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삶/감동받은 글

가장 아름다운 발 - 강수진 발레리나

예인짱 2007. 11. 27. 09:14

 

 

 

 

예수님의 고행을 좇아나선 순례자들의 발도 이렇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명실공히 세계 발레계의 탑이라는 데 누구도 이견을 제시하지 않을,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입니다.

<그 세련되고 아름다운 미소를 가진, 세계 각국의 내노라 하는 발레리나들이 그녀의 파트너가 되기를 열망하는, 강수진 발입니다. 예수님이 어느 창녀의 발에 입 맞추었듯, 저도 그녀의 발등에 입맞추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마치 신을 마주 한 듯, 경이로운 감격에 휩싸였던 것이지요.>

 

그녀의 발은, 그녀의 성공이 결코 하루 아침에 이뤄진 신데렐라의 유리구두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하루 열아홉 시간씩, 1년에 천여 켤레의 토슈즈가 닳아 떨어지도록, 말짱하던 발이 저 지경이 되도록...그야말로 노력한 만큼 얻어낸 마땅한 결과일 뿐입니다.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프리마 발레리나 강수진(37)은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발을 갖고 있다.

그러나 발만을 놓고 보면 도무지 정상적인 사람의 발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

뼈가 튀어나오고 발톱이 뭉개지고 살은 찢어지고 갈라졌다.
그녀의 남편은
아내의 발이 점점 피카소의 그림을 닮아간다고 조크를 한다.

 

발레리나들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일직선을 만들려면 토슈즈 안에 덧댄 나뭇 조각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발레리나가 가볍게 날아올랐다가 내려앉는 동작을 하는 동안 두 발은 나뭇조각에 짓이겨지는 고문을 당한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발레리나 강수진이 러시아의 문호 푸슈킨 원작 오네긴의 주역 발레리나로 2년 만에 고국 무대에 섰다.

 

발 이야기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20여 년 발레를 했지만 지금도 공연이 끝나면 제대로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발에 통증이 와요.
그런데 발레는 참 희한한 마술이에요. 토슈즈 신고 무대에 서면 통증을 못 느끼는데 끝나면 발이 아파요. 연습할 때도 통증을 느껴요. 공연할 때는 몰입이 되기 때문에 아픈 것도 잊어버리죠.

 

강수진이 가진 위대한 발은 피나는 연습과 그 고통을 이겨낸 인내의 결실이다.

 

강수진은 어머니의 권유로 선화여중 때 발레를 붙잡았다.

발레를 시작한지 1년6개월 만에 이화여대 주최로 열린 발레 콩쿠르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한국에 왔던 모나코 왕립 발레학교 교장 마리카 베소브라소바는 강수진의 아버지에게 10만명 발레리나 중에서 한명 나올까 말까 한 천재라며 유학을 권유했다.

 

1985년 청소년들이 기량을 겨루는 스위스 로잔 국제 발레 콩쿠르에서 동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우승.

다음해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최연소 단원.

1999년 4월 무용의 아카데미상이라고 일컫는 브노아 드 라 당스(Benois de la Dance) 최고 여성 무용가상 수상.

 

그러나 강수진은 이렇게 화려한 경력을 재능만 갖고 이루어낸 것은 아니다.

강수진은 연습 벌레다.

강수진이 신은 토슈즈가 무려 250켤레.

남들이 23주 신는 토슈즈를 하루에 네 켤레나 갈아 신은 적도 있다.

하루에 89시간씩 연습을 한다.  

강수진은 2002년 독일에서 터키인 매니저 툰치 셔크만과 결혼식을 올렸다.

툰치는 같은 발레단의 남자 무용수였다.

둘의 관계는 동료에서 친구로, 친구에서 애인으로 발전해갔다.

하지만 강수진의 부모가 반대하는 바람에 7년 동안 결혼을 미뤄야 했다.

 

강수진은 독일 슈투트가르트 시의 문화진흥 공익 광고 모델이다.

거리를 누비는 15번 전차 한가운데 강수진이 춤추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강수진은 15살에 한국을 떠나 19년을 이 도시에서 살았다.

길거리를 다니다 보면 시민들이 그녀를 대개 알아보고 미소를 보낸다.

포스코를, 철을 만드는 큰 회사로 기억하고 있는 강철나비 강수진에게

발레를 배우는 후배들을 위해 조언을 부탁했다.

 

음악성이 있어야 특별한 발레리나가 될 수 있어요. 음악성이 없는 파트너를 만나면 춤이 잘 안 되죠. 발레도 파트너와 호흡을 맞추는 마술이거든요.

 

발레는 자기와의 싸움이 중요합니다.인내심이 없으면 못해요. 발레뿐만 아니라 살아가는 데도 인내심이 없으면 자기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더 늦게 가요.

 

이 대답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다.

강수진은 입단한 지 1년이 지나도록 군무에도 변변히 끼지 못했다.

견디기 어려운 세월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를 연습으로 극복했다.

강수진의 실력이 향상되면서 솔로의 기회가 생겼고 93년 1월에는

세계 5대 발레단에 드는 슈투트가르트에서 주역 발레리나가 될 수 있었다.

 

강수진의 인생 철학을 들어보자.

 

오늘 최선을 다해 살라는 거죠. 과거는 벌써 지나간 일이고 내일은 아직 안 온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그러면 항상 결과가 좋아요.

 

- 황호택.동아일보 논설위원 -

 

<또 다른 이야기>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종신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발레리나 강수진(40·사진)씨가 올해 불혹의 나이를 맞았다. 또 이 발레단에 들어온 지 꼭 20년이 됐다. 슈투트가르트발레단은 지난 7일 공연한 ‘로미오와 줄리엣’을 강씨에게 헌정했다. 강씨는 독일에서 영어와 독일어, 한국어로 된 발레 화보집도 냈다. 화보집 출간 기념회는 22일 한국에서 열 예정이다. 강씨는 또 25일부터 28일까지 서울 강남구 역삼동 LG아트센터 등에서 ‘한국을 빛내는 해외무용스타 초청공연-강수진과 친구들’의 예술감독을 맡아 김지영, 김세연, 차진엽씨 등 해외에서 활약중인 후배 무용가들과 함께 무대를 마련한다.

13일 오후 3시30분,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있는 강씨와 전화로 만났다. 독일 현지시간으로는 같은날 오전 8시30분. 강씨는 이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오전 6시30분에 일어나 자신이 개발한 체조로 1시간여동안 몸을 깨운 뒤 일어났다고 한다. ‘미인은 잠꾸러기’라는데 일찍 일어나는 것을 보니 미인이 아닌가 보다 했더니, 마흔의 나이로는 믿어지지 않는 해맑은 웃음이 전화선을 타고 전해진다.

먼저 마흔의 느낌부터 물었다. 보통사람의 마흔이라면 ‘불혹(不惑)’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발레리나의 마흔은 예순인 ‘이순(耳順)’격이다. 그는 “마흔이 될 때까지 무용을 할 줄 몰랐다”면서 “마흔살이 좋다”고 말문을 열었다.

“믿지 않으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정말 나이든 게 좋아요. 젊어지기 싫어요. 주름이 있는 것은 할 수 없는 일입니다만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입니다. 행복하면 나이는 숫자밖에 안됩니다.”

그래도 무용수인데, 정신적으로야 더 성숙하고 완성될 수 있겠지만, 몸은 속이지 못하는 법이다.

“지금이 오히려 신체적으로도 좋은 것 같아요. 정신적으로 저를 더 알게 되면서, 제 몸을 제가 훨씬 더 잘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알면 알수록 더 어렵지만, 하는 게 더 재미있어요. 서른살, 스무살로 돌아가기 싫어요.”

강씨는 “(예술에 있어서) 경험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젊었을 때는 다 아는 것 같았는데 가면 갈수록 모르는게 더 많아지는 것 같아요.(젊을 때 하던 것과) 똑같은 스텝(step·걸음)이지만 한 스텝, 한 스텝이 다르다는 것을 느낍니다. 몸도 더 새로워진 것 같아요. 배울 길이 앞으로도 멀지요. 정신적 조건은 물론 신체적 조건도 젊었을 때보다 훨씬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쉰살이 돼도 마흔보다 좋을까.

“그렇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좋다’는 겁니다. 신체가 스무살이라도 정신이 좋지 않으면 일흔살로 느껴지는 것처럼 쉰살도 스무살이나 서른살, 마흔살과 다를 것이 없어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얼마나 행복하냐는 겁니다. 몸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만큼 따라와만 준다면 나이드는 게 좋습니다. 그만큼 많이 경험하고 알게 되잖아요.”

대체 언제까지 춤을 출 것인지. 마고트 폰테인은 예순이 넘어서도 무대에 서긴 했다. 강씨는 “아마 그 정도는 아닐 것”이라며 “무대에서 걷기만 하는 것은 싫다”고 단언했다.

폰테인은 말년에 왕비 등 춤추지 않고 걷는 것만으로도 카리스마를 충분히 발휘했다. 하지만 강씨는 언제까지일지는 모르겠지만 춤추지 않고서는 무대에 서지 않겠다는 결심이다.

지난 7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이 강씨의 입단 20년을 기념, 이날 공연 ‘로미오와 줄리엣’을 그에게 헌정됐다. 세계정상급 발레단이 아직 현역인 무용가에게 헌정공연을 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저도 놀랐습니다. 예술감독이 은퇴할 때 마지막 기념공연을 헌정한 기억은 있습니다. 다른 무용단이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무용수가 은퇴하는 것도 아니고, 현역인 경우에 헌정공연을 한 예는 생각이 안납니다.”

강씨는 남의 이야기하듯 건조하게 말했다. 별로 감동한 기색도 없다.

“감사하죠. 장미꽃 축하도 해주고 스탠딩 오베이션(Standing ovation·기립박수)도 해주셨으니요. 저는 그저 좋은 공연을 한 것에 만족합니다. (이 발레단에 처음 들어온)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20주년 기념 사진집을 냈다. 말은 달라진 게 없다고 하지만 뭔가 정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와 관련, 강씨는 “아무 의미도 없다”며 “나를 쭉 찍었던 사진작가가 있었는데 그저 한번 모아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저 잘 아시겠지만 복잡하지 않아요. 단순하잖아요. 제 사진들이 많은데 좋은 추억이 있는 사진들을 모아 놓은 것뿐이에요. 제 생활은 사실 심심하잖아요. 하지만 (발레를 하는 데는) 그게 중요해요.”

그는 “오늘 열심히 살면 내일 좋은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 “그저 열심히 오늘을 살 뿐”이라고 덧붙였다.

어떻게 하다보니 오늘 이야기의 주제가 ‘그저 현재에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 돼버렸다. 그렇게 40년을 살아오며 30년 넘게 발레를 했고, 20년간 슈투트가르트발레단에서 무용수 생활을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무용도 사람이 하는 것인데 다를 게 뭐 있겠어요. 공부하는 것도 똑같잖아요. 오늘 예습, 복습 열심히 하면 내일 좋은 결과를 얻지요. 오늘 열심히 살면 내일이 좋지요.”

말은 쉽게 하지만 실제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매일 오전 6시30분에 일어나 1시간 이상 몸 풀고 일어나 밥 먹고 발레단 가서 연습하고, 무대에 올라 최선을 다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이미 유명해진 ‘강수진의 발’은 그가 얼마나 뼈를 깎는 인고의 삶을 살았는지 가슴 아프게 웅변하고 있다.

“쉽지 않죠. 하지만 (극한까지) 푸시(push)하는 것이 제 원칙입니다. 맥시멈을 하지 않으면 제가 싫어요. 힘들고 피곤해도 시작하면 하기 마련이에요. 시작하는 게 힘들죠.”

발레뿐 아니라 사람살이 그렇지 않은 게 없다. 만유불성(萬有佛性)이라, 한 가지를 깊이 파면, 그 안에서 모든 것을 만나기 마련인가 보다. 20년 가까이 정상의 발레리나 생활을 하면서 슬럼프는 없었을까.

“무대에 설 때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실제는 힘들 때가 많습니다. 2000년에 1년 쉬어야 했을 때 다시 무용을 할 수 있을지 몰랐습니다. 그때 많이 배웠습니다. 쉬면서 발레가 제 삶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새삼 깨달았으니까요.”

그는 피로가 쌓여 정강이뼈에 금이 가는 피로골절을 5년 동안 앓았다. 아픔을 참고 무대에 서다가 35세에 그만 쓰러지고 만 것이다.

“옆에서 도와주려고 많은 노력을 했지요. 하지만 도움이 안됐습니다. 9개월쯤 지나도 힘이 받지 않아 저는 다시 춤을 출 수 없다는 깊은 우울에 빠져 있었습니다. 발레단에서 시간은 걱정하지 말고 나아서 다시 돌아오라고 했지만 불안했습니다. 신랑이 큰 힘이 됐습니다. 1년쯤 돼서야 뼈가 붙는다는 것을 보고 힘을 냈습니다.”

그에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일까. 우문(愚問)에 현답(賢答)이라고 그는 “매일 매일 좋다”고 말했다.

“결혼식날과 같은 특별한 날도 좋겠지만 매일매일 사랑하는 사람의 곁에 있고, 건강하고, 맛있는 음식 먹고, 연습 잘 하고, 좋은 공연하고, 매일 매일 행복합니다. 매일 행복하니 제가 굉장히 많이 웃잖아요.”

‘강수진과 친구들’ 공연에서 예술감독을 맡았다. 그동안 강씨에게서는 발견하지 못한 직함이다. 무용가와는 다른 길을 준비하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그냥 해외에서 힘들게 활동하는 후배들을 만나 격려하는 무대에서 선배로서 그냥 쓴 이름이에요. 별로 하는 일도 없어요.”

힘들다? 처음으로 부정적인 단어가 나왔다. 말꼬리를 잡아봤다.

“이거 나쁜 말 아니에요. 고생을 모르면 행복도 모르잖아요. 저는 힘든 시간도 즐겨요. 10시간 힘들게 노력해 1분 동안 좋은 공연을 하면 힘든 10시간은 잊어버리고 행복만 남습니다. 제가 쓰는 ‘힘들다’는 말은 플러스(plus·긍정)적인 말이에요.”

그는 “무용을 언젠가는 그만둘 때가 올 것”이지만 “지금은 아니다”고 못박았다. 사진집을 내고, 공연의 예술감독을 맡고 하는 것에 무용수 이상의 의미를 두지 말라는 압력이다.

“미래에 무용을 그만두는 날이 올 것이고, 문은 다 열려 있습니다. 하지만 어디에 있든지 발레 세계 안에 있을 것이고, 그 안에서 저는 저에게 가장 적합한 선택을 할 것입니다.”

한국 발레가 해외 콩쿠르 등에서는 좋은 성적을 내지만 국내 무대의 활동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특히 최근 들어 한국 발레가 침체기에 빠졌다는 지적도 있다.

“모든 일에 업 다운(up down·오르막 내리막)이 있습니다. 항상 올라갈 수만은 없지요. 그러나 오늘 잘 하면 내일이 나쁠 수 없습니다. 내일이 좋으면 모레도 좋습니다. 미래의 결과가 나쁠 수 없지요. 항상 100% 하면 후회는 없습니다. 모두가 후회하지 않도록 열심히 살아야죠. 후회는 나쁘잖아요.”

개인적인 문제로 마지막 질문을 했다. 결혼한 지 꽤 됐는데 아기 계획은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다. 그는 “계획은 있었는데 타이밍은 아닌 것 같다”고 시원하게 답했다.

“지금 남편과 함께 강아지 두 마리, 고양이 한 마리와 너무 행복하게 살고 있어요. 제 나이가 40이고, 남편이 47살로 아직 젊잖아요. 요즘 (과학기술의 발달로 아기를 갖는데) 나이에 관계 없지 않아요. 강아지, 고양이가 지금 저희 애들이에요. 하지만 또 모르죠. 사람살이가 그런 것 아니에요?”

활달하게 모든 현실을 긍정하며 최선을 다하면서도 가능성을 활짝 열어두는 그의 타고난 노력과 성실, 개방성, 낙관주의가 오늘날 세계적인 발레리나 강수진을 만든 비결인 것 같다.

문화부장 hyeon@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