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삶/가고 싶은 곳

낙안읍성의 옛정취

예인짱 2008. 10. 22. 11:03

<그 품에 안기고 싶다> 낙안읍성 민속마을과 물레방아

▲ 낙안읍성 민속마을 물레방아는 오늘도 세상 시름 콩콩 찧으며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다.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포근해지면서 슬슬 졸음이 오는 마을. 부드러운 초가지붕 아래 놓인 마루에는 언제나 시커먼 보리밥 한 그릇과 시원한 막걸리 한 주전자가 길손을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마을. 아무리 오래 바라보아도 늘 정겹고 언제 찾아도 늘 반갑게 맞이해 줄 것만 같은 어릴 적 내 동무, 내 고향 같은 마을.

지금 낙안읍성 민속마을에 가면 까맣게 잊어 버린 어린 날의 기억처럼 물레방아가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다. 촬촬촬 물소리를 내며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는 물레방아는 그냥 바라보기만 해도 고향의 향수에 포옥 젖어들게 한다. 부드러운 초가지붕을 겹겹이 끼고 해시계처럼 천천히 돌아가고 있는 물레방아.

아버지의 땀방울이 올올이 배인 것 같은 잘 엮은 초가집과 오늘도 세월의 수레바퀴를 돌고 돌리는 낙안의 물레방아를 바라보면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넉넉하고 포근해진다. 그렇다고 그 초가집에 그 옛날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 물레방아가 돌아가면서 예전처럼 절구통에 담긴 곡식을 콩콩콩 찧고 있다는 것도 아니다.

▲ 언제 바라보아도 어릴 적 동무 같고 고향 같은 곳이 낙안읍성 민속마을이다.


▲ 늘 즐겁고 편안하다는 뜻의 '낙안'(樂安)


지난 17일(일) 아침. 따가운 봄햇살을 맞으며 천천히 거닌 낙안읍성 민속마을은 고향의 품 그대로였다. 잘 엮은 초가지붕 위에 가물가물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연초록빛 싹을 파랗게 매달고 있는 나뭇가지. 군데군데 쌓인 붉은 황토. 비좁은 골목길 곳곳에 피어난 노오란 민들레와 보랏빛 예쁜 제비꽃. 이마를 맞댄 초가집 사이로 현기증처럼 핑그르르 돌아가는 물레방아.

첫사랑의 그날처럼 곱게 피어나는 연분홍빛 복사꽃. 어질어질 흐드러지게 피어난 노오란 평지나물꽃. 100여 채 남짓한 초가지붕을 자식처럼 품에 보듬고 있는 낙안읍성. 냇가에 앉아 빨래를 하는 누이의 속살처럼 하얗게 피어나는 배꽃. 종달새와 까투리를 불러들이며 꺼칠한 수염을 드러내는 초록빛 보리밭.

여기가 바로 사적 제302호로 지정된 낙안읍성 민속마을(전남 순천시 낙안면 남내리 299-1)이다. 낙안읍성 민속마을의 특징은 용인민속촌이나 제주민속마을처럼 그저 사람들이 보기 좋게끔 꾸며 놓은 마네킹 같은 그런 마을이 아니다. 실제 이 마을 주민들이 식의주를 해결하며 살아가고 있는, 말 그대로 살아 움직이는 민속마을이다.

옛 우리 조상들이 살아가는 마을의 모습을 그대로 쏘옥 빼 닮았는 낙안읍성 민속마을. 북쪽으로는 금전산, 동쪽으로는 오봉산과 제석산, 서쪽으로는 백이산, 남쪽으로는 옥산이 어미처럼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마을. 그래. 즐겁고 편안한 곳이라는 뜻의 낙안(樂安)이란 이름은 이렇게 뛰어난 풍수지리 때문에 붙혀진 이름임에 틀림없다.

▲ 첫사랑의 그날처럼 곱게 피어난 연분홍빛 복사꽃


▲ 부드러운 초가지붕과 야트막한 돌담을 끼고 피어난 복사꽃은 더욱 아름답다.


한동안, 한바탕 꾸는 봄꿈처럼 민속마을을 팔자걸음으로 천천히 거닐다가 문득 낙안읍성에 올라선다. 읍성 밖에는 드넓게 펼쳐진 낙안벌이 초록빛을 한껏 펼쳐놓고 아지랑이와 씨름을 하고 있다. 낙안읍성은 고려 끝자락부터 왜구가 자주 침입하여 이를 막기 위해 조선 초기에 흙으로 쌓았다는 성이다. 하지만 성을 쌓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낙안읍성에는 재미나고도 아름다운 전설이 깃들어 있다. 이곳에 부임한 임경업 군수와 누나의 이야기. 임경업 군수가 이곳에서 성곽을 쌓을 때 그의 누나는 임 군수를 돕기 위해 병사들의 옷을 만들며, 누가 더 빨리 일을 끝내는가 내기를 했다. 그때부터 누나는 목화를 거둬들여 2000여명이나 되는 군사들의 군복을 만들었고, 임 군수는 병사와 주민들을 불러모아 열심히 성곽을 쌓기 시작했다.

근데, 임 군수의 누나가 병사들의 옷을 다 지었을 때까지도 성곽은 공사가 한창이었다. 그때 임 군수의 누나는 자신이 내기에서 이기게 되면 임 군수의 통솔력과 군사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질 것을 우려하여 군복 하나의 옷고름을 잘라 놓고 성곽이 다 지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성곽이 완성되자 그제서야 옷고름을 달아 일부러 내기에서 져주었다고 한다.

아름답다. 한동안 임경업 군수와 누나의 살가운 이야기를 떠올리며 다시 한번 성벽을 바라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물 흐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이게 어디서 나는 소리일까. 가만이 귀 기울여 들어보니 분명 민속마을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소리임에 틀림없다. 어딜까. 이 마을을 가로지르는 강이나 계곡은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 초가지붕을 낀 돌담길 곳곳에 노랗게 피어난 평지나물꽃(유채꽃)


▲ 낙안읍성에서 바라보는 낙안 들판에는 초록빛 물결과 아지랑이가 넘실댄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민속마을 저 쪽 끝에서부터 눈으로 차근차근 훑는다. 아니나 다를까. 저만치 초가지붕이 처마를 맞대고 있는 곳에 작은 연못 같은 것이 하나 보인다. 그 연못 옆에 아까 보지 못했던 원두막 같은 작은 초가지붕이 하나 서 있고, 그 옆에 오래 묵은 추억처럼 물레방아 하나가 열심히 돌아가고 있다.

그래. 바로 저 소리였구나. 서둘러 낙안읍성에서 내려와 물레방아가 있는 곳으로 다가간다. 물소리가 점점 크게 들린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물레방아 위로 떨어지는 물과 그 물을 봄햇살에 무지개빛으로 튕기며 열심히 돌아가는 물레방아가 또렷하게 보인다. 아, 내가 이곳에서 실제로 돌아가는 물레방아를 보고 있다니.

그랬다. 나는 지금까지 여러 곳으로 여행을 다니면서 물레방아를 숱하게 보았다. 하지만 물레방아가 실제로 돌아가고 있는 모습은 좀처럼 볼 수 없었다. 근데, 여기에 와서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다니. 그것도 꽃이 한창 피어나는 이 아름다운 봄날에 말이다. 나도 몰래 기분이 썩 좋아진다. 마치 지금 열심히 돌아가고 있는 이 물레방아가 올해 나에게 큰 행운을 가져다 주는 행운의 여신 같다는 그런 느낌.

촬촬촬 물소리를 내며 열심히 돌아가는 물레방아 곁에는 예전에 방아를 찧었음직한 절구와 절구통이 놓여 있다. 하지만 물레방아와 절구는 서로 이어져 있지 않다. 아마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옛날에는 이렇게 방아를 찧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전시용인 모양이다. 그래도 기왕 만들었으면 물레방아와 절구를 이어놓아 방아를 찧는 모습을 보여 주었더라면 훨씬 더 좋았을 것을.

▲ 낙안읍성 민속마을의 물레방아는 지금도 봄햇살에 무지개를 튕기며 돌아가고 있다.


▲ 이 절구통에 쌀이나 보리를 넣어 찧어 보면 어떠랴.


하긴, 빈 절구통을 절구가 하릴없이 찧고 있으면 또 무얼 하겠는가. 어찌 보면 빈 절구통을 쿵쿵 찧고 있는 절구의 모습을 보는 것도 꼴불견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왕 물레방아를 돌리고 있다면 절구통에 쌀이나 보리를 넣어 찧어보면 어떠랴. 그렇게 찧은 쌀과 보리로 시루떡이나 개떡을 만들어 이곳을 찾는 나그네들에게 공짜로 하나씩 나누어 주면 또 어떠랴.

한동안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모습을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자니 나도향(1902~1927)의 소설 <물레방아>에 나오는 신치규가 떠오른다. 마을에서 가장 부자이자 권세가였던 신치규. 오십대의 신치규는 무엇이 부족해서 자기 집에서 막실살이를 하는 이방원의 젊은 아내를 물레방앗간에 불러내 몹쓸 짓을 저질렀을까.

나도향은 또 왜 하필이면 그 몹쓸 짓을 저지르는 장소를 물레방앗간으로 정했을까. 늘 제자리 걸음을 하면서 끝없이 돌고 돌아가는 물레방아가 변함없이 이어지는 권세가로 보였을까. 그 물레방아에 매달려 끝없이 절구통에 담긴 곡식을 쿵쿵 찧는 절구가 끝없이 수탈 당하는 가여운 민초로 보였을까.

어찌됐든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모습을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이 세상 온갖 시름이 절로 사라진다. 저렇게 돌고 도는 물레방아에 내 시름을 실어 그 시름이 절구를 타고 절구통에 콩콩콩 찧어져 새로운 희망으로 거듭났으면 정말 좋겠다. 절구통에 넣은 까칠한 곡식이 마침내 맛난 알곡으로 찧어지듯이.

봄의 중심에 서서 바라보는 낙안의 물레방아. 행여 올 봄에 물레방아가 힘차게 돌아가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면 낙안으로 가자. 가서 오늘도 세월을 휘감으며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는 물레방아를 바라보며 어린 날의 빛바랜 기억을 다시 한번 되살려보자. 가서 고달픈 세상사 물레방아 절구통에 콩콩콩 찧어 기쁜 세상사로 바꾸어보자.


========================================== 덧붙이는 글 =========================================



☞ 찾아가는 길
서울 ==> 호남고속도로 ==> 승주 나들목 ==> 857번 국도 ==> 남내리 4거리 우회전 ==>

낙안읍성 푯말 ==> 상사호 ==> 낙안읍성 민속마을

289 낙안읍성 사적 302호 전남 순천시 조선 초기
 
고려 후기부터 잦은 왜구의 침입으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조선 전기에 흙으로 쌓은 성이다.

조선 태조 6년(1397)에 처음 쌓았고, 『세종실록』에 의하면 1424년부터 여러 해에 걸쳐 돌로 다시 성을 쌓아 규모를 넓혔다고
한다. 읍성의 전체 모습은 4각형으로 길이는 1,410m이다. 동·서·남쪽에는 성안의 큰 도로와 연결되어 있는 문이 있고,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 성의 일부분이 성밖으로 튀어나와 있다.
성안의 마을은 전통적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당시 생활풍속과 문화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낙안 읍성은 현존하는 읍성 가운데 보존 상태가 좋은 것들 중 하나이며, 조선 전기의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출처;tong.nate.com/zxcdleog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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