梅花屛題圖(梅鳥圖)
翩翩飛鳥 息我庭梅 파르르 새가 날아 뜰 앞 매화 가지에 앉네
有列其芳 惠然其來 매화 향기 진하여 홀연히 찾아왔으리라
亥止亥樓 樂爾家室 여기 깃 들고 머물러 즐거운 가정을 꾸려다오
華之旣榮 有賁其實 꽃이 이렇게 좋으니, 그 열매도 가득하겠지.
余謫居康津之越數年 내가 강진에서 귀양살이 한지 여러 해가 지났을 때
洪夫人寄敞裙六幅 부인 홍씨가 헌 치마 여섯 폭을 보내왔다.
歲久紅 剪之爲四帖 세월이 오래되어 붉은 빛이 바랬기에 잘라 네 첩을 만들어
以遺二子 用其餘 두 아들에게 주고 그 나머지로
爲小障 以遺女兒 족자를 만들어 딸에게 남긴다.
다산 정약용의 하피첩(霞피帖).
나이 열 여섯에 한 살 연하인 정약용에게 시집 온 풍산 홍씨가 나이 오십 줄에
들어선 어느날 장롱 속에 고이 간직했던 빛 바랜 다홍치마를
강진에 귀양 가 있는 다산에게 보냈다.
다산이 나이 40에 귀양을 떠난 지 10여년이 넘었고 언제 해배(解配) 될지
가늠하지 못하는 처지에, 접어든 황혼에 대한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신혼 때 입던 그 치마가 장롱 속에서도 빛이 바랬으니
인생의 무상함을 탓해야 무엇을 하겠습니까?
자식 아홉에 여섯을 가슴에 묻고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누에와 함께
자식들도 키웠으니 그녀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은 가히 짐작을 하고도 남는다.
38세에 얻은 농장도 세 살이 되던 해에 죽었고,
귀양지에서 그 소식을 들은 다산이나 혼자 그 일을 감당을 했어야 했던 부인 홍씨,
모두 애절하기는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다산은 요절한 아이들을 불쌍히 여겨서 “구장이와 효순이는 산등성이에다 묻었고,
삼동이와 그 다음 애는 산발치에다 묻었다. 농아도 필시 산발치에 묻었을 거다”라고
적고는 “오호라, 내가 하늘에서 죄를 얻어 이처럼 잔혹하니 어쩌란 말인가”라고
비통해 했다.
말없이 여섯 폭의 다홍치마가 보내 왔지만 다산은 그 치마를 잘라서 만든 서첩에
“노을 치마”란 뜻인 “하피첩(霞피帖)”이라 표지를 썼다.
찾아 온 황혼에 순응을 하자는 뜻으로 빛바랜 다홍치마를 보낸 것인지,
아니면 현재는 고통스러우나 아름다운 추억을 생각하며 힘을 내자는 뜻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다산은 그 치마폭으로 하피첩을 만들었다.
옛 사람들의 절제된 애정 표현, 그러나 그 정신적 교감은 현대 누구도 따르지는 못할 것이다.
다산은 18년의 유배에서 풀려서 집에 온 때가 58세,
그러나 둘은 다시 18년을 같이 살다가 75세에 별세를 하였습니다.
다음은 다산이 작고 하시기 전 병중이지만 회혼례(결혼 61주년)를 위하여 지은 시.
회혼례 몇일 뒤에 별세를 하셨다.
육십 평생 바람개비 세월이
눈앞을 스쳐 지나는데
무르익은 복숭아 봄빛이
마치 신혼 때 같아라.
칠순 나이에 신혼의 기분을 연상할 수 있는 그들의 정신 세계,
신혼은 더불어 누리는 것이니 부인 홍씨 역시 그에 상응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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