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의 삶/역사,추억이야기

조선의 역대왕과 시호

예인짱 2010. 6. 4. 17:16

* 조선의 역대왕과 시호 *


조선왕조에 대하여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편집한 내용입니다.
 

[태조- 정종-태종-세종-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연산군-
중종-인종-명종-선조-광해군-인조-효종-현종-숙종-경종-영조-
정조-순조-헌종-철종-고종-순종]
왕을 지칭할 때에는 흔히 이름 대신 묘호(廟號)를 쓰는데
묘호는 신료들이 왕의 일생을 평가하여 공이 많다고 여기면 
조(祖)를 붙이고, 덕이 많다고 여기면 종(宗)을 붙여 
두 글자로 지은 것이라는 등, 여러 사람의 설명이 분분한데 
왕의 이름 뒤에 붙은 조와 종의 구분은 왕위 계승의 성격에 
따라 붙여진 것입니다. 

선왕으로부터 합법적이고 정상적인 절차에 따라 왕위에 오른 
왕은 “종”이 붙고, 그렇지 않고 위화도회군으로 개국한 태조나 
계유정란으로 왕이 된 세조나, 인조반정으로 왕위를 뺏은 
인조 같은 왕은 뒤에 “조”를 붙였습니다.
 
즉 “종”은 계승군주에 붙이는 시호요, 
“조”는 창업군주에 붙이는 시호입니다. 

부언하자면,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왕위가 물려진 경우에는 시호가 “종”이 되고 
대에 단절이 있거나 건너뛰거나 계통이 바뀐 왕은 “조”를 붙였습니다. 
그리고, 재위 중에 폐위되어 종묘에 들어가지 못한 왕은 
묘호 없이 군(君)으로 부름니다.(예: 연산군, 광해군)

여기서 말한 것은 “시호 제정의 본래 원칙”이 엄정했다는 것을 
설명한 것입니다. 
조선조 임금의 적장자 승계는 사실 명종으로 끝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적장자란 정실 왕후 소생의 후계를 뜻합니다. 
명종 이후에는 정실과 후궁 소생이 번갈아 대를 잇게 되어 
혼란해지기 시작하다가 “영조” 대(代)에 와서는 드디어 
무수리 신분의 여자가 낳은 왕이 나오고 맙니다. 
이때부터는 사실 적통이다 아니다 따지는 것 자체가 우스워졌지요. 
기왕에 혼탁한 물이 됐으니 조종의 구별이 의미가 없어진 것입니다.
당시의 신분사회의 관념 속에서 무수리 출신의 왕이 “조”면 어떻고 
“종”이면 어떠냐 이거지요!
 
그것을 따지고 가르고 할 가치 자체가 사라졌다고 본 것입니다. 
그만큼 신분과 혈통적 고귀함을 잃었을 때의 상실감은 컸습니다. 
지금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래서 시호의 제정에도 이전처럼 그렇게 엄격하지 않았고, 
또 왕권이 실추된 상황에서 세도권신들이 더 이상 죽은 왕의 시호에 
존경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조선조 말기에는 사회 모든 분야의 기강과 전통과 규율이 
다 무너져 내렸습니다. 
외세에 의한 개국이 강요되었을 때, 그 파도를 헤쳐 나갈 
국가적 에너지가 고갈되어 있었습니다. 
조선의 왕통은 사실상 경종으로 끝난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경종이 누구냐 하면 바로 유명한 장희빈의 소생입니다. 
경종은 성장했을 때 이미 남자 구실을 못하는 병신이었습니다. 
생모의 비참한 최후를 비롯한 궁중의 끔찍한 암투에 정신적인 
쇼크를 받아서 불구자가 되었다 합니다. 

그래서 비천한 궁녀 출신인 선왕의 아들을 다음 왕으로 앉히는데 
이 사람이 영조입니다. 
영조부터는 사실상 신하들이 왕을 왕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영조의 큰아들은 어려서 요절했고, 차남이 비극의 주인공 사도세자입니다. 
사도세자는 폐서인이 된 다음에 죽었으니 정조는 법적 신분으로는 
서인의 아들이나 마찬가집니다. 
게다가 다음의 순조도 후궁의 아들입니다. 
왕의 혈통적 순결함과 신분적 정통성을 상실했고 이때부터 권세를 쥔 
안동 김씨가 “종”이나 “조”나 뭐 맘대로 갖다 붙이는 세상이 됐습니다. 
이미 임금이 임금으로 대접을 못 받았던 관계로 조선 후기의 시호는 
변칙이고 예외적인 것으로 봐야 합니다. 
후대에 내려오면 대가 끊겨서 인척 중에서 추대한 경우에도 
“종(宗)”을 쓴 경우가 여러 번 됩니다. 
철종과 고종이 그 대표적이지요.
 
철종의 선왕은 헌종인데 후사가 없어 대가 끊기고 
사도세자의 장남(정조의 배다른 형) 은언군의 손자로 대를 이었습니다. 
고종 역시 마찬가지 였지요. 
이는 선왕의 양자로 입적하는 편법을 사용한 듯한데 
역으로 선왕의 대가 이어졌는데도 “조(祖)”를 쓰는 일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정조의 후임인 순조는 정조의 소생이었는데도 
“종(宗)”을 쓰지 않고 “조(祖)”를 썼습니다. 
이것은 어떤 이유인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설명이 안 됩니다. 
결론적으로 “종(宗)과 조(祖)”를 구분하는 기준은 양자입적 등의 
요인 때문에 단순하게 정의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또 연산군과 광해군은 재위 중에 폐위되어 종묘에 들어가지 못했으므로, 
묘호 없이 군(君)으로 부르고, 덕종(성종의 아버지), 원종(인조의 아버지), 
진종(정조의 의붓아버지:효장세자), 장조(정조의 친아버지:사도세자), 
익종(헌종의 아버지)은 후에 아들이 왕이 되면서 왕으로 추존된 경우가 있지요. 
조선왕들의 평균 수명을 보면 47세이며, 평균 즉위 연령은 24세이고, 
평균 재위기간은 19년 2개월입니다. 
장남이 왕이 된 경우는 7번(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으로 
26%에 불과합니다. 

마지막 왕인 순종은 32년간을 세자(황태자)로 있었으며, 최장수 임금이자 
최장기 재위했던 영조는 천민 출신인 숙빈 최씨에게 태어나, 
서자 출신이 왕이 된 경우이며, 
또 철종은 강화도에서 농사를 짓다가 왕이 되었으며, 
태종은 역대 왕 가운데 유일한 문과 급제자였다고 하는군요. 
최고령으로 등극한 왕은 58세에 즉위한 태조 이성계이며, 
최연소로 왕이 된 제24대 헌종은 8세에 즉위하여 재위 15년만인 
23세에 사망했고요, 
최연소로 세자가 된 임금은 2세 때 책봉된 순종이고, 
제2대 정종은 42세에 최고령으로 세자에 책봉되었습니다. 
(왕위 쟁탈이 심했나? 이성계가 넘 오래 살았나?) 

제12대 인종은 최단기간인 9개월간 왕위에 있었고
(기억하시나요? SBS 여인천하의 그 귀여운) 세자가 바로 인종입니다. 
그러나 금방 죽고 마는데, 아마 문정왕후가 준 떡을 잘못 먹고 
죽었다는 설도 있지요?
영조는 51년 7개월 동안 왕위에 있었고, 
단종은 17세에 세조 수양대군에게 죽임을 당하였고, 
최장수한 영조는 83세에 생을 마쳤답니다. 
앞서, “종”은 계승이요, “조”는 창업이라고 말했는데, 
좀 더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대의 단절이 있었느냐 아니냐의 
차이가 있습니다.
연산군을 폐위하고 세운 다음 왕은 쿠테타로 즉위했지만 
“조”가 아니라 “종”이 붙었습니다. 
바로 중종이지요.
중종은 선왕인 성종의 아들로 연산군과는 이복형제로서 
중간에 연산군이 끼였다가 없어졌지만 대가 성종으로부터 
아들인 중종으로 단절됨이 없이 이어졌기 때문에 “중조”가 아니라 
“중종”이 된 것이지요.
 
반면에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어려서 죽었기 때문에 
할아버지인 영조로부터 바로 손자로 건너뛰었으므로 “정종”이 아니라 
“정조”가 된 것입니다.
원칙적으로 왕은 태어날 때 이름을 갖지 않습니다. 
왕의 적장자로 태어나면 원자가 될 뿐이고 세자가 될 때까지는 
원자로 불리다가 관례를 행하면서 자(字)를 받고, 
세자에 책봉될 때에 이름을 받습니다. 
이때 2품 이상 대신들이 모여 세자의 이름을 한 글자로 지을지 
두 글자로 지을지 와, 무슨 변으로 지을지를 숙의하여, 
세 가지 이름을 왕에게 품의하면 왕이 골랐답니다. 
그리고 왕의 이름은 함부로 부를 수도 글로도 쓸 수가 없어서
이를 어기면 큰 벌을 받았답니다.
과거시험에도 역대 왕들의 이름이 답안에 한 글자라도 들어가면 무조건 
낙방이고, 상소문에도 들어가면 접수가 안 될 뿐만 아니라 
곤장 1백대의 중형을 받게 규정되었답니다. 

왕도 유학자처럼 호(號)를 갖는데, 왕은 살아가는 동안에 
훌륭한 업적이 있으면 신료들이 찬양하기 위해 존호(尊號)를 올리고, 
왕이 붕어하여 삼년상이 끝나고 신주가 종묘에 들어가면 
종묘에서 그 신주를 부르는 호칭이 묘호(廟號)인데 
그 묘호는 신료들이 왕의 일생을 평가하여 지었습니다. 
왕의 무덤은 특별히 능(陵)이라 하는데 왕의 무덤을 지칭하는 호칭이 
능호(陵號)로서 왕의 칭호는 보통 붙여서 씁니다. 
순서는 맨 앞에 묘호, 다음이 중국서 준 시호, 존호 그리고 신료들이 올린 시호 
따라서 조선시대 왕들은 보통 20~30자의 호칭을 갖고 있습니다. 
예 : 세조---> 
"세조혜장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대왕"입니다. 
'세조'는 묘호 
'혜장'은 중국에서 내려준 시호 
'승천제도열문영무'는 존호 
'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는 신료들이 올린 시호 

대한제국 이후에는 고종이 황제에 오름으로써 제후국을 청산하는 의미로, 
그 전에 중국으로 부터 받은 시호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현재 종묘에 배향되어 있는 왕의 호칭에는 중국에서 받은 시호는 기재되지 
않는답니다. 
그러나 태조부터 고종 이전까지의 조선 왕들은 중국서 시호를 받아 
써온 것이 사실입니다. 
한국인에게 조선시대 임금의 시호인 “조와 종”의 차이는 전문가의 
영역이 아니라 극히 기본적인 상식의 영역이라고 저는 봅니다. 
아는 것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이 아주 놀라운. 
정상적인 중학생이라면 알고 있어야 합니다. 
[태조- 정종-태종-세종-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연산군-중종-인종- 
명종-선조-광해군-인조-효종-현종-숙종-경종-영조-정조-순조-헌종-철종-고종-순종]

제1대왕 태조 
재위기간 6년, 「1392-1398」 57세-63세, 
부인 : 3명, 자녀 : 8남 5녀 

[참고사항]
1. 태조(조선왕조 500년 창시자 고려의 반역군인 태조 이성계 요동정벌차 
북진하다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하여, 고려 제34대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새 왕조의 태조가 됨, 
* 요동 : 중국에 요하라는 강의 서쪽(요서)과 동쪽(요동)을 부르는 호칭
2. 태조 이성계, 국호를 “조선”으로 하고 새로운 도읍지를 “한양”으로 정함
3. 역성혁명을 실천한 풍운아 “정도전”, 장수를 군왕으로 이끈 “무학대사
제2대왕 정종 
재위기간 2년, 「1398-1400」 41세-43세,
부인 : 8명, 자녀 : 15남 8녀 

[참고사항]  
1. 태조 이성계의 둘째 아들 이방과 태조의 세자 책봉과 왕자들의 반발
2.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세자로 책립
3.재위 시에는 정무보다는 격구(擊毬) 등의 오락에 탐닉하면서 보신책을 삼음

제3대왕 태종 
재위기간 18년,「1400-1418」 33세-51세,
부인 : 12명, 자녀 : 12남 17녀

[참고사항]
1. 태조 이성계의 다섯 번째 아들인 “이방원”이 제2차 왕자의 난으로 세자 책봉
2. 거북선 개발, 신문고 설치

제4대왕 세종 
재위기간 32년,「1418-1450」 21세-53세, 
부인 : 6명, 자녀 : 18남 4녀

[참고사항]
1. 양녕대군, 효령대군이 동생인 태종의 셋째 아들 충녕대군(세종)에게 왕위 양보 
2. 1420년에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고 훈민정음 창제
3. 천문학 발전과 과학 혁명의 주창자 “장영실”을 통한 조선의 과학 혁명
4. 희대의 명재상 “황희(黃喜)”, “맹사성(孟思誠)”, “허조(許稠)” 등 
청백리(淸白吏) 등용
5. 대마도 정벌 “이종무”, 육진을 개척한 “김종서”, 음악의 귀재 “박연”

제5대왕 문종 
재위기간 2년, 「1450-1452」 36세-38세, 
부인 : 3명, 자녀 : 1남 2녀

[참고사항]
1.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심씨 사이의 8남2녀 중 장남 
2. 30년의 세자 생활과 8년의 섭정
3. 문종의 아우들인 수양대군(首陽大君=후에 세조), 안평대군(安平大君) 등 
종친(宗親) 세력의 간섭으로 왕권 위축 
         

제6대왕 단종 
재위기간 3년, 「1452-1455」 12세-15세, 
부인 : 1명, 자녀 : 없음

[참고사항]
1. 문종이 재위 2년 3개월 만에 병으로 죽자, 
장남인 단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 
2. 어린 단종의 즉위와 왕위를 찬탈하는 왕숙(수양대군=세조)
3. 계유정란 과 단종 복위 운동
* 사육신(死六臣) : 
단종 복위운동을 하다가 죽음을 당한 여섯 신하 
-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
* 생육신(生六臣) : 
수양대군의 왕위찬탈(王位簒奪)을 분개하여 한평생을 죄인으로 자처(自處)하고 
충심으로 벼슬을 버린 여섯 신하 
- 김시습, 이맹전, 원호, 조여, 성담수, 남효온.


제7대왕 세조 
재위기간 13년,「1455-1468」 39세-52세, 
부인 : 2명, 자녀 : 4남 1녀

[참고사항]
1. 조카인 어린 임금 단종을 보호하겠다는 명목으로 계유정난(1453)을 일으키자,
단종은 자신과 중전을 해치는 일 만큼은 하지 말기를 청하며 왕위를 내 놓고 
상왕으로 물러남. 
2. 세조의 강권정치와 문치의 후퇴
* 훈구파(勳舊派) : 세조를 도와 왕위에 오르게 한 학자들의 무리.  
3. 함경도의 호족 이시애(李施愛)가 세조13년(1467)에 반란을 일으킴.  

제8대왕 예종 
재위기간 1년, 「1468-1469」 19세-20세, 
부인 : 2명, 자녀 : 2남 1녀 

[참고사항]
1. 세조의 차남으로  정희왕후(세조의 1부인)의 수렴청정
2. 예종시대의 최대의 옥사 “남이 장군”의 역모 사건


제9대왕 성종 
재위기간 25년,「1469-1494」 12세-38세, 
부인 : 12명, 자녀 : 16남 12녀         

[참고사항]
1. 세조의 손자로 정희왕후와 한명회의 정치적 결탁으로 왕위 계승
2. 성종의 도학 정치와 조선의 태평성대, 사림파의 등장과 조정의 세력 균형
3. 활발한 문화 서적의 편찬 
- [동국여지승람], [동국통감], [동문선], [악학궤범]


제10대왕 연산군 
재위기간 12년,「1494-1506」 19세-31세, 
부인 : 2명, 자녀 : 4남 2녀

[참고사항]
1. 성종과 3번째 부인 폐비 윤씨의 아들 
2. “무오사화”, “갑자사화” 등 양대 사화를 통한 광적인 폭정
3. 윤비폐출 사건인 갑자사화가 일어난 뒤에 자기 큰아버지인 
월산대군의 처인 박씨 부인을 범하자, 박씨 부인은 자살을 하고 
이를 알게 된 박씨 부인의 오라버니인 박원종(훈구파)이 연산군을 몰아냄


제11대왕 중종 
재위기간 38년,「1506-1544」 19세-57세, 
부인 : 10명, 자녀 : 9남 11녀

[참고사항]
1. 성종의 2남(진성대군)이며 연산군(燕山君)의 이복동생, 
2.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顔) 등이 일으킨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왕에 추대되어 즉위
2. 중종의 개혁정책 실패와 정국 혼란
3. 신진 사림의 재등장, “조광조” 일파의 개혁정치
4."기묘사화”와 사림 세력의 후퇴

제12대왕 인종 
재위기간 1년, 「1544-1545」 30세-31세, 
부인 : 1명, 자녀 : 없음

[참고사항]
1. 중종의 맏아들로 기묘사화 때의 희생자 조광조(趙光祖) 등을 신원(伸寃)해 주는 등
 어진 정치를 행함. 
2. 검약한 생활과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 하였으나 짧은 치세


제13대왕 명종 
재위기간 22년,「1545-1567」 12세-34세, 
부인 : 1명, 자녀 : 1남

[참고사항]
1. 중종의 둘째아들로 일명 눈물의 왕 “명종”
2. 정국의 끝없는 혼란
* 명종시대의 주요사건들 : 
- 을사사화, 양재역 벽서 사건, 임꺽정의 난, 을묘왜변
3. 명종시대를 이끈 사람들 : 
- 성리학 정립에 선구적인 인물 “이언적” 
- 조선 성리학의 큰 인물 “이황”


제14대왕 선조 
재위기간 41년,「1567-1608」 16세-59세, 
부인 : 8명, 자녀 : 14남 1녀

[참고사항]
1. 명종의 아들이 13세로 죽어 후사(後嗣)가 없자, 
덕흥부원군(德興府院君-중종의 아홉째아들)의 셋째아들인 
선조가 왕위에 즉위. 
2. 사림의 분열과 붕당 정치의 전개
3. 임진왜란 발발
- 난세에 핀 꽃 “이순신”, 붉은 옷의 전설 “곽재우(홍의장군)“
4. 당시의 석학들 : 
- 위대한 인본주의자 율곡 “이이”, 불멸의 시인 송강 “정철”


제15대왕 광해군
재위기간 15년,「1608-1623」 34세-49세, 
부인 : 2명, 자녀 : 1남 1녀

[참고사항]
1. 선조의 둘째 아들로, 광해군 가족들의 비참한 말로와 광해군의 유배 생활
2. 실리주의자 광해군의 과감한 현실 정치
- 무너져가는 명과 떠오르는 청 사이에서 중립외교로 이익을 보려고 
청나라와 명나라를 둘 다 섬기다가 쫓겨남, 
3. 변혁시대에 핀 문화의 꽃 
- 비운의 혁명가 “허균” 과 불사의 영웅 “홍길동”
- 동방의 편작 “허준” 과 [동의보감]


제16대왕 인조 
재위기간 26년,「1623-1649」29세-55세, 
부인 : 3명, 자녀 : 6남 1녀           

[참고사항]
1.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인조)은 무력 정변으로 광해군 폐출시킴
2. 아버지는 정원군(定遠君:元宗으로 追尊), 어머니는 좌찬성 구사맹(具思孟)의 딸인  
인헌왕후(仁獻王后)로 광해군을 몰아냈고, 병자호란을 극복했다고 “조”가 붙음. 
3. 조선의 끝없는 수난과 변란들 
- 이괄의 '삼일천하' 
- 정묘호란
광해군 때의 중립정책을 지양하고 반금친명(反金親明) 정책을 쓰다 후금의 침략으로
강화도로 천도하였다가 후금과 형제의 의(義)를 맺음. 
 - 병자호란
청(淸) 태종이 10만 대군으로 침입하자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항전하다가 패하여 
청군(淸軍)에 항복, 군신(君臣)의 의를 맺고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이 볼모로 잡혀가는 치욕을 당함. 

제17대왕 효종 
재위기간 10년,「1649-1659」 31세-41세  
부인 : 2명, 자녀 : 1남 7녀

[참고사항]
1. 인조(仁祖)의 장남인 소현세자가 죽자 둘째아들인 봉림대군(=효종)을 
세자로 책봉
2. 오랫동안의 볼모생활 중 청나라에 대한 원한을 품고 그 설욕에 뜻을 두어 
김상헌(金尙憲), 송시열(宋時烈) 등을 중용(重用), 은밀히 북벌계획을 수립
3. 청나라의 국세가 더욱 일어나 북벌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1654년 러시아 ·청나라의 충돌사건이 일어나자 청나라의 강요로 
러시아 정벌에 출정.


제18대왕 현종 
재위기간 15년,「1659-1674」 19세-34세
부인 : 1명, 자녀 : 1남 3녀

[참고사항]
1. 남인과 서인의 예론 정쟁
* 예송 논쟁의 전개
인조의 계비(繼妃)인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일어나자, 
남인이 주장하는 3년 설을 물리치고 서인의 기년설(朞年說:1년설)을 
채택함으로써 서인이 집권
2. 하멜(Hamel, H.) 등 8명이 억류생활 14년간의 이야기인
《화란선제주도난파기 和蘭船濟州島難破記―하멜표류기(漂流記)》


제19대왕 숙종 
재위기간 46년,「1674-1720」 14세-60세
부인 : 6명, 자녀 : 3남 6녀

[참고사항]
1. 숙종 시대는 조선 왕조를 통틀어 당파간의 정쟁이 가장 심했던 기간이었으나
숙종은 비상한 정치 능력을 발휘하여 왕권을 회복하고 사회를 안정시켰다.
2. 숙종의 환국정치로 왕권은 안정되었으나 계속되는 정치 옥사
-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
* 환국정치란? 
"국면을 전환하는 정치"로 집권세력(집권당파)을 서인(노론/소론) 과 남인 등을 
번갈아 가면서 집권케 함(환국)으로써 정치적 난맥을 타개하려 했던 정치적 양상

제20대왕 경종 
재위기간 4년, 「1720-1724」 32세-36세
부인 : 2명, 자녀 : 없음

[참고사항]
1. 숙종의 장남으로 어머니는 희빈 장씨(禧嬪張氏)
2. 노. 소론의 당쟁 격화
3. 독도(獨島)가 우리의 영토임을 밝혀주는 내용을 담은 
남구만(南九萬)의 《약천집 藥泉集》을 간행


제21대왕 영조 
재위기간 52년,「1724-1776」 31세-83세
부인 : 6명 / 자녀 : 2남 7녀

[참고사항]
1. 숙종의 2남으로 노론과 소론 사이의 치열한 정쟁 속에 탕평책 실시
2. 소론 ·남인 등의 일부 과격한 분자들이 영조의 왕위 자체를 부정하는 
반란(이인좌의 난)을 일으킴
3. 실학의 선구자들 
- 역사학의 아버지 순암 “안정복”, 새 하늘을 연 “홍대용”
4. 백성들의 사정을 직접 듣기 위해 경희궁 건명문(建明門)에 신문고를 달음.
제22대왕 정조 
재위기간 24년, 「1776-1800」 25세-49세)
부인 : 3명, 자녀 : 2남 1녀

[참고사항]
1. 영조의 손자로 아버지는 장헌세자(莊獻世子:思悼世子), 
어머니는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惠嬪)
2. 정조의 문화정치와 실학의 융성
실학의 거장들 
- 북학파의 “박지원”, 실학의 최고봉 “정약용”, 
- 신세계를 염원한 석학 “박제가”
3. MBC드라마 “이산(=정조의 본명)”의 주인공


제23대왕 순조 
재위기간 34년,「1800-1834」12세-45세
부인 : 2명, 자녀 : 1남 5녀

[참고사항]
1. 정조의 장남 문효세자(文孝世子)가 일찍 죽어 11세의 나이로 즉위
2. 즉위 즉시 영조비 정순왕후(貞純王后; 英祖繼妃 慶州金氏))의 수렴청정으로
경주김씨 김관주(金觀柱)와 심환지(沈煥之) 등의 벽파가 정치를 주도
3. 천주교 박해를 통한 벽파의 정권 장악
4. 안동 김씨의 세도 정권을 부정한 “홍경래의 난” 발발
5. 홍경래 난을 극복했다 해서 “조”가 붙음, 

제24대왕 헌종 
재위기간 15년,「1834-1849」 8세-23세
부인 : 3명 / 자녀 : 1녀

[참고사항]
1. 순조의 장남인(효명세자 : 일찍 죽음) 익종(翼宗:추존왕)의 장남으로 
순조가 죽자 8세로 즉위
2. 조선 사회의 총체적 위기
3. 1846년 최초의 한국인 신부 김대건(金大建)을 처형
4. 순조 때 정권을 잡은 안동김씨(安東金氏)와 새로 등장한 풍양조씨(佯壤趙氏) 
두 외척이 세력을 다투다가 한때 풍양 조씨가 집권하였으나, 
1846년 조만영이 죽자 정권은 다시 안동 김씨에게로 넘어감. 


제25대왕 철종 
재위기간 14년, 「1849-1863」 19세-33세
부인 : 8명, 자녀 : 1녀

[참고사항]
1. 농부에서 제왕이 된 강화도령 
* 정조의 아우 은언군(恩彦君) 인(?)의 손자로 1844년(헌종10) 옥사로 
가족과 함께 교동(喬桐)으로 유배되었다가 곧 강화(江華)로 옮겨져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하고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영조의 유일한 혈손인 그는 순조비(純祖妃)인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명으로 궁중에 들어가 덕완군(德完君)에 봉해지고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에는 순원왕후가 수렴청정
2. 철종은 대왕대비(순조의 비)의 선택에 의하여 불시에 왕위에 올랐으며, 
대왕대비의 친정인 김조순 가문이 경쟁세력을 도태시키면서 
재위 기간 동안 안동 김씨의 60년간의 세도정치가 절정에 달하여
정치문란이 더욱 심해져, 경상도 진주(晉州), 함경도 함흥(咸興), 
전라도 전주(全州) 등지에서 대규모의 민란이 빈발하는 등 백성의 생활이 
도탄에 빠짐.
3. 동학의 탄생
- 사회의 혼란을 종교적으로 구제하려는 동학(東學)이 창시되어 
학정에 허덕이는 민중 속으로 놀라운 속도로 파급되자 이를 탄압하고 
교주 최제우(崔濟愚)를 '혹세무민'(惑世誣民)이라는 죄를 씌워 체포.


제26대왕 고종 
재위기간 44년,「1863-1907」 12세-56세
부인 : 7명, 자녀 : 6남 1녀

[참고사항]
1. 수난의 왕 고종과 조선왕조의 목락
2. 떨어지지 않은 녹두꽃 '전봉준'과 동학혁명
3. 영조의 현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의 둘째 아들. 
4.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이 청 ·일 전쟁을 유발하고, 
일본이 승리하자 친일파는 대원군을 영입
5. 가톨릭교 탄압에 따른 8,000여 명의 교도 학살, 쇄국정책, 병인양요(丙寅洋擾), 
신미양요(辛未洋擾) 발발 
6. 1873년(고종 10) 11월, 민비의 공작에 따라 대원군이 섭정에서 물러나자 
고종이 친정(親政)을 선포
7. 1881년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일본에 파견하여 새로운 문물을 시찰
8. 청·일 간의 톈진조약[天津條約]이 체결되어 
일본이 한반도에 발판을 굳히는 계기가 됨
9. 일본인 자객(刺客)들이 경복궁으로 들어가 민비(閔妃)를 시해,
10.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계략으로 고종과 세자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
11. 한 ·일 협약인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김
12. 만국평화회의가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리자 
고종은 밀사 이준(李儁) 등을 파견
13. 일본의 방해로 실패한 헤이그 밀사사건 때문에 일본의 압력과 
이완용(李完用) 등의 강요로 황태자(순종)에게 양위(讓位)한 후 퇴위, 
14. 순종황제로부터 태황제(太皇帝)의 칭호를 받고 덕수궁에서 만년을 보내다가 
1919년 1월 21일 일본인에게 독살


제27대왕 순종 
재위기간 3년,「1907-1910」  33세-36세
부인 : 2명, 자녀 : 없음
 
[참고사항]
1. 고종과 명성왕후(明成皇后) 민씨의 장남으로, 일본의 압력과 
이완용(李完用) 등의 강요로 헤이그 밀사사건의 책임을 지고 
고종이 양위하자 즉위
2. 1908년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의 설립을 허가하여 
경제침탈의 길을 열어줌
3. 안중근의사에 의하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암살됨
4 친일매국노 이완용 ·송병준·이용구(李容九) 등을 중심한 매국단체 
일진회(一進會)를 앞세워, 1910년 8월 29일 국권이 강탈되어 
조선왕조는 27대 519년 만에 망하고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됨.

'풍요의 삶 > 역사,추억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초창기 라면  (0) 2010.07.06
태풍 사라호가 쓸고간 자리~  (0) 2010.07.06
영남의 잊혀진 소왕국  (0) 2010.05.28
여명의 제국 · 백제 · 百濟  (0) 2010.03.05
신비의 왕국 · 가야 · 伽倻   (0) 2010.0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