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의 삶/역사,추억이야기

무인 정조대왕

예인짱 2008. 1. 17. 17:14


 

무인정조대왕편


사상 유례없는 대규모 군사 훈련이 벌어졌다.
신하들은 이 훈련을 보며 두려워 했다.
정조는 왜 군대를 이끌고 나선 것일까.








조선 최고의 학자군주였던 정조
그런데 이런 모습 이면에는
전혀 다른 정조의 모습이 숨어있다.

직접 군대를 이끌고 병사 훈련 시키는 등
스스로 무사와 같은 모습으로 자주 나타났다.
그러나 정조가 왕이 되기 까지의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신하들이 영조의 하교를 거부하며 (세손에게 왕 물려주겠다는)
승지가 쓰지 못하도록 막았다.
이 당시 그 장소에 세손도 있었다 ... (신하들 ㄷㄷㄷㄷ)






왕명조차 거부되는 냉엄한 현실을 세손은 일찍부터 경험하였다.


12살에 쓴 글로 신하가 왕을 어떻게 보필한 것인가에 대한 자세에 대해 쓴것.
사도세자일 의미심장하게 꼬집음.






사도세자를 지키는 포졸들은 그 앞에서 세자를 놀림. (ㅁㅊ ...)





존현각 일기- 정조의 세손 시절 일기
정조는 이러한 일들을 일기로 남겼다.




노론의 위세는 대단하였다. ↓ 대충 요정도 ...




삼불필지설(세손이 세가지를 알 필요가 없다)
동궁께서는 노론인지 소론인지 알 필요가 없으며,
이조판서와 병조판서의 일 또한 알 필요가 없고,
조정의 일에 관해선 더욱이 알 필요가 없습니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정조 즉위...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천명 ...





구선복(사도세자 앞에서 술떡 쳐먹었던)






신하들은 왕위의 정당성까지 문제 삼았다.





늘 위태로웠던 정조 ...





이때 야뇌 백동수라는 타고난 야인이 있었으니
정조가 주목한 것은 바로 이런 무사였다.




무가 천시되던 조선 시대에 실력있는 무사 양성.
누구나 상관없이 대규모 무과시험을 치루고
마침내 정조가 선택한 최종 30명의 무사들을 기반으로 장용영 탄생.




정조대왕이 만든 무예도보통지.
18기 쉽게 익히도록 함.
하루 3000발 이상... 강도높은 훈련함.






신하 장용영에 대한 불편한 심기 드러내기 시작




사실 군권은 노론과 결탁한지 오래였다.
정조가 군권 장악할 수 있었던건 그 스스로가
무예 크게 쌓았기 때문이다.

장용영 30명에서 18000명까지 늘어났다.



정조의활쏘기 기록 - 믿을 수 없는 기록들 쏟아냄.
50발 49발 맞추는게 10번이나 되고,
100발 중 98발 맞춘것도 있었다.
기록을 보면 다 쏘고
마지막 10순에서 한발을 쏘지 않았는데
겸양의 미덕을 보여줘야 하므로 ... 그리 한것이다.(참나 ㅋㅋㅋ)




과녁 축소시키도 함. 작은 부채나 곤봉 편곤등.
과녁이 아무리 작아져도 실력에는 변함이 없음~~~






정조는 강력한 새로운 국왕의 모습 보여주려 하였다.
군권을 기반으로 신화들 협박하고 회유하기도 했는데...

도대체 정조는 뭘 하려 했을까.
그는 그의 숨겨진 뜻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사도세자의 복권작업은 정조 평생의 숙원이었다.
사도세자의 묘소 수원의 명당자리로 이전하였는데,
이런 그의 모습을 보며 노론 대신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사도세자의 죽음에 정치적 책임을 진 사람들










정조 팔달산에 올라 화성 건설을 명함.





수원에 요새같은 신도시 지음.

대규모 행궁, 6km에 달하는 거대한 성곽.
상업도시로 발전
정조의 친위부대도 설치. 자그마치 6000명.




정조는 늘 깊은 뜻이 있음을 강조했다.






정조 19년,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홍씨의
회갑을 맞아 화성행차를 계획.

6000명의 수행원.





단순히 회갑뿐 아닌. 이 행차를 통해 자신의
깊은 뜻 드러냄. 야간 훈련 했는데 그 규모 짐작
친히 훈련. 사상 유례 없는 일.




아까 말했던
깊은 뜻이란 무엇일까.
어쨌든 이 훈련은 반대세력에게 위협 가하는 등의
정치적 효과도 있었다.






정조가 꿈꾼 정치는 어떤것 이었을까.
정조가 그린 그림 옆에 정조의 호 낙관이 찍혀있는데,





신하를 구름에 비유하며,





임금과 백성이 직접 만나고 영향을 주고받는
정치였다.


신하들 절대권력 행하려는 정조에게 결사적으로 대항.
갈등 극으로 치달음. (진짜 이 자식들 ...)








군권 장악한 정조 물러서지 않으며,
신하들에게 마음 단단히 먹을것 주문하였다.




정조24년 충격적 선언을 하였는데
'오회연교'
즉, 오늘의 하교는 참다참다 나온것 이라는 말로
사도세자 죽음에 책임을 묻는등 협박에 가까운 선언을 했다.
신하들은 침묵으로 일관하였으며,
이로써 정조와 신하들의 결별은 시작되었다.





오회연교 발표된지 한달뒤,
정조대왕은 갑자기 숨을 거두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정조의 죽음에,
독살 당했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개혁의 꿈을 불태웠던 정조.
하지만 그의 꿈은 결국 이렇게 멈추고 말았다.






그의 죽음과 함께 개혁의 발판도 사라졌다.
장용영은 해체되고 백동수도 숙청되었다.
임금 아래 차별없는 세상을 꿈꿨던 정조.
노비제를 혁파하고 서얼차별을 없애는 등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쳤던 정조의 시대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그는 문무의 조화를 중요시 여기며
나라를 위해 스스로 무인이 되었던 조선시대 임금이었다.

'풍요의 삶 > 역사,추억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종의 비 폐비윤씨  (0) 2008.02.06
정조  (0) 2008.01.17
아버지의 눈물-영조  (0) 2008.01.17
1970년대의 동영상  (0) 2008.01.02
1960년대의 동영상  (0) 2008.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