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의 삶/기독교 자료

바울의 성령 이해

예인짱 2008. 6. 26. 11:03

바울의 성령 이해


서    론

 A . 연구목적

성령의 역할에 대해서 올바른 성경적 관점을 갖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개인적인 면에서 성령은 죄인을 그의 타락된 아담적 본성에서 구원하여 두번째 아담되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변화시키는 구원론적인 사역을 담당하실 뿐만 아니라, 그가 계속 죄의 권세와 싸워 극복할 능력을 제공하고 그의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결단하고 행동해야 할지 방향제시의 역할을 하신다.1 또한 공동체적 면에서 성령은 교회의 참된 성장을 결정하는 역할을 담당하시기 때문에 성령의 역할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교회는 2천 여년의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복음전파의 사명을 감당해 왔다. 이 사명을 감당하는데 있어서 성령은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오순절 성령감림을 통해 시작된 복음전파의 물결은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와 더불어 강력하게 나나타났고, 그 결과 교회는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하며 오늘날까지 선교적인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20세기 시작된 오순절 운동으로 교회는 그동안 거의 잊혀져 왔던 성령의 초자연적인 표적과 기사와 능력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최근 한국교회는 성장위주의 전략을 강조한 나머지 신자의 인격을 변화시켜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가게 하는 성령의 내면적 사역에 순종하지 못하였다.  성령의 사역은 그 특성상 초자연적인 기사와 표적을 수반하기는 하지만 성령은 엄연히 인격을 가지고 있는 분이시다. 성령의 인격성을 무시하여 성령을 단지 능력을 행하는 도구로 이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한국교회는 교회는 숫적으로는 부흥하였지만 세상에서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였다는 비판을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는 교회가 성령의 은사들을 교회성장의 수단으로 생각하여 성령의 사역에 대하여 잘못 이해한 탓이라고 할 것이다.

요즈음 한국교회에는 성령의 활동과 사역에 대한 뜨거운 논쟁들이 일고 있다. 그 문제 중의 하나가 성령침례이고 또 하나는 참된 영성 개념의 혼란이다. 한국의 전통적인 교회들도 이 문제 대한 통일된 해답을 주지 못하고 있고, 심지어 같은 교단의 신학교수들 사이에서도 심각한 해석상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1

따라서 본 연구의 목적은 성령의 사역과 그리스도인의 삶의 관계에 보다 직접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 바울서신을 통해 바울의 성령이해를 고찰해 봄으로써 성령에 대해서 올바로 이해하고 어떠한 삶이 성령 안에서의 참된 삶인지 살피는 것이다. 또한 잘못 사용되어 왔던 성령의 은사와 사역이 있다면 그것을 바로잡고 모든 성도가 능력있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하나님 나라에 힘있게 쓰임받게 하려는데 본 연구의 목적이 있다.

 

  B. 연구배경

성령의 역사가 개인과 교회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만약 우리가 성령에 대해서 무지하다면 우리 개인의 생활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서도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적인 상황에서 흔히 사랑이 없이 은사들을 경험하는 형상들이 눈에 뛴다. 그렇다고 반드시 도덕적, 윤리적인 사람이 신령한 사람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진정한 성령의 열매는 윤리성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한국교회가 당면한 시급한 문제는 바로 땅에 떨어진 윤리성을 바로잡고 겸손과 희생의 길을 걸어가신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성도들을 훈련시키는 것이다. 성장위주의 목회철학이나 세속적이고 기복적인 신앙으로는 현재의 문제는 극복할 수 없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 성서적인 성령의 이해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연구자는 바울의 성령론을 다루게 되었다.

바울은 율법주의자로서 교회를 핍박하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율법에서 성령으로 그 삶의 자리를 바꾼 사람이다. 그는 교회에 보내는 서신서들을 통해 신자들이 옛사람의 모습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지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으심을 새사람으로 살기를 권면하였다.이러한 내적은 변화를 가능케 하는 분이 성령이시라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성령은 새 언약의 시대에 그 언약 백성들의 성격을 규정하는 중심요소이자, 그 삶을 변화시키는 내적인 힘이다.

 성령에 대한 이해는 바울 이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구약시대와 중간기 시대 및 공관복음서 저자들을 통해서도 성령에 관한 다양한 이해가 존재함을 알게 된다. 하지만 바울은 아마도 신약의 저자들 가운데 성령의 사역에 있어서 가장 실제적으로 자세히 다룬 저자일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의 교훈들 속에서 우리들은 우리의 삶과 관련하여 나타나는 성령의 대표적인 사역들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C. 연구 방법

본 논문은 바울서신에 나타난 바울의 성령 이해를 학문적으로 검토하고 분석하고자 한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현재 한국교회가 씨름하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염두에 두고 진행할 것이다.

 접근방법으로는 조직신학적 접근보다는 성서신학적인 입장을 취하였고, 현재 진행되고 있는 신학자들의 견해를 참고하였다.

먼저 Ⅰ장에서는 바울의 성령론의 배경를 다루었다. 바울은 그 자라온 유대교적 배경과 그의 학문적 배경으로서 헬라적 배경, 그리고 회심한 이후 최초기독교적 배경 속에서 바울만이 수행할 수 있는 엄청난 사역의 발자취를 남겼다. 그리고 이러한 배경은 그의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제 Ⅱ장에서는 성령의 존재를 다루고자 한다. 그의 서신서들에 나타나고 있는 성령의 존재를 그리스도의 영, 새생명으로서의 성령, 그리스도와 연합으로의 성령 그리고 성령, 믿음, 성령침례에 대해서 다루었다.

제 Ⅲ장에서는 실제로 그의 서신서에 나타나고 있고 그가 각 교회들에게 말하고 있는 구체적인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검토하게 될 것이다. 신자에게 있는 육체와 성령과의 갈등과 싸움, 성령의 은사에 대한 바울의 이해, 그리고 성령을 통해서 누리게 되는 생명에 대해 다루었다.

본 연구논문은 성령에 대해서 바람직한 이해를 하는 동시에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성령의 은사 및 여러 가지 사역에 대해서 잘못된 사고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였다. 


 

 Ⅰ. 바울의 성령론의 배경


바울의 신학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바울의 성장배경 및 그에게 영향을 주었던 종교적, 학문적, 사회적,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리라 본다. 바울은 철저히 유대인 토양에서 성장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율법준수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율법에 있어서 흠이없는 자라고 자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는 그가 유대종교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 토양을 가지고 있는 최초 기독교의 신학사상을 형성하는데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둘째로 헬라적 배경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바울이 성장한 다소라는 지역은 헬라사상의 막대한 영향을 받던 곳이다. 그리고 사도행전 및 그의 서신서들에 등장하고 있는 사건과 단어에서 헬라사상의 배경을 짐작케 하는 자료들을 발견하게 된다.

셋째로 최초기독교의 배경을 들수 있다. 최초 기독교 안에서의 바울이 받은 여러 가지 영향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A. 유대교적 배경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현을 체험하기 전까지 교회를 핍박하는 열심있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다(빌3:5). 바울은 이 사실을 회고하면서 자신을 팔일만에 할례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흠이없는 자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바울 자신의 고백을 통하여 볼 때, 바울이 철저하게 유대적 토양에서 자라난 사람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또한 율법에 정통한 사람이었고, 당시 최고의 학벌이 가말리엘의 문하생이 되어 철저히 율법을 공부하기도 했다(행 22:3). 이런 유대적 배경으로 인하여 바울은 구약성서에 범주들과 이미지들을 빌려 생각하고 사상을 표명한다.1 그래서 큄멜은 “바울은 유대인 랍비의 제자였으며 그러므로 기독교 최초의 신학적 사상가가 되었기 때문에 교회사적으로 결정적인 업무를 수행할 능력이 있었다”고 말한다2.

바울과 유대교의 관계는 바울의 생전에 여러 측면에서 서로 충돌하기도 하지만 초대 기독교가 유대교의 회당이라든지, 신앙이나 예배나 조직 등 여러 면에서 복음 전파나 신학이나 의식이나 생활에서 배우기도 하고 도움을 받는 입장이기도 하다. 바울이 바리새인으로서 유대교 입장에서 기독교를 반대하고 방해하기 시작해서 교회 안에서 기독교의 복음을 전파할 때에 이방인에게 할례를 베풀고 율법을 지키게 하여 기독교로 남아 있었느냐 하는 문제로 발전해서 유대교 회당과 안식일에 말씀을 증거하는 문제 등 여러 측면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끝없이 바울과 유대교와 계속적이고 또 심각하게 대두되었던 것을 바울서신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3 바울에게 있어서 구약성경과 유대교와 묵시 문학적 경건과 사상과 사회적 종교적 배경과 토양이 없이는 결코 기독교의 복음이 결실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유대교적 배경은 그의 신학사상에 많은 영향을 주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바울은 로마서 1장 3절과 4절에서 성령을 육신의 혈통과 대비되는 ‘성결의 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어떤 학자들은 본래 이 문구가 유대 기독교나 그 영향권 아래 있었던 사람들에 의해 처음 사용되어졌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들에게 있어 예수의 다윗 가문의 혈통은 그의 메시야적 사역과 신분에 결정적으로 중요했을 것이다. 바울이 이런 유대적 색체를 띤 전통적 형식문에다 ‘성결의 영’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문구를 넣은 것은 유대교에 대해 비평하려는 의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바울의 신학은 유대교 신학과의 논쟁을 통해서 바울 자신의 독특한 신학을 형성하게 된다. 바울서신을 통해서 우리가 알수 있는 것은 예수와 유대인들 간의 논쟁과 긴장관계가 있었던 것처럼 바울과 유대인들간에도 이러한 논쟁과 긴장관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바울은 유대교 바리새인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입증하려고 노력했다. 바울은 교회를 유지시키는  복음을 요약하여 제시한 그의 진술 속에서 잘 드러나듯이. 기독교와 유대교의 상호 간에 대치관계를 묘사하고 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유대인”라는 용어를 율법에 매여 있는 유대인의 혈통을 가진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한다. 유대교에 속한 유대인들은 율법에 속하여 있으면서도 그 율법을 거스리는 삶을 살며 그러면서도 약속을 받은 상태에 있는 기독교 이전의 사람의 태도의 한 실례가 된다.

로마서 2장과 3장에 바울은 유대교는 단순히 기독교 이전의 인류에 속한 하나의 역사적 부분만이 아니라, 그 부분의 정점으로서 만인의 타락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4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도다”(롬 2:23)라는 구절에서 볼수 있듯이 바울은 유대인들이 겉으로는 공의를 나타내 보이면서 율법을 결의론적으로 오용하여 실제로 하나님의 계명들을 회피함으로써 실제로 그것들을 지키지 않는다고 책망하고 있다. 유대인의 경험적인 자기 인식에 의해서 판단하면, 바울이 묘사한 그리스도인 이전의 인간의 실존은 하나의 추상적이며 왜곡된 모습이다.5 이 왜곡된 실존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는 율법아래 나셨고(갈 4:4 이하),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희망이 되었다.

바울의 성령이해는 바로 이런 율법에 의한 구원을 주장하는 유대교적 사상을 반대하면서 성령론을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다. 바울 이전 시기에도 성령에 관한 여러 가지 이해가 있었다. 공관복음서들 뿐만 아니라 그보다 훨씬 이전 구약시대와 중간사 시기의 유대교 내에서도 성령에 관한 기존의 다양한 이해들이 존재했었으나 바울은 그런 기존의 성령이해들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그것들을 자신의 기독교적 신앙체계 속에 소화시키면서도 자신의 독특한 성령이해를 체계화시켰다.6

이한수에 의하면 바울은 유대교적 배경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경험을 한 이후에 초대교회와 중간사 시기의 유대교에서 존재하던 기존의 성령 이해들을 바울의 성령론과 대비해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바울의 성령론에 있어서 특징 중의 하나는 바울이 성령을 구원론적인 기능들과 연관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이 성령을 구원론적인 기능들과 연관시킨 것은 솔로몬의 지혜서와 쿰란에서 발견된 찬송시들을 제외한 중간사 시대의 문헌에 잘 나타나지 않고, 누가와 초대교회의 성령론에는 완전히 결여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지혜서에 따르면 지혜는 구속적 능력을 지니는 것으로 종말론적인 측면을 나타낸다. 지혜를 따라 사는 의인들은 불멸의 영생을 얻을 것이 확실하며 열방을 다스릴 권세가 주어질 것이다.  따라서 기능적인 면에서 성령을 지혜와 동등한 존재로 제시함으로써 지혜서의 저자는 바울과 마찬가지로 성령을 받아야 구원의 축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확증한다. 지혜서의 전망과 바울의 성령론 이해가 유사하다는 것은 바울이 중간사 시대의 유대 지혜 사변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최근 학자들은 인정하고 있다.

구약성서에 나타난 성령, 즉 ‘루아흐’는 하나님께서로부터 온 영으로 구체적으로 인간의 삶 속에서 활동하는 하나님으로 이해되었으며 이 하나님의 영은 창조의 영역, 역사의 영역 및 예언자 개인의 영역에서 활동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중간기 문헌에 나타난 영은 창조의 영역에서의 역할이 점차 사라지고 주로 특출한 예언의 영으로 간주되었으나 이것 역시 정지된 영으로 간주되었다. 헬라적 유대교에서는 성서적이면서도 동시에 플라톤적인 사상이 나타나 몸과 영혼을 구분하는 이원론적 사상과 영의 선재성 및 불명성이 두드러진다.


B. 헬라적 배경

바울에게 있어서 인간존재를 특징짓는 가장 포괄적인 개념은 ‘몸’이다. 바울이 ‘몸’을 전인으로 보는 견해는 히브리적 사유에서 유래했다고 한다면 몸을 이 세상에 있는 장막집(고후5: 1-4)으로 보고 죽을 몸으로부터의 구원(롬7:24)을 말하고 있는 바울에게서 그리스 헬라사상이 엿보이기도 하며 그의 유대적 교육배경 만이 아닌 그리스 헬라 교육배경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7. 당시의 헬라사상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바울의 신학을 연구하는데 도움이 될것으로 생각한다.

헬라사상의 거대한 두줄기를 이루고 있는 것은 플라톤의 이원론과 영지주의이다. 플라톤은 현상계와 사상계로 구분되는 두개의 이원론과 몸과 혼으로 구분되는 인간학적인 이원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영지주의자들처럼 모든 물질이 악하다고 보지는 않았지만 몸은 온통 악 투성이며 비본래적인 것이고 사악하다고까지 한다. 그러나 나중에 가서는 몸은 영혼에 의해 움직인다고 생각하였고 감각적으로 인식되는 세상의 아름다움이 이데아의 세계로 나가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서 구원을 정신의 함양에 달린 문제로 보았다.8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는 플라톤과는 대조적으로 몸은 근본적인 것이고 영보다 먼저 선재한 것으로 이해한다. 영은 몸, 즉 그것의 외적인 형상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생명의 실현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영을 인간의 몸의 목표로서 보고 있다.

영지주의의 개념적 골격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급진적인 이원론이다. 이 이원론의 시초는 플라톤주의. 이단 종교사상, 그리고 조로아스터교 사상등이다. 영지주의에 있어서 몸은 영혼의 감옥이며 모든 물질세계는 악한 것이고 오직 영적인 것만이 선하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위대한 헬라의 사상가들도 영혼의 불멸성을 믿었다. 헬라에서의 몸개념과 영개념은 철저히 이원론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플라톤의 이상계와 현상계를 이원론적으로 파악했던 헬라사상은 인간에게 있어서 몸과 영의 관계는 신과 물질계의 관계로부터 유추 해석되는데 신은 제3의 중간존재인 로고스를 통하여 물질계에 연결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인간의 경우에 있어서 영은 혼을 매게로 하여 몸과 연관되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매개물로서의 혼은 육과 가까워지느냐, 아니면 영과 가까워지느냐에 따라 물질적 존재로 간주하기도 하고, 비물질적인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여 영육적인 성격의 존재로 파악되었다.

이와같이 헬레사상의 이원론은 인간론적 이원론으로 발전되었다. 이런 배경속에서 인간은 삼분설적으로 이해되었다. 먼저 인간의 몸은 동물 및 식물과 그 본성을 공유하고 있다. 둘째, 인간의 혼은 이성과 감성의 근거요, 또한 사회적 관계를 가능케하는 기반으로서의 정신적 요소다. 인간의 혼은 인간과 동물을 식물로부터 구별시키는 요인이다. 셋째,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인간이 영을 소유하는 이유 때문인 것으로 해석한다. 이는 종교적 요소로서 인간으로 하여금 영의 일들을 분별하고 인식하게 하며, 영적인 자극에 반응하게 하는 개인적인 영성의  요인이다.  이 영으로 말미암아 인격적인 특징이 비로소 혼속에 거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삼분설적 인간론보다 훨씬 더 폭넓게 주장된 것이, 인간은 두 요소, 즉 물질적 관점의 육체와 비물질적 요소인 영이나 혼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이분설의 견해이다. 이런 이분설적인 관점은 교회의 보편적인 신앙이 될 만큼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바울은 이러한 헬라주의가 만연했던 장소인 다소에서 자라났다.  바울은 개종 후 제1차 선교여행을 떠나기까지 근 10년동안 다메섹, 다소, 안디옥과 같은 문화중심지에서 헬레니즘 분위기에 싸여 살았다. 이렇듯 바울이 자라나고 성장해온 삶의 중심이 헬라문화권이기도 하지만 바울이 받은 헬라문화의 영향은 그의 문체와 70인역 인용에서 나타나고 있다. 많은 대구들이 그러한데 예를 들면 주님, 하나님의 아들, 몸과 영, 신비등이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종교 사회적 해석을 시도하여 바울을 헬라적인 배경에서 이해하려고 하였다. 곧 헬레니즘 시대의 대중적인 종교개념의 현상, 특별히 그 당시의 종교적 혼합주의, 이른바 동방문화의 영향아래 서방종교 안에서 일어났던 신비종교와 제식을 통하여 뚜렷이 드러난 혼합주의에 관심을 갖고 바울을 해석하고자 하였다9.

그러나 헬레니즘이 그의 신학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하더라고 바울의 사상을 헬레니즘적 신비주의와 영지주의의 관계에서 찾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바울의 영이해는 헬레적 사상과는 분명히 다르게 전개되고 있다. 그가 사용하는 일반적인 ‘몸’의 용법과 의미는 인간의 육체 자체가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고 인간이 ‘몸’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선할 수도 악할 수도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질 수도 있는 전인격인 것이다. 바울은 신자들의 몸이 성령이 거하는 전임을 밝히고 있다(고전3: 16-17). 다시 말해서, 그리스 철학에서 처럼 인간의 몸을 성령을 가두고 있는 감옥이 아닌 성령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라는 의미로 사용하면서 바울은 몸을 거룩하게 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신자들에게 권면하고 있다. 따라서 바울의 성령론은 헬라사상에서 찾아볼수 없는 독창적인 사상을 펴고 있는 것이다.


C. 최초기독교의 배경

바울은 기독교 신학을 조직하고 발전시킨 사람은 아니었다. 또한 그것을 의도하지도 않았다.10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유대교와 그가 체험한 그리스도 사건을 연결하여 이해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그는 부활한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과 성령의 사역에 대하여 어느 누구보다도 강한 확신과 풍부한 체험을 가지고 있었다. 바울의 신학 사상은 여러 가지 면에서 다양한 방향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풍부한 자료를 가지고 있었는데, 특별히 성령론에 대해서 그러했다. 바울에게 이렇게도 풍부한 내용을 가져다 준 배경에는 첫째로 예루살렘 교회와 제자들로부터 그가 듣고 배운 것이고, 둘째로 그의 특유한 성령 체험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의 성령론에 대해 연구한 이종성은 초대교회가 바울에게 미친 영향을 네가지로 설명한다.11 그는 초대교회 당시, 방언하는 많은 예가 있었는데 바울도 성령의 사역에 의해서 방언을 한 것 같다고 말한다.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 14:18). 또한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때 많은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긴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롬 15 : 18). 바울은 이러한 일이 성령의 사역에 의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을 통해서 그는 큰 기쁨을 느꼈다.

둘째로, 바울은 베드로나 초대교회의 교인들과 같이 그러한 체험은 그리스도가 약속해 준 선물이라고 믿었다. 바울은 펜테코스트의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건과 같은 체험은 할 수 없었으나 그때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약속하신 그 선물을 받아서 그런 체험을 했을 때 바울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12

셋째로, 성령이 임재함으로써 일어나는 현상에 대한 묘사가 동일하다. 사도행전의 초반에 기록된 모든 사건은 성령의 사역에 의해서 일어난 능력의 사건들이었다.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 : 13),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케 하옵시며”(엡 3 : 16) 등의 표현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생활하던 최초 기독교의 생태와 같은 것이다.

네째로, 성령의 은사를 열거하는 데 있어서 초대교회와 바울이 매우 비슷하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8-10절에서 성령의 은사를 열거한다. 지혜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힘, 능력 행함, 예언, 영 분별력, 방언, 방언 통역 등이라고 한다. 사도행전에는 방언과 예언만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바울은 성령의 사역에 대한 이해는 최초기독교의 그것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은 또한 그의 성령체험을 통하여 깊은 신학적 기반을 갖게 되었다. 그는 성령을 그리스도와 밀접하게 연결시켜서 이해했으며, 성령의 인격화를 로마서 8장에서 밝히고 있고, 또한 성령의 사역의 윤리성을 강조하였다. 베드로나 초대교회는 성령의 사역이 초자연적 현상을 초래한다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방언, 치유, 이적, 예언 등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성령의 은사는 단지 그러한 초자연적이고 비정상적인 현상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논리적이고 윤리적 결과를 초래한다고 주장한다.13 바울은 성령의 사역을 신자들이 일상생활에서 정상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윤리적 차원으로 승화시켰다. 

Ⅱ. 성령의 존재

A. 영과 그리스도

바울에게 있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영의 관계에서 세가지 측면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영적인 분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지상에서 활동하던 예수와 올리우신 그리스도의 인격적 동일성을 든든히 견지하였지만 천상의 그리스도의 존재양식이 역사적 예수의 지상에서의 존재양식과 다름을 알고 있었다.14 이 사실을 바울은 “첫아담은 산 영이었으나 마지막 아담은 살리는 영이 되었다”(고전 15; 45)는 말로서 확증한다. 이 땅에서 죽을 수 밖에 없는 몸을 갖고 사는 동안 신자들은 믿음으로 올리우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 또한 믿음으로 주와 연합한 자는 그와 한 영이 된다. 성령은 신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과 영광에 참여할 보증과 첫 열매로서 신자들에 주어진 것이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은 그리스도인의 경험에서 서로 관련된다. 바울의 서신에서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이 평행되는 구절을 자주 접하게 된다.15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위하여 간구하듯이(롬8:34) 영 자신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한다(롬8:26).  하나님은 성도들을 자기 아들과의 친교에 들어가도록 부르셨으며(고전1:9) 성령과의 교제를 즐기도록 부르셨다(빌2:1).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한편(롬8:35) 성령의 사랑을 이야기한다(롬15:30).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소유한 자유(갈5:1)를 이야기할 때 그는 주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고후3:17)고 한 그 자유를 마음속에 생각했다.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되는 것처럼 성령 안에서 거룩케 되었다(롬15:16) 바울은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의 관계,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종말론적 구원 사건과의 밀접한 관계를 표현할 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주안에 있는”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는 동시에 “성령 안에서”라는 말로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신자의 새로운 삶을 나타낸다.16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구원 경험에서 그리스도와 성령은 하나로 인식된다. 이처럼 바울에게 있어서 영은 그리스도론적인 내용을 함축한다. 영은 신자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영으로 경험되며,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원의 은총은 매개하며, 그리스도와 신자를 결합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

셋째로, 바울에게 있어서 영은 종말론적인 특징을 갖는다. 바울은 메시야의 도래로 새시대가 시작되었으며,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시대의 구원을 현실로 인식하게 한다고 보았다. 또한 성령은 장차 거하게 될 영원한 삶, 하늘의 생명에 대한 보증으로 우리에게 주어졌다(고후5:5)

다른 한편 바울은 너무 과도하게 이해된 실현된 종말론을 거부한다. 특히 고린도전서를 보면 영지주의적 이해를 갖고, 영안에서 이미 부활을 경험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 부활에 참여하게 될 성도들의 미래의 부활의 몸을 논했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것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의 목표로서 미래에 이루어질 것이다. 특히 고전 15: 49절의 문맥을 보면 흙에 속한 첫 아담의 형상으로 된 우리가 마지막 아담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는 것은 부활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현재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확증해 주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도록 해줄 뿐 아니라 장차 새 생명에 참여하도록 우리의 죽을 몸을 살릴 것이다.

성령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바울은 성령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구원론적 사역과 연결시키고 있다.17 바울은 성령을 그리스도론의 관점에서 규정하고 있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성령의 빛 안에서 이해하고 있다. 이 상호연관성은 그가 자주 사용하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규정하는 신학적 용어인 ‘그리스도 안에서’(εν χριστψ)와 ‘성령 안에서’를 서로 바꾸어 쓴 것에서 잘 나타난다. 부활 후에 그리스도는 살리는 영이 되었으며(고전 15:45b) 이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역시 성령 안에 있는 것으로 묘사될 수 있는 것이다.18

바울은 그의 주요 서신들에서 그리스도의 많은 활동을 영에게도 적용하고 있다. 고린도 후서 3장 17절에 ‘주는 영이시다’라는 표현에서 사도 바울이 처음으로 성령을 불가분리하게 그리스도와 연결시켰을 뿐만 아니라 부활 이후의 그리스도를 성령과 동일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도들의 생활과 성령 안에서의 성도들의 생활에 구분을 두지 않고 있다. 또한 ‘주는 영이시다’(고후 3:17a)나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셨다’(고전15:45b)라는 표현을 통해 그리스도가 곧 성령이라고 단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진술들은 바울이 그리스도와 성령을 단일한 존재로 보았다거나 성령주의자들처럼 이 둘을 혼동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기능적인 면에서나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는 두 분의 인격이 하나로 체험되어지기는 하나 존재론적으로는 성령과 그리스도가 구별되고 있다.19

다시 말해서, 바울이 영을 통하여 부활한 그리스도를 체험했다는 점에서 “성령을 그리스도화”하고 있으나 실제적으로 성령과 그리스도는 구분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 그 구분은 불분명하게 되었으며 신약의 기자들도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역사와 성령의 역사를 구분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20

바울서신에서는 성령과 영으로 게시는 그리스도 사이에 엄격한 구분을 짓기가 불가능한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성령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알게 할 뿐망 아니라 그리스도로 하여금 주님이 되게 하는 기독교 생활의 지배적인 원리로서 그리스도와 불가분리의 관계 가운데 있는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3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시내산의 모세에 대해 상세하게 이야기하는 문맥에서 16절에 나온 구약의 인용문 가운데 ‘주’라는 단어를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해석하고 있다.21 왜냐하면 바울은 구약본문을 인용하되 예수의 부활 이후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으며 여기서 ‘주’는 단순히 회개한 이스라엘이 다시 향하는 신적인 분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으로부터 너울을 벗겨서 돌아설 수 있게 하는 분을 말하는데 이런 기능은 바울의 이해에 의하면 성령의 활동을 말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이 본문에서 올리우신 그리스도 주님과 성령을 동일시 한 것은 실체나 인격적인 면에서라기 보다는 사역의 영역에서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성령은 경험의 실체로서 부활하신 이후의 그리스도는 다만 성령을 통해서, 그리고 성령으로서 현존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성령과 동일시하여 ‘주님은 영이십니다’라고 단언하는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와 영이신 그리스도는 서로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어서 둘 중의 어느 하나를 분리시켜서 생각할 수 없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구원사적 현재를 지시하는 명칭이고 그리스도에게 연결되고 그리스도가 영 안에서 활동하시며 말씀하신다.  구원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구원을 이렇게 규정하는 것이 옳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론적 의미를 영과 관련시킬 수밖에 없다. 사실 성서전체를 통해 볼 때 영은 생명을 부여하는 힘이요, 우리를 하나님의 생명에로 이끌어 들이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힘이다.


B . 자녀됨과 성령

 바울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믿음생활은 ‘믿음의 들음으로’(갈 3: 2f) 혹은 ‘믿음으로‘ (갈 3 : 14) 성령을 받는 일이며 여기서 ’성령을 받는다‘는 표현은 이 문맥에서 칭의와 결합된 믿음과 관련되어 사용되기 때문에 처음 회심경험과 관련된 것이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22 그리고 성령과 믿음은 상호대체적인 관계에 있는데 믿음으로 부르심을 바울은 성령의 역사를 따르라는 도전이며, 반대로 성령을 받은 것은 ’듣고 믿음으로‘라고 이해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성령을 받는 그릇임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전제조건인 것이다.

바울의 성령이해에 있어서 주목할 것은 성령이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와 대속적 사역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인간들과 하나님 사이의 새로운 관계, 즉 ‘자녀됨’이라는 개념속에 잘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졌던 언약의 성취(롬 9 : 26)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된 구속의 때에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다.23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게를 나타내는 자녀됨이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얻어지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하나님 자신에 의해 성취된 화목케 됨이자 그 화목케 됨의 실현이기 때문이다. 성령이 하나님의 아들이 그리스도의 영 또는 자녀로 삼으시는 영이기 때문에 믿는 자들의 자녀됨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 및 성령의 사역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갈4: 6이하에서는 자녀됨이 성령을 주심에 선행하는 것처럼 보이고 롬8 : 14-16에서는 다시 아들됨이 성령을 주심의 선행하는 것처럼 보이나 성령의 역사가 그리스도의 구원사역과 더불어 시작됨을 고려할 때 이 두 구절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믿음으로 자녀된 자들에게 성령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인식하게 만들고 이제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영의 인도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24

본래 성령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죄인들에게 ‘자녀됨’을 중개하는 영의 역할을 한다. 그래서 ‘자녀로 삼으시는 영’으로 불리워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자녀가 된 믿음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을 보내셔서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며 인도하시는 것이다(롬 8 : 16). 성령의 역할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계속적으로 믿음의 자녀들이 완전한 구원의 날까지 그들의 특권과 사명들을 완성하도록 도우며 확신과 자유함을 얻도록 안내하신다.

그러므로 자녀로 삼으시는 성령의 사역은 하나님의 구원계획 전체에 있어서 하나님과 그의 자녀들을 연결시키고 지금 있는 것과 앞으로 일어나야 할 것 사이의 관계를 유지시키는 고리역할을 하는 것이다. 갈라디디아서 4장 6절은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말해준다.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에서 바울은 성령과 하나님의 자녀됨의 관계에 있어서 자녀되는 것이 성령을 받는 것보다 선행되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이 문맥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은 기독교인의 삶에 있어 논리적 혹은 시간적 단계를 서술하고자 함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녀됨과 ’성령받음‘의 상호관계를 강조하고 있으며 이 점에서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만 독특하게 ’그의 아들의 영‘이란 표현을 쓰고 있다. 바울은 구원의 주관적인 경험에 있어 두 가지 상호 의존적이고 연관되는 특징인 자녀됨과 성령받음의 통합적 특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또한 구원론적 관점에서 이를 기술하고 있다.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께로 돌아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새 사람으로 지으심을 받게 된다. 바울은 이 구원론적 과정을 본래 침례 의식에서 나온 것으로 보여지는 ‘입는다’ 또는 벗는다‘는 용어들을 가지고 묘사한다.25 바울은 롬13:14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을 “그리스도를 옷입는다”는 표현으로 바꾸어서도 표현한다. 성령은 ’하나님의 아들의 영‘ 또는 ’양자의 영‘으로 불리우는데, 만일 내주하는 새 언약의 영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신자 속에 새 사람을 재창조하신다면, 다음 두가지 결론이 뒤따르게 된다. 첫째 결과는 성령은 “하나님의 아들의 영”이라고 불리울 수 있고(갈4:6), 둘째 결과는 따라서 성령의 선물을 받는다는 것은 신자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일을 가능하게 한다는 뜻을 가지기 때문에 신자는 이제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하신다는 것이다.


 C. 그리스도와 연합으로서의 성령

바울의 교회론 가운데 특징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이다. 교회의 본질적 정의로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표현을 하는 바울은 믿는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서로가 지체라고 한다(롬12:5). 여기서 바울은 몸의 본질이 그 통일성과 다양성에 있다고 해석하며 이것을 통해서 교회의 상호연합과 다양성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교회가 한 몸이라고 하는 것을 공동체로서의 존재 그 자체로부터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이끌어내고 있으며 이것은 고전 12:27에서 대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특징적인 표현은 많은 사라들이 그리스도에 함께 참여하고 있으므로 해서 그 안에서 상호간에 하나의 새로운 연합을 형성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들은 각각 하나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집합적인 연합인 것이다.

그리스도가 안에 있다는 것, 그의 몸에 속한다고 하는 것은 성령 안에 있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믿는 자들은 또한 그에게 속해 있는 자로써 또 그의 몸의 지체들로서 그와 한 영이다. 왜냐하면 주께서 계신 곳에 그의 몸이 있고 거기에 그의 영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 된다는 것은 한 성령 안에서 나누고 한 성령에 의해서 다스려 진다는 것이다. 그르므로 교회내의 각기 다른 구성원들은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며 각인은 상이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그리스도인의 몸은 그리스도의 한 지체로서 성령의 전인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을 통해서 바울이 교회에 관해 말하고자 했던 바는 각기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다양한 은사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통일성에 있다고 할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4-13에서 사람의 몸을 예로들어 영적인 은사의 다양성과 통일성에 관하여 묘사하고 있다. 사람의 몸이 많은 지체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임을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라는 표현을 통해 암시해 주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그리스도 자신이 여러 지체들로 이루어진 한 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유기적 통일체로서의 그리스도의 몸에서 바울이 주목한 점은 그 다양성에 있다. 그리스도의 몸으 이루는 각 지체들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통일성이 강조되고 있는데 그것은 같은 성령을 매개로한 다양성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궁극적인 일치가 주시는 성령과, 섬김을 받는 주와, 활동하시는 하나님 안에 있음을 먼저 전제로 하고 있음에도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의 은사의 다양성이 같은 성령에서 연유하므로 하나의 통일적 유기체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몸의 지체는 여렷이지만 몸은 하나라는 사살은 성령의 역사로 인한 것이다. 그러므로 한 개인의 몸이나 집합적인 연합인 그리스도의 몸은 모든 지체들의 다양성과 동시에 한 몸을 이루는 통일성 둘 다가 같은 성령의 역사임을 바울은 제시하고 있다.

한편 바울은 그리스도와 성령을 신자의 신앙 경험에서 기능적으로 밀접히 관련시키고 있다. 바울과 요한은 모두 그리스도인을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이 동일한 면을 표현하였다. 비록 그들이 성령의 존재와 그리스도를 혼동하지는 않았지만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 경험과 성령의 관련성을 깊이 인식하였다. 성령의 역사는 예수의 사역의 계속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역사는 일관성을 유지한다. 바울의 경우 ‘주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안에서’라는 구절이 평행을 이루는데 그것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신자의 새로운 삶을 표현하는 것이다.


D. 성령, 믿음, 성령침례

최근 한국교회에서 논쟁이 되고 있는 성령침례를 바울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을까? 바울서신에서 우선 이 문제를 다루어 보기로 하자.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출발점으로 믿음을 중시했다. 갈라디아서 3장 2절에서 바울은 ‘성령을 받는다’라는 말을 믿음과 연관시키고 있음을 보게 된다. 바울서신에서 ‘성령을 받는다’라는 헬라어 표현은 약간 변형된 형태로 몇군데서 나타나는데 (고전 2: 12 ; 갈 3:2,5 등), 특히 로마서의 구절에서 나오는 ‘양자의 영을 받았다’는 부정과거 시제의 표현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처음 구원경험을 지칭하는 것이 틀림없다.26

성령 받는 일과 관련하여 갈 3:2에서 쓰인 ‘믿음의 들음으로’라는 표현은 정확하게 무엇을 시사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이다. 다만 갈 3:2의 소유격적 표현에 대하여 이것을 주격소유격으로 보면 ‘믿음이 요구하는 들음’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바울은 3장에서 자주 신뢰의 행위로서 믿음으로 성령받는 것을 언급했기 때문에 이 소유격을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취하여 ‘복음을 들음으로’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와같은 해석을 따른다면 바울이 말하는 참 믿음은 복음을 들음으로 얻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의 선물은 어떤 인간적인 성취나 사회적 특징들과 관련없이 순종하는 믿음을 가지고 바울이 전하는 참 복음을 들을 때 주어진다고 볼 수 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3장에 논하고 있는 성령받는 일은 믿을 때 뒤따라오는 것이다. 믿지 않으면 결코 성령을 받을 수 없다. 갈 3:5에서 바울은 성령받는 일을 ‘능력행함과 관련시키고 있다. 바울이 성령받는 다는 것을 그저 단순한 지적이거나 추상적인 개념으로 생각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바울서신에서 성령침례 문제와 관련한 연구는 최근 신약학자들로부터 상당한 주목을 받아왔고 또 문제의 접근방식들도 다양하다. 논쟁이 되고 있는 구체적인 구절들을 찾아 검토해 봄으로 이 논쟁점의 실마리를 살펴보고자 한다.


고전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느니라


바울서신에서 분명하게 성령침례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유일한 구절이다. 이 구절은 논쟁을 벌이고 있는 오순절주의자나 회심입문을 주장하는 여타의 신학자들에게 중요하다. 이 구절을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문맥상 접근을 시도해 보자. 바울은 이 구절을 성령의 은사를 다루는 과정에서 언급하고 있다. 바울은 교회의 통일성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성령침례를 내세우고 있다는 것이 관찰된다. 다양한 인종적 사회적 신분의 차이를 넘어서서 교회를 구성하는 기초는 한 성령을 받아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몸의 연합이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았다거나 한 성령을 마셨다는 표현들이 다양한 종교, 사회적 배경을 지닌 사람들을 통일된 그리스도의 몸으로 형성시키는 교회론적 기초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소수의 사람들만이 소유하는 종교적 경험을 지친한다고 말할 수 없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성령침례를 받았다거나 한 성령을 마시는 행위는 오순절주의자들이 말하는 대로 제2의 축복을 경험한 교회내의 특정 그룹의 사람들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회심한 후에 경험하는 독특하고 분리된 경험일 수 없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회심할 때 소유하는 보편적 경험이어야 한다.

둘째로 살펴보아야 할 것은 ‘침례를 받았다’는 동사이다. 이 동사는 부정과거시제로 사용되었다.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침례를 주다’라는 의미에는 두가지 특징이 있다. 단순하게 물로 침례를 받는 다는 의미도 있지만 은유적으로 신자 안에서 이루어지는 영적인 변화를 말하고자 할 때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분명하게 언급할 수 있는 것은 신자들을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통합시키는 것은 회심 후의 어떤 독립적인 성령 경험에 의해서가 아니라 침례시에 모든 사람이 믿음을 통해 소유하는 보편적인 성령경험이라는 것이다.

셋째로 다루어야 할 문제는 ‘마시게 되었다’는 동사의 의미다. 이것과 관련해서 세가지 다른 해석들이 제시되어 왔다.27 첫째는 ‘침례를 받았다’는 동사와 ‘마시게 되었다’는 동사가 모두 같은 실재를 지칭하는 동의어적 평행 이미지들이라는 견해다.  이 경우에 동일한 부정과거 시제의 동사들이 쓰이기 때문에 ‘마시게 되었다’는 표현도 고린도인들이 처음 믿을 때 경험한 회심경험을 지칭하게 된다. 둘째는 첫 번째 동사가 입문의식으로서 침례를 지칭하고, 두 번째 동사는 “침례받은 후에 영적인 은사들을 쏟아 부어주는 것”을 지칭하다는 견해이다. 세번째는 앞의 동사가 침례를 지칭하고 두번째 동사가 성만찬을 지칭한다는 견해이다. 그러나 두 동사 모두 어떤 확정적인 경우를 나타내는 부정과거 시제들이기 되풀이해서 시행되는 성만찬이나 침례 이후에 주어지는 은사경험에 사용될 수 없다고 생각된다.

여기서 두 번째 해석은 오순절 학자들에 의해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마시게 되었다’는 동사의 주어가 ‘성령’이 아니라 ‘우리’라는 것이다. 이는 두 동사 모두 교회론의 통일적 기초를 나타내고 있고 고린도 교인들의 확정적인 어떤 경험을 지시하고 있다. 따라서 본절에 적합한 해석은 첫 번째 해석이 부합된다고 결론지을 수 밖에 없다.


딛 3:5-7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오순절 학자들은 이 구절이 바울이 오순절 사건을 염두에 두고 있고 요엘서 인용문에서 사용된 것과 일치한다고 추측하고 있다. 여기서도 동사 ‘부어주다’는 부정과거 시제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이 동사를 사용함으로써 에베소 독자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회심 경험을 가능한 풍부하고 충만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7절의 목적절은 신자들에게 부어지는 성령겸험이 구원경험을 지시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시사하여 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을 풍성하게 부어주신 것은 그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시고 후사가 되게 하려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이루게 하기 위한 것이다.


롬 5: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니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오순절주의자들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한 날로 보고 있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이 오순절날 비로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했다고 보는 것은 오순절 이전에 신자들이 중생치 못했다고 보기 때문에 거절되어야 한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회심 시에 주어진 신자의 성령경험이 하나님의 사랑의 충만한 경험을 동반하는 것임을 가능한 생생한 표현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위 결과들에 근거하여 바울의 성령이해에 있어 ‘성령을 받는다’ 또는 ‘성령을 주신다’는 표현들은 처음 회심한 신자들에게 관련시킴으로써 믿음이 성령의 선물을 받는 전제조건임을 제시하고 있다. 바울은 또한 믿음으로 성령받는 일을 강조하면서도 믿음을 성령의 행위에 직접적으로 귀속시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체적인 삶속에서 효과적인 것으로 만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서 성령을 경험하게 하는 존제조건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과 성령은 상호대체적인 과계에 있는데 믿음으로 부르심은 성령의 역사를 따르라는 도전이며 역으로 성령받은 것은 ‘듣고 믿음’을 통해서였다( 갈3:2 ; 5:5). 따라서 믿음은 성령을 받는 그릇임과 동시에 성령에 의해 형성되고 유지되는 그릇이었으며 비록 바울이 성령에 의한 믿음의 창출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함축하고 있음은 사실이다.28 바울이 말하는 성령침례는 우리가 이미 밝힌 대로 처음 구원경험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으며 그것을 교회론의 통일적 기초로 삼으려고 하였다. 오순절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중생 이후에 존재하는 제2의 성령경험이 있다는 시사가 그에게는 발견되지 않는다. 바울은 이것을 계속적으로 경험되어야 할 성령충만과 연계시키고 있다(엡 5:18).

Ⅲ 성령의 사역


A. 성령과 육체의 씨름 (롬 8:2 , 고후 3: 17 )

바울은 인간을 ‘영과 육’의 대립 안에 서 있는 것으로 보는데 이런 대립이 몸과 영혼의 헬라주의적 대립과 이원론에 의해 주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오랫동안 간주되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육(σὰδξ)”이란 개념을 살펴보면 그것이 옳지 않음을 발견하게 된다. 오히려 바울은 구약적 배경 하에서 이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그 용례를 자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노선을 따라 확장하여 사용하고 있음을 보게된다.29

바울이 사용한 육의 용법을 보면, 첫째로 ‘사람의 신체’라는 평범한 의미로 사용되며, 둘째로 ‘자연적인 인간의 혈통 또는 혈연관계’의 의미로(롬 1:3 , 4:1, 9:3), 셋째 ‘인류’라는 의미로(갈 2:16, 롬 3:20) 사용된다. 그러나 바울에게서 가장 특이한 것은 ‘육’을 ‘인간본성’이라는 뜻으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특별히 연약한 인간본성(롬 6:19, 고후 7:5)이나 거듭나지 못한 인간본성(롬 7:18, 고전 3:1-4, 갈 5:19-21)을 뜻하므로 ‘육’은 죄와 사망의 법에 종속되어 죽음의 선고아래 있다30

이 육신에 속한 인간은 그리스도와 믿음이 오기까지 죄와 율법의 저주아래 있으며(갈 3:10) 죄와 율법은 인간에게 죽음을 가져다 준다(롬7:5). 따라서 죄와 율법의 지배하에 있는 인간은 다음과 같은 외침에 이를 수밖에 없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이러한 인간은 바울에 따르면 죄와 죽음 및 율법에 속박당해 있으므로 부자유하다는 것이다(로 6;16).31

바울은 로마서 전반부를 통하여 무능한 인간, 죄아래서 신음하는 인간의 비참함을 그려내고 있다. 롬 7장에서 바울은 율법과 죄아래 있는 인간의 계속되는 좌절과 비참한 생활을 묘하고 있는데 이는 바울이 과거 바리새인이었던 때의 내적인 갈등을 자서전적으로 묘사하는 것이며 이 내적 갈등은 그를 기독교 신앙으로 회심하게 한 심리적 준비라고 해석하려는 시도들이 있어왔다.32  그러나 최근에 이러한 해석을 비판하고 롬 7장에서 바울이 그리스도인의 실제 경험을 묘사하고 있다고 하는 전통적인 견해를 훌륭하게 변호 한 몇몇 학자들이 있다. 그들은 니그렌(A. Nygten), 머레이(J. Murray), 크렌필드(C.E.B. Cranfield) 그리고 던(J.D.G. Dunn) 등이다.33 이와같은 주장의 근거를 롬 7-8장과 갈  5 : 16절 이하에 나타난 특정한 구절들에서 찾고 있다. 롬 7장이 의롭다함을 받은 신자를 묘사하는 문맥 속에 놓여져 있다는 점이다.  또한 7 : 25b의 위치가 바울이 감사를 외친 후에도 자신은 마음과 육신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민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다. 바울이 사용한 ‘속 사람’이라는 단어도 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바울이 그의 회심 전에 이렇게 죄에 대하여 번민한 흔적이 없다는 것으로도 롬 7장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죄에 대한 갈등과 투쟁의 삶을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주장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 자세하게 다루는 것은 지면상 피하기로 한다. 보다 여기서 중요하게 다루어질 문제의 핵심은 바울이 말하는 육신 안에 인간의 죄성과 싸워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투쟁적 삶이다.

바울은 롬 8장에서 롬 7장에서의 좌절과 실패의 장면과는 정반대로 신자의 승리라는 새로운 상황을 도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의 선과 악의 갈등 속에서 해결사로 등장하는 분이 바로 성령이다. 성령께서 육체와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완전히 해방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롬 8 : 1의 ‘그러므로 이제’는 롬 7장에서 묘사하고 있는 죄와 율법의 지배 아래 있던 인간의 해방을 선언하는 표현이다.

롬 8 : 1-4에서 바울은 윤리 명령들의 궁극적인 근거를 구원사건의 직설법에서 찾고 있음이 분명하다. 아들을 죄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보낸대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구원사역과 그가 죄를 정죄한 사실은 순종하는 우리의 새 생활을 가능케 하는 새로운 종말론적 상황을 열어 놓았으며 율법이 할 수 없었던 육신의 세력을 돌파하는 것을 가능케 하여 주었다(8 : 3).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바울이 성령의 사역과 율법의 의로운 요구들을 대치시키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죽음과 저주의 통치세력으로서 율법은 의와 생명의 새로운 통치세력인 성령과 서로 대치된 것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하나님은 “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고”(4절) 그의 아들 그리스도와 그 아들에 의해 대표되는 성령을 보내주셨다. 바울은 성령을 좇아 행하는 자들에게 육신의 세력을 이길 수 있다는 승리의 확신을 주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성령의 인도하심에 복종하기만 하면 승리의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바울은 롬 6-8장과 갈 5장에서 교훈하고 있다.

바울은 은총의 통치를, 신자가 자동적으로 죄의 통치와 세력을 물리칠 수 있는 선험적 근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죄가 그의 죽을 몸을 다스리도록 허용해서는 안됨을 강조하여 말한다. 바울의 관심은 죄없는 삶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의 권세로부터의 해방이다. 따라서 신자는 그의 지체들로 하나님을 섬기는 의의 병기로 사용해야 한다. 죄와의 무기력한 싸움을 하던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죄가 더 이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을 주관하지 못한다는 확신을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14절)는 구절에서 사용된 미래 시제는 신자가 결코 죄의 권세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어디에서도 기독교인의 삶이 그와 같이 죄없는 상태가 되리라고 말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죄가 자신의 삶을 주관하지 못하도록 하라는 명령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도 안된다.34

육신적으로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하기 때문에, 신자는 이 시대를 다스리고 있는 악한 영의 세력들에 여전히 노출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더 이상 죄의 통치 아래서 도움없이 방치되어 있지 않고 더 강력한 은혜의 통치 아래서 살고 있다. 따라서 바울은 그의 독자들에게 은총의 통치 아래서 죄의 권세를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들의 육신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릴 것을 권면한다.

바울은 계속해서 갈 5 : 16 이하에서 그리스도인 안에 지속되는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의 갈등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육체의 통치가 구원받을 소망이 없는 영구적 상황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단지 여기서 육체의 소욕은 성령에 의해 주도되는 의지를 방해하는 힘이다. 신자의 의지는 성령의 충동에 의해서만 움직여지는 힘도 아니요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그 어떤 방향으로든 스스로 움직이는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중립적 행위자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서로 대적하여 싸우는 전쟁터이다. 이렇게 바울이 육체를 그리스도인 속에 있는 끈질긴 세력으로 생각하고 있음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갈 5 : 16의 “이루지 아니하리라”라는 말을 통해 신자들에게 성령을 의지해서 산다면 이러한 육체의 소욕을 극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고 있다.

또한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하나님의 의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어떻게 성취되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로마서 8: 1-11은 하나님이 어떻게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해방을 누리게 하며 또한 계속적으로 그들에게 생명을 공급하시는가를 교훈한다.35

성령과 관련된 바울의 전 강조점은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소유한 자로서 마땅히 육신에 속한 옛사람의 삶을 버리고 새로운 피조물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강한 윤리적 책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36 그리스도인은 침례와 믿음으로 “새사람”이 되지만 “옛사람”과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여전히 그 성향들은 남아 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두 현신을 산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이중적인 존재다.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가 “의로운 동시에 죄인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부어 주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살기 때문에 옛사람과는 전적으로 다른 윤리적 존재로 살아가야 함을 의미한다.

그들은 믿음 안에서 살지만 육체 안에서도 산다. 그리스도인은 육과의 끊임없는 싸움을 요청받으며 살아가야 하지만, 이 영역에서 성령의 도우심을 통하여 육체의 정욕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은 더 이상 무기력한 그리스도인으로 좌절할 필요가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B. 성령의 은사

바울은 고린도전서 12;8~10 ; 12:28!30 ; 로마서 12:6~8, 그리고 에베소서 4:11 등에서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특히 고린도교회는 바울의 2차 전도 여행시 설립된 교회인데, 열광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고린도교회는 성령의 은사활용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들은 황홀경에 빠지는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천상의 세계로 옮겨진다고 믿기 때문에 죽은 자들의 미래의 부활까지도 더 이상 필요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에게는 몸으로 사는 삶의 현실 및 이 세상에서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삶과 관계를 가진 모든 것은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고전 5:1-8, 6:11-20).

더욱이 더러는 이러한 세상의 삶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불결하게’ 만든다고 염려하기도 하였다(고전 7:1-5). 특히 방언 말하기와 같은 성령의 은사는 성령의 내재에 대한 증명으로 여겼으며 더 깊은 지식과 사변적 지혜를 얻으려고 애썼으며 요구했다(고전 1:12-2:16).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의 이와같은 문제와 관련하여 성령의 은사의 성질과 목적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1. 은사의 목적

예수를 믿어 성령을 받은 자들은 다 은사를 받아가지고 있다. 그것이 자연적 은사의 복원이든지 새로운 은사의 수여이든지 간에 그리스도인은 다양한 은사를 성령으로부터 받는다. 은사의 목적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 주어진다. 모든 은사는 교회를 세우고 바로 자라가기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교회의 성장을 위해 사용되지 않으면 그 은사는 주어진 목적에 배치되어 그 은사는 변조되고 교회는 고린도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영적혼란에 빠져들어 퇴조하게 된다. 이때 성령의 은사는 더 이상 성령의 선물이 아니고 인간의 자연적 능력의 발현에로 추락한다.37 또한 교회는 은혜를 따라 사는 것이 아니고 그 은사들의 나타남에만 집착하므로 기독교의 구원이 아니라 기적행함에로 전락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의 예배에 관한 지시에서 힘있는 말로 신령주의자들을 견제하려 했으며 그들을 영적인 혼란에 내버려두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불을 끄지 않고 이성과 질서로 대치시키지도 않기 위해 애쓴 것을 볼 수 있다.38

성령의 은사수여에 대해서 가질수 있는 잘못된 생각 중의 하나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그것을 인하여 자랑하거나 우월감에 도취되어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랑거리고 삼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고린도교회는 이러한 잘못된 은사론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는 어느 것이 더 우월한 것도 아니고 그것을 자랑하라고 수여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성령의 은사는 성령의 주권적인 수여에 따라 나누어지며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에 사용되어야 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11의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고 말하면서 은사수여에 있어서 성령의 주권적인 면을 강하게 언급하고 있다.39 우리는 성령의 은사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지만 은사들을 주시고 주시지 않고는 전적으로 성령 하나님께 달려있다. 은사를 주시는 일과 어떤 은사를 주실 것인가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성령의 권한에 속한 일이다. 그러므로 은사를 소유했다고 하여 자랑하거나 교만하거나 우월감을 가질 하등의 이유가 없다. 성령의 은사들은 어떤 보상으로 주어진 것도 아니고 우리가 은사들을 구했기 때문에 혹은 은사들을 위해 기도했기 때문에 은사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40


2. 은사의 특성

성령사역의 근본목적은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교회를 세우는데 있다. 따라서 모든 은사는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를 영화롭게 하는데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자기과시를 위해 사용된다면 그 은사들은 회수되고 부패된다. 또한 성령의 은사들은 다 초자연적으로 오지 않는다. 이미 주어진 재능들이 개발되고 활용되는 것도 성령의 은사이다. 예수를 믿어 그리스도의 교회에 가입할 때 이전의 재능이 발휘되고 또 그것이 교회봉사와 신앙의 진보를 위해 사용되면 그것도 신령한 은사이다.41

토레이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영적능력을 어떻게 상실하는가에 대하여 다음 몇가지로 정리하고 있다.42

첫째, 하나님은 성도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거두어 가신다. 둘째, 능력은 죄가 들어올 때 상실된다. 셋째, 능력은 성도의 방종을 통해 상실된다.  넷째, 능력은 돈에 대한 탐욕을 통해 상실된다. 다섯째, 능력은 자만이나 교만을 통해 상실된다. 여섯째, 능력은 기도를 등한시할 때 상실된다. 일곱째, 능력은 말씀을 등한시할 때 상실된다. 그러므로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겸손하게 교회를 세우고 교회에 유익이 되도록 그 은사들을 활용해야 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로마서, 에베소서에서 성령의 은사들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이는 은사들 자체에 비중을 두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세워나가는데 은사들이 필요한 것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성령의 은사들이 집중적으로 나타난 구절들의 문맥을 살펴보면 성령의 은사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주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몸의 각 지체들은 유기적으로 협력하여 몸의 활동을 원활하게 하여야 하고, 각 지체들은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다른 지체를 위해 존재하며 다른 지체를 경쟁 상대로 생각하지 않는다. 각 지체 간에 시기와 분쟁이 있을 수 없고 서로 협력하여 몸의 활동을 도와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고 말하고 있다.


3. 은사의 종류

우리는 여기서 고린도전서 12장과 로마서 12장, 그리고 에베소서 4장에 나타난 은사들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성령의 은사들의 목록은 어떤 것들인가?

(1) 고린도전서 12 : 4-11

  ① 지혜의 말씀

  ② 지식의 말씀

  ③ 믿음

  ④ 병 고치는 은사

  ⑤ 이적 행하는 은사

  ⑥ 예언

  ⑦ 영을 분별하는 은사

  ⑧ 방언

  ⑨ 방언의 통역


 (2) 고린도전서 12 : 28-30

  ① 사도

  ② 선지자

  ③ 교사

  ④ 이적 행하는 은사

  ⑤ 병 고치는 은사

  ⑥ 서로 돕는 은사

  ⑦ 다스리는 은사

  ⑧ 각종 방언

  ⑨ 방언의 통역


(3) 로마서 12 : 6-8

  ① 예언

  ② 섬기는 은사

  ③ 가르치는 은사

  ④ 권면의 은사

  ⑤ 구제

  ⑥ 다스리는 은사

  ⑦ 긍휼을 베푸는 은사

  (4) 에베소서 4:11

  ① 사도

  ② 선지자

  ③ 복음전하는 은사

  ④ 목사

  ⑤ 교사

 이상에 열거된 은사들은 중복된 것들을 제외하면  ① 사도 ② 선지자 ③ 복음 전하는자 ④ 목사와 교사 ⑤ 예언 ⑥ 방언 ⑦ 방언의 통역 ⑧ 믿음 ⑨ 이적 행하는 은사 ⑩ 병고치는 은사 ⑪지혜의 말씀 ⑫ 지식의 말씀 ⑬ 영들 분별하는 은사 ⑭ 다스리는 은사 ⑮ 서로 돕는 은사 ⑯ 섬기는 은사 ⑰ 가르치는 은사 ⑱ 권면의 은사 ⑲ 구제 ⑳ 긍휼을 베푸는 은사 등 20가지로 구별할 수 있다.43 은사의 목록에서 나타나는 사실은 이 은사들이 이적적인 선물들만을 포함하지 않고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필요한 다양한 종류의 은사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은사들은 자연적이 재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은혜의 선물들이다.

바울은 고린도저서 12장에서 성령의 은사들을 언급한 후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31)고 말한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의 우월성, 사랑의 특성, 사랑의 영원성을 설명한다. 이는 바울이 은사 추구를 무시하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며, ‘더욱 큰 은사’란 바로 ‘사랑의 은사’임을 밝혀주고 있다. 은사들의 목록에서도 보아 알 수 있듯이 은사에는 초자연적인 은사도 있지만 모든 그리스도인이 삶을 통해 나타내야 할 일반적인 특성의 은사들도 있음을 바울은 말하고 있으며, 다른 모든 은사는 사라질 수 있지만 사랑의 은사는 영원성, 탁월성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하고 이것을 더욱 추구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C. 성령이 주시는 생명

바울은 성령이 하시는 주된 사역은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고전12:3).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주라고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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