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삶/성경연구

내가 깨달은 하나님의 사랑

예인짱 2010. 3. 14. 03:12

 

 

 

 

신앙의 세계를 가장 확실하고 분명하게 드러내는 단어를 찾으라면 그 단어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나를 향해 가지신 하나님의 사랑,

내가 깨달은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이 곧 신앙의 본질이요, 핵심인 것이다.

그 사랑안에서 나를 세우고, 다른 이를 세워가는 과정이 인생의 삶의 현장인 것이다.

 

내가 깨달은 하나님의 사랑의 첫번째 경험은 고등학교 다닐때 깨달은 하나님의 선택이었다.

하나님이 나를 택했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여 나를 특별히 사랑하신다는 예언기도는 나를 설레이게 했고, 나를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는 초석이 되었다.

그때부터 난 세상에 두려운 것이 없었고, 무엇이든지 하나님안에서는 가능하다는 당당함과 새 힘을 얻는 삶을 살았다.

 

그런데 그 경험은 잠깐이었다.

살면서 나를 하나님이 사랑하실 것 같지 않다는 불안이 들어왔다.

아니 나를 하나님이 토하여 내칠 것이라는 불안이 자리했다.

난 안 될 것이라 생각했다.

 

신앙안에서의 좌절,

그것은 감당할 수 없는 충격에 사로잡히게 했다.

이런 저런 일들로 인해 그 때마다의 위기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내 속에 하나님 앞에서 고뇌하는 한 인간의 아픔이 가득히 자리하는 인생을 살아갈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을 여는 돌파구가 목회였다.

목사가 되면, 목회를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인생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27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목회의 현장에 들어섰고, 3년만에 예배당을 짓기도 하였다.

교회를 부흥시키고 나름대로의 성공적인 목회를 하는 것 처럼 보였다.

 

그러나 내 내면은 그렇지 않았다.

하나님의 사랑앞에서 난 초라한 존재였다.

늘 부족함과 부끄러움이 가득한 존재로서 하나님의 무서운 손길을 피할 길이 없었다.

 

새로운 교회를 시작했다.

내 일생을 다해 하나님 앞에 살아갈 소중한 출발이 새로운 교회의 시작이라고 생각하고 힘든 길을 스스로 택해서 걸어갔다.

모든 것이 힘들었지만 가장 힘든 것이 하나님앞에서 내가 온전치 못하다는 자괴감이었다.

새 교회를 시작 한지 2년째 난 한계에 부딛쳤다.

이러다간 아무것도 안될 것 같다는 심한 부담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청천 다락원 가서 3일 금식기도를 하며 하나님 앞에서 순결한 삶을 살게 해달라는 기도제목을 갖고 기도했다.

기도는 전혀 되지 않았다.

상달되기는 커녕 듣지조차 않으신다는 생각을 했다.

 

3일 밤

차가운 예배당 바닥에 무릅을 꿇고 찬송을 불렀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목소리는 모기소리 같았다.

무릅을 시려서 꽁꽁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냥 일어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그 때 하늘에서 빛이 내렸다.

그리고 음성이 들렸다.

네 행동을 중지하라.

행동으로 내게 나아오지 말라.

내가 찾는 것은 너다.

 

이 음성을 세번 들었다.

처음엔 사탄의 음성인줄 알았다.

그러나 난 알게 되었다. 이것이 하나님이 내게 들려주시는 음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눈물로 시간을 보냈다.

보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하게 막았다.

 

하루 30분 이상씩 하던 기도를 하지 못했다.

하루 20장 이상씩 읽던 성경도 읽지 않았다.

 

그런데 내안에 하나님의 평안이 왔다.

내가 믿어야 할 신앙의 본질이 바로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나 자체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사랑

그런데 난 그걸 몰랐다.

 

내가 무언가를 해야 했고,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였고,

그 사랑으로 인해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실 거라는 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난 그 일로 인해 아버지가 신앙의 절대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분의 존재하심, 그분의 사랑하심,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 안에서 난 나에게 주어진 모든 가능성을 찾고 노력해 나가는 삶의 패턴을 가지며 살게 되었다.

 

하나님 앞에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는 것이 나의 신앙의 과제였다.

그런 인간을 양육하는 것이 내가 해야 할 목회적인 과제로 담고 있었다.

한 인간을 아버지 아들로 멋지게 키워내는게 나의 과제요, 내 목회의 과제였다.

 

그러던 내게 하나님은 무서운 터치를 하셨다.

나의 존재의 터를 송두리채 무너트리셨다.

난 하나님 앞에서 가장 부끄럽고 부족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난 세상에서도 가장 보잘 것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난 모든 것을 잃었다.

 

난 하나님께 호소했다.

하나님.

난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난 내가 설 자리조차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너의 문제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라는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넌 가만히 있어라.

내 품에 거하라.

내가 한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온 세상이 나를 다 버려도 예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나를 맞기고 의지할 분이 예수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품은 나를 영원히 받아주시고 감싸주시는 사랑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내 존재의 근본적인 값이 무엇인가?

예수님이 보시는 내 존재의 근본적인 값이 무엇인지를?

 

하나님은 나를 존엄하게 보십니다.

나를 존귀히 여기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그 어떤 값에 의해 결정하지 않습니다.

나를 그냥 나로 사랑하십니다.

이게 내 존재의 값임을 알았습니다.

 

이 나를 사랑하셔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예수님께 붙어 사는 자가 되길 원하십니다.

그게 내 존재의 자리입니다.

 

나는 포도나무,

너희는 가지

내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안에 거하리라의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모든 것을 영원히 책임져 주십니다.

구원, 생명, 용서, 영권, 천국열쇠,

나의 모든 필요를 영원히 채워주십니다.

 

예수를 얻는 자리가 얼마나 큰지를 처음 알았습니다.

율법의 의로 구원얻을 육체가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의 자리를 깊게 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내 존재의 값임을 비로서 알게 되었습니다.

 

난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가 되었습니다.

난 예수님안에서 예수님의 품에만 거하면 되는 존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사랑, 그분의 용서, 그분의 위로, 그분의 품에 거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게 내 존재에게 허락된 영원한 축복입니다.

이 축복은 영원히 내안에 자리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입니다.

일흔번씩 일곱번 죄를 지었다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존재는 예수안에서 모든 것이 보장된 존재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눈물겨운 사랑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새롭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사랑이 나의 사랑이요,

이 신앙이 나의 신앙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보내주셨고,

나는 예수님의 품에 거하는 자로서 영원한 자유자가 된 것입니다.

 

그 자유자인 나는,

내 믿음의 분량껏, 내 소망의 정도껏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앞에 겸손히 말입니다.

일만달란트 탕감받은 자로서 백 데나리온을 갚는 심정으로 말입니다.

이게 오늘 나의 삶의 자리입니다.

 

늘 울어도,

그 눈물로 못 갚을 줄 알아

이 몸밖에 더 없어서

이 몸 드립니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