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삶/가고 싶은 곳

해미읍성

예인짱 2007. 5. 15. 00:06
 

공주에서 서북쪽으로 200여리쯤에 가야산이 있는데, 가야산의 앞뒤에 있는 10고을(당진·면천·서산·태안·해미·덕산·홍주·결성·대흥·보령)을 내포라고 부른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내포지역을 홍주목이 관할하던 서천군에서 평택까지의 20여개 고을을 지칭하기도 했는데, 조선후기 실학자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충청도에서는 내포가 가장 좋다'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내포는 지형적인 특성으로 인간과 자연이 어우러지는 인정이 넘쳐 다양한 민속문화를 만들어 낸곳이기 합니다.

위치적으로 대륙의 문물이 들어오는 지리적 위치로 인해 서구문명의 영향을 먼저 받게 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남연군묘는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아버지인 남연군 이구(李球)의 무덤으로 규모는 약 5,590㎡입니다.. 풍수지리설을 믿은 대원군 이하응이 한 풍수가에게 명당을 찾아줄 것을 부탁하였는데, 풍수가는 이 자리를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올 자리로 지목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2대명당중에 하나라고 하지요.


 

 

이곳에는 원래 가야사(伽倻寺)라는 절이 있었고 무덤자리에는 탑이 서 있었는데, 1844년(헌종 10) 대원군은 명당자리를 찾아 옛 가야사를 불지르고 탑을 부순 후 경기도 연천에 있던 부친의 묘를 썼다합니다.

 

 
 

1968년 독일인 에른스트 오페르트(Ernst Oppert)가 1866년 3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친 조선과의 통상교섭에 실패한 뒤 대원군과 통상문제를 흥정하기 위하여 이 묘의 시체와 부장품을 도굴하려다 미수에 그치기도 하였고 이 사건으로 대외적으로는 서양인의 위신이 크게 떨어졌으며 크게 노한 대원군은 쇄국정책을 강화하고 천주교탄압을 하여 해미읍성에서 많은 천주교인이 희생된 동기가 되기도 하였던 곳입니다.

 
 

조선땅 최고의 명당자리답게 땅기운이 남다르게 느껴집니다. 답사객들이 토끼풀꽃이 무리지어 피어 있는 능원둔덕을 오르고 있습니다.

 

이제 원형이 가장 잘 남아 있어 읍성의 대표적이 표본이 되고, 남연군묘 도굴사건으로 기화된 천주교탄압으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던 해미읍성으로 향합니다.

 
 

해미읍성은 둘레에 탱자나무울타리가 둘러져 있어 "탱자나무성"이라고도 하였습니다. 1491년(성종 22)에 축조된 것으로 서해안 방어의 임무를 담당하던 곳이며, 내포일대에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이었고 지리적으로 충청도내에서도 선진문물이 빨리 전파되어 18세기말에 천주교인이 많이 늘어났었습니다.

 

 
 

남연군묘 도굴사건때 길잡이를 한 조선인이 천주교 신자였다고 하여 이 곳 해미읍성 박해가 심했던 1866년에 천명쯤 이곳에서 처형되었다고 합니다.

 

 
 

해미읍성은 원형그대로의 보존이라는 의미도 크지만 천주교인들에게는 순교의 순례지라는 의미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읍성으로 사적 제 11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르기를 정해현과 여미현 두 현을 조선 태종 7년(1406)에 병합하면서 두현에서 한자씩 따서 지은 이름이라 합니다. 1578년에는 "이순신"장군이 병사영의 군관으로 열달동안 근무를 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남북으로 좀 더 긴 타원형 모양을 한 해미읍성은 남쪽 진남루(위사진)만이 남아 있었으나 1973년 복원정화사업으로 동문과 서문도 복원되었습니다. 북문은 원래 없었습니다. 옹성(甕城)이 2개소, 객사(客舍) 2동, 포루(砲樓) 2동, 동헌(東軒) 1동, 총안(銃眼) 380개소, 수상각(水上閣) 1개소, 신당원(神堂院) 1개소 등 매우 큰 규모였다고 합니다.성내에는 우물이 여러개 있었다 합니다.

 

 
 

해미읍성은 높이가 4m쯤 되고 둘레가 2Km이고 대부분의 읍성이 그랫든이 성 안에 관가를 두어 고을을 다스리는 행정기능도 겸했는데, 그 관아의 자취가 남아 있지 않았으나 1981년 발굴조사를 통해서 건물지를 찾아내고 일부 복원을 하였습니다.

 

 
 

해미읍성에 들어서면 만나는 안내소입니다. 이 건물도 원래의 자리에 복원을 하고 안내소로 사용을 하고 있습니다.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되지요.이런면은 박수를 쳐줘야 합니다^^>>

 

 
 

본래 성내에는 민가 160여채와 초등학교가 남아 있었으나 사적이 지정되면서 모두 철거 하였습니다. 이렇게 성내에 민가와 민간시설이 들어선것도 일제시대의 일어난 일이라 하니 우리땅 곳곳에 그들이 남긴 상채기가 아프게 느껴집니다.

 

 

 

 

 

객사는 궐(闕)자가 새겨진 위패를 모시고 국왕에 대한 예를 올리고, 조정 상부에사 파견된 관리나 귀빈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던 곳입니다.

 

 
 

동헌뒤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 보면 청허정이 있습니다. 일명 "광화문공법(시멘트)"으로 복원을 해 놓았더군요.

 

 
 

 

 

 

길게 이어진 서문으로 가는길...천주교 박해가 심했던 때 저길은 죽음(순교)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일명 "호야나무"라고도 합니다. 저 나무 동편가지에 천주교도를 매달아 고문을 하였다고 합니다.

 

 
 

현재 발굴 복원중인 감옥터입니다. 이 감옥 창문으로 회화나무에 매달려 배교을 종용하며 고문을 하던 모습이 보였다 합니다.

 

 
 

답사객들이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습니다. 과연 저분은 박해사건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요. 남연군묘 도굴사건, 서양문물의 유입, 천주교의 유입, 조선의 통치이념, 전통들과 뒤섞여 수많은 희생자를 낸 이자리에서 혼돈스럽기만 합니다. 감옥에 가두고 온갖 고문을 하여도 배교를 하지 않자 길옆에 "성물"을 놓고 건드리기만 하여도 배교를 한것으로 하여 용서를 해주려고 했다는 부분에서는 더욱 큰 혼란속으로 빠져듭니다.

 

 
 

천주교도들이 줄지어 나와 죽음(순교)를 맞았던 서문입니다.

 

 
 

성밖 해자에 있던 돌다리 입니다. 서문밖을 나와 병사 여럿이 천주교도를 저 돌위에 내쳐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웅덩이에 산 사람을 밀어 넣고 그대로 생매장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해자가 메워져 묻혀 있던것을 발굴하여 서문앞에 복원을 해 놓았습니다.

 

 
 

잘정비되어 굳건히 서있는 저 성벽은 그 참혹한 현장을 목격하였겠지요. 말없이 바람에 가지를 흔들고 있는 저 나무는 지금도 역사의 흐름을 기록하고 있는듯 합니다.

 

 
 

서울에서 출발하면 서해안고속도로를 따라 시간반이면 해미읍성에 도착을 합니다. 예전에 서해안고속도로가 놓여지기 전에는 해미를 가려면 반나절은 족히 걸리던 때가 있었습니다. 세상은 시간을 따라 변화해 갑니다. 세상이 변하는 것에 따라 역사는 굴곡을 만들고 그 굴곡속에 희생이 생기게 되고 그 희생은 늘 힘없이 착하게 사는 민초들의 몫이라는 생각을 해미읍성에서 하게 됩니다.

 

 
 

저도 천주교인으로 십수년전에 해미읍성을 "성지"로서 다녀간 일이 있었습니다. 이번 여정에서 또 다른 시각으로 해미읍성을 생각합하게 됩니다.

읍성에 무성한 아름들이 나무들은 오월햇살에 싱그러움을 더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원형이 가장 잘 남아있는 대표적 표본인 읍성으로 , 우리나라 천주교의 성지로서 역사적 의의를 잘살려 역사의 산 교육장이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2005. 5

글/사진 마실정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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