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의 삶/기독교 자료

데살로니가

예인짱 2008. 2. 28. 11:36

 아테네로부터 북쪽 513Km에 위치해 있고 현재는 '쎄쌀로니끼' 라 명명되는 이 곳은 약 100만명의 인구를 가진

그리스 제2의 도시이며 발칸반도의 여러 동구권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이며 상공업과 교육, 항구 도시로, 고대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던 도시 '쎄르메'가 주전 316년에 까산드로스에 의해 주변의 25개 도시와 연결되어 하나가 되면서 도시를 개축하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이복 동생이었던 자신의 처 이름을 따서 '쎄살로니끼'라 명명하였다. 주전 146년에 마케도니아 지방이 로마에 귀속되면서 마케도니아 속주의 수도가 되었다. 주전 49년에 로마의 폼페이우스가 시저를 피해 도피 생활을 하기도 하였던 곳으로 필립삐 전투에서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를 지지함으로서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다졌다. 사도 바울이 제 2차 전도 여행을 할 때 이 곳에서 복음을 전파하였으며 후에 이 곳의 교회를 위해 2편의 서신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주후 14세기에 있었던 두 차례의 비잔틴 제국의 내전 때에 중요 거점 도시로서 이용되기도 했으며 그 당시 신학논쟁이 이 곳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이 논쟁은 그리스 전 교회의 중요한 사건의 하나로서 1341년과 1343년 연이어 열린 콘스탄티노플의 교회회의에 헤시카즘(HESYCHASM)이 정교회의 중요한 교리로서 공인되게 되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파할 때 뭇사람들이 바울을 좇음으로 시기한 유대인들이 소동을 일으켜 바울일행은 베뢰아로 피신하게 된다.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를 받고 놓으니라.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행17:7~10)

 주제...

 

 이 도시에는 길이 43.58m, 넓이 33m로 돔이 없는 높고 긴 직사각형 형태의 그리스에서는 가장 큰 교회로 갈레리우스 황제에 의해 순교한 쎄살로니끼 출신의 디미뜨리오스를 기념하는 성 디미띠리오스 교회가 있다. 주전 297년에 갈레리우스 황제가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 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개선문, 갈레리우스 생존 당시에 그의 무덤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건축되었으나 후에는 아기오스 요르기오스 교회로 사용되었으며 터키 지배 당시에는 모스크(회교사원)로 사용된 로똔다, 또한 탑의 높이 32m이며 1430년 베네치아인들에 의해 건축된 것으로 알려진 화이트 타워(오 레프꼬스 삘고스)등이 있다.

 

 

 

 


데오도시우스 교회 (드미트리우스 교회)

 

데살로니가 디미트리우스 교회  (출처- http://holyland.maru.net)


데살로니카와 베레아에서 바울과 관련되는 동시대의 유적은 거의 없다. 그러나 데살로니카에서 찾아볼 만한 곳 중에 하나가 이 지역 교회 중 가장 규모가 큰 디미트리우스 교회일 것이다. 성 디미트리우스는 303년 디오클레시아누스 치세 때 아니면 306년 막시미아누스 치세 때 헝가리 시르미움에서 순교한 분인데, 어쩌다 데살로니카의 수호 성인이 되었다. 5세기에 지은 성당은 7세기에 재건되었으나 이것도 1917년 화재로 타버리고 1948년 지금의 성당이 재건되었다. 이 바실리카풍의 교회는 크게 로마식 집회장소용 홀과 세례 욕조가 있는 유적 두 부분으로 되어있다. 특히 세례터는 성 디미트리우스가 갇혀 있다가 순교했던 장소 위에 만들었다. 전통적으로 그의 제자 네스토가 이교도 리아에우스와 싸웠다가 패전했던 AD 303년에 이 곳에 묻혔다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 성전은 밀란의 종교적 관용에 관한 포고가 있었던 313년후에 작은 기도처소로 처음에는 설립되었었다. 백년이 지난후에 레온티우스, 일라리쿰의 주교 때에 큰 세 개의 측랑으로 이루어진 성전으로 같은 장소에 더 크게 지어지게 된다. 이 당시 성전 제단 밑으로 성 디미트리우스가 순교했던 장소와 동일한 세례욕조가 있었다.


<건축양식>

교회는 나르텍스와 십자형교회의 뒷자석이 높은 바실리카풍으로 다섯 개의 측랑이 있다. 우리는 교회가 한 개의 안뜰만 갖고 있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나르텍스가는 입구는 안마당 안있는 두 개의 문으로 통과하게 되어있다. 두 개문을 통과하여 나르텍스로 들어가면 교회의 서쪽벽을 따라 북과 남으로 가는 통로가 나온다. 나르텍스는 교회보다 좁고 짧은 폭으로 되어있다. 왜냐하면 북쪽구역이 계단으로 할애되었기 때문이다. 네줄로 된 열주들은 하나의 중심을 두고 회중석사이로 양쪽에 두 개씩 나있는 다섯 개의 통로를 나누어주고 있다. 그 원주기둥들은 바실리카고유양식을 기초하여 다양한 변화를 주어 장식되었다. 교회측면 넘어의 교차랑 설계는 두 개의 날개처럼 되어있는 모양이다. 중앙의 지성소로 측면은 날개로 구성되어 있다. 지성소는 크고 밝은 다섯 개 창문을 통해 밝게 비추어주고. 묘지와는 높은 칸막이로 나뉘어져 있다. 이것의 중앙에는 성찬대가 있고 십자가 모양으로 움푹팬 바로 아래, 엔카니온, 석관 형태의 대리석 궤로 이루어진다. 건조된 혈액의 작은 유리병이 이 대리석 궤 안에서 발견되었다. 이 교회는 독창적으로 지붕을 가로질러 교차하는 빔이 대들보로 지붕을 지탱하고 있다. 회중석 위를 덮고 있는 지붕은 다른 지붕보다 더 높으며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있다. 그 중심부 구역 또한 십자형의 날개로 일정한 간격을 지붕과 유지하고 있다. 대리석 장식이 디미트리우스 교회 전체를 형성하며 방사형창이 있다. 그리고 원주들과 제단, 감실등의 사이를 석판들과 대리석판으로 덮어놓았다. 독특한 점은 회중석과 나르텍스부분에 대리석장식을 했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5세기의 바실리카 성전의 형태에 속하는 모습으로 동쪽 벽에는 스카이로스 석판장식이 북쪽에는 트라이빌론 장식이 되어있으며 각각 그들의 틈에 한 줄로 기도손모양 장식이 되어있다. 이 교회의 주요한 특징은 초기로마건축양식과 5세기 바실리카풍 양식을 한쌍으로 잘 어울리도록 배열하였다는 것이다.


<누가 스판티누스의 무덤>

교회 본당 회중석의 북서쪽 모퉁이, 문설주와 열주의 첫 번째 기둥사이, 이탈리아에서 고안 되어진 듯한 기념묘가 존재한다. 이것은 1481년 교회에 사적으로 안치하도록 허가를 받은 부요한 데살로니가 귀족 누가 스판티누스의 것이다.


<회화장식>

이 교회에 유명한 모자이크에 대한 설명이다. 그러나 작은 북쪽 열주에 서쪽면을 장식했던 모든 모자이크들이 1917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교회에 남아 있는 무덤에서는 단지11개의 모자이크가 나왔고 5세기-9세기의 연대에 속한다. 그들은 노아와 두 개의 지성소 문설주, 홀과 나뉜 동쪽 파샤드의 벽에서 붙여진 것이다. 남쪽  통로 내부의 서쪽 벽의 상단에 성 데메트리우스가 기도하는 형태를 낮은 받침대 위에 초상화를 새겨져 있다.  그의 손바닥은 금 모자이크 세공으로 덮여있고 화가가 오래된 독실한 성인의 아이콘을 모방하는 것임을 표시하고 있다. 오른쪽 여자는 아이를 그에게 건네고 있으며 두 번째 아이의 발이 왼쪽에 보이는 동안에 무대는 문 한쌍과 성 데메트리우스에게 아이들의 헌신을 표현한다. 이것은 5세기의 것이다. 북쪽 통로에 유사하게 위치해 있는 다른 모자이크는 성 데메트리우스를 향하여 트럼펫을 구부리고 있는 천사의 초상화로 이 초상화는 원래대로 남아 있지 않다. 누가 스파누트스의 무덤 곁에 본당 회중석의 서쪽 벽의 다른 모자이크는 7세기의 것으로 도시벽 흉벽 앞 두 목사 사이에 서있는 성 데메트리우스를 보여준다.


<남동쪽 문설주의 모자이크>

북면 문설주의 성 데메트리우스는 도시 벽의 정면인 감독과 주교 사이에 서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지고 있다. 그림아래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여기 당신은 미래한 사람들의 흐름과 남겨진 도시의 난잡한 섞임을 막은 그 유명한 집의 창시자 데메트리우스를 보고 있다. 이것은 7세기 초반에 노예의 입장이던 데살로니가의 세 번째 포위기간을 언급한 것이다. 동쪽 면 문지방의 모자이크 성 테메트리우스와 성인이 그의 오른팔로 끌어안은 두드러진 얼굴의 특징을 지닌 데메트리우스를 보여준다. 그 그림 밑에 한 구절이 쓰여 있다. (그리스도의 순교자. 도시의 친구. 시민과 객을 돌보는 자는 복이 있다.) 이 모자이크에서 초상화를 그렸던 성직자는 629-34년에 붕괴된 이후 교회의 재건축의 의무를 맡은 집사이다. 서편 문설주의 성 세르기우스는 담 정면에 기도하는 형상으로 표현되어진다.

<북서쪽 문설주의 모자이크>

이 문설주의 서면은 두 명의 아이와 함께 있는 성인의 모자이크로 그들의 손은 헌금하는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남면에는 소원을 담은 모자이크를 동정녀 마리아가 전사성인과 함께 있다. 이 모자이크 아래에 이런 글이 있다. <인간으로써 나는 실망했다. 그러나 당신은 내 삶에 가장 큰 힘을 주시는 분이시기에 감사함으로 이것을 드립니다.> 이 그림의 상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흉상으로 축복하시는 그림이다. 이 모자이크는 9세기에 속한다.


<벽화>

성 데메트리우스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중요한 벽화는 교회의 남쪽 벽에 있다. 이것의 대부분은 현재 큰 아치형의 개막으로 인해 파괴되어져 있다. 초상의 왼손부분에서 한 임금이 그의 군대의 호위아래 말 등에서 따르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뒷 배경으로 서 있는 큰 건물은 도시 경기장 일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왼손부분은 크게 손상되어 있다. 이것은 교회의 실내현관 부분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불꽃과 연기가 보이는 지붕위이다. 땅에서 창을 가진 형상이 홀로 걷는다. 반대로 외부로 퍼져 나가는 날개를 가진 천사가 내려와 복종하고 있다. 현관 위에서 두려워하는 여성은 그들뒤에 군인과 함께 묘사되어 진다. 비문에는 아래와 같이 쓰여진다. (경기장에 의한 거룩한 교회) 도시 경기장 가운데 서 있어온 성 데메트리우스 교회를 표시하고 있다. 이 벽화는 8세기 초반에 속한다. 본당 회중석의 남쪽 통로에 있는 서면의 최서단 문설주는 성 요셉의 벽화이다. 그는 짧은 머리에 수염이 없는 젊은 남자로 묘사되어져 있고 그의 오른 손에는 더블 십자가를 잡고 그의 왼손은 미세화에서 한 조상을 보호하고 있다. 미세화에서 성경과 향로를 들고 있는 이 벽화는 수도사가 되어 요셉의 이름을 가졌던 황제 존 4세 칸타쿠네를 다룬 것이다. 같은 열주에서 남면의 두 번째 최서단 문설주에는 수도사 복장과 모가달린  옷의 성 누가 스테리어트스의 초상이 있다. 이것은 11세기에 속한다. 트빌로의 남쪽 붙임기둥은 알레고리컬한 장면으로 한 남자가 유니콘에게 쫓기고 북쪽 기둥은 유월절로 1474-93년의 것이다

 

데오도시우스 교회 (드미트리우스 교회) 

 


데오도시우스 교회 내부

 

드미트리우스 교회안의 성화

 

지하성전

 

이것은 교차랑 아래 지하동굴이며 남향날개쪽으로 들어간다. 계단의 왼쪽에서 아래로 작은 예배실로 가게되는데 두방 은 순교자의 몸을 즉시 넣어두었던 칸막이로 된 성도의 전형적인 납골당이다. 아칸서스와 월계수 나뭇잎과 야자나무무늬의 대리석으로 아치를 장식했다. 성합의 기본 앞면에는 대리석으로 된 원형 세면대가 있었다. 지하실의 중앙은 나무로 둘러싸여있다

 


성 디미트리오 성당 아이콘

 


데오도시우스 교회 분수대

 


성 에카테리니 성당, 13세기

 


성 니콜라스 오르파노스 성당

 


성 소피아 성당, 8세기

 


갈레리우스 황제 개선문 부조

 


데살로니카 시내

 


데살로니가 해변

 


데살로니가 하얀성

 


하얀성 공원 알렉산더 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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