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의 삶/역사,추억이야기

다산의 사상

예인짱 2008. 8. 7. 16:47

다산의 학문은 경학(經學)에서 출발한다.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면서 쓴 <자찬묘지명>에 “육경(六經)사서(四書)로써 자신의 심신을 수양하고, 일표이서(一表二書)로써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니, 이로써 본(本)과 말(末)을 갖추었다”고 적고 있다.

다산의 학문체계는 경학을 근본으로 하고, 경세학을 그 실현방법으로 보고 있다. 경학을 통해 수기(修己), 즉 자기의 인간됨의 완성을 위해 수양하고, 경세학으로 치인(治人), 즉 완성된 인격과 능력으로 천하와 국가를 경영(세상에 봉사)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유배시절 초기에 경학부터 본격적으로 연구에 들어갔다.

 

다산은 『오학론』에서 성리학, 훈고학, 문장학, 과거학, 술수학의 다섯가지 학에 관해서 그 폐단을 비판했다. 다산은 당시의 지배적인 학문이던 주자성리학에 안주하지 않았다. 관념화된 주자성리학은 더 이상 시대를 이끌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산은 공자와 맹자의 본래 정신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한다. 이는 결코 복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동양의 혁명적 사상은 당시의 지배이념에 대한 비판으로 그 근거를 고대의 전통에서 찾곤 했다. 다산의 개혁론도 전통에 내재된 본래적 가치를 재각성함으로써 현재의 묵은 폐단을 제거하는 논리를 취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다산정신으로 돌아가자’ 하는 것도 이와 같은 이치라 할 수 있다)

다산은 이론 위주의 성리철학으로 윤색된 육경(六經)과 사서(四書: 논어, 맹자, 대학 중용)를 새롭게 재해석하여 공자, 맹자의 본지(本旨)가 무엇인가를 해명하는 데에 힘썼다. 그 결과가 《논어고금주》48권을 비롯하여 《맹자요의》 9권 등 육경사서에 대한 232권의 방대한 저술로 남았다.

여기서 다산은 성(性) · 인(仁) · 도(道) · 덕(德) · 명(命) 등 대부분의 유교의 중심적인 명제(命題)들을 다시 해석한다. 이(理)라는 관념의 세계로 해석한 주자와 달리, 실행과 실천이 가능한 실학적 사고로 새로운 경전 해석을 시도한 것이 다산의 경학이었다.

 
 

다산은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학문자세를 견지했다. 청나라에서 새롭게 전래된 경전해석 방법인 고증학이나 서양에서 전래된 서학 등 새로운 사조에 열려있었다. 그리고 고증학의 실증적 태도 등 객관적 학문자세를 따르지만 그에 머물지 않았다. 실증이라는 수단에 매몰되지 않고 실용이라는 목적을 추구했다. 인간과 사회의 가치를 추구했던 것이다.

다산은 속유론(俗儒論)에서 ‘속된 선비는 시의(時宜)를 모르니 어찌 일을 맡길 수 있겠는가?’라는 주장에 대해 논하면서, 고루한 선비의 잘못을 질타했다.

“참 선비의 학문은, 본디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며, 외적을 물리치고 재용(財用)을 넉넉하게 하며, 문(文)에 능하고 무(武)에 능한 것, 이 모두 해당하지 않은 것이 없다. 어찌 옛 사람의 글귀나 따서 글을 짓고, 벌레나 물고기 등류의 해설을 하고, 소매 넓은 선비 옷을 입고서 예모(禮貌)를 익히는 것만이 선비의 학문이겠는가.”

 

경학과 더불어 다산의 중심과제인 경세학은 당시 사회현실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조선후기의 세상은 썩고 병들지 않은 분야가 없었다는 것이 다산의 진단이었다. “털끝 하나인들 병들지 않은 분야가 없다(一毛一髮無非病耳)”고 보았으며,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 만다”며 개혁의 불가피성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정약용이 쓴 자찬묘지명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경세유표』를 지은 동기는 ‘오래된 나라를 새롭게 할(新我之舊邦)’ 생각이라 했다. 나라를 완전히 개혁하여 새로운 체제로 바꾸려는 의사로 경세유표를 저작했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다산은 숱한 개혁안을 내놓았다.

 

다산 경세학의 근저에는 민(民)을 근본으로 여기는 자세 또는 민(民)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한다. 다산이 남긴 시문들은 당시 민초의 피폐하고 참혹한 현실을 고스란히 그려내고 있다. 경기 암행어사로 민간에 잠행하면서 농촌의 피폐상을 직접 보고서, 강진 귀양살이 때 국가권력과 아전의 횡포를 직접 듣고서 토해낸 글들이다.

다산은 당시의 치자-피치자의 구조에서 백성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치자의 책무와 피치자의 권리를 각성시키고자 노력했다.

원목(原牧)이라는 글에서 “목민관이 백성을 위해서 있는 것인가, 백성이 목민관을 위해 생긴 것인가?” 이러한 질문으로 시작하여 “목민관이 백성을 위하여 있는 것이라(牧爲民有也)”고 결말을 짓고 있다.

또한 탕론(湯論)에서는 “탕왕(湯王)이 걸(桀)을 추방한 것이 옳은 일인가?”, “신하가 임금을 친 것이 옳은 일인가?” 라는 질문으로 시작하여, “천자는 여러 사람이 추대해서 만들어진 것이다(天子者 衆推之而成者也)”고 답한다. 그리하여 “옛날에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추대했으니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추대하는 것이 순(順)이라”고 보았다.

다산은 목민심서 서문에서 군자의 학문은 수신(修身)이 그 절반이요, 나머지 절반은 목민(牧民 : 백성 다스리는 것)이라 했다. 그리고 목민관으로서 요구되는 덕목으로 ‘율기(律己: 자신을 다스림)’, 봉공(奉公: 공을 받듦), ‘애민(愛民: 백성을 사랑함)’ 세 가지를 벼리로 삼고 있다. 이 모두가 백성 한사람이라도 그 혜택을 입었으면 하는 것이 다산의 마음이었다.

『흠흠신서』를 지은 것도 법의 집행에서 억울한 백성이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이러한 다산의 애민정신, 민본사상은 민생을 위한 각종 대책으로 연결된다. 경자유전(耕者有田), 균산병활 원칙에 입각한 토지제도 조세제도의 개혁론을 전개했다. 나아가 제도개혁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생산증대의 방법을 모색한다. 기계와 기술의 도입에 의한 생산성 향상을 도모하는 것이다.

 
 

다산은 그의 「기예론(技藝論)」에서 기술을 개발하고 널리 적극 도입할 것을 주장했다. “사람이 많이 모일수록 그 기예가 정교하게 되고, 세대가 아래로 내려올수록 그 기예가 더욱 공교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아, 더 넓은 세계의 기예를 배울 것과 새로운 기예를 배우는 것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그리하여 농업의 기예나 직조의 기예를 정교하게 하여 편리함을 도모하고 소득을 올릴 수 있고, 병기의 기예를 정교하게 하여 용맹을 돕고 그 위태로움을 보호할 수 있다고 설파했다. 그 밖에도 의술과 백공의 기예가 정교해지면, 나라가 부유해지고 군대가 강해지고 백성들이 넉넉하여 오래 살 수 있을 것이라 했다.

 

21세기의 초입에서 지금 왜 다산 정약용인가. 다산을 한국 사상사의 한 고봉으로 역사적으로 연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왜 지금 새 세기의 첫걸음을 내디디면서 특별한 의미를 갖고 그에게 뜨거운 시선을 보내고 있는가. 그것은 개혁이라는 문맥이다. 한국은 지금 개혁도상국( Newly Restruturing Countries )이다. IT( Information Technology )혁명을 축으로 하는 정보화와 세계화의 물결을 잘 타지 못하면 물에 빠져 죽고 만다. 세계 각국이 구조조정에 필사적인 것도 이 때문이다. "개혁이 아니면 죽음이 있을 뿐이다"고 하면 지금의 한국경제에 관한 말 같지만 실은 다산의 문장 속에 자주 등장하는 문구다.

흔히 다산을 조선후기 실학사상의 위대성자라고 평가하고 있지만 오히려 개혁사상의 위대성자라고 평가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는 크고 작은 여러 개혁적 사고의 개울물들을 자신의 물줄기 속으로 모아 체계화했고 큰 강물의 출발점으로 이뤄냈다. 그러므로 구한말 장지연 박은식 같은 개혁사상가들은 정다산의 개혁의 강물로 돌아가 그곳에서 재출발하려 했다. 다시 오늘날 21세기 개혁의 흐름 속에서 다산이 이룬 강의 출발점으로 되돌아가 그 순수와 정열 그리고 꿈을 되찾으려는 것이다.

'풍요의 삶 > 역사,추억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100년 전  (0) 2008.09.10
다산 정약용  (0) 2008.08.07
다산 정약용의 생가-여유당  (0) 2008.08.07
아! 그때를 아십니까.  (0) 2008.05.30
훈민정음해례본-국보70호  (0) 2008.0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