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의 삶/기독교 자료

무디

예인짱 2007. 8. 21. 17:43

보스톤 뒷골목의 구두 세일즈맨에서 세계적인 부흥사. 하나님을 증거하기에 과감했으며 잃어버린 자들에 대한 강한 열정을 지닌 사람. 무뚝뚝한 첫인상 뒤에 숨겨진 겸손하고 솔직한 얼굴. 이것이 D.L.무디이다.

'거친 흙덩이가 하나님의 그릇으로 빚어지기까지 하나님 앞에 완전히 굴복한 자에게 부어주신 능력의 증인이다.



1. 무디의 생애


드와이트 리먼 무디는 별로 인기 없는 배경, 즉 뉴잉글런드의 작은 농촌 출신이었다. 1837년 소작농이자 석수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4살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어머니와 8명의 아이들은 아주 가난하게성장했다.

초등교육밖에 받지못했지만 그는 근육질의 탄탄한 체구에 열심히 노력하며 야심있고 상당히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시카고로 이주하여 제화점에 취직한 그는 이러한 성격과 직업의식으로 일약 백반장자가 되었다. 그러나 무디는 곧 시카고의 빈민가에 사는 거친 소년들과 소녀들을 대상으로 하는 기독교 사역에 심혈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부족한 교육에도 불구하고 그는 성경을 살아있는 말씀으로 증거하는 값진 은사를 발전시켰다.

불신영혼을 구원하려는 무디의 열망은 너무도 강했으며 무보수로 어린이들을 위한 선교와 새 YMCA를 운영하기 위하여 자신의 사업을 포기하기도 하였다.



1870년 그는 평생의 사역자이자 동역자인 생키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하나님 사역을 위한 완전한 구도를 갖게 되었다. 1872년 시카고 화재로 그가 건설한 모든 것이 파괴되었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영국과 미국을 넘나들며 가진 그의 전도집회는 그 전역을 흔들곤 하였다.


그는 학식보다 경험이 녹녹히 녹아있는 재담꾼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영어는 종종 문법이 틀리기도 하고 설교 원고는 철자와 문법이 틀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해 결단을 촉구하는 그의 강한 메시지와 성령 충만한 집회는 어느 것보다 강하고 능력이 있었다.

그는 복음성가와 독창곡으로 인한 방대한 매출을 두 개의 학교와 선교를 위해 모두 헌금했으며, 1886년에는 시카고에 무디 성경학교를 설립하여 직업 기독교 사역자와 선교를 위한 헌신자들을 훈련시켰다.


무디는 단순히 그의 이름을 D.L.무디라고 서명하고 결코 목사안수를 받지 않았다.

그는 단지 평범한 무디, 혹은 부흥사 무디로 불리길 원했다. 결코 미국과 영국을 넘어 전도여행을 하지 않았지만 학생자원단체와 해외 선교를 위한 끊임없는 독려를 통해 기독교 확장에 큰 영향을 주었다.


2. 무디의 설교


사람들은 그의 학식보다 경험이 풍부한 농담때문에 그를 더 잘 기억하였다.

무디의 정식 학교교육은 고작 5년 정도다.

그의 설교원고와 편지들을 검토해 본 사람이면 엉망인 철자법과 문법, 문자사용으로 겨우 읽을 수 있다는 사실에 공감하게 된다.

이런 그가 적극적으로 전도에 대한 용기를 가지게 된 계기는 무디의 주일 학교에서 소녀반을 가르치는 한 선생의 도움 요청으로부터 시작된게 아닌가한다.

폐출혈로 죽음을 앞둔 그 선생은 맡고 있던 소녀들을 하나하나 개종시키는 데에 무디의 도움을 원했다.

이 일 이후 무디도 자신의 사업을 버리고 하나님의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인도받았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사람은 헨리 무어하우스(Henry Moorhouse)이다.

"당신 자신의 말을 전하는 것을 중단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충고를 무디는 기쁘게 받아 들였다. 또한 그로부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다. 무디는 하나님이 죄인을 미워하신다고 설교해 오고 있었다.

심판의 복음, 징계의 하나님을 설교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어하우스의 조언으로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전파하기에 이르게된 무디. 사람들이 하나님께 이끌림을 받는 것은 그 사람의 의로움 �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때문이라고 자신의 인생 여정을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

외치고 있다.


그에게도 위기는 있었다. 자신의 야망이 그리스도를 나타내려는 욕망보다 커지게된 시기에 영적으로 침체되기에 이른다.

이 위기를 통해 성령 충만, 성령 세례, 기름 부으심, 봉사를 위한 권능에 초점을 맞춘 설교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브루클린으로부터 시작된 미국 부흥 운동이 각지로 전파되면서 신문들에 매일 집회 소식과 함께 설교 전문이 실렸다.

신문에 실리던 설교들은 "견고한 성을 붙들다(Holding the Fort)","기쁜 소식(Glad Tidings)","복음을 깨달으라(The Gospel Awakening)",

"위대한 구원"(The Great Redemption) 등의 책으로 만들어 졌다.


하나님 앞에 가기 전에 사람은 새로 거듭나야 한다고 무디는 말하고 있다.

지옥에 갈수 밖에 없는 사람들은 "피에 의한 가리움"을 받을 뿐 아니라 "성령으로 거듭나야"한다. "신생(New Birth)"에 대해 그는 


속죄 : 우리들을 위하여 되어진 것

중생 : 우리 속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일로 바라보고 있다.


"천국의 하나님은 인간에게 어떻게 그의 나라에 들어와야 하며 누가 들어올 수 있느냐 하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실 권리를 갖고 있지 않느냐?" 며 신생의 필요성을 옹호한다.

그는 사람의 죄를 깨닫게 만드는 일뿐만 아니라 중생의 사건 속에서 새롭게 태어나게 함으로써 새로운 본성을 사람들에게 주는 것은 성령의 능력이다고 역설한다. 타락한 인류는 부패할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죽은 상태이므로 중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중생에 관한 것이 아니라도 그의 설교 속에 이 주제가 끊임없이 들어가 있다. 


3. 무디가 우리에게 남긴 것들


무디는 한 권의 책도 그가 직접 탈고해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다만 그는 편찬을 도운 찬송가집과 설교 출판물의 수입으로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중 한 푼도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돈을 그가 세운 노스필드의 여러 학교와 시카고에 있는 성경 학교에 기부했다.

그의 자녀들에게 아무런 재산을 남기지 않았으며 단지 미망인에게는 겸허한 생활을 본으로 남겼을 뿐이다.


"언젠가는 무디가 죽었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읽게 될 것입니다.

그 말을  한 마디도 믿지 마십시오.

그 순간 나는 지금보다 더욱 생생하게 살아 있을 것입니다.

나는 1837년에 육신으로 태어났지만 1855년 영으로 태어났습니다.

육신으로 태어난 것은 죽겠지만 영으로 태어난 것은 영원히 살 것입니다."

그가 사망하던 해에 뉴욕시 집회에서 한 말이다.


사역에 열망과 자질이 있으며 충분한 교육을 받은 사람도 가난한 부모 밑에서 교육도 거의 받지못한 시골 소년이었던 무디만큼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한다.

그에게 무디와 같이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굴복과 사사로운 욕심에서의 해방이 없다면 위로부터 부어지는 능력은 그 만큼 감할 것이기 때문이다.


드와이트 L.무디, 그는 아직도 우리 가슴에 살아 있다. 그의 설교와 글들 속에서 성공한 부흥사로서보다 그리스도의 충성스런 군사로서 우리는 그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성경. 이 책은 당신으로 하여금 죄 가운데 들어가지 못하도록 해준다.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 죄가 당신으로 하여금 이 책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한다."


"내가 역사에서 사라질 때 나는 얼마의 위대한 남녀를 뒤에 남겨둘 것이다." 라는 그의 말처럼 다음 세대의 지도자 교육을 위한 그의 아낌없는 헌신은 우리 후대인들의 삶에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성경공부의 기쁨과 유익승리..

네가 어디 있느냐

너는 이것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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