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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밀양(密陽)’ - ‘구원과 용서’를 넘어서

예인짱 2010. 2. 14. 18:24

영화 ‘밀양(密陽)’의 ‘구원과 용서’를 넘어서
      -이청준 또는 이창동의 문학과 영화에서 구원의 실마리 찾아보기-

                  글쓴이 : 원성웅 목사(옥토교회 담임/ 배재고 88회)

* 이 글은 '기독교 타임지' 2007.6.23 판에 실린 글입니다.

  지난 주간 월요일에는 아내와 함께 영화를 한편 감상하였다.
최근에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전도연의 연기도 궁금하고,
화제가 된 밀양(密陽)이라는 영화가 기독교의 구원과 용서에 대한
신학적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글을 읽었기 때문에
한번 보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영화 밀양(密陽)의 스토리는 교통사고로 남편과 사별한 신애가
유치원 또래의 아들과 함께 남편의 고향 밀양으로 내려와서 피아노 학원을 하면서 시작된다.
주인공 신애 역을 전도연이 연기했는데,
그의 우수에 어리고 애처로워 보이는 첫인상이 이 영화 분위기를 시종일관 한다.
그의 곁에는 밀양에서 자동차수리를 하는 노총각 종찬(송강호)이 신애에 대한
보호본능적인 친밀감과 연애 감정으로 주변을 맴돈다.

그런데 밀양에서 자리를 잡아가던 신애에게 어느 날 예상치 않았던 불행이 찾아온다.
서울에서 내려와 피아노 학원을 하며 땅을 구매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어떤 사람이 신애의 아들을 유괴하여 몸값을 요구한 것이었다.
신애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유괴범의 요구대로 은행에 입금되어 있던 얼마 안 되는 전 재산을 다 찾아
유괴범이 요구한 장소에 갖다 놓았으나 아들은 시체로 발견되고.......





신애의 슬픈 통곡을 달래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범인은 신애의 아들을 가르치던 유치원 웅변학원 원장이었는데,
그는 검거되어 감옥에 들어가서 복역하게 되었다.

슬픔 속에 지내던 어느 날 신애는 예전부터 자신에게 교회에 나오라고 전도하던
길 건너편 약국의 집사님의 권유를 받아 한 작은 교회의‘상처 받은 영혼을 위한 부흥회’에 나가게 되어
목사님의 안수를 받고난 후에 그의 아픔과 고통이 치유 받게 된다.

예전에는 보이지 않아서 믿을 수 없다고 말하던 신애가
이제는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그 하나님의 섭리와 손길을 믿게 되었다고 고백하며 간증 하였다.
그는 교회 성도들과 함께 길거리 전도대에 끼여 찬양도 하고,
속회 모임에도 참여하고, 믿음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아들 잃은 슬픔을 잊고 밝고 즐겁게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신애는 목사님에게 자기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니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기 아들을 죽인 유괴 살인범을 찾아가서 용서 해주겠다고 말한다.

교회의 목사님과 교우들은 신애의 믿음과 사랑, 용서의 실천에 대해 칭찬하고 격려하면서
유괴범이 복역하는 감옥으로 동행해 준다.

그런데 신애가 면회소의 창살을 사이에 두고 만난 유괴 살인범,
웅변학원 원장은 의외로 얼굴이 깨끗하고 마음이 안정되어 보였다.
신애가 범인의 근황을 묻자 자기는 교도소 안에서 잘 지내고 있으며
교회에 다니고 성경도 읽고 세례도 받았다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죄 용서를 받아 신애씨를 위해 늘 기도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유괴범의 이러한 침착한 태도와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마음이 평안하다는 말을 들은
신애는 갑자기 큰 충격과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피해자인 내가 용서하기도 전에 어떻게 하나님이 그를 먼저 용서하실 수 있다는 말인가?”
“내가 당신을 용서하기도 전에 하나님이 어떻게 당신을 먼저 용서할 수 있다는 말인가?”
신애는 혼란에 휩싸이게 되고, 일종의 배신감 같은 허탈함에 빠져 면회소 밖으로 나와서 실신한다.

병원에서 깨어난 후에 신애는 마치 정신병자처럼 완전히 변해버렸다.
그는 교회에 가서 기도하려 하다가 의자를 두드리며 고함을 질러대고,
자기를 위해 기도하기 위해 심방오신 목사님과 심방대원들 앞에서 무례히 행하며 울부짖고,
자기를 위해 특별기도회로 모인 교우의 집에 돌을 던지고,
심지어는 자기를 전도한 약국집 집사님의 남편 장로님을 유혹하여 타락시키려고도 한다.
야외 집회 때는 앰프실에 몰래 들어가서는 훔친 가요 C.D를 틀어놓고 나온다.
그 C.D에서는 “거짓말이야” 라는 유행가가 부흥 목사님의 설교를 방해하며 계속 흘러나온다.

그러다가 마침내 신애는 자해를 하고 피 흘리다가 병원에 실려가게 되는데.......
이런 신애의 시험과 고통과 절망의 자리 곁에는 언제나 사람 좋은 노총각 종찬이 함께 있어준다.
종찬은 원래는 교회에 다니지 않았으나 신애를 따라 다니다가 그 후로도 계속 교회에 다니게 되는 인물이다.



신애가 자해한 상처가 아물고 병원에서 퇴원할 때에
종찬이 자기 차로 데려다 주는데 그의 차에는 십자가가 걸려 있다.

집으로 가다가 신애는 먼저 미장원에 들러 머리를 자르게 되는데,
하필 유괴범의 딸이 학교를 중퇴하고 그 미장원에서 신애의 머리를 자르게 된다.
신애는 참지 못하고 머리를 자르다가 말고 미장원을 뛰쳐나오고 만다.

아직도 용서할 수 없는 유괴범에 대한 미움이 그의 딸에게까지 이어진다.
집에 돌아와서 마당에 거울을 놓고 자르다 만 머리카락을 가위로 자르는
신애를 종찬이 따라 들어와서 거울을 들어준다.
그 때에 햇빛은 그 집 마당 한 구석의 지저분한 곳을 비춘다.

이 영화의 시작은 신애가 아들과 단둘이 밀양으로 들어오는 길에 차가 고장이 나서
길옆에 세운 뒤에 눈부신 하늘을 바라보다가 차에서 내려와서
햇빛이 비치는 개울과 들판을 보고 있는 장면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끝 장면은

신애가 머리를 자르는 마당 한 구석의 지저분한 곳을 비추고 있는 한조각 햇빛이다.
하나님의 햇빛은 은밀히 가난하고 고통 받고 슬퍼하는
낮은 삶의 자리에도 비춰지고 있다는 무언의 메시지가 울려날듯 할 때에 이 영화의 막이 내린다.

  이 영화는 ‘친 기독교적인가’ 아니면 ‘반 기독교적인가’ 의 문제를 떠나서
기독교적 신앙생활이 영화 내용의 배경과 스토리 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관심이 클로즈업 되고 있다.

스토리 속에서 신애는 아들을 잃어버린 고통과 절망을 교회를 통해 치유 받고 회복된 생활을 하게 된다.
영상에 담긴 교회의 찬양과 부흥집회, 성도들의 모습들은 일단 나쁘지 않은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신애가 아들을 죽인 유괴 살인범을 용서해주려고 감옥에 찾아갔을 때에 드러난
그 유괴범의 신앙 태도이다.
그는 어린이의 유괴 살인범으로서 감옥 속에서 어떤 괴로움과 번뇌의 시간을 가진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너무도 평온하고 안정된 모습을 하고 있던 그가
“나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죄 사함과 구원을 얻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애의 말처럼 피해 당사자가 용서해주지 않았는데 범죄자가 그렇게 평안해도 되는 것인가?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라는 것이 그런 것일까? 하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해서 일단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감옥에 갇힌 범인은 교도소 전도를 하는 전도자들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전도자들의 복음은 너무 쉽게만 이해되지 않았을까?

그들은 누구든지 회개하고 예수 믿고 세례를 받으면 구원을 얻고 천국에 들어간다는
복음 교리를 전했을 것인데, 그 복음 교리가 전체적인 구도로는 틀리지 않지만,

피해자에 대한 배려가 전혀 고려되어있지 않은 채, 무책임한 회개와,
감상적인 하나님의 은혜라는 불완전한 구원교리가 감옥에 갇혀있는
그 범죄자를 자기 최면에 빠져들게 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회개에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마태 3:8)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전에
먼저 너희와 불화하거나 너희가 죄를 지은 그 사람에게 찾아가서
먼저 사과하고 용서를 빌고 와서 예배를 드려야 아버지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감옥 속의 유괴범에게는 그런 것이 생략된 ‘자기도취’의 구원과 은혜였던 것이다.

이런 신학이 한국교회의 주류 신학이 되고 있기 때문에 믿음은 좋아 보이는데
파렴치한 교인들이 양산되고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또 하나는 신애의 태도 속에 비쳐지는 일종의 허영심 같은 것이 그의 신앙생활의 실패를 미리 암시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비록 그가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다 하더라도,
믿음이 성숙한 성자도 하기 어려운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하러 가는 ‘섣부른 행위’가
결국 그를 허무와 허탈의 시험에 빠지게 한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용서해 주지 않았는데 어찌 하나님이 그를 먼저 용서할 수 있어요?”
이 말은 이중적인 대답을 필요로 하는 질문이다.

신학적으로 보면 신애가 용서해주지 않아도 하나님은 범죄자를 용서해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므로 죄의 용서는 하나님의 전적인 자유에 속한 영역이다.
그러니 엄밀히 따지면 흉악한 유괴범일지라도 하나님이 용서하시고자 하시면
피해자가 용서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용서하실 수 있다는 말이다.

  구약성경 요나서에는 앗수르의 니느웨 성에 대한 유대인들의 미움과 증오가 드러나고 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가다가 폭풍을 만나 바다에 던져진다.
그는 삼일 밤낮을 고래 뱃속에서 회개하고 나서 뭍에 토하여진 후에 다시 살아 니느웨로 가게 된다.

그런데 요나가 그 크고 악독한 성 니느웨를 돌면서 하루 동안 하나님의 심판을 외쳤는데
의외로 그 성 사람들이 왕으로부터 어린 아이까지 다 회개하고 육축까지 금식시키며 뉘우쳤으므로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에 내리시기로 한 무서운 진노를 내리시지 않기로 하셨다.

그 때에 요나가 하나님께 거칠게 항의를 한다.
“니느웨 사람들이 얼마나 악독한 사람들인데,
우리가 그들에게 당한 고통과 피해가 얼마나 큰데 하나님은 우리의 감정과 생각을 무시하시고
그들을 용서해 주시려 하십니까?”

“우리가 용서해주고 싶지 않은 악당들을 왜 하나님은 용서해주십니까?”라고
항의하는 요나에 대해 하나님은 박 넝쿨을 통해 교훈을 주신다.

“너는 하루 만에 났다가 하루 만에 시든 박 넝쿨을 그렇게 아꼈거늘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별치 못하는 사람이 12만 명이나 있고 육축도 많으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않겠느냐.
그러니 내가 먼저 용서했으니 너희도 용서 하여라” 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이와 대조되는 또 하나의 신학적 관점은
피해자의 용서가 없이는 하늘의 하나님도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너희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니.......”(마태 16:19)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어떤 부분은 사람에게 권한을 대여해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재량권에 따라 용서와 복을 임하시게 하시는 분이시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그 믿음의 후손들을 통해서 복이 지상에 전해지도록 계획하셨고,
롯이나 이스마엘이나 에서를 통해서가 아니라는 점에서 하나님은 사람과의 언약에 제한 받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땅에서 용서하면 하늘에서도 용서하시고,
땅에서 용서치 않으면 하늘에서도 용서치 않으시는 분이시기도 하다는 말이다.

  이 두 신학적 관점은 다 성서적 근거를 가지고 있어서 어느 한 편만 맞고 다른 편은 틀리는 것이 아니다.
역설적이긴 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유와 그 하나님이 인간과 맺은 언약의 관계는
은혜로운 긴장 관계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괴범은 신애가 용서해주러 오기 전에 예수님을 믿고 죄 용서를 받고
새사람이 되어 마음의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랬을 경우에라도 구원 받은 후에 그는 더욱 자기 죄에 대한
통렬한 반성과 회개를 통해 하나님이 용서하신 ‘은혜로운 용서의 서류’에
‘피해 당사자의 용서의 도장’을 확인받기 위해 먼저 노력하고
더욱 죄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살았어야 했을 것이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리스도인들은 ‘용서 받은 죄인’일 뿐이다.
그런데 마치 자기는 용서 받았기 때문에 세상에서 아무에게도 빚 진 것이 없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신애 같은 사람들’을 미치게 하고 허탈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실망하고 허탈해 하는 문제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구원 받고 은혜 받았다고 간증하며,
자기는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자들이 너무도 파렴치하게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
거짓말도 하고 이기적으로 뻔뻔스럽게 살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영화 밀양(密陽)의 원작은 소설가 이청준의 ‘벌레이야기’라 한다.
이 원작을 이창동 감독이 각색하여 전도연과 송강호를 등장시켜서
세계적인 무대에서 호평을 받은 영화로 만들었는데,

원래 원작가인 이청준은 광주항쟁 이후에 김영삼 전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전두환 노태우 두 대통령이 군부 독재와 인권유린에 대한 재판을 받고 사형언도까지 받았으나,
사면을 하고 서둘러서 용서와 화해를 촉구하는 사회 분위기와 어색한 여론 조성을 보면서,
피해자에게는 용서할 마음도 아직 들지도 않았는데 가해자 쪽에서 먼저 용서와 화해를 들고 나오는
이상한 사회현실을 생각하며 이런 이야기를 주제로 삼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생각이 깊지 못한 어설픈 신학이 파렴치하고 어설픈 교인들을 양산했듯이
어설픈 용서와 화해의 노선이 어색하고도 허탈한 절망스러운 사회를 만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해결의 실마리를 은밀한 햇빛(secret sunshine) 속에 감춰두고 있다.
신애는 그런 괴로움과 허탈에 빠져 있지만,
믿음이 없어 보이는 교인 종찬(송강호)은 오히려 신애를 위로하려 하고
교회의 성도들도 신애를 감싸 안으려 노력한다.

  이청준은 예전에도 기독교적 소설인 맹인 안요한 목사의 회생을 소설화한
‘낮은 데로 임 하소서’란 글을 썼고 그 작품은 이장호 감독에 의해 영화로 개봉되었다.
그러나 영화 밀양(密陽)의 원작자 이청준과 감독 이창동은 아직까지
성경이 말해주는 기독교 신앙의 깊이와 넓이를 온전히 이해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한 것 같다.

사실은 기독교 신앙에서의 용서와 사랑은 하나님이 먼저 용서 하시고
인간이 그 용서와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은혜의 구조와,
인간 편에서의 용서를 통해 하나님의 용서가 내 것으로 체험되는 역설과 긴장 상태의 조화인데,
영화 밀양(密陽)에서는 문제 제기는 크게 해 놓고는 주인공 신애가
어떻게 더 높은 차원의 구원과 더 감동적인 용서와 사랑으로 성숙되어가는 지에 대한
고귀한 승화가 없이 끝나고 있어서 아쉽다.

  톨스토이의 소설‘부활(復活)’에는 귀족 자제인 네프류도프가 자기 집안 하녀 카튜사를 겁탈하고,
그녀가 아이를 낳고 쫒겨난 뒤에 매춘부로 전락된 후 억울한 유형을 받게 되었을 때.......
나중에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되어 자신의 파렴치했던  행위를 진심으로 회개한
네프류도프는 자기 때문에 파멸된 카튜사를 따라 시베리아로 함께 떠나려 한다.

그는 자신의 명예와 모든 지위를 버리고 오직 자신 때문에 불행하게 된 카튜사 만을 위해 살기로 결심하고
동토의 땅으로 함께 떠나려 하는데,
그러나 한편 카튜샤는 자기 인생을 파멸시킨 네프류도프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진심으로 용서하고
자기를 위해 시베리아로 따라오지 말라고 간곡히 부탁하는.......

진정한 용서와 사랑의 희생이 사건의 결말을 아름답게 승화시키고 있다.

똑같이 기독교적 신앙을 주제로 삼고 있는 소설인데 우리나라 작가들은 용서와 사랑으로
승화되는 구원에 까지는 이르지 못한 채 방황하고 반발하는 모습을 부각시킨 반면에

톨스토이는 참되고 거룩한 용서와 사랑의 감동으로 인도하고 있다.
구원이 있는 문학과 문제만 제시된 문학과의 차이는 성경에 대한 이해와
기독교 신앙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고 없음에 좌우되고 있다.

  나는 이 모든 문제가 성숙이라는 주제와 관련된다고 본다.
우리의 믿음이 유치한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우리 자신은 은혜를 받았음에도
도리어 어떤 다른 사람들을 미치게 하고, 시험 들게 하고, 불신으로 떨어지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유치한 신앙인은 자기 마음은 편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이기적으로 보여 지고
그래서 더욱 절망감을 주는 교인으로 여겨질 것이다.

또한 우리가 성숙한 신앙으로 자라나지 않는다면 신애처럼 구원과 평안을 노래하다가도
정말로 용서하고 사랑해야 하는 현실 앞에서는
하나님 보다 자기 의를 더 앞세우므로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을 의심하고 대적하는 위치로 추락하게 되고 말 것이다.

  영화 밀양(密陽)은 우리나라 기독교의 미성숙함을 보여주고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에 희망의 실마리가 있음도 보여주고 있다.

성숙한 기독교와 성도들은 아픈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다.
그러나 유치하고 미성숙한 교회와 교인들은 값싼 은혜를 간증하며
도리어 상처 받은 사람들에게 좌절과 절망을 주는 파렴치한으로 비춰질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 교회와 성도들의 믿음이 더욱 성숙되기를 바란다.
또한 이와 더불어 보다 승화된 구원과 용서와 사랑을 담은 고전의 반열에 오를만한 작품들이 발표되고
그런 작품들이 영화화되기를 기다려본다.




♪ You Raise Me Up - Josh Groban

출처:배재학당총동창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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