 독립교회로써 추구하는 신앙노선이 정확하고 그 특징들이 선명했다.  대동교회는 신앙과 신학의 일치를 통해 견고한 신앙을 구축할 수 있었고, 성약교회는 독립 개신교회로서 개혁주의 신앙의 전통을 고수 하려하고, 아현교회는 김현봉목사의 뜨거운 헌신과 모범이 이후 많은 독립교회들을 탄생시키게 된 계기가 되었으며, 신촌교회와 염천교회는 김현봉목사의 삶과 신앙을 그대로 이어가려고 애쓰고 있으며 지금은 고인이 되었으나 서부교회의 설립자인 백목사는 김현봉 목사에게서 영향을 받은 친구였다. 이들 독립교회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1. 각 교회 설립의 공통적 의의
상기 여섯 교회의 설립 의의에는 공통된 점이 있다.  즉 교단교회는 교단이라는 대집단적 조직 속에서 참된 교회로서의 그 빛을 잃는 경우가 많았고 정치적 사회적 단체활동 기구로 전락했거나 파벌과 교권쟁탈과 제사장적 신성한 직분을 세속적 야심의 권세직으로 바꿔 놓았으며 일부 목회자들의 대교회 지향적 수단과 방법은 온갖 부정과 타락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에 대한 극도의 회의감을 느끼게 된 몇몇 목회자들이 교단이라는 절대 구조를 이탈, 독립된 교회의 소신목회를 통하여 교회의 본질적 사명을 회복해 보려한 것이 그것이다.
독립시 문제가 되는 것은 독립된 개교회의 신앙과 신학적 토대가 확실하고 선명해야 한다.  그 자체가 불분명하고 독립의 목적의식이 희미하면 이단으로 빠져서 본래의 취지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 기존 교회의 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즉 독립시에 선명한 신학적, 신앙적 지표가 확립되어 교단 교회를 향해 그 모순을 지적하고 그 방향을 명확히 제시하지 못하면 사교화 내지는 이단의 길을 걸어 배교하는 교회의 모습을 낳게 될 것이다.  그런데 위 세 교회는 적어도 이러한 점에서는 그 독립의 목적의식이 비교적 분명했다 볼 수 있다.
특히 김현봉목사의 아현교회 건립은 그의 헌신과 뜨거운 구령의 열정으로 인하여 이루어졌다.  김현봉목사는 성령의 뜨거운 감동을 체험한 직후 하나님 나라건설을 먼저 해야 할 것으로 믿어 사회운동가에서 신학생으로 변모하였다.  러시아 영내의 한국인들이 조직한 '노회'의 추천을 받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리하여 1928년 제 23회로 졸업하게 되었는데 졸업과 동시 서울로 오게 되었다.  이때 공덕(리) 교회를 맡아보게 되었는데, 이것은 남대문교회 당회장 오순영목사가 추천해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결혼을 하였다.  그는 아들, 딸 낳지 않기로 하고 당시 세브란스병원 간호원이었던 28세의 처녀 박천선과 결혼하였다.  결혼직후 경기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당시 공덕교회에 홍장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아들은 집사일을 보고 있었다.  이들이 성수주일을 하지 않는 등 멋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여러번 권면하였으나 듣지 않으므로 사임하고 새로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는데 그 교회가 아현교회인 것이다.  아현동 37번지, 공동묘지터에 빈민촌이 세워졌는데 그곳에서부터 개척케 된 것이다.
2. 독립교회의 교회관
김현봉목사는 지상교회에 대하여 말하길 "지상교회는 신성불가침이 아니다.  그러니 별별 사람이 다 모이는 것이다.  외로워서 사람을 의지해 보려고 나오고, 장가 시집가기 위해 나오고, 출세하기 위해 나오고, 득표하기 위해 나오고, 협잡하려고 나오고, 순전히 마귀로서 음란하기 위해 나온다.  정말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들어와 있는 곳이 예배당이다.  초신자들은 주의를 하라.  교회 다니는 사람이 다 예수 믿는 사람이거니 하고 믿다가 잘못되어 못된 행실보고 낙심하여 떨어지고 만다.  요즈음은 교인이라는 사람이 돈 떼어먹기가 예사다.  믿다가 타락하니 심히 악해진다.  아주 악해져서 양심이 화인 맞아 목사 장로할 것 없이 악하다.  제자 중 유다가 있고, 또한 사도들이 택한 집사중에 니골라가 있고, 교인 중에는 믿는 일 하지 않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가라지와 알곡이 비슷하니 속는 것이다.  그래도 나중에는 드러나고 마는 것이다."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교회관은 칼빈의 교회관과 크게 다르지 않다.  유형교회나 무형교회는 관계가 있지만 유형교회, 가견적교회의 회원이 곧 무형교회, 불가견적교회의 회원이라 할 수 없는 사실과, 지상에 있는 교회의 한시성과 불완전성을 그는 이야기 한 것이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령께서 교회에 내주 하시므로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교회를 다스리신다.  따라서 노회, 대회, 총회같은 상회들이 개교회를 지배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개교회를 다스리는 최고의 통치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요, 교회마다 개교회의 독립성, 자치권, 보호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조영엽은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대동교회나 성약교회, 아현교회는 이러한 원리에 충실한 교회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3. 타교회들과의 상호협력
구제와 선교 같은 하나님의 일들을 보
3. 타교회들과의 상호협력
구제와 선교 같은 하나님의 일들을 보다 더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경우에 따라서는 신앙을 같이하는 타교회들과의 상호협력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이 복음을 인하여 핍박을 받을때 설상가상으로 흉년까지 엄습하였는데,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을 위하여 여러 교회에 구호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롬 15:25-26),  이에 호응하여 온 교회들이 자원하여 구제에 적극 참여하였다.  여러 교회의 위원들이 구호품과 구제금을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서 사도들에게 맡겼으며, 사도들은 성령님의 지도하에 구호를 필요로 하는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 안디옥교회가 할례 문제로 쟁론이 있을 때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행 15:1)고 하였다.  안디옥교회는 대표들을 선정하여 예루살렘 공회에 파송하여 문제해결책을 요청하였고, 이에 응하여 예루살렘 공회는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유다와 실라를 안디옥교회에 파송하여 일을 수습하였다.
이러한 성경의 예처럼 독립교회들은 자신들과 형제관계를 맺고 있는 교회뿐 아니라 여러 개교회들과의 유대와 협력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고 있다.  성약교회의 경우에는 교파를 초월하여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목회세미나를 열고 있다.  아현교회의 김현봉목사의 경우는 이러한 가르침을 일생동안 베풀었다.  또한 각 교회 직분자의 임직을 위한 제반논의와 절차, 임직식 등을 위하여 모임을 갖는다.  
4. 독립교회의 예배
교회의 예배들도 대동교회나 성약교회는 개신교 교회들의 예배의식과 크게 다른 것이 없다.  그러나 형식이나 제도보다는 내용과 본질에 더 치중하였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중에 특히 김현봉목사는 마음을 다하여 예배를 드릴 것을 권면했다.  주일학교 예배는 7시 30분(오전)이었는데 일년내내 변함이 없었다.  이것은 어린아이들에게도 정성들여 주일 지키며 예수 믿는 법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장년주일학교는 9시에 시작하여 10시 15분까지 성경을 차례대로 강해해 나갔다.  주일 낮 예배는 10시 30분부터 11시 30분까지 드렸다.  오후예배는 오후 2시부터 1시간 드렸다.  그리고 저녁예배는 없었다.  예배는 기도를 시작하고 찬송한 후에, 성경을 봉독하고 설교를 하였다.  그 사이에 간간이 찬송을 불렀다.  그리고 설교를 마친 후 축복기도로 예배를 끝냈다.  온 교인이 온종일 안식하는 법을 가르친 것이다.
5. 독립교회의 신앙고백
이 부분에서 조사한 것은 제시한 독립교회의 신앙 노선이 어디에 있는가이다.  이 여섯 교회는 각 교회 나름대로 추구하는 신앙의 노선이 문서로써 제시하고 있는데 대동교회는 설립자인 김석준 목사의 강의인 "기독자의 바른 자세"로 나타나 있고 성약교회는 역시 설립자인 김홍전 목사의 저서 "복음이란 무엇인가"를 통하여 그 방향을 언급하고 있다.

1) 대동교회


대동교회의 설립자인 김석준 목사의 강의인 "기독자의 바른 자세"를 통해 본 신앙사상은 다음과 같다.
   (1)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롬 8:14-16, 히 12:9)
이 개념은 현존 세상에서는 자녀로 구별되나 무궁 세계에 가서는 딸은 없고 전부 아들 뿐이다.(엡 1:5).  그 세계는 생육하고 번성하는 세계가 아니고 오직 누리는 세계이기 때문에 아들 딸이란 구별이 없고, 또 그 세계는 육체가 아니고 영체이기 때문에 아들 딸이란 구별이 없이 다 하나님의 아들 자격을 가지고 子權으로 행세하는 것이다.  그런고로 자녀란 말은 세상에서 신체를 가지고 있을 기간만 사용되는 것이요, 그 세계에 가서는 다 동등한 자권(子權)으로 행세하게 된다.  그리고 그 세계에서는 하나님의 자권으로만 만족한 세계요 누리는 세계이다.
   (2) 나는 영존할 자이다.(요 5:24, 6:47, 엡 2:1, 5:8, 골 1:13, 요일 3:14, 5:13)
이 말은 택함받아 구속 입은 성도가 사선에서 끝나거나 혹은 목석으로 변하거나 금수로 화할 것도 아니고 영원불멸의 존재임을 나는 확신 해야한다.
   (3) 현세는 나의 영존처가 아니다.(전 1:2-7)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정, 사랑, 마음을 두지말고 언젠가는 주님이 부르실 때 이것과 이별한다는 것을 알고 살되 영세주의, 초절주의가 되어서는 안된다.
   (4) 나는 현세에서 조만간에 떠나야 한다.
이 뜻은 언제 떠날지 예고 없다는 말이며, 영원에 비교하면 빨리 떠난다는 말이다.  즉 영과 육이 다 떠난다는 말이다.
   (5) 현세는 나의 영적 실력 양성의 교육장이다.(게 3:18-19, 19:7-10, 약 1:2, 롬5:3)
현세는 현실 세상이며, 여기는 우리로 영원히 누리라고 주신 곳이 아니기 때문에 현세에서 선한 싸움 다 싸우면서 영적 실력을 양성해야 된다.  현세 아니면 우리는 영적 실력 양성은 못한다.
   (6) 나의 영원히 누릴 곳은 무궁세계이다.(요 14:1-2, 계 21:1-8)
성도의 영존처는 무궁 세계라는 믿음이 확실해야 한다.  이 삶의 목적이 분명치 않으면 성도의 신앙은 자기 위주의 신앙으로 이기화 된다.
   (7) 무궁 세계는 실력대로 누린다.(계 22:12)
이 땅에서 영적 실력을 기른 그대로 무궁 세계를 누리기 때문에 환경이 교차되는 현세에서 영적 실력을 향상시키는데 주력해야 한다.


2) 성약교회


성약교회는 역사적 개혁 신앙과 그 정통 신학을 오늘날 이어받고 전파에 주력하는 것을 신도의 생활화하는데 목적을 둔다.  성도가 진척할 신앙의 자세에 대해, "누구나 복음을 진정으로 받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그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역사하고 있음을 체험할 것이다.  복음의 실내용을 받는다, 곧 구원을 받은 자는, '그 눈을 뜨게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 돌아온' 자요, 죄사함을 받았고, 또 예수를 믿어 거룩하게된 우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는다(행 26:8)이다.  그는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심'을 입고 그의 사랑의 아드님의 나라로 옮기우심을 받은자(골 1:3)이다.  구원을 받은 자에게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끊임없다.  그 사람을 붙들어 주시고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그에게마다 나는 '새 사람(엡 4:24, 골3:10)은 항상 힘있게 활동해야하고 그리하여 그는 시험과 흑암의 권세를 물리쳐야하며, 자기 일생의 인생길을 오직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인도하시는대로, 좌우로 치우침 없이 바르게 행진해야 한다.  사람은 잠시라도 성신께 의지 않고서는 구원의 능력 안에서 사는 자의 생활을 할 수 없다.  신자는 만사에 성신님을 의지하고 사는 데에서 복음이 항상 신선한 희소식임을 맛볼 것이다."라고 그 방향성을 제시한다.  각 성도는 배운 도리대로 열매 맺는 생활을 하는 자체가 개혁신앙운동의 일부분으로, 각자 각성한 바 도리대로 생활하는데 주력한다.


3) 아현교회


김현봉목사의 가르침대로, 삼위일체론, 기독론 등에 있어서 정통개혁파교회의 가르침에 충실하였고, 특히 보혈과 십자가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가르침이 있었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었고 하나님의 진노의 자식이다.  따라서 영원한 사망의 저주를 받아 구원의 소망이 전혀 없다.  하나님의 축복은커녕 사탄의 노예와 죄의 멍에 아래서 무시무시한 파멸 속에 떨어져 있다.  이와 같은 차제에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변호자로서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개입하셨다.  즉, 하나님과 의로운 심판하에서 모든 죄인이 위협받고 있는 모든 형벌을 그리스도께서 홀로 감수하시어, 하나님과 인간을 소외시키는 모든 죄악을 그의 피로서 씻어버리셨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 화목제에 의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진노를 잠잠케 하셨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인간의 평화와 화해는 바로 이 시간에 근거한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이로인해 우리에게는 칭의가 생기며 복음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믿는 상태에서 우리에게 진정한 하나님의 평화를 제공한다.  그러므로 김현봉은 죄인이 그의 전적인 겸손 속에서 하나님께 은혜를 간구할 때 그는 '칭의'를 취득할 수 있다고 했다.


4)신촌교회


신촌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안병모 목사는  철저한 칼빈주의 사상과 웨스터 민스터 신앙고백을 신조로 개혁주의 신앙 노선을 가고 있다고 그의 교회소개지에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는 과거 한국 장로교의 모태였던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였고, 그 후 육군본부교회에 군목으로 근무하였으며, 대한 에수교 장로회 총회전도부에서 일한적도 있다.
초기 장로교회의 신앙을 본 받아 검소한 믿음 생활을 하겠다는 안목사의 생각에 따라 여성도들의 경우 검은 치마에 흰저고리를 입고 교회에 나오기도하는 점이 특색있다. 안목사 자신도 머리를 깍고 삼베옷을 입는등 교리나 에배형태는 기존교회와 차이가 없으나 오직 말씀중심으로 살고자하는 열정이 있다.
5)염천교회
염촌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이한영 목사 역시  철저한 칼빈주의 사상과 웨스터 민스터 신앙고백을 신조로 개혁주의 신앙 노선을 가고 있다. 고 김현봉 목사의 독립교회 사상에 매료되어 당시 노회와 총회가 개교회를 위한 제기능을 못할 때 의연히 교권주의에 맞서 소신목회를 하기위해 신앙과 사상은 그대로 인채 교회의 행정만이 독립을 하였다.


6)서부교회


고 백영희 목사에 의해 설립된 서부교회는 고 백영희 목사가 고신출신인 관계로 신학적으로는 보수 개혁주의 신앙을 고수하였다.  신구약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유일한 법칙으로 믿고, 사도신경, 니케아 신경, 콘스탄틴노플 신조를 정통교리로 채택하였다.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 및 대소요리문답을 성경과 사도신경의 가르침을 가장 잘 나타낸 것으로 보고 그것을 사용한다.


7) 신앙고백에 대한 평가
위 여섯 교회의 신앙의 방향에 대해 알아본 결과 공통적으로 나타난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신자의 자세이다.  한국교회가 근자에 와서 대교회 주의, 조직화 운동 등으로 성도 개인의 중요성이 상실되고 있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성도는 대체로 교회 조직의 일원으로서 조직의 부품과 같이 그 가치가 격하되고 있다.  그러나 위의 여섯 교회의 신앙운동을 통해 나타나는 것은 성도 개인의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할 자세를 구체적이고 정확히 제시해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교회가 대형화, 조직화, 물량화, 세속화되는 속에서 교회 성장 위주의 추구를 배격하고 구속받은 성도 개인의 신앙자세를 명확히 제시하며 실천하게 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세우신 교회의 모습을 올바르게 찾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발견 할 수 있다.  시대의 흐름에 역류해 오르며 가능한 한 성경의 가르침대로 지키며 살려는 의지를 세속화된 교회는 주목해야 한다.


6. 독립교회의 정치와 행정


조영엽은 개교회의 권한들을 맥클레인(Alva McClain)의 말을 빌려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개교회의 회원들은 치리할 권징권을 가지고 있다.  
    이는 사도 바울이 개교회로 하여금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          와 악한 사람은 교회에서 출교하라고 명령(고전 5:13) 하였기 때문이          다.  교회의 순수성을 보전하기 위하여 교회는 권징권을 사용하여야          한다.  권징은 교회의 임무인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칼빈도 교회의 표지의 요소중의 하나로 권징을 이야기한 것이다.  독립교회 또한 권징을 시행한다.  아니 오히려 기존의 교회들이 성경적인 권징을 시행치 않는데 대한 반발로서 세워진 교회들이 많기 때문에 지금 예로 들고 있는 세 교회뿐만 아니라 많은 독립교회들이 권징을 시행하고 있는 것이다.
    개교회는 직원들을 선출할 권리들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초대교회의 직원들은 사도들이 하지 않고 개교회가 직접 선출하도록           하였다(행 6:1-6).  이와 같이 오늘날도 교회 직분 선택에 있어서 사           전에 직분의 자격, 임무, 권한 등에 관하여 성경말씀이 교훈하는대로           가르치고 광고하고, 신앙으로 기도와 말씀으로 준비케하여 교회가            정한 일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일정한 방법에 의하여 교회 회원들(세           례교인들)이 직접 선택하도록 해야한다.  선택방법은 기명이나 무기           명 투표로 하되 결격 사유가 발견되면 제직임명전에 무효화 할 것이           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독립교회들만큼 이러한 원칙을 철저히 지키는 교회들이 드물 것이다.  혹자들은 독립교회가 담임목사의 전횡과 횡포가 우려된다고 하지만 교회의 직원들이 성경의 원리하에 엄격하게 선출된다면 성숙된 교인들과 직원들에 의해 교회가 운영되므로 그러한 우려가 결코 문제가 될 수 없다.
    교회의 규례들을 보호하고 지킬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 터, 방파제이다(딤전 3:15).  교역자들이 타락하           는 만일의 경우에도 교회는 교회의 모든 규례들을 지키고 보호할 사           명이 있다.  모든 규례들은 우리를 위하여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하였다.(고전 11:23)  여기에 "너희"는 목사 또는 장로가 아니라 성           도 전체를 가리킨다.  성도들 전체는 교회의 규례들을 지켜야 할 책           임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개교회들은 성경의 원리원칙 안에서 각각의 규례와 규칙을 제정하고 폐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이다.  물론 거대교단에는 헌법이 있고 규칙들이 있지만 그렇다고해서 그것이 개교회의 독립성을 침범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개혁자들이나 현대의 신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각각의 독립교회들은 교회의 규례들을 만들고 또 지키고 있다는 점에서 개교회의 고유한 권한들을 보존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개교회는 자신들 교회의 내부의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할 권리가 있다.
         개교회내에 어떤 어려운 문제가 있어서 개교회 자체가 해결하기 곤           란할 때는 상회인 노회나 총회에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다.(고전             6:1-15).  
그러나 가능한 한 개교회의 문제들은 개교회가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또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각 독립교회들은  소속된 교단이나 노회가 없어도 잘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신약의 모든 교회정치는 개교회들에만 적용시켰다고 할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큰 사업을 하기위해서는 상회의 역할이 크다.  교역           자 양성을 위하여 신학교를 운영하거나, 해외 선교사의 파송, 타교단           들 과의 연합, 신앙적 교리정립, 성경적 연합운동 또는 집회, 협동적           구제 등은 개교회들로 구성된 노회나 총회 같은 상회의 역할이 지대           하다.
  그러므로 상회와의 관계를 무시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들로 해서 상회가 구성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교회들을 대표하는 기구에 불과하므로 민주적 협의체로서의 기능을 발휘하여야만 할 것이다.
    개교회의 문제에 관한 한 개교회의 권위는 최종적이다 할 것이다.
         개교회 이상의 고등재판소가 없다. 극단적으로서 개교회가 다수              에 의하여 이단으로 넘어가도 할 수 없다.  인간적 측면에서 고려한           다면 개교회의 문제에 관한 한 개교회가 결정할 최종적 결정권을 가           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독립교회들이 다소의 위험성은 있지만 최종적 결정권을 가지고 자신들의 교회의 정치, 행정을 자율적으로 집행해 나가는 것은 온당하다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개교회는 그러나 타교회들과의 유대관계를 소홀히 하거나 무시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함을 받은 믿음의 형제, 자매들이므로 공동체적 책임과 특권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계 1:9)가 우리가 속해있지 않은 다른 교회에 의하여 증거되는 증거와 별개의 것으로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상호간 물심양면으로 서로 협조하고, 교리적인 문제들을 규정짓고, 이단을 경고, 방어하는 것은 매우 필요하다.  다만 예루살렘 공회에서처럼 개교회정치에 간섭하지 않고 개교회들이 성경 원리대로 시행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금일 다수의 교파들은 정치적 교권이 너무 강하여 중요시해야 할 신앙적, 교리적 문제들은 소홀히 하고 개교회 정치와 행정에만 너무 깊이 간섭하는데 이것이 성경원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도 교권 침해는 정당화 될 수 없다.  모든 것은 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개교회 중심이면서 상하, 또는 좌우협력, 유대강화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성경의 원리이다.
1) 독립교회의 정치와 행정비교
 

  (1) 대동교회


교회의 정관은 따로 없고 장로교 헌법(합동)으로 교회의 제도 및 처리를 기준한다.
교회 전체 운영을 위해 임사부를 두고 산하에 재정부, 조직부, 교육부, 전도부, 건축부, 수리부, 관리부, 수양관(기도원), 출판부, 봉사부, 구제부, 섭외부, 찬양부, 성가지도, 반주 등을 두어 평신도가 각 부에 부(차)장을 맡아 교회를 주신 은사대로 섬기게 한다.  그리고 교육부에는 청년부(대학부 포함), 중.고등부, 유.초등부를 두고 각 부서에 부장과 교사, 부교사를 임명하고 각 부 후원회를 조직하여 교육비를 자체 충당하도록 한다.  여기서 교사는 1명이며 전도사와 같은 일을 하되 학부생에서는 전도사를 세우지 않는다.  부교사는 보통 교회의 교사의 역할을 한다.  여전도회는 40세 이하를 에스더라 칭하고, 40세 이상을 마리아라 칭하여 이원화 하고 있다.
  

(2) 성약교회


특별한 제도는 없고, 집사 한 분만 임명되어 있어 그 분이 제정을 관리한다.  교인수는 장년 45명 정도이다.
  

(3) 아현교회


아현교회에 대한 구체적인 정치와 행정에 대한 자료는 없다 단지 그의 가르침의 단편들을 정리 해볼 때 다음과 같은 것들을 추측 할 수 있다.
치리에 대해서는 "교인이 잘못 하더라도 그 교인의 정도와 형편, 처지, 교회의 상황을 보아서 가르칠 것이고 만약, 벌을 잘못하면 악감정만 나게 해서 손해만 본다.  그대로 두면 스스로 해는 볼지라도 이것저것 생각해서 그대로 두는 것이 법이다.  자신이 만들어져야 성경을 써먹고, 이 말씀이 (성도들 자신으로 하여금) 포용성, 관용성, 그리고 너그럽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래서 자꾸 하나님의 성품과 같아진다" 이것은 교회가 권징을 시행은 하되 신자의 신앙정도에 따라서 또 가능하면 말씀을 가르쳐서 스스로 깨닫도록 하자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장로에 대해서는 "장로는 교회를 쥐고 펴고 하는 짓을 하면 장로의 자격이 없다.  장로가 교회의 주인도 아니며 목사도 주인이 아니다.  주인은 오직 그리스도인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장로는 주인이요, 목사는 품팔이 꾼이 되어있는 것이다.  목사가 장로를 책망하면 책망은 받지않고 목사를 쫒아내는 것이 다반사이다.  교인 몇 명에 장로 한명을 세우는 것은 성경에 없다.  숫자와 조직의 일부는 편리할 수도 있겠지만 조직에 치우쳐서 자격이 없는 자도 장로를 세우니 이 사람이 목사를 가르치고 쫓아내고 하는 것이다.  장로는 목사를 주관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장로가 되지 아니하였으면 오히려 범죄치 않을 사람이 있다.  그러나 목사가 평교인만도 못할 때에는 불가불 교인의 대표와 장로가 교회를 이끌어 가는 것이 옳을 것이다.  장로는 목사의 조력자이다. 그런데 권세를 부리고 주인 노릇하며 일꾼 내쫒고하는 것은 벌 받을 일이다.  장로가 장로의 일을 못하면 교회의 분쟁의 원인이 되고, 장로 때문에 목사가 교회 일을 못하게 된다."
이러한 그의 설교에서 볼 때 아현교회는 장로교회는 아니지만 장로제도를 인정하고 있으며 개교회의 자율성과 독립성 특히 공동의회에 의한 교회운영과 정치를 하였음을 볼 수 있다.  
    

(4)신촌교회


현재 교인이 600명정도인 신촌교회는교회당이 협소하여 사택과 다락등으에서 모니터로 연결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다. 교역자로는 안목사와 전도사 9명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기존교회와 별 차이가 없는데, 남자와 여자성도들의 자리가 구분되어 있어 초대교회를 연상케 한다. 십자가상과 피아노등이 없는 것은 이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에서가 아니라 단지 형편이 여의치 않아서 그렇게 했을 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성도들이 한복을 입고 에배를 드리는 것이 이채롭다. 교회운영에 대한 전반은 기존의 교회와 별다르지 않다.


(5)염천교회


목회방침으로는 성도개인의 구원을 이루어가는 성화에 중점을 두고 있는데, 행정조직으로는 주일학교를 위해 반장(교사)몇명외에 일체의 직분을 두지 아놓고 있다. 집사, 권사, 장로, 구역장, 남녀전도회 회장, 성가대등의 일체의 기관이나 조직이 없이 다만 두사람의 전도인이 교회의 모든 행정, 재정, 을 보조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6)서부교회


목회행정 전반이 주일학교 중심으로 꾸며져 있다. 모든 훈련이나 교육도 주일학교 중심으로 꾸며져 있기 때문에 동양에서 가장 큰 주일학교를 운영하는데 주일학교 학생수가 자그만치 일만명이 넘는다. 기존의 교회운영과 다르지 않은 조직과 행정체계를 가지고 있으나 백영희 목사 사후 네 교회로 분열되는 아픔을 겪었다.  
  


2) 독립교회 행정에 대한 견해
위에 제시한 교회들은 모두 기존적으로 내려오는 장로교회제도와 헌법을 토대로 교회 행정을 이끌어 가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성약교회의 경우는 평신도가 주축이 된 교회의 모습을 찾고져 하는 의미에서 새로운 운영지침을 마련한 듯 하다.  각 교회들이 대교회의 조직중심, 제도중심의 교회보다는 성경을 올바로 배우려는 자세가 기초적으로 확립되어 있기 때문에 제도와 행정면에서 부실한 면도 없지 않다. 특히 염천교회의 경우에는 이러한 면이 더 강하다. 그리고 각 교회의 예산 편성 집행보다는 결산 위주의 집행을 했고 헌금 상황을 잘 파악 못하여 구체적으로 각 부별 행사별 %를 조사하지 못했으나 공통점은 제도보다 성경의 진실된 가르침과 배움을 중점적으로 하고 있다.
아현교회의 경우는 김현봉 목사가 늘 가르치기를"교회에서 큰 자가 천국에서도 큰 자이다.  남을 위해 일하고 남을 위하는 자가 큰 자이다.  자기 일 하고 또 힘이 있으니 남을 위해 일해주는 것이다.  이이가 큰 자이다.  자립심을 길러야 한다.  이왕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학교공부 할 형편이 되지 않을 시는 자기가 고학으로 하는 것이다. " 그러면서도 늘 구제를 강조하였다.  "빌어 먹을 수 있는 자를 도와주는 것은 결코 그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력을 못 길러 주는 것이고 이런 자가 많을 때는 국가가 가난해진다.  그러나 조금 도와주어 그의 장래에 유익을 줄 수 있다면 힘껏 도와주는 것이다.  구제는 잘해야 한다.  잘못하면 해를 끼치는 것이 된다." 고 했다.  물론 아현교회의 김현봉 목사는 다른 교회행정은 교회의 직원들에게 위임했지만 교회의 재정만큼은 그가 직접 관리하면서 전권을 가지고 주로 교회의 구제를 위해 사용했다는 것이 특이하다. 그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서 아현 교회 안에서는 전혀 불평이 없었으나 바깥에서는 독재라며 빈정대기도 했다.  


Ⅷ. 독립교회의 가능성


1. 독립교회의 단점
한국교회내에서는 전통적으로 교단이 발전했기 때문에 독립교회라는 이름이 주는 의미가 생소하고 아직 이 개념이 일반인들에게 잘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교회사적으로 볼 때 종교개혁은 카톨릭교회에 대한 독립교회 운동이었고, 장로교회, 감독교회, 회중교회등은 주지하다시피 처음엔 모두 독립교회로 출발하였었다. 신학이나 실천에서 동일하나 정치적으로 교단을 형성하거나 서로 유대를 갖지 않는 이러한 특징을 일반교인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약점이 있다. 즉 신학적인 건강한 기초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립교회(Independent Church)라 할 때 일단 사람들에게 주고 있는 거부감은 그 명칭에 따른 모호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독립교회라 할 때 그 개념은 기존 교단에 속하지 않고 자유로우며 개교회의 독립성과 자율성 즉 교회의 자치권과 행정을 독립적으로 운영해 가는 교회들이라고 넓게 지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면이 오히려 사람들에게는 이단적인 거부감을 주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교단에 대한 이미지가 강한 한국교회의 특성상의 문제이기도 하겠지만 지금까지 너무 많은 이단들이 출현 해 한국교회에 피해를 입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독립교회는 앞으로 무엇보다 이러한 이미지 개선 작업에 더욱 노력을 경주하여야 할 것이다.


1) 교단과의 관계문제
독립교회의 장점이며 자랑이기도 한 개교회의 자율성과 독립성 문제가 향후 독립교회성장의 가장 큰 장애물이 될 것이 틀림없다.  즉 기존의, 교단이나 교파에 치우치지 않고 독자적인 기준을 마련하여 시행해 나가고 있는 교회라는 긍정적인 측면이 많이 있지만 여전히 교단 중심 노회 중심으로 흘러가는 한국교계의 풍토상 독립교회의 홀로 서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닌 것이 사실이다.  조영엽은 다음과 같이 논한다.
    우주적 교회는 모든 세대에 구속함을 받은 모든 참된 성도들로 구성          된다.  따라서 개교회들은 우주적, 무형적, 신령한 교회들을 반영하는          참된 유형적인 교회들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          씀이 바로 증거되며, 성례가 바로 시행되며, 권징이 바로 시행되어야          한다.  신자들이 개교회에 가입하지 않아도 우주적교회의 회원이 될          수 있는가? 오늘날 교회들의 큰 문제들 중 하나는 개교회 중심, 교파          중심이 강하여 전 세계에 편만에 있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로 구성된 우주적 교회의 성질에 관하여 망각하고 개교회          만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개교회 중심주의는 교회를            물량주의로 하락시키며, 세속화시키며, 심지어는 동일한 신앙을 고백          하는 교회들, 신자들과의 신령한 연합도 저해시키며, 개교회로서 수행          할 수 없는 보다 더 큰 주님의 사업을 수행할 수 없도록 하는 중요           요인들이 된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상당수의 교회들이 배교와 불신앙으로 타락되었다는 사실이다.  교회가 타락되면 그 교회는 더 이상 성령이 역사하시는 교회, 진리의 기둥과 터, 방파제로서의 교회가 아니다.  상당수의 신자들은 부지중에 신조와 신앙고백이 변질되고 신앙적으로는 저질화 내지는 세속화하게 된다.  한편 교회가 타락할 때 진실된 많은 신도들 중에는 그 여파로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로서의 교회도 등한시 또는 경시, 심지어 부인하는 경향이 발생된다.  따라서 개교회의 일원으로 가입하는 것을 주저하게 된다.  우주적 교회의 회원이 아닌 사람들, 즉 불신자들은 개교회의 일원이 되지 않은 것이 이상적이다.  그러나 지상의 유형적 교회는 실제상 가라지와 쭉정이도 들어있게 마련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에 대하여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고전 1:2)이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교회 내에 위선자들을 포함하지 않음이 분명하다.  위선자들, 불신앙자들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와 상관이 없는 자들이요, 교회의 회원들이 아닌 이상 개교회 회원들인 신자들에게 신앙상 피해를 주지 못하도록 교회를 보호해야 하며, 위선자들, 불신앙자들이 교회에 침입해 오면 추방해야 할 것이다.(마 18:15-18; 고전 5:1-13)  그러므로 독립교회들은 개교회의 독립성을 강조는 하되 신앙상 교리상 별 차이가 없는 다른 교단 또는 형제교회들과의 관계를 폐쇄해서는 안되고 개교회 행정 및 신앙노선을 개방하여 타교회와의 신령한 교제를 이루어가는 길을 섬세하게 모색해야 한다.
다행히 최근에 독립교회의 위상을 새로이 정립하고자 하는 운동이 일ㅇ나고 있다. 독립교회연합회가 생겨지고 협력을 서로 모색하고 있는등 매우 고무적인 일이 일어나고 있지만 본 연구자가 생각하기에는 단순한 친목 이상의 유대는 오히려 독립교회의 순수성을 해칠 우려가 있지 않을까 한다.


2) 목회자의 문제      
독립교회는 앞으로 한국교회에 기여할 수 있는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우려와 경계의 눈초리를 피할 수 없다.  그것중의 하나는 목회자의 과도한 카리스마로 인한 폐단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독립교회의 탄생 이면에는 목회자의 강력한 리더쉽과 독선에 가까운 홀로서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생전에만 영향력을 발휘할 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계속해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게 된다.  이들 교회들은 대개가 기존의 교단들이 지나친 교파주의로 개교회를 고립시키거나 과도한 교권주의로 신앙의 순수성을 잃어버린 채 파행적으로 운영되는 것에 반대하여 교단의 굴레를 과감히 벗어 버리고 홀로서기 한 경우가 많다.  개혁교회의 신앙지표인 말씀의 올바른 선포와 성례와 권징을 무시 혹은 왜곡하는 것에 대하여 회의를 느끼고 자신들이 속하여 있던 교단을 탈퇴하여 독자적 행정체계를 갖거나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독립된 행정과 신앙관을 가지고 창립한 교회 등이다.  이러한 독립교회의 발생이유는 그 당시로서는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지만 시대가 지나고 그러한 요인들이 상당히 제거된 뒤에도 과거의 전통에만 묶여 있게 되는데 이는 목회자의 영향력이 너무 많이 교회에 미쳤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설립자 혹은 목회자 개인의 신앙이 성도들의 신앙을 극단적으로 폐쇄시켜 사교화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독립교회의 실제적인 출현은 시간이 지날수록 대세화 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더 많은 독립교회들이 출현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므로 앞서 지적한 목회자의 지나친 영향력을 배제할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의 보완이 필요하다.  아현교회 김현봉목사는 그가 세상 떠날 때가 가까워졌는데 그는 자기 정신을 바로 이해하는 이가 없는 것과 교회 앞날을 염려하여 탄식하면서 "하나님 나를 불러가옵소서"하고 기도했다고 한다. 또 임종하기 얼마 전에도 "하나님께서 자꾸 나를 징계하시는데 이 교회가 앞으로 어떻게 될런지…"하며 걱정했다 한다.  이에 대하여 엄두섭은
     김현봉목사의 정신이 특별했기 때문에 그를 추종하는 목사들도 많았           고 김목사는 젊은 목사들이나 청년들을 기르기 위해 자신의 온갖 정           력을 다 썼다.  그러나 결과는 그들 중 다수가 자기 고집대로 하고,           김목사 정신을 바로 안 배우고, 바로 안 따르니 김목사는 실망속에           그런 기도와 탄식을 한 것이라 본다.
고 했다.  실제로 그의 이러한 기우는 김목사의 사후에 사실로 나타났다.  아현교회도 그의 사후에 분열되어, 결국 네 조각으로 갈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부정적인 결과는 엄두섭의 말처럼 김현봉 목사를 지나치게 흉내내는 목사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김목사는 설교할 때마다 목이 깔깔하여 가래 배앝듯 '캑캑'하여 밥알           하나 정도의 가래를 곁에 준비해 둔 신문지 자른 종이에 닦는 습관           이 있었다.  그를 따르던 젊은이 중 어떤 분은 신통하게도 설교하다           가 꼭 김현봉목사식으로 '캑캑'하여 종이에 닦는 습관이 있는 이도            있었다.  또 어떤 목사는 말하는 것, 동작, 손가락 놀리는 것, 밥숟갈           놀리는 것까지 신통하게도 김현봉 목사를 닮은 이들이 있었다.
   이러한 경향이 독립교회의 목회자들에 의하여 나타날 수 있는 단점들이다.  또 김현봉목사의 제자라기보다는 동지의 한 사람이었던 부산의 백목사도 생전에는 독립교회로서 부산 경남지방에서 크게 성공한 목회를 하였으나 그의 사후에는 역시 네 개의 교회로 갈라지는 아픔을 겪었는데, 그 일차적인 원인은 백목사의 카리스마를 벗지 못한 일부 교회의 추종 성도들이 새로운 목사를 모시기보다는 생전의 비디오 녹화 테입으로 예배를 대치하였기 때문이다.      
3) 지나친 구별의식
앞서도 잠시 언급하였지만 독립교회가 가지고 있는 지나친 구별의식에 문제가 있다.  독립교회의 독자노선 추구 및 설립동기를 원인별로 분석해 보 때 이해되는 부분이지만 그러나 세월이 지난 지금 까지도 그러한 의식으로 형제교회에 대하여 배타적인 의식을 갖고 있다면 고쳐야 할 것이다.  독립교회의 발생 이면에는 교단적 잘못된 결정사항 (신사참배 결의 혹은 불신법정 고소문제)등의 자체의 범죄행위에 동참하는 죄를 범치 않기 위하여 결별 혹은 독립한 것으로 신앙적 차이로 인한 이유와 기존교회의 이기주의, 대형화, 물질주의로 흐르는 부패된 현상을 개혁하여 교회 본래의 사명인 사회 속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되찾자는 교회 윤리적인 견해차이의 이유 그리고 인위적 압력의 수단화가 되고있는 거대교단조직의 경직성을 탈피하여 독자적 소신 행정을 펴기 위한 교회행정상의 이유. 기타 양보할 수 없는 신학적 견해차이의 이유. 등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교회들이 흔히 이단으로 치부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기존의 고정된 교회개념을 갖고 관찰하는데서 오는 오류일 수도 있다.  대개의 경우 우리나라 독립교회 설립당시의 출발은 적어도 절대적 하나님 중심의 신앙 목표 하에 신앙적으로 윤리적으로 그리고 교회행정 신학적으로 정로를 걷고자 시작된 용기있는 개혁운동 이었음을 부인할 사람이 없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지나치면 바리새 주의가 될 수 있고 개교회주의가 과도하게 심화되거나 교회의 통일성을 해치며 중구난방으로 흩어질 가능성이 있다.  또한 성경절대주의의 일면으로만 흐르다가 정통신학을 간과하여 이단적 요소를 배태시킬 위험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독립교회의 지나친 우월의식을 타파하지 않는 한 지난 시대에는 긍정적이었던 장점이 오늘날에는 오히려 단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여 새롭게 일신할 수 있는 과감한 노력이 요구된다 하겠다.


2. 독립교회의 장점


1) 21세기를 대비한 독립교회


세상에는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변하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며, 그 변화는 우리들의 삶의 전 영역에 미치고 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급변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21세기는 시시각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한 자는 아니나 세상에 살고 있다. "We are in the world but not of the world"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밖에서 따로 떨어져 살 수 없다.  세상의 변화는 교회의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변화는 신앙의 방법과 세계관과 가치관을 많은 부분 바꾸어 놓고 있다.  목회자는 변치 않는 성경의 복음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변해가는 세상에 증거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목회자가 무서운 속도로 변하는 세상을 바로 읽지 못한다면 시대의 낙오자가 되거나, 그 시대에 풍속에 빠져서 무력한 종교 지도자로 전략하기 쉽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4장과 25장에서 말씀하신 대로 시대의 징조를 바로 알아 깨어 있어서 오는 미래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평안하다 평안하다고  자위하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시대적 변화에 대안 없이 자폭할지도 모른다.  
이 연구는 다가오는 미래를 생각하면서 복음을 붙들고 고뇌하는 목회자를 위한 제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연구들이 과거에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21세기를 몇 년 앞으로 내다보면서 급격히 변하는 세상에 대비한 목회전략이 시급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목회전략 보다도 더 시급한 것이 있는데 새 시대에 필요한 새 부대를 준비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독립교회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김현봉목사는 일찍이 시대를 예견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자기가 된 것이 하나님 은혜로 된 것이지 자기가 잘나서 자기가 된 것이 아니다.  교회의 성직을 가지고 명예, 영광을 취하여 자랑하는 것은 자기를 망하게 하는 것이다. "
이러한 이유로 해서 독립교회들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 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더 우선으로 해왔던 것이다.  그래서 김현봉 목사는 신앙양심을 똑바로 쓸 것을 강조했던 것 같다.  "양심 깨어지면 마음 깨어진다"라고 하면서 신앙양심대로, 특히 중생한 영혼의 인도대로 살 것을 늘 강조하였다.  그러기 위해서 "참고 견디고, 인내심을 길러라"고 하였다.  중생한 개인의 신앙양심이 교단이나 교파의 정치보다 위에 있다는 원리가 이로써 나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성경보다 유전을, 주님의 가르침보다 전통을 더 따르는 것은 신앙양심을 저버리는 행위로서 이는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을 훼방하는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독립교회가 걸어간 신앙양심의 길을 인정하고 우리들 자신들을 돌아보는 거울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김현봉 목사에게서 영향을 받은 이러한 독립교회들은 교회의 목표를 좀더 작게 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기관으로서 교회가 여러 가지 책임과 임무가 있을 수 있겠지만 이들 독립교회의 지도자들은 교회의 역할을 진리수호와 진리전파로 한정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독립교회의 장점이요 단점이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길지 않은 역사속에서 많은 신앙적 도전들을 겪어왔다. 선교초기에 있었던 무속과 미신과의 투쟁, 일제시대 우상을 섬기라고 강요하던 신사참배에 교회가 동조한 일, 그리고 자유주의와 이에 반등하여 일어난 신비주의 운동등 수많은 바람들이 교회를 흔들어 놓았고 그 때마다 지도자들은 우와좌왕하여 이곳에 붙었다가 저 곳에 붙었다가 교인들을 잘 인도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여러상황에 대하여 권성수교수는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한다.
"정통신학의 공이 있다면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한 점을 들 수 있다. 신학을 하든, 목회를 하든, 선교를 하든, 사업을 하든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 앞에서라는 인식을 갖게하여 하나님을 우주의 왕 '왕중왕'을 강조한 것이다. 여기에 성경의 절대권위와 '오직 그리스도' 중심의 믿음을 그 공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과는 목회에 있어 '청중분석적 차원'을 밝히지 못해 양떼들을 이해하지 못하여 그들을 진리가운데서 살게 하는 데는 실패하였다"고 말한다.  
  
이말은 뜻은 결국 한국교회가 그동안 잎은 무성하였지만 열매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독립교회가 추구하고자하는 것도 결국 따지고 보면 하나님의 진리말씀이 강단에서 선포되어지는 대로 목회자가 살고 성도들로 살게하자는 운동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외에는 가급적이면 시간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것이다. 여기에 이들 독립교회의 정체성이 있는 것이다. 김현봉 목사가 가난한 청중들과 함께 목회하고 그들과 함께 가기를 원하였던 그길을 가고자 애쓰는 가운데 이러한 독립교회들이 형성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미래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그렇지만 미래의 세계와 한국이 어떤 모습으로 변할 것인가를 예측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역사는 워낙 돌발적인 사건, 사고가 많기에 역사의 방향이 어떻게 전개될는지 단적으로 결론 짓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해도 대안적인 미래를 제시하는 것도 현명한 선택에 이바지하므로 미래의 연구 는 불완전하다고 해도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오늘날처럼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과학기술적인 변화가 가속화되고, 미래의 모습에 대해서 기대와 불안이 교차되고 있는 시대의 변화에 추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국가나 민족은 세계사의 흐름에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국가와 기업들은 작은 정부와 작은 경영을 목표로 구조를 조정하고 있다. 과거에는 필요하였던 조직이었지만 지금은 고나료화되어 오히려 비생산적인 요소들이 많이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조정이 더디지면 공룡과 같은 조직들은 자체적으로 생존하는데에도 문제가 있을 뿐 아니라 시대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기도 힘들다,. 그러나 독립교회는 보다 다양하고 다변화될 다음 세기에 교회가 어떤 길을 가야 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지표가 될 가능성이 있다.  또한 교권주의와 교파의 틀보다는 더 중요한 것이 신자들 개개인의 신앙양심과 개교회의 독립적 자치권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조직의 융통성과 유연함을 잘살린다면 우리는 독립교회의 장점중의 하나인 절대적인 말씀중심의 신앙과 양심중심의 신앙을 보태어 더 발전 시킬 수 있을 것이다고 생각된다.  


2) 말씀중심의 목회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경이적인 성장으로 많은 구미교회들의 부러움을 산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에 따른 부정적인 요소가 너무나 많았다.  교회의 성장에 비해서 사회적인 신인도가 너무나 낮은 것이다.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야 할 교회들이 그 반대로 지방색과 교파주의 교단주의 또한 세속정치와의 야합으로 얼룩져 왔기 때문이다.  100여 개가 넘는 장로교단이 그렇고 난립되어진 신학교가 그렇다.  교회론의 성경적 정립에는 관심을 갖지 않고 프로그램 중심의 목회관도 그렇다.  '꿩 잡는게 매' 라는 식으로 극단적 실용주의가 교회에 가득하여져서 비성경적인 교회성장의 신학이 교회를 흐려 놓고 있다.
교회는 항상 특수한 시대적 상황속에 존재해왔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신학작업은 신학의 봉사적 성격을 상실할 우려가 있다.  왜냐면 신학의 존재목적이 신학 그 자체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상황 가운데 처해있는 교회를 섬기는 일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말씀은 제쳐두고 한국인의 심성 속에 있는 샤머니즘적 기복주의를 발동시켜 신비주의를 양산했다는 것이요, 둘째는 지성우월주의와 신인협동적 알미니안적 양태를 만들어 내었다는 것이다.  독립교회가 태동하게되는 역사적인 배경들을 살펴보면 기존의 교회들이 성경의 본질에서 벗어나 엇길로 가거나 아니면 인간의 유전이나 전통을 성경보다 우위에 놓으려고 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그러므로 독립교회의 신학정신은 보다 철저한 말씀중심의 사상이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독립교회는 다시 한 번 조명을 받아야한다고 생각된 것이다.
감성적이고 인간의 의지를 강조하는 목회적 경향들이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는데 특히 기도원 운동이나 신비주의 운동이 한국교회의 둔세주의에 편승하여 교회의 균형적인 신앙성장을 저해한 것이 아닌가 한다.  한국교회는 "오직 믿음"을 "오직 신념"으로 잘못 오해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는 "적극적 사고방식"이지 믿음은 아닌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를 믿되 기록되어진 말씀 안에서 해야한다.  그러나 적극적 사고 방식은 인간의 능력과 의지에 호소하며 양심에 호소하는 방법이다.  이는 자칫 율법적인 열심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런 유형에 속한 교회성장 프로그램이 "작정 OO일 새벽기도회" "총동원전도주일"등등이다.  이러한 운동들은 하나님의 섭리와 도우심에 호소하기 보다는 인간의 가능성과 의지에 호소하는 경향이 짙은 신학이다. 우리에게는 방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본질이 중요하며, 주변의 것보다는 내부의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독립교회는 이러한 측면에서 오래전부터 칼빈주의와 개혁주의에 입각하여 더욱 말씀중심의 목회를 추구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고 이를 더욱 계승하여야 한다.  
3) 개인구령의 관심
이들 독립교회가 가지고 있는 장점중의 하나는 개인구령 중심의 운동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아들을 통하여서 온 세계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구속활동(Missio Dei)에서 현 교회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참여하는가를 다루는 데에 그 어느 교회보다도 관심을 깊이 가진다는 것이다.  
요컨대 이들 독립교회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구원받은 자는 마땅히 복음에 빚진 자의 심정이 되어 이웃에게 그리고 또 다른 사람과 나아가 바다 건너에 까지라도 죄에 빠진 사람 구하는 일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을 강조해 왔던 것이다.
이러한 복음전도 위임과 개인영혼과 구원의 중심사상이 전도신학에 영향을 주는데 이러한 개인 영혼구원사상은 경건주의가 물려준 보수교회의 정신적 유산이다.  경건주의 지도자 스페너(Pillip Jacob Spenner)는 그의 저서「경건의 욕망」(Pia Desideria)에서 주장하기를 "참 경건의 실천, 즉 신자들의 작은모임, 성경연구 그리고 기도와 힘쓰는 일" 등을 이야기했다.  그는 "개인영혼의 회심만이 선교의 목적" 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우리의 선교실천에서 외로움에 떨고 있는 심령에 대한 위로의 사역, 죄, 마귀, 죽음의 위협 아래 있는 자에 대한 접촉과 관심등은 결코 우리가 등하시 할수 없는 사역들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인간적인 사랑의 실천을 도외시 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들을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경건주의 영향을 받은 독립교회들은 교회의 정치나 교권주의 몰입하기보다도 더욱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온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다음으로 우리가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진정한 복음전도는 개교회 중심으로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교회심기"를 해야 하는데 이러한 교회심기 사역은 개신교나 카톨릭이나 매한가지이다.  카톨릭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의 「Summa Theologia」에서 선교의 목적은 다양한 문화나 사회에서 구원과 선을 위한 기구로서 봉사할 중앙 집권적, 군주적, 그리고 성층적인 구조를 가지고 교회를 심는 것이라 하였다.  선교에 대하여 기스벨투스(Gisbeltus)는 주장하기를 "이는 이방인의 회심, 교회의 심음,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냄과 영광을 보임" 이라 하였다.  물론 때로는 로마교회나 대교단이 지향하는 교구주의도 선교에 도움이 되겠지만 성경이 보여주는 보다 성경적인 복음전파와 선교는 지역교회 즉 독립적인 교회들을 심어 자치적으로 주님을 섬기고 또 다른 곳에 복음을 전하도록 하는 일이다.
맥가브란 박사를 중심으로 한 교회성장신학은 수용성이 강하게 보이는 지역에 교회를 심음으로 더 많은 전도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으로 결론지어지는데, 수용성의 원칙과 숫자를 통한 정확한 통계만이 교회성장의 정도를 측정할 수 있다고 했다.  이때 교육사업이나 사회사업, 교회의 현실 참여나 역사 참여는 2차적인 것으로, 아니면 교회성장을 위한 봉사정도에 둔다는 원칙이다. 물론 교회가 이에 대한 책임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독립교회의 원칙은 개교회의 자치권과 자율성을 최대한 살려서 네비우스의 정책과 같이 교회를 살려 나간다면 얼마든지 더 나은 효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4) 교회의 자율성과 자치성


독립교회가 가지고 있는 최대의 장점은 개교회가 가지고 있는 자율성과 자치권에 대한 보다 명확한 이해와 실천이라고 할 것이다.  성경은 교회라고 할 때 지역이름을 붙여서 사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이러한 전통은 한국에 있어서도 예외가 없는 일이다.  물론 근자에 와서 "사랑의 교회"니 "산성교회"니 하는 형용사적 이름의 교회가 많이 생겨나고 있지만 이러한 교회들도 모두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는 교회들인 것은 사실이다.  지상에 있는 교회들은 이처럼 한결같이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는 특성을 갖게된다.  그렇다면 교회란 우리가 앞서 신학적으로도 살펴보았지만 그 지역에서 그리스도의 것으로 구별되어진 모임인 것이다.  이로 인해 각 지역교회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역적 특성과 독특한 문화를 바탕으로 자율권과 자치권을 가지고 자신들의 교회를 책임질 권한과 의무가 있는 것이다.  독립교회는 이러한 면에서 그 교회에서 일어나는 제반 문제들을 노회나 대회 총회 등의 의결에 의하여 해결하지 않고 교회에 주신 고유한 권한과 각 사람에게 주신 신앙의 양심에 따라 처리함으로 신약의 교회원형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물론 노회나 대회 총회 등이 필요는 하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형제애를 나누며 보다 큰일을 하기 위한 협력의 차원에서 하자는 것이기 때문에 개교회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권한을 간섭하거나 침해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직분자의 임명, 권징의 시행, 그리고 행정에 있어서 개교회의 자율을 중시함으로 교권주의나 나쁜 교회의 정치주의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는 것은 크나 큰 장점이라 할 것이다.
  

3. 한국교회의 현황과 독립교회의 가능성  

  
1) 신학적인 토대의 필요성  


한국교회는 여러 가지 좋은 전통들을 지금까지 지녀왔다.  선교사들의 피흘림과 오랜 세월 격동기 속에서도 복음주의적 전통을 잃지 않았으며 여러 좋은 신학자들과 순교자들의 업적은 오래오래 간직되어야 할 소중한 교회적, 민족적 유산이라고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초창기부터 복음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성장해온 이면에는 한국에 기독교신앙을 가져온 선교사들이 대부분 복음주의적 전통에 깊숙이 뿌리박은 미국 장로교출신들 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신종철의 논문에 의하면, 1983년에서 1901년까지 한국에 있던 40명의 선교사중에서 프린스톤신학교(Princeton) 출신이 16명, 맥코믹(McCormic) 출신이 11명이었고, 산 안셀모(San Anselmo) 출신이 4명, 그리고 뉴욕의 Union 출신이 3명, 그 외 Moody 성경학교와 뉴욕의 Biblical Seminary 출신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처럼 한국의 최초의 선교사들은 선교의 개척을 위해서 희생적 각오와 보수주의적, 복음주의적인 신학사상을 소유하면서 퍼뜨렸던 것인데 현금에 와서는 보수, 진보 양측에서 이들의 신학사상에 대해 "근본주의 일색" 이었다는 비판을 하고 있다.
복음과 상황은 타원의 두 중심과 같다.  전자는 불변하나 후자는 변한다.  불변성과 적응성, 복음의 씨와 그것이 뿌려질 토양, 이 둘은 사역의 성격과 방향을 규정하는 함수 요인들이다.  복음은 상황을 도전하고, 상황은 복음을 요청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항상 시대의 요청과 상황의 요구에 대하여 신학적 여과와 대답을 항상 준비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신학적 고찰을 중지할 때 역사 속에서 복음은 퇴색되고 외면 당하고 말 것이다.
교회는 항상 특수한 시대적 상황 속에 존재해왔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신학작업은 신학의 봉사적 성격을 상실할 우려가 있다.  왜냐면 신학의 존재목적이 신학 그 자체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상황 가운데 처해있는 교회를 섬기는 일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이러한 작업을 게을리 해 왔기 때문에 많은 좋은 공(功)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인 요소를 많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지나온 반세기 동안에 한국의 교회성장운동을 한 마디로 요약해 보자면 불건전한 신비운동(기도원운동과 은사운동)과 기복주의적 신앙의 양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급격한 산업화 속에서 탈락하는 사람들은 인간소외를 느꼈고, 이들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피안의 세계를 제시하는 세속적 기독교와 기도원운동으로 흡수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와중에서 교회의 상부구조라 할 수 있는 교단과 신학교는 신학적 자유주의와 이성주의의 물결에 휩쓸려 이렇다할 교회 성장신학을 교회에 제시해줄 여가가 없었다.  물론 교단의 필요성이나 교파의 필요성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유교사상과 장로교적인 분위기는 한국교회를 교조적인 분위기로 몰아가는 데 일조를 했다.  그래서 교단에 가입하지 아니한 모든 교회들을 이단으로 몰아가는 편협성이 너무 강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모든 이유는 우리의 신학이 너무 지엽적이기 때문에 보다 다양한 형태를 가질 수 있는 교회의 형태와 모양을 획일화시키고 말았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2) 보다 강력한 교회의 필요성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는 교회가 전혀 관심을 갖지 못한 채 지방색과 교파주의 교단의 정치로 개교회들이 정상적인 기능과 성장을 하지 못하는 가운데 90년대를 허비하고 말았다는 것은 한국교회에 불행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이 1960년대 미국교회들에서도 일어났다.
     딘 M, 켈리는 "1960년대 후반에 미국에서는 무엇인가 특이한 현상이           나타났는데 그것은 미국역사상 처음으로 큰교파의 대부분이 성장을           중지하고 쇠퇴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 시대의 극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사회행동을 연구하는 사람들에           게는 가장 주목할 만한 현상으로 인식되었다.(중략)  미국에서 가장           큰 기독교 교파 가운데 10개 교파는 그 전체 교인수가 1967년에              77,666,223명이었는데, 그 이듬해에 교인 수는 감소되었고 또 다음해           에도 감소되었다.  이들 교파들의 대부분은 식민시대 이후로 아무런           장애 없이 성장을 계속했었다.  1960년대 후반 이전의 10년간 그들           교파들은 성장이 둔화되었는데 그 가운데 어떤 교파들은 미국인구            증가에 보조를 맞추지 못했다.  그러더니 이제 그들 교파들은 교인           수가 감소하기 시작했고, 두 세기의 성장추세를 거꾸로 뒤집어 버렸           다."
그러면 종교는 더 이상 필요 없는가? 아니면 교회는 더 이상 필요치 않는가? 하고 그는 질문하면서 그럼에도 어떤 교회들은 성장하고 있다고 그 근거를 제시한다.
시대에 뒤떨어지는 그런 쇠퇴를 조직체 회원이 감소하는 이유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비슷한 활동을 하는 다른 조직체를 괴롭히는 유사한 사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만일 경쟁자가 일률적으로 적개심을 가진 풍토 속에서 번창하고 성장한다면 그것은 정말로 이상한 일이다.  이러한 시대는 문제가 어떤 조직체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있다고 하는 견해를 의심스럽게 만든다.  바로 이러한 상황이 교회들 가운데 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종교적 단체가 다 쇠퇴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개신교의 주된 교파들의 대부분이 감소추세를 일시적인 것으로 여기고 존속을 위한 고투를 하고 있는 반면에, 남부침례교, 하나님의성회, 하나님의 교회, 오순절 및 성결교단, 복음주의 교회, 몰몬교, 여호와의 증인, 흑인 모슬렘교 등과 같은 종교 또는 교파들은 생동력으로 넘치고 있다.  이 밖에도 생동력으로 넘치고 있는 교파들은 심지어 큰 교파들에는 알려지지도 않은 군소 교단들 가운데도 많이 있다고 도표로  그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급속히 성장하는 교단들은 종교는 폐물이 아니며 교회들은 죽은 것이 아니라는 증거를 말해줄 뿐만 아니라, 인정할 수 있는 종교에 대한 현대적 개념에 전적으로 배치한다.  이 교단들은 "비합리적" 이며 "관대" 하지 않고 "반초교파적" 이며 "적절" 하지 않다. 이것은 큰 모순이라 할 것이다.  이 교단들은 흔히 다른 교회들의 교훈, 안수, 성례, 등의 정당성을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이 교단들은 특수한 의식이나 특이한 식사관습을 지킨다.  또 이러한 교단 혹은 교파들은 불합리한 행동에 집착함으로써 "인류의 어지간한 견해"를 무시한다.  그러나 이렇게 비합리적이고 비사교적인 행위에 집착하는 종교교단이 번창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지적 수준이나 위치로 보아 마땅히 합리적이며 자유주의적인 교회들을 선호할 것 같은 사람들조차도 이러한 교회들에 몰리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느냐고 묻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 이유를 D. M. 켈리는 종교가 가지고 있는 필수적인 기능이 있다고 평가했다.  즉 종교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에게 어떤 근본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틀림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고 생각이 들게 한다는 것이다.  첫째는 종교의 임무는 의미에 있다는 것이다.  둘째, 종교는 신성한 세계건설에 있다는 것이다.  세상이 탁해질수록 그리고 물질 문명이 발달할수록 종교가 가진 이상적인 미래제시에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것들을 포함하는 보다 강력한 종교를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우리는 그 증거로 재침례교도들의 활동과 교회증가. 그리고 웨슬레의 부흥운동 등에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앞서도 살펴보았지만 재침례교도들은 제16세기 개신교 개혁의 좌파에서 일어난 신자들의 작은 무리였다.  그들의 지도원리는 신약성경의 초대교회를 회복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와 개신교회 양측 모두의 많은 특징을 복음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배격했다.  그리고 그들은 진정한 교회를 재건하기 위해 작은 비밀 집회소에서 회합을 가졌다.  하지만 그들은 성경과 양심에 따라 굴하지 않고 그들의 믿음을 키워 나갔던 것이다.  그 결과 미국에서 가장 강력한 교회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웨슬레의 부흥운동 또한 도덕적 빈혈증을 앓고 있었던 영국을 각성시키고 가난, 사악, 술취함, 불의, 부패한 사회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기성교회의 배척을 받은 감리교도들은 기성교회를 떠나려 하지는 않았지만 매주 "속회"로 개인 가정에서 만났다. (그들 대부분은 가난하고 문맹이었다.) 그 모임에서 그들은 함께 찬송을 부르며 기도했으며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서로에게 의로운 권면을 했다.  회원 중의 한 사람이 속회 지도자로 지명되었는데 그의 임무는 다른 사람들의 도덕적 발전을 보살피며 매주 그들 각자를 개인적으로 권면하는데 있었다.  이러한 방법이 전통적인 교회관이나 그 당시의 교권주의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들어 쓰셨다.
그러므로 독립교회는 오늘날 교회들이 본래 가지고 있었던 강력한 비젼 제시와 리더쉽의 상실에 대하여 하나의 촉매제가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교권주의 권위주의에 몸을 사릴 수밖에 없는 오늘날의 교회들을 일깨우고 새롭게 갱신 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Ⅸ. 결 론



지금까지 우리는 긴 시간 동안 독립교회의 신학적 근거와 역사적 근거 그리고 타당성들을 살펴보았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먼저 Ⅱ장에서는 칼빈의 교회론을 Ⅲ장에서는 칼빈의 목회철학을 살펴보았다.  칼빈은 주지하다시피 루터의 종교개혁을 완성시키고 체계화 시켜 교회의 새로운 시대가 오게 한 사람이다. 그런면에서 그는 로마 카톨릭의 교권주의에 대하여 독립교회운동을 일으켰던 최초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이나, 그의 교회론이 영적이며 다소 원론적인 면에 머물고만 아쉬움이 있는 개혁자라고 본다면 칼빈은 그의 목회와 실천을 통하여 제네바에서 구체적으로 체계화시키고 확립한 개혁자요 독립교회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칼빈의 신학 사상 특히 그의 교회론은 구미의 많은 개신교회들을 탄생 시켰을 뿐 아니라 한국의 교회 형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많은 개신교회들은 저마다 개교회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염두에 두고 탄생되었기 때문에 엄격하게 말해서 독립교회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칼빈의 교회론은 상당부분 한국교회에 오해된 감이 없지 않다.  즉 장로교회라는 틀 속에서만 교회를 이해했기 때문에 교권주의화 되고  교조주의화 하는 문제들이 발생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오해가 생긴 이면에는 한국 사회에 전통적으로 내려온 관습인 유교의 영향이 강하기 때문인데, 이것이 밥그릇 싸움이 되어 파벌주의 지방색 등으로 교회 정치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칼빈은 중세시대에 만연했던 로마교회의 이러한 교권주의 전횡을 보고 성경적으로 개혁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또 다시 이러한 문제가 그의 영향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면 어떤 태도를 취할 까 생각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칼빈의 교회론은 로마카톨릭 교회의 교황중심 교권중심에 대하여 어머니로서의 교회를 이야기하되 가견교회와 불가견교회를 나누어 설명하면서 가견교회의 회원이 꼭 불가견교회의 회원이 아님을 이야기하였다.  단지 가견교회의 표지로서 우리가 미루어 짐작 할 뿐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면 가견교회의 표지는 무엇인가. 칼빈은 말씀의 선포와 성례의 정당한 시행 뿐 이라고 했다.  지상에 있는 교회를 규정짓는 다른 요소를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교회의 건물이 있던 없던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그 고백 위에 세례를 받으며 성찬을 행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교회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것을 인정치 않는다면 다시 중세의 그 어두운 시대로 되돌아가는 것이요.  또한 지금도 드러내어 놓고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중국의 가정처소 교회와 북한의 지하교회성도들을 교회라고 할 수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단에 소속되지 않았다고, 혹은 교파를 표방하지 않았다고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부르지 않거나 심지어 이단시한다면 그리스도의 교회를 허무는 대단한 불경을 저지르는 것이 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독립교회의 자리가 있는 것이다.  
본 논문에서 연구하고자 하였던 김현봉목사에게 영향을 받아 생겨난 독립교회들은 한국적 상황에 의해 생겨진 독립교회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에 목사의 개인적인 소신이나 정치적인 문제의 중립을 위해 독립교회를 표방한 그외의 많은 독립교회들을 연구의 대상으로 모두 다 다루지는 못하였다. 김현봉목사에게서 영향을 받은 독립교회들은 지나온 세월 한국 교회는 괄목할 만한 성장의 이면에 있었던 말씀의 혼탁함, 우상숭배, 교권주의 지방색 신학교분리, 일제시대의 신사참배 문제가 그렇고 6.25때 상당수의 목사들이 좌경화되어 공산주의를 옹호한 것도 그렇다.  그리고 최근에 와서는 군사독재시절 정권에 아부하고 자신들이 살고자 신앙양심과 형제교회를 팔아 버리는 가룟유다와 같은 배반도 많았다.  또 세상법정에다가 형제를 고소하고 판단받게 만드는 일도 여러 번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 교회들은 교단과 교파의 바벨탑으로 서로를 얽어매어 하나님의 도우심보다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교회사업을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등과 같은 일들을 보고 오직 진리수호와 진리의 전파에만 관심을 가져왔던 교회들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얻고자 하는 목적으로 연구되었다.  지나온 세월 독립교회들은 이러한 범죄에 동참하여 죄를 짓지 않고, 또 교회에 각성을 주기 위하여 홀로서기를 감행한 것이다. 물론 자칫 잘못하면 바리새적인 면도 보일 수 있겠으나, 많은 이들 독립교회들의 노력에 대하여 그동안 긍정적인 시각보다는 부정적인 시각속에 편견으로 대하여 오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독립교회의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이름이 주는 의미가 생소하고 아직 이 개념이 한국교회사에서 일반 평신도들에게 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독립교회(Independent Church)라 할 때 일단 사람들에게 주고 있는 거부감은 그 명칭에 따른 모호함 때문임은 이미 말했다.  
또한 독립교회의 장점이며 자랑이기도 한 개교회의 자율성과 독립성은 여전히 거대 교단주의적 한국교계 풍토상 홀로서기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목회자의 과도한 카리스마의 문제, 지나친 구별의식 내지는 우월의식 등은 독립교회가 갖는 크나큰 약점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교회의 보다 많고 결정적 장점들이 있기 때문에 독립교회에 대한 교회사적인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본 논문도 이러한 관점에서 진행시켜온 것이다.
이미 앞서 말했듯이 한국교회는 여러 가지 좋은 전통들을 지금까지 지녀왔다.  선교사들의 희생과 순교자들의 업적은 한국교회의 자랑이다.  또한 짧은 선교기간 동안에 괄목할만한 성장 또한 그렇다.  하지만 그러한 한국교회의 이면에는 드러내 놓기 부끄러운 면면들 또한 쌓여있다.
하나님은 이러한 문제가 있을 때마다 필요한 자기의 종들을 일으켜 세워서 빗나간 교회의 흐름을 바로 잡으셨다.  그러한 측면에서 독립교회들은 나름대로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 수고를 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 이러한 독립교회의 공과 과를 밝히는 보다 많은 논의 가 이루어 져야할 때가 되었다고 본 연구자는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 논문이 일조를 하였으면 하는 바램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하여 새롭게 다가오는 21세기에는 더욱 성숙하고 성장하는 한국교회가 되어 주님 오실 때 칭찬받는 교회들이 되도록 하는 일에 보탬이 되는 연구가 되었기를 기대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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