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의 삶/역사,추억이야기

다산의 하피첩

예인짱 2008. 9. 10. 17:41


梅花屛題圖(梅鳥圖)

 

翩翩飛鳥 息我庭梅              파르르 새가 날아 뜰 앞 매화 가지에 앉네

有列其芳 惠然其來              매화 향기 진하여 홀연히 찾아왔으리라

亥止亥樓 樂爾家室              여기 깃 들고 머물러 즐거운 가정을 꾸려다오

華之旣榮 有賁其實              꽃이 이렇게 좋으니, 그 열매도 가득하겠지.

 

余謫居康津之越數年            내가 강진에서 귀양살이 한지 여러 해가 지났을 때

洪夫人寄敞裙六幅               부인 홍씨가 헌 치마 여섯 폭을 보내왔다.

歲久紅 剪之爲四帖              세월이 오래되어 붉은 빛이 바랬기에 잘라 네 첩을 만들어

以遺二子 用其餘                 두 아들에게 주고 그 나머지로

爲小障 以遺女兒                 족자를 만들어 딸에게 남긴다.

 

다산 정약용의 하피첩(霞피帖).

 

나이 열 여섯에 한 살 연하인 정약용에게 시집 온 풍산 홍씨가 나이 오십 줄에

들어선 어느날 장롱 속에 고이 간직했던 빛 바랜 다홍치마를

강진에 귀양 가 있는 다산에게 보냈다.

 

다산이 나이 40에 귀양을 떠난 지 10여년이 넘었고 언제 해배(解配) 될지

가늠하지 못하는 처지에, 접어든 황혼에 대한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신혼 때 입던 그 치마가 장롱 속에서도 빛이 바랬으니

인생의 무상함을 탓해야 무엇을 하겠습니까?

자식 아홉에 여섯을 가슴에 묻고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누에와 함께

자식들도 키웠으니 그녀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은 가히 짐작을 하고도 남는다.

 

다산의 나이 스물일곱에 과거에 급제를 하였고 13년 뒤에 다시 귀양을 갔다. 

빠른 출세도 아니었지만 인생의 황금기에 유배를 가야만 했던 다산으로 인하여 

가정 경제는 거의 부인 홍씨의 몫이었다.

 

38세에 얻은 농장도 세 살이 되던 해에 죽었고,

귀양지에서 그 소식을 들은 다산이나 혼자 그 일을 감당을 했어야 했던 부인 홍씨,

모두 애절하기는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다산은 요절한 아이들을 불쌍히 여겨서 “구장이와 효순이는 산등성이에다 묻었고,

삼동이와 그 다음 애는 산발치에다 묻었다. 농아도 필시 산발치에 묻었을 거다”라고

적고는 “오호라, 내가 하늘에서 죄를 얻어 이처럼 잔혹하니 어쩌란 말인가”라고

비통해 했다.

 

말없이 여섯 폭의 다홍치마가 보내 왔지만 다산은 그 치마를 잘라서 만든 서첩에

“노을 치마”란 뜻인 “하피첩(霞피帖)”이라 표지를 썼다.

찾아 온 황혼에 순응을 하자는 뜻으로 빛바랜 다홍치마를 보낸 것인지,

아니면 현재는 고통스러우나 아름다운 추억을 생각하며 힘을 내자는 뜻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다산은 그 치마폭으로 하피첩을 만들었다.

 

옛 사람들의 절제된 애정 표현, 그러나 그 정신적 교감은 현대 누구도 따르지는 못할 것이다.

다산은 18년의 유배에서 풀려서 집에 온 때가 58세,

그러나 둘은 다시 18년을 같이 살다가 75세에 별세를 하였습니다.

 

다음은 다산이 작고 하시기 전 병중이지만 회혼례(결혼 61주년)를 위하여 지은 시.

회혼례 몇일 뒤에 별세를 하셨다.

 

육십 평생 바람개비 세월이

눈앞을 스쳐 지나는데

무르익은 복숭아 봄빛이

마치 신혼 때 같아라.

 

칠순 나이에 신혼의 기분을 연상할 수 있는 그들의 정신 세계,

신혼은 더불어 누리는 것이니 부인 홍씨 역시 그에 상응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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