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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루터

예인짱 2020. 3. 7. 17:16

마틴 루터


기독교 개혁자들 - 변질된 신앙에서 본질적 신앙으로 돌아가자.

1. 피에르 왈도(Pierre Waldo, 1140-1217) 77세

 2.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 ~ 1384) 64세  부관참시
 
3. 얀 후스(Jan Hus, 1372년 ~ 1415.7.6) 43세  화형
 
4. 말틴 루터(Martin Luther 1483.11.10일~1546.2.18) 63세
 
5. 1489∼1565 기욤 파넬  76세

6.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 1494~1536). 42세  화형
 
7. 장 칼뱅(Jean Calvin, 1509.7.10.-1564.5.27), 55세
 
8. 존 녹스(John Knox, 1513? ~ 1572) 59세
 
9. 1519-1605장 테오도르 드 베자 86세


왈도파의  핍박은  1179년부터  시작한다.   1184년  이단으로 정죄된다.  성 프란시스코와   얀 후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웨스트팔레아 조약 (1648년)때까지   500여년의  핍박.  5.000만명의   순교의 피로  프로테스탄트 신앙이  얻어진다.   변질된  신앙에 빠지지 말고 본질적   신앙,  성경만이  최종 최고의   권위.  하나님과 일치한 권위임을  믿고 지키고 순종하자.   기복신앙,  세속주의  신앙.  번영신앙.   혼합주의.  이성주의는   다시  변질 신앙으로   가고 있다.  개혁자들의   희생을   헛되게 하지 말자.


               
마르틴 루터는 로마 가톨릭교회에 부패와 잘못된 교황의 권위에 항거하여,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리를 논박하고, 성서가 지니고 있는 기독교 신앙에서의 최고의 권위와 그리스도에 대한 오직 믿음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통한 구원을 강조하였다. 이 주장은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Sola scriptura, Sola fide, Sola Gratia, Solus Christus, Soli Deo Gloria)라는 말로 함축할 수 있다. (다섯 솔라) 그러나 루터는 스스로가 시작한 이 일을 ‘종교 개혁’으로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종교 개혁이 하나님에게 이끌림을 받아, 할 수 없이 한 일이기 때문이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복음주의자’로서 복음을 전파하기를 원했고, 자신이 설교자, 박사, 교수라고 불리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의 삶 가운데 그가 행했던 일들은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그로 인해 개신교가 태동했을 뿐 아니라, 성서 번역, 많은 저작 활동, 작곡과 설교를 통해 사회와 역사가 크게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1.10~1546.2.18)
 
독일의 작센안할트 주의 아이스레벤(Eisleben)에서 광산업에 종사하는 아버지 한스 루터(Hans Luther)와 어머니 마가레테 린데만 (Margarethe Lindemann)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중산층으로 생계에는 지장이 없었고. 아버지는 법률가로 키우려고 에르푸르트 대학교에 입학시켰다.
 
15029월에 문학 학사학위를, 15051월에 17명 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5월에 본격적으로 법률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해 72, 슈토테르하임 근처에서 무시무시한 벼락이 옆에 떨어지는 순간 루터는 땅으로 엎어지면서 친구가 죽는 것을 보고 신부가 되기로 결심한다.
 
부친의 분노어린 반대에도 불구하고 717, 에르푸르트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 은둔자 수도회소속 검은 수도원에 입회하여 수사신부가 되었다. 수도회에서는 그를 비텐베르크 대학교에서 공부하게 하였다.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요한 스타우피츠 교수는 루터가 성서에 대해 진지하게 공부하면 평안을 찾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를 성서학 교수신부로 임명하였는데, 스타우피츠 교수의 결정은 루터가 신앙적인 고민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루터는 성서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면서 칭의론에 대해 생각하였다. 칭의론은 인간은 죄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는다는 교리이다.



마르틴 루터(독일어: Martin Luther, 1483년 11월 10일~1546년 2월 18일)는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교수. 본래 아우구스티노회 수사였던 루터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면벌부 판매를 회개가 없는 용서, 거짓 평안(예레미야 예언자의 가르침을 인용함)이라 비판하고 믿음을 통하여 의롭다함을 얻는(der Rechtfertigung durch den Glauben) 이신칭의를 주장하였다. 칭의를 통한 개인 구원의 새 시대를 열어주었다. 면죄부 판매를 비판한 그는 1517년 95개 논제를 게시함으로써 당시 면죄부의 대량 세일을 하는 도미니코회 수사이자 설교 담당자인 요한 테첼에 맞섰다. 1520년 그는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자신의 모든 주장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받았으나 오직 성경의 권위을 앞세우면서 성서에 어긋나는 가르침들을 거부하였다. 1521년 보름스 회의에서도 마찬가지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카를 5세로부터 같은 요구를 받았으나 거부함으로써 결국 교황에게 파문을 당하였다. 그는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대학교 교회 문에 95개 논제를 붙였는데 이것이 종교 개혁의 시작이 되었다. 그의 종교 개혁은 당시 종교와 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로마 교황 레오 10)의 강제적인 면죄부 판매는 루터의 신앙 양심을 근본적으로 흔들게 되었다.‘돈으로 구원을 살 수 있다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순응할 수 없었고, 나아가 침묵할 수도 없었다.
 
면죄부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일곱 성사들 가운데 하나인 고해성사와 연관된 것. 신부는 통회하는 고해자의 죄 고백을 듣고 죄 사면을 한 뒤 죄책에 대한 보속으로 순교, 시편 낭송, 특별기도 등의 행위를 하게 하였는데 면죄부는 이러한 보속을 면해주는 증서였다.
 
그런데 면죄부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주요 수입원이 되면서 교회는 면죄부 영업에 열을 올렸는데, 실제로 요한 테첼(도미니크 수도원 신부)금화가 헌금 궤에 떨어지며 소리를 내는 순간 영혼은 연옥을 벗어나 하늘나라를 향해 올라가리라고 신자들을 기만하였던 것이다.
 
신자들은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진지한 신앙생활보다는 면죄부를 구입함으로써 죄의식을 면하려는 손쉬운 방법을 좋아하고, 구원을 돈으로 살 수 있다는 주장이 과연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하는가를 생각하지 않았다. 루터는 침묵하는 것은 죄라고 생각하고 성경 진리를 위해 면죄부의 부당함을 선언하게 된다 

   

               

1515년 루터는 10개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을 감독하면서 서신 교환과 방문 등을 통하여 새로 발견한 복음의 씨앗을 전파할 위치에 서게 되었다. 루터는 자신이 가르치고 돌보는 많은 사람들에 대한 목회적 양심과 책임에 따라 설교에서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기 시작하였고, 전혀 개선됨이 없자 드디어 15171031, 비텐베르크 성의 만인 성자 교회의 문 앞에 ‘95개 논제를 내 걸음으로써 기존 교회와의 본격적인 논쟁에 들어가게 되며, 이것이 종교 개혁의 시작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교황 레오 10(재위 1513~1521)는 사치스럽기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부유한 메디치 가문에서 태어난 그(원래 이름은 조반니 디 메디치)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아버지 로렌초(1449~1492)의 도움으로 이미 14세의 나이에 추기경이 되었다. 1513년에는 교황으로 선출되었고, "신께서 우리에게 교황직을 주셨으니 즐겨 보도록 하자."라는 말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얼마나 사치스러운 인물이었는지를 보여 주는 예로, 그의 유명한 나들이 행렬을 들 수 있다. 그는 나들이를 할 때 표범, 어릿광대, 하마와 흰 코끼리로 행렬의 선두에 서게 하였다. , 푸딩에서 미소년들이 뛰어나오는, 65가지의 코스로 이루어진 저녁 식사를 즐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루터는 도미니코회 수사이자 대사령 설교 담당자인 요한 테첼에 맞섰다. 1520년 그는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자신의 모든 주장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받았으나 거부하였다. 1521년 보름스 회의에서 마찬가지로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 황제로부터 같은 요구를 받았으나 거부함으로써 결국 교황에게 파문을 선고받았다. 또한 황제로부터 삭권 박탈당했다. 이미 1414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지기스문트의 신변보장을 받은 얀 후스도 콘스탄츠 공의회에 참석했다가 재판 끝에 이듬해 화형당한 선례가 있어 루터의 주변에서도 보름스에 가는 것을 말렸다.



15471월중 조용히 사망한다. 죽기전 루터파 신학자 유스투스 요나스가 "선생님은 지금까지 주님의 가르침을 선생님이 전한 것에 대해 확신 하십니까?" 물었고 루터는 ""라고 짧게 대답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63년동안 평범치 않은 삶을 살았지만 그의 묘비에는 '신학박사 마르틴 루터 여기에 잠들다'란 간단한 묘비만이 남아있다.


               

구원에 이르기 위해 무릎으로 성당 계단을 오르며 기도하는 사람들. 그러나 돈을 받고 면죄부를 파는 성직자들의 모습에 사제가 된지 얼마되지 않은 루터는 혼란을 겪는다.

성당건축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사람들을 현혹하며 면죄부를 판매하는 모습을 본 루터는 면죄부에 대한 95개의 반박논제를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붙이고, 교회권력에 정면으로 맞선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로마서의 성경구절을 바탕으로 한 영화 루터는 돈으로 구원을 사고파는 당시 유럽 교회의 부패상을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보름스 의회(Diet of Worms, Reichstag zu Worms) 또는 보름스 제국의회는 1521년 3월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보름스에서 제국의회를 소집하고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를 소환해 루터의 견해를 심의한 사건을 말한다.


1518년 하이델베르크 논쟁과 1519년 라이프치히 논쟁 이 후 루터는 독일 국민의 영웅이 되어가고 있었다. 독일인들은 루터의 개혁 사상과 민족주의를 지지하였고,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한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곤 하였다. 비텐베르크 근교에 살던 주민들은 길에서 여행자를 만나면 "당신은 마르틴 편입니까?"라고 물으려 만일 그가 아니라고 대답하면 구타까지 할 정도였다. 루터의 영향력이 확산되자.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황의 사절 알레안더(Alender)는 카를 5세에게 사람을 보내 종교개혁을 탄압할 것을 요청하였다. 카를 5세는 직접 루터의 견해를 직접 들어보고자 루터를 제국의회에 소환하였다.


브룸스의회


카를 5세는 루터의 안전한 통행을 약속하였지만 이미 얀 후스윌리엄 틴데일종교 개혁가들이 붙잡힌 즉시 체포되어 고문 당하고 화형을 당한 전례가 있어 루터의 친구들은 루터에게 불참을 권유했다. 특히 프리드리히는 비서 스팔라틴(Spalatin)을 보내어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순교한 얀 후스의 예를 상기시키면서 루터에게 가지 말것을 권하였다. 하지만 루터는 살기 위해 비굴하게 숨는 것보다 죽더라도 자신의 입장을 밝히겠다며 참석을 강행하며 이렇게 말했다.


보름스의 지붕 기왓장만큼이나 많은 마귀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고 해도 나는 그곳에 가겠다.

마침내 4월 2일 비텐베르크를 떠나 4월 16일 보름스에 도착하여 대중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보름스에 도착한다. 그의 도착시간은 저녁이었지만 20000여명이 넘는 인파가 루터를 맞이하기 위해 운집했다.


보름스에 1521년 4월 16일 도착한 루터는 다음 날 첫 번 청문회에 참석하였다. 의회에는 카를 5세와 독일의 영주들 그리고 여러명의 추기경 등이 참석하였다. 참석자들은 극단적인 교황주의자, 공정한 심리를 촉구하던 루터 지지자들, 그리고 절충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던 에라스무스 지지자들이 있었다. 에라스무스 지지자들은 루터가 공재설을 포기하고 화체설을 묵인하여 로마 가톨릭교회와 타협할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절충안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의회는 루터의 신학적 입장을 밝히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트리에르 대주교의 고문관은 루터에게 두 가지 질문에 답하도록 물었다.



첫 번 질문에 루터는 자신의 책들이라 시인하고 자신이 쓴 책들이 더 있다고 대답했다. 두 번째 질문에 루터는 하루의 여유를 구했다.
루터는 4월 17일 저녁에 비엔나요하네스 큐스피니아누스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날에 있었던 일과 다음 날 있을 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대의 이름으로 출판된 이 책들을 그대의 것으로 인정하는가?
그대는 이 책들에서 쓴 내용을 철회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 순간 나는 황제와 사절들 앞에 서서 철회할 것인가하는 질문을 받았다 … 내일 나는 철회에 대한 답변을 할 것이다. 생각할 시간을 달라는 요청은 받아들여졌지만, 이 하루 이상은 허락이 안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께서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한 영원히 한 글자도 철회하지 않을 것이다 ….


브룸스 의사당
다음날(4월 18일) 루터는 황제 앞에서 담대히 대답했다. 성서의 증거함과 명백한 이성에 비추어 나의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 이상 나는 교황과 공의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사실 이 둘은 오류를 범하여 왔고 또 서로 엇갈린 주장을 펴왔습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고 또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반해서 행동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현명한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이 몸을 도우소서, 아멘.


루터가 보름스 의회를 떠날 때, 약속대로 독일군이 그를 호위하여 체포되는 것을 막았다. 루터의 영웅적인 행동에 많은 백성들이 찬양하였지만 카를 5세와 로마 가톨릭교회는 루터를 살해하고자 하였다. 살해 음모를 파악한 프리드리히는 4월 24일 병사들을 보내 루터를 은밀하게 아이제나흐 근처의 발트부르크 성에 피신시켰다. 카를 5세는 루터의 단호한 입장에 충격을 받았다. 가톨릭 교도였던 황제는 오랫동안 불편한 관계였던 교황과 화해하기 위해 루터의 종교개혁을 억제하고자 하였다. 그는 5월 26일 '보름스 칙서'를 발표하면서 루터를 정죄하고, 루터의 모든 책을 불사르도록 명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행정체제가 중앙집권적 통치체제가 아니었으므로 루터를 체포 할 수는 없었다

luther-erasmus
영국의 역사학자 토머스 칼라일은 루터가 보름스 제국의회에 죽음을 무릅쓰고 출두한 일을 유럽 역사상 최대의 장면이며, 보름스 국회에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이 장면을 인류의 근대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지옥 그 자체에 정면으로 도전하고자 했던 루터의 행위는 두려움 없는 최고의 용기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