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의 삶/기독교 자료

성만찬에 관한 자료들과 의미

예인짱 2008. 10. 13. 10:15

1. 초대교회의 예배관 - 성만찬에 관련하여


정일웅 교수

초대교회의 예배는 설교와 성찬이 어우러지는 예배였다. 그러나 종교개혁 때부터 말씀의 회복을 가져왔지만 반대로 성찬의 중요성을 간과했다. 말씀의 의미만 예전의 요소로 강조하였고, 성찬은 부차적인 것으로 보았다. “신학적으로 말씀 예배는 성찬 예배로 가는 수단으로 보아야 하며 예배의 실제적인 목표는 어디까지나 성찬에서의 주님과의 신비로운 연합과 교제에 실제적인 목표는 어디까지나 성찬에서의 주님과의 신비로운 연합과 교제에 있음을 우리는 인식해야 할 것이다.”(정일웅-한국교회의 실천신학 p201)

“예배의 본질적인 의미와 관련하여 볼 때 말씀은 하나님의 뜻을 인지적 차원에서 경험하게 하는 도구라면 성찬은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연합을 경험하게 하고, 감성적, 실천적인 은혜의 경험과 동시에 헌신적 삶의 실천을 귀결하게 하는 수단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이라고 하겠다”(227)


J.-J. von Allmen

Worship Its Theology And Practice

JJ폰 알멘 예배학 개론,  정용섭 역 1979,4,20 발행

기념(아나므네시스)를 하는 동안 예배는 단순히 “과거를 다시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구속의 행위가 신앙의 고백에서 약속이 되는 것이다. “예배자가 경배를 드리고 충성을 고백하므로 그를 기념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그리스도교의 예배와 가장 중요한 성례전은 구약성서에 기록한 ” "oth" 즉 표(sign)가 기념적인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거기서 내포된 것에 생명력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그것을 현재에 효험을 가져오는 것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심과 부활을 단순히 요약하는 것은 아니다. 실재로 구속의 역사는 과거에 있었던 것만이 아니라 동시에 오고 있는 것이다.

미래는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과 또 특히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한 구속의 역사의 전과정의 초점에다가 덧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미래는 그것을 확정하고 나타내보이고, 궁극적이고 영원한 실현을 가져오는 것이다. 구속의 과정을 요약하는 데 있어서 예배는 언제나 미래를 지향하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죽음과 승리를 표현할 뿐 아니라 그의 재림을 기대하며 그의 재림 후에 그가 세울 그 나라를 미리 맛보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잡수셨던 마지막 만찬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로운 포도주로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과 마시게 될 메시야적인 잔치를 미리 나타내는 것이다.(마26:29)

이렇게 해서 성도들은 성례전에서 장차 올 그 나라에 들어갈 표를 받는다. 미래의 예표는 더 이상 과거를 그려서 표현하는 것이 아니고 예배에서 이것은 성령의 역사로 과거와 미래가 구속의 과정의 중요한 사건으로 그 영광스러운 현현(顯現)으로 현재에 효과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

과거를 현재에 효과적으로 만들고 미래의 예시와 메시야적 영광을 현재에서 효과적으로 만든다는 의미에서 구속의 역사를 요약하는 이유 때문에 예배는 종말론적인 현상(eschatological phenomenon)이라고 불려질 수 있을 것이다.


초대교회는 “나를 기념하여 이를 행하라”

초대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서로 사귀며 함께 떡을 떼고 기도하는 일에만 힘썼다고 말해지고 있다.(행2:442) 그러므로 만찬은 정기적으로 있었다. 그리고 도로아(Troas)의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에 “떡을 떼기 위해”(행20:7) 모였다는 것이 부연적으로 보도되어 있다. 여기서 “주의 날”과 “떡을 떼는 것” 사이에 거의 자동적인 결속이 있었던 것같이 보이다. ... 진실로 고대 교회에서는 성만찬 없이 집행되는 주일 예배에 대한 시사는 없다. .... 5세기에 이르기까지 파문되지 않은 모든 세례 교인들은 매주 성찬을 받는 것을 당연시 하였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 신도들의 성찬은 훨씬 드물어 졌고, 9세기경에 이르기까지 평균 일년에 한 번 성찬이 있었다. .... 종겨개혁 때 루터는 주일 성만찬을 견지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성공회도 마찬가지였다. 개혁교회만이 주일 성만찬을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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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성만찬이 설교와 분리 된다면...

설교가 성만찬을 향하지 않게 되고, 결국 그리스도의 죽음심과 부활, 그리고 천국의 소망에 대한 메시지가 흐릇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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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생애는 불가피하게 십자가로 인도된다. 십자가에서 떠나서 그의 예언자적 그리고 교사적 사역은 그 참된 본질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예언자적 그리고 교사적 사역은 사제적 사역에도 마찬가지로 필요한데 그것은 사세적 사역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할 뿐 아니라 그것에 기동력을 부여하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와같이, 십자가가 예수의 사역에 필요한 것처럼 성만찬도 설교(말씀의 성례전)에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십자가가 없다면 예수의 사역은 초점을 잃고 무디어지고 분파주의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으로 되고 말 것이다. 성만찬 없는 예배의식은 성(聖)금요일없는 예수의 사역과 같다. ..

그러므로 성만찬이 예배의식에 필요할 뿐 아니라 성만찬의 포기는 예배 의식의 본질의 포기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과장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만찬에서 우리가 자신을 바치도록 부름받고 있다. “일찌기 우리를 위해 중재해주신 우리의 높으신 제사장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우리는 ‘오, 하나님 당신께 찬송의 제사와 우리 마음의 충성을 드립니다. 그리고 우리 모습 그대로를, 우리가 가진 것 모두를 산 거룩한 제물로서 당신을 섬기기 위해 스스로 바칩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드림으로써 하나님을 찬양하고 숭상하면서 우리 자신을 거룩한 산 제사로 헌신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그 앞에 내 놓기 위해 초대받고 있는 한, 성만찬은 예배이다. 그러므로 예배의식이 - 우리가 지금 말해야 하는 요소들과 만찬가지로 - 성만찬을 필요로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 안에서 예배의식이 일종의 교환, 즉 고통의 즐거움으로, 비참을 감사로의 교환, 사랑의 교환이 되어야 한다고 바라시기 때문이다.


김소영. 유니온신학교에서 예배학 전공

초대교회 예배를 기도, 찬송, 가르침, 예언, 방언과 축도로 이어졌을 것으로 보고, 성찬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는다.(현대예배학, 장로교출판사, 1997, p25)

그는  성찬을 매일 밤 통상적으로 하는 예배가 있는데 그곳에서 거행된다고 말한다.(27) “이때 제자나 성도들이 한 장소에서 모이면서 각자가 음식을 가지고 와서 주의 만찬을 겸한 ‘아가페’라고 하는 식사를 함께했다.


로버트 G. 레이번, 예배학, 성광문화사

져스틴 마터의 글에서...

태양의 날(주일)에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나 시골에 사는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서 사도들이 실록(實錄)이나 선지자들의 기록을 시간이 허락하는 한도 안에서 낭독하였다. 그리고 읽은 자가 읽기를 끝내면 사회자가 구구절절이 가르치고 인용된 좋은 모범을 본받으라고 격려하였다. 그 후에 모든 일어나서 기도를 드렸다. 마지막으로......... 기독가 끝나자 떡과 포도즙과 물을 들여와서 사회자가 기도와 감사를 있는 힘을 다하여 드렸다. 그러자 사람들은 아멘이라고 동의하였다. 그리고 분배를 하는 데 축복된 요서의 각자의 몫을 나누고 출석하지 아니한 교인들에게는 집사의 봉사에 의하여 보내어 졌다.(p105)


2. 성만찬의 의미


1. 감사  giving of thanks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대해 감사의 글을 낭송함으로써 하나님께 특색있게 접근한 유대교로부터 유래한 유산이다. 여기서 성만찬이 유월절의 어린양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유월절의 어린양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만찬은 감사의 의미를 갖는다.


2. 양식

초기에 성만찬은 식사와 엄밀하게 구분되지 않은 것 처럼 보인다.(고전11:21) 디다케 9-10에서도 ‘애찬’이 언급되고 있다. 아마 식사를 통하여 육적 생명을 보장받는 것처럼, 애찬을 영적인 의미로 받아 들인 것 같다. 후기에 식사와 성만찬은 분리되었다.


3. 교제

성만찬을 통하여 초대교회는 교제를 했다. 고전10:16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떡을 뗌으로 그리스도인은 하나의 공동체이며, 그리스도의 각 지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것은 성도간의 긴밀한 교제와 친교를 전제하는 것이다.


4. 종말의 소망

이그나티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성만찬에 대하여 “불사의 명약이며 죽음을 물리치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영원한 생명을 낳는 해독제이다.” 그리스도의 임재는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경험된다.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12:13)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11:26)

성만찬 성례전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들이 천국의 잔치에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하게 될 때 갖는 최후 최고의 성만찬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 성만찬 성례전은 하나님의 모든 과거의 사역을 요약하는 것이며 창조와 최후의 종말 안에서 구속 뒤에 오는 것을 향하도록 우리를 떠민다. 상만찬 성례전은 우리의 앞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상상하도록 도울 뿐만 아니라 제한된 방법 속에서 그것에 참여하도록 돕는다. (Note Goffrey, 제임스 화이트의 예배의 역사에서 재인용. 33페이지, 쿰람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