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추억이 되어버린 2010 남아공 월드컵이 스페인의 우승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습니다. 사상 첫 원정 월드컵 16강이라는 선전속에 문득 4강신화라는 업적을 이룩한 2002년 월드컵을 추억하게 되네요.
2002년엔 수많은 명승부가 있었지만 저는 그중 최고의 명승부로 한국과 터키의 3/4위전이라고 자신있게 말하겠습니다.
경기는 초반부터 양팀의 치열한 공방전속에 한국은 터키에 2:3 분패를 했습니다. 3:2라고 하는 축구에서 가장 재미있다는 펠레스코어가 나왔기 때문에 2002년 최고의 명승부일까요?
아닙니다.
제가 이 경기를 최고의 명승부로 꼽는 이유는 경기가 아니라 경기 외적인 부분에 있습니다.
위 사진은 경기가 끝난 직후의 모습입니다. 터키선수가 주저앉은 박지성 선수에게 손을 내밀며 일으켜 줍니다.
그리고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자 터키 벤치의 귀네슈 감독은 터키국기가 아닌 한국의 태극기를 들고 그라운드로 달려 갔습니다.(하지만 귀네슈 감독님께서 태극기를 잘못 드셨네요.^^)
귀네슈 감독뿐 아니라 터키선수들은 하나같이 터키의 국기와 함께 태극기를 들고 그라운드를 누볐으며, 한국 선수들과 어깨동무를 하며 관중들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후 터키사람들은 대한민국의 중요경기가 있으면 마치 자국의 팀인양 열정적인 응원을 보여줬습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분명 보기 좋은 모습이긴 하지만... 왜 터키선수들과 감독은 경기가 끝나자 마자 태극기를 흔들고 터키국민들은 이렇게 한국을 응원해 줄까요?
위 사진이 터키인들로 하여금 한국을 외국이 아닌 형제의 국가로 느끼게 했던 결정적 장면입니다. 2002년 월드컵은 대한민국의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룩한 대회이긴 하지만 한국과 터키라는 두 나라를 하나의 형제국가로 만들었던 대회입니다.
월드컵 기간에 몇몇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지만 한국과 터키의 3/4위전이 펼쳐진 대구 월드컵 경기장에서 모습은 터키인들로 하여금 축구를 단순한 스포츠에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뜨거운 형제애를 느끼게 하는 큰 감동을 선보였습니다.
6~7만명 수용능력을 지녔던 대구월드컵 경기장엔 5만여명의 관중들 손에 터키 국기가 들려있었고 경기시작에 앞서 양국의 국가 연주때 터키의 국가가 흘렀습니다. 순간 관중석에서는 터키인들도 보지못했던 세계에서 가장 큰 터키 국기가 눈앞에 펼쳐집니다. 위 사진에서 보듯 당시 터키의 국기는 우리 태극기 보다 더 큰 국기였습니다.(당시 대한민국의 응원중 하나가 카드섹션과 함께 세계 최대 규모의 태극기가 있었는데 지금 보이는 태극기는 최대 규모의 태극기는 아닙니다. 단지 터키를 존중하기 위해 터키 국가가 흐를땐 상대를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조금 작은 태극기를 펼쳤고, 우리의 애국가가 펼쳐질땐 당시 모든 국기 중 세계 최대 규모라는 초대형 태극기가 펼쳐졌습니다.)
월드컵이라는 최고의 무대에서, 원정팀이 홈팀에게 이런 응원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상상하기 힘든 영광입니다. 더군다나 자국에서도 본 적이 없는 세계 최대 규모의 터키국기를 제작해줬고, 그 규모가 같이 걸린 홈팀의 국기보다 더 컸습니다.
TV를 통해서 이 장면을 지켜본 모든 터키국민들은 큰 감동을 받고 이후 한국에 대한 무한의 사랑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터키인들에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멀리 떨어진 외국이 아니라 터키와 영원히 함께 할 형제의 나라가 됩니다.
이후 터키인들은 대한민국을 제 2의 조국이라 생각하고 각종 대회에서 대한민국을 열정적으로 응원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럼 여기서 또 한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터키에서 한국에 대한 우호적인 반응은 우리의 감동적인 응원에 있었다면, 대한민국은 왜 터키에게 저런 우호적인 반응을 보였을까요?
지금부터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제 개인 블로그가 아닌 국가보훈처에 이 글을 쓰는 이유가 됩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듯 터키는 한국전쟁 당시 공산주의에서 우리를 지켜준 은인이자 혈맹국입니다. 터키는 미국과 영국. 캐나다에 이어 가장 많은 전투병을 파병했는데 그 전투병은 모두 순수 자원을 통해 이루어진 지원병이었다고 합니다. 터키인들이 이렇게 자신들과 상관없는 대한민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전쟁에 지원을 했는데 그 이유는 역사적으로 볼때 한국과 터키는 돌궐이라는 유대감이 있는 형제의 국가라는 이유에서 형제국가를 위해 1만 5천명이라는 많은 터키인들이 자발적으로 한국전쟁에 참전을 합니다.
▲연합뉴스 제공 사진입니다.
우리는 공산주의로부터 우리를 지켜준 미국에 대한 감사의 마음은 있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우리를 지켜줬던 터키에 대해서는 너무 무관심했습니다. 올해는 한국전쟁 발발 60년입니다. 사람으로 치면 환갑에 해당하는 오랜 기간이지만 그동안 잊고 지냈던 형제의 국가 터키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 합니다.
일단 간략하게 한국전쟁에서 터키군의 활약을 간략하게 알아볼까 합니다. 터키는 여러 전투에서 수많은 전과를 올려서 공산주의 세력으로부터 남한을 지키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전투 몇가지를 소개합니다.
1950년 11월 26일부터 12월 1일까지 평양 북쪽에 위치한 군우리에서 펼처진 군우리 전투입니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무섭게 북진을 거듭하여 북진통일이 눈앞에 다가오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중공군의 계입을 눈치채지 못한 국군과 유엔군은 계속 북진을 하다가 중공군의 포위망에 걸려들어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습니다. 이 과정에서 '지휘관의 명령 없이는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는다' 라는 말을 하며 5천여명의 터키군은 2만명이 넘는 중공군과 일전을 벌이게 됩니다.
▲ 이미지 출처 : http://koreanwar60.tistory.com/166
5천여명의 터키용사들은 군우리 전투에서 적군에게 아군보다 10배 이상의 피해를 입히는 등의 전과를 올리며 자신보다 4배나 많은 2만명 이상의 중공군 총 공세를 3일이나 막아내며 국군과 유엔군의 안전한 퇴로를 확보하여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는데 결정적인 역활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중공군에 포위당한 일부 터키군은, 포로가 되는 것을 거부한 채 탄창이 떨어지면 총에 착검을 하여 적진으로 돌격하는 용맹성을 보였다고 합니다. 이 전투에서 터키역시 수많은 희생자와 함께 주요장비 70%가 손실되는 피해를 받았습니다.
군우리 전투 이후 1951년 지금의 용인에 위치한 김량장이라는 곳에서 또 한번 중공군과 전투가 벌어집니다.
계속되는 중공군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유엔군은 평택과 제천에서 반격을 계획하며 김량장 및 151 고지를 공격합니다. 이때 유엔군의 일원으로 터키가 이 공격을 선봉을 맡았는데, 이때 터키군은 알라 후 아크바르!!(신은 위대하다) 라는 신에 대한 찬양을 하며 현대전이 아닌 전통방식의 총검에 의한 백병전으로 중공군을 상대하였는데 이 전투에서 터키군 1명당 40여명의 중공군을 무찌르며 '백병전의 터키군' 이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3일간이나 계속된 전투에서 압승한 터키군은 군우리 전투의 패배의 불명예를 완전히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2개의 전투에서 보듯, 터키군은 자신들과 아무 상관 없는 대한민국의 자유를 위해서 누구보다 용감했으며, 아군의 피해를 줄이려고 자신을 희생하며, 적군에게 목숨을 구걸하는니 용맹하게 싸우며 최후를 맞이 하는 용맹스러운 군사들이었습니다.
터키는 1만 5천여 전투병을 파견해서, 741명의 전사자와 2068명의 부상, 163명의 실종, 그리고 24명이 포로가 되는등 총 3천여명이 넘는 큰 피해를 받았습니다.
▲ 이미지 출처 : http://koreanwar60.tistory.com/166
이렇게 치열했던 한국전쟁중에 최근 모 방송사에서 터키 노병의 특별한 사연이 소개 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많은 감동을 느끼게 했던 장면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위 사진에 검정색 선그라스를 낀 슐레이만이라는 터키병사가 자신이 안고 있는, 당시 아일라로 불렸던 꼬마 아이를 찾고 싶어서 한국에 연락을 했습니다.
터키에서 아일라는 달의 아이라는 상당히 좋은 의미를 가진 이름입니다.
이렇게 슐레이만과 아일라의 첫 만남을 갖습니다.
터키군과 슐레이만은 어린 아일라를 잘 보살피며 함께 즐거운 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터키군들이 전쟁터에 나갈때면 아일라는 터키인이 만든 고아원에 잠시 맡겨두고 전투가 끝나면 다시 아일라를 보살피는 생활을 반복했습니다. 터키군은 치열한 전투속에서 한국의 전후를 생각하여 학교를 세워주고, 전쟁고아를 위한 고아원을 세우는 등 전투뿐 아니라 사회적인 부분에서도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줬습니다.
전쟁고아인 아일라는 자신을 거두워준 슐레이만을 아버지로 믿고 따랐으며 슐레이만 역시 그런 아일라를 친딸처럼 여기며 보살펴 주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전이 휴전협약에 따라 종료되자, 터키군은 한국에서 철수를 하고 슐레이만은 아일라와 터키에서 함께 살기를 희망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둘은 슬픈 이별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연락이 끊어져 서로를 마음속으로만 그리워하다가, 최근 수소문끝에 투르크의 용사 슐레이만 할아버지께서 그토록 보고싶던 어느덧 중년이된 어린 아일라를 찾게 되었습니다.
슐레이만 할아버지는 아일라를 보기위해 한국을 찾으셨고....
아일라는 터키인 아버지를 위해 정성껏 선물을 준비합니다.
같은시간, 슐레이만 역시 한국인 딸 아일라를 위해 터키에서 가져온 정성스런 선물을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터키인 아버지와 한국인 딸은 서로를 만난단 생각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국적이 다른 두 모녀는 60년만의 감동적 제회를 합니다.
슐레이만과 아일라는 그동안 서로를 찾으려는 노력을 했지만 결국 6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만나게 되었습니다. 슐레이만과 아일라의 모습을 보면서 한국과 터키는 서로 피가 섞이진 않았지만 피보다 더 진한 뭔가를 느끼게 해 주는 관계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돌궐로 맺어진 인연이 한국전에서의 터키군의 도움을 받았고, 우리는 월드컵에서 환대를 해줬으며 최근엔 누구보다 서로를 지지해주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60년간 서로 떨어져있었던 국적다른 두 모녀들의 이야기 처럼 우리도 잊고있었던 우리의 소중한 인연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월드컵 이야기를 하다가 한국전쟁의 이야기에서 모녀상봉으로 마무리를 하지만, 지난 월드컵 대회에서 붉은옷을 입고 비가 오는 날에도, 늦은 새벽에도 뜨겁게 대한민국을 응원하던 모습은 분명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축구응원으로 표출한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축구 응원으로 대한민국의 사랑을 표현했다면, 과거 모든 젊음을 바쳐 대한민국에 도움을 줬던 영웅들을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한국과 터키엔 슐레이만과 아일라 가족사진과 함께 어린시절 아일라의 사진이 함께 자리하고 있습니다.
터키는 한국을 사랑한다고 합니다. 우리역시 우리가 위험에 처해있을 때 누구보다 우리에게 큰 힘이 되어준 터키와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많은 은인들을 끝까지 사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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