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삶/양육의세계

양육의 선명성이 떨어지는 이유

예인짱 2007. 2. 16. 10:19
 

1. 자기의 틀에 근거한 신앙관을 갖고 있을 때

 

사람은 누구나 나름대로의 신앙관을 갖고 있다.

그 신앙관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으면 나름대로 만들어 놓은 신앙관에 근거한 신앙을 한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이 신앙을 대신하는 주제로 그안에 자리하는 것이다.

그것이 성공이든지, 노력이든지, 착하게 사는 것이든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이든지, 나름대로의 신앙관에 근거한 신앙을 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음은 은혜스럽기는 하지만,

그것이 본질적으로 복음의 선명성과는 거리가 먼 결과를 만들고 만다.

 

왜냐하면 이 사람의 가장 큰 주제는,

자기가 생각하는 신앙관을 성취하는 것을 신앙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공부를 잘하는 것이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라고 정의하는 사람에게 있어서의 신앙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공부를 잘해야 한다. 그것이 되면 신앙이 잘 되는 것이고, 그것이 안되면 신앙이 안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은 공부를 잘하게 하는 본질목표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이 신앙관이 얼마나 하나님이 주시려는 본질적 신앙관과 거리가 있는 것인가를 직시하고 자신의 신앙관 자체를 철저히 중지하고 반드시 바꾸리라는 강한 집중을 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2. 입체적 세계로 신앙의 세계를 받아드리는 변별력이 떨어질 때

 

흔히 신앙을 얘기할 때,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 말이 갖고 있는 의미는 천차만별이지만, 그 말이 갖고 있는 최선의 입장에서 이해하더라도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곧 신앙의 본질인 것은 아닌 것이다.

 

또는 신앙을 얘기할 때,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고도 정의한다.

맞는 말처럼 들린다.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예수를 믿는 것이 신앙의 근본이지는 않다.

예수가 내게 누구로 계시고, 나에게 왜 예수를 주셨는지를 분명히 모르면 예수와의 관계속에 살아가는데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신앙의 세계가 정확하게 정립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주셨고,

그 독생자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심을 굳게 믿는 신앙이 정립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에게 예수를 보내 주신분이 되어야 하고,

예수님 하면 언제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사 내게 보내신 나의 주라는 절대 의식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의 품에 영원히 거하게 하는 절대 요소인 것이다.

 

3. 영원한 생명의 세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때

 

신앙은 현실의 문제를 다룬다.

그러나 신앙의 가장 큰 주제는 영생의 문제이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다.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영원히 사는 것에 관심을 가지신다.

어떻게 하면 우리를 영원히 하나님의 품에 거하는 사람으로 영원히 살게 할 것인가가 하나님의 주제인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관심은 그렇지가 않다. 인간의 관심은 눈에 보이는 현실이다. 코 앞 닦기 급급한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말씀은,

코 앞을 닦는데 필요한 현실적 주제보다도 덜 중요한 말씀처럼 느껴진다.

 

영원한 하나님의 세계,

내가 반드시 죽게 되고, 그후엔 심판이 있다는 절대적인 기준안에서,

나를 향해 가지신 하나님의 큰 사랑, 주 예수를 통해 내게 이루시려는 영원한 사랑의 의지를 담는 것이 신앙의 자리인 것이다.

 

이런 의식에서 건짐 받아야 양육의 선명성이 더욱더 극대화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