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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심덕·김우진 ‘현해탄 정사(情死)’ 미스터리

예인짱 2018. 12. 7. 07:40

배우가 된 성악가 


1926년 김우진은 윤심덕에게 광무대에서 상설 공연을 하는 토월회에 입단할 것을 권했다. 조만간 집을 나온 후 극장을 차려 윤심덕과 함께 운영할 생각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조선사회는 여배우를 기생처럼 여겼다. 여배우가 되는 것은 신세를 망치는 일처럼 인식됐기에 극단들은 여배우를 구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 시절, 한때 악단의 여왕으로 명성을 떨치던 윤심덕이 여배우가 되겠다고 자원해서 나서자 토월회는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윤심덕은 집안의 만류를 피하기 위해 대구 일갓집에 간다는 핑계를 대고 집을 나와 여관에서 기거했다. 윤심덕이 공연에 출연한다는 광고가 나가자 이용문과 염문을 뿌려 하얼빈까지 달아난 뻔뻔스러운 여자 얼굴이나 보자고 관객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일갓집에 간다고 집을 나간 윤심덕이 여배우가 됐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모친은 열흘 동안 매일같이 광무대를 찾아와 그를 무대에서 끌어내리려 했다. 모친이 찾아왔다는 연락을 받으면 윤심덕은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뒷문으로 도망치듯 광무대를 빠져나왔다.

윤심덕은 여배우로 성공하지 못했다. 그의 몸짓은 둔하고 부자연스러웠고, 발음이 부정확해서 대사가 객석까지 전달되지 않았다. 가끔 오쿠다 사진관 2층에 마련한 자신의 거처에서 상경한 김우진과 만나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언니!

지금 생각해도 눈에 선합니다. 수은정 오쿠다 사진관 2층에서 김우진 군과 공허한 살림살이를 꾸미고 지내며 가끔 남창을 열고 두 분이 나란히 앉아 길거리를 내다보던 형용이 지금도 눈앞에 선합니다. 아마 지금은 천국의 창을 열고 두 분이 나란히 고해(苦海)를 내려다 보고 계실지도 모르지요. (‘다한한 윤심덕’, ‘삼천리’ 1938년 11월호)



1926년 6월 김우진은 2년 동안의 목포 생활을 청산하고 집을 나왔다. 가업을 더 이상 돌보지 않고 예술에 전념하겠다고 선언하자 부친은 잘 가라는 말조차 하지 않고 맏아들을 내쫓았지만, 모친은 생활비에 보태 쓰라고 3000원을 마련해주었다. 집을 나온 김우진은 윤심덕에게 알리지도 않고 도쿄로 건너갔다. 김우진이 도쿄로 떠난 지 한 달 후 윤심덕은 음반 취입과 미국 유학을 떠나는 동생 배웅을 위해 오사카로 건너갔다. 닛토레코드에서 27곡을 취입한 후 도쿄에 있는 김우진에게 전보를 쳤다. 

‘당장 달려오지 않으면 죽어버리겠소.’ 

1926년 8월3일, 윤성덕이 미국행 배를 타기 위해 요코하마로 떠나자, 윤심덕은 도쿄에서 황급히 달려온 김우진과 함께 시모노세키로 가서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에 탑승했다. 그 후 아무도 윤심덕과 김우진을 보지 못했다. 

윤심덕 생존설의 진상 

1930년 12월 김우진의 동생 김철진과 김익진은 총독부에 수색원을 제출함으로써 한동안 잠복했던 윤심덕·김우진 생존설은 또다시 수면으로 떠올랐다. 생존설은 ‘윤심덕과 김우진이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에서 현해탄에 몸을 던져 정사했다는 것은 한낱 연극일 뿐이고, 실상은 도쿠주마루 일등선실 급사를 매수해 정사한 것처럼 위장한 후 나가사키를 거쳐 상하이로 가서 중국인 명의로 다시 이태리로 건너간 후 로마에서 악기점을 경영하면서 단란한 가정을 꾸몄다’고 설명한다. 

남의 소문을 잘 알기로 유명한 어떤 소식통은 다음의 세 가지 근거를 들어 윤심덕과 김우진의 정사를 부인하고 아직도 생존설을 주장한다. 

첫째, 악단의 여왕이라는 존칭을 듣던 윤심덕의 성격이 본시부터 쾌활해 절대로 자살을 하지 못할 사람인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가 정사했다는 1926년 8월 피아노를 공부하려고 미국에 건너간 피아니스트 윤성덕을 보고 “동생 성덕아! 내가 큰 성공을 하기 전에는 절대로 간 곳을 알리지 않을 터이니 그런 줄 알고 절대로 나를 찾지 말라…”고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간 것. 

둘째, 그들의 정사 사건이 있은 후 양가에서 특히 김우진의 집에서 기어이 죽은 사람들의 시체나마 찾고자 부산, 시모노세키 등지에 있는 각 신문지상에 현상금을 내걸고 광고까지 내면서 시체를 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사건 발생 후 5개년이나 지난 금일까지 시체가 발견되지 않은 것. 

셋째, 윤심덕의 집안에서는 아직도 칠십 노모가 생존해 있는 관계도 있겠지만 어쨌든 처음부터 두 사람의 사망을 부인해 지금까지 정식으로 발상하지 않은 것 등등.

그렇다 하더라도 두 사람이 이태리까지 가기만 하는데도 상당한 여비가 필요하겠거늘 하물며 산 설고 물 설은 이역만리 로마에서 악기점까지 경영하고 있다 하니 그들은 대체 무슨 돈을 가지고 이 같은 전대미문의 연극을 실행했을까? 

“윤심덕이 세상을 떠난 것과 같이 보이는 연극에는 적어도 어떠한 유력한 음반회사와 크나큰 밀약이 성립된 뒤의 일이다. 즉 김우진과 정사극을 연출하기 전 우선 ‘사의 찬미’라는 죽음을 암시하는 노래를 녹음해놓고 그후 즉시 정사극을 실행한다면 소위 악단의 여왕이라는 사람의 로맨틱한 정사극에 100퍼센트 이상의 흥미를 느낀 세상 사람들은 대체 ‘사의 찬미’란 어떠한 노래인가 하고 앞을 다투어가며 음반을 사갈 것이다. 그러면 음반회사의 배가 불러질 것은 물론이요그 대가로 윤심덕도 상당한 보수를 받을 것이니 두 사람이 이태리 로마로 가게 된 것은 실로 ‘사의 찬미’를 음반에 녹음해놓은 닛토레코드 회사로부터 ‘산송장’이 될 것을 조건으로 받은 보수금 3만원 때문이다.”라고 정말로 그 내용을 아는 것과 같이 말하는 친구도 있다. 그렇지만 윤심덕이 아무리 조선에서 인기가 있는 음악가라 하더라도 음반 한 장을 녹음하는 데 3만원씩이나 되는 막대한 보수금을 주었을 리가 있을까? (‘불생불사의 악단 여왕 윤심덕’, ‘삼천리’ 1931년 1월호)



1930년 제기된 윤심덕 생존설이 놓치고 있는 한 가지 의문은 두 사람이 과연 정사할 만큼 사랑하는 사이였는가 하는 점이다.  

윤심덕은 김우진만 사랑한 순간이 단 하루도 없었다. 언제나 동시에 여러 사람과 사랑을 나눴다. 김우진은 유부남이었고, 일본인 간호사를 사랑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어도 윤심덕을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두 사람이 살림을 차린다고 손가락질하거나 뜯어말릴 사람도 없었다. 1920년대 조선사회에는 ‘제2부인’이라는 용어가 있을 정도로, 유부남과 처녀가 살림을 차리는 것이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드문 일도 아니었다. 두 사람이 정사할 이유가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가장해 로마에서 신분까지 속이고 함께 살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윤심덕·김우진 ‘현해탄 정사(情死)’ 미스터리
전봉관 

1971년 부산 출생 

서울대 국문과 졸업, 동 대학 석·박사(국문학) 

서울대, 아주대, 한신대, 한성대, 덕성여대에서 강의 

現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 과학부 교수 

저서 및 논문 : ‘1930년대 한국 도시적 서정시 연구’ ‘황금광시대’ ‘경성기담’ 등



1931년 11월, 이탈리아 주재 일본영사관은 김우진의 유족에게 “로마에는 김우진과 윤심덕이라는 이름을 가진 조선인이 살지 않으며, 동양인이 경영하는 악기점도 없다”고 공식적으로 통보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생존설에서 제기한 것과 같이 중국 여권으로 신분을 가장하고 살 경우에 대해서는 확인하지 못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윤심덕과 김우진이 1926년 8월4일 현해탄에서 동반자살한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두 사람의 동반자살이 정사라는 믿음은 언론이 만들어낸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

신동아 2007년 9월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