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의 삶/CELL 자료

셀 교회가 목회 대안으로

예인짱 2008. 5. 8. 11:56

셀 교회가 목회 대안으로

 

이동원 | 지구촌교회 담임목사


소위 셀목회가 새시대의 목회대안으로 발 빠르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해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 징후가 유행에 민감한 한국교회의 장마당을 휩쓸어 가는 한 바탕의 바람이 아닌가를 걱정하는 기우도 적지 않습니다. 소위 교회성장 시대의 만만치 않은 역기능적 징후들을 피해 가면서 또 다른 교회성장만을 추구하려는 위장된 욕구가 아닌가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들리고 있습니다. 맹목적으로 세계교회 성장의 새 조류에 편승하려는 성급한 호기심으로 한국교회의 전통적 기초를 뒤흔드는 것은 아닌가를 경계하는 신학적인 감시의 전망도 없지 않습니다. 이 모든 우려에도 불구하고 셀목회를 추구하려는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이제는 누군가가 대답해야 할 때입니다.

첫째 이유는, 현대인들에게 교회를 영적인 집으로 되돌려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최근에 상영된 이정향 감독의 우리영화 집으로’가 사 백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는 방화사상 공전의 히트 작이 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 중요한 이유는 이 영화가 우리가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근원적인 영혼의 근원인 집을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집은 우리의 모든 것을 품어주는 어머니의 초상화이며, 할머니의 마음으로 현대인의 잃어버린 고향을 회복시키는 꿈의 마당입니다. 신약성경은 교회를 하나님의 집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권속 곧 가족이라고 증언합니다. 오늘의 교회가 잃어버려진 영혼을 구원하는 책임에 여전히 성실하면서 교회를 집으로 회복하는 유일한 대안은 셀목회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어 보입니다. 주일의 예배만을 유일한 교회의 마당으로 고집하는 한 현대인의 영혼은 결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종래의 전통적인 구역예배가 있지 않느냐고 말씀하실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대부분의 구역예배가 주일예배의 복사판이 되고 있는 한 거기에 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투명하게 열린 대화, 서로의 영혼을 진하게 책임지는 돌봄이 있기 위해서는 단순한 예배모임이나 소그룹모임 이상의 교회이어야 할 필요를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여기에 셀교회로서의 셀목회의 긴박한 시대적인 요청이 있다고 믿습니다.

둘째 이유는, 종교개혁의 이상인 만인제사장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입니다.
누군가가 첫 번째 종교개혁은 사제의 손에 있던 성경을 평신도의 손으로 넘겨주었지만, 평신도의 손에 있어야 할 사역(ministry)은 아직도 사제들의 손에만 있다고 진단한 것은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을 향한 넘쳐나는 비판 가운데 어떤 것들은 매우 불공정해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비판의 밑바닥 평신도 정서는 “이제 우리에게도 사역의 기회를 달라”는 외침으로 들려 옵니다. 필자는 이런 요구에 대한 응답으로 교회내 평신도 사역기회의 극대화를 위해 진지하게 노력해본 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아무리 그와 같은 기회창출을 위해 노력해도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때에 이런 딜레마의 해답으로서 필자의 영혼을 두드리며 다가온 환상이 셀목회이었습니다. 전통적인 교회의 경우 아무리 평신도 사역이 활성화 되어있어도 일꾼은 20%에 불과하고 80%의 교인들은 여전히 구경꾼의 자리에 있습니다. 그러나 셀교회의 경우에 적어도 80%까지 일꾼을 세울 가능성이 충분히 있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12명 이내의 인원이 모이는 셀교회 구조 안에서는 구성원들의 은사가 쉽게 관찰되고 은사에 따라 적절하게 일감을 나누어 배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의 동역자들은 모두 진실로 그들이 제사장들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 이유는, 초대교회적 코이노니아의 회복을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라는 구호의 허실을 이제는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초대교회는 결코 완전한 모델교회일 수는 없었습니다. 오늘의 교회 못지 않은 만만치 않은 대내외적 갈등과 문제를 안고 있었음을 사도행전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사람마다 쉽게 간파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이노니아에 관한 한 초대교회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동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코이노니아는 단순히 교제라는 낱말로 번역될 수 없는 깊이를 안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단어입니다. 코이노니아는 실로 진지한 삶의 나눔, 혹은 삶의 참여를 뜻하는 말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벌써 오래 전에 이미 이 코이노니아의 영성을 상실했다라고 지적한다면 지나친 말일까요? 스코틀랜드 국교회 내에서 셀교회 운동을 주도한 톰 알렌(Tom Allen)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메마른 교회 안에서 오아시스처럼 물을 내뿜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살아있는 셀들 - 이 밀접한 공동체 그룹들만이 모든 문제와 슬픔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진지한 관심으로 삶의 처방을 나누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가 참되고 역동적인 공동체의 생활, 즉 신약적 코이노니아를 드러내 보일 때에만 비로소 온전히 그 교회 된 기능을 발휘하고 교회로 하여금 세속적인 세상에 성공적으로 침투하게 할 것이다.” 세상을 이기는 교회의 능력은 바로 함께 모여 떡을 떼며 교제하던 그 역동성에 있었음을 그는 정확하게 진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이유는, 주님의 지상명령의 온전한 성취를 위해서입니다.
셀은 생명의 기본단위이며 가장 작은 단위입니다. 그런데 셀, 즉 세포의 존재 이유는 성장이 아닌 증식에 있습니다. 세포는 분열을 통해서 자신을 재생산하는 것입니다. 셀교회는 일정한 숫자가 되면 반드시 나누어짐을 그 특성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나눔의 이유가 전도를 통한 나눔일 때 교회는 가장 건강한 방식으로 주님의 지상명령을 성취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포의 존재 이유가 증식인 것처럼 셀교회의 존재 이유도 증식, 곧 전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제자를 부르신 이유가 그들을 통해 또 다른 제자를 부르시고자 함이셨습니다. 그래서 주 예수님은 마지막 부탁으로 제자들에게 “제자를 삼으라”고 말씀하셨고, “내가 너희를 택한 이유가 너희로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족한 필자가 섬기는 교회에서도 “셀 중심 교회에서 셀교회에로의 전환”을 선포한 이래 짧은 기간이지만 ‘이동성장은 현저히 줄고 ‘회심성장이 현저하게 증폭됨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아직도 한국사회 인구의 80%는 교회 밖에서 서성거리는 이때에 우리가 바람직한 교회상으로 작은교회, 대교회, 혹은 분립교회 등의 논쟁을 벌리는 것 그 자체가 필자의 눈으로는 소모적으로 보입니다. 전도자의 진지한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우리가 할 일은 너무나 많고 일꾼은 절박하게 모자라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셀목회는 이런 현실에 대한 가장 성경적인 대안이라고 믿어집니다.

결론을 맺고자 합니다.

셀목회를 추구하는 가장 절실한 이유 그것은 셀 교회운동이 우리의 목회를 거듭나게 하고, 신약성경적 교회 본질의 회복을 도울 수 있다는 확신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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