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이었다가 목사가 된 김성화 목사님의 신앙 간증 http://cafe.daum.net/waitingforjesus/HlU4/11107
김성화 목사
스님의 아들로 출생 경북대학교 수학과 졸업 경북대학교 대학원 수학과 졸업 대한불교 정토종 포교국장역임 대한불교 정토종 교육국장역임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 저서 : 극락의 불나비
대구에서 영천으로 20킬로를 가면 하양이 나옵니다. 여기가 산 좋고 물 좋은 나의 고향입니다. 병풍처럼 우뚝 서있는 무학산을 뒤로하고 늘 푸른 물이 넘실대는 금호강이 마을을 가로질러 포근히 감싸주는 마을입니다. 아버님은 영천 죽림사의 주지스님이셨고 형님은 영천 은혜사의 오산 불교학교에 다녔고 나와 동생 그리고 어머니는 하양의 큰 집에 살았습니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독경소리와 범종소리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달 밝은 밤이면 아버지와 스님들 그리고 가족들은 탑돌이를 하며 염불을 외고 합장하고 뒤를 쫓았습니다. 뜻도 의미도 몰랐지만 단란하고 평화로왔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정에 먹장구름이 몰려와 어머님은 막내동생 출산 후 산후 조리가 잘못 돼 병이 드셨습니다. 대구 동산병원에 다니시면서 사랑채에는 한의사가 끊임없이 출입했고 이 와중에 가산만 탕진하시고 결국 돌아가셨습니다.
해방 후 토지개혁 실시로 가세는 완전히 기울었습니다. 설상가상 아버지마저 점심 식사 중에 피를 토하고 유언도 없이 돌아가셔서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조차 없었습니다. 천애고아가 된 나와 동생은 아버님의 친분이 있던 사미승이 거두어 주셨습니다. 국민학교 3학년이 된 나도 절로 들어가 사미승이 되었습니다.
하루 일과는 고되고 혹독했습니다. 새벽 3시에 일어나 다기에 물을 붓고 법당에 향을 꽂으면 아침예불이 시작?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하루 일과는 일과 청소 잔심부름 공양준비 염불 불교의식 등 끝없이 이어지는 일들로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갔습니다. 한끼에 1홉으로 지은 밥으로 하루 세끼니를 먹으니 커가는 나로서는 그 배고품이란 정말 힘겨움의 연속이었습니다. 부모 형제가 그리울 때 남모르는 눈물도 수없이 흘렸습니다.
세상공부를 좀 더 해야 한다는 스님의 배려로 대구로 나와 고등공민학교에 입학하여 열심히 공부하여 고입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대구상고를 마쳤습니다. 가까운 경북대 수학과에 진학하여 어려운 처지를 아는 분들의 도움으로 대구시 장학생으로 선정되 학교를 다닐 수 있었습니다. 아르바이트 전전하며 어렵게 대학을 마친 나는 입대해 1965년 제대했습니다.
그후 경북 울진의 산간오지에서 승려생활을 하던 중 교사들이 기피하는 울진중학교 삼진분교에서 교사자격이 있는 나를 주민이 간청해 타의로 교사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해 여름 울진의 한 교회에서 수련회 장소로 교실을 빌려 달라는 요청으로 그들에게 편의를 제공했는데 몹시 고마워하며 점심식사에 초대 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나를 살펴 보시더니... "선생님, 제가 느끼기엔 선생님께선 예수 믿고 목사가 되실 것 같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나는 "목사님 헛 수고 마십시요, 나는 뱃속에서 부터 부처를 섬긴 중입니다." 라고 했더니 목사님은 "개의치 않고 기도하겠습니다." 부화가 치밀어 "목사님 나도 목사님이 머리깍고 중이 되길 불공드리겠습니다, 어디 누가 이기나 함 해 봅시다." 라고 쏘아 붙였습니다. 이제 생각하면 그때 부터가 하나님의 나를 향하신 역사의 시작이었나 봅니다. 그 당시 울진군 원남면 매화교회 권찬수 목사님이셨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나는 불교계에서 인정받는 승려가 되었고 대한불교 정토종 교육국장과 포교국장을 역임했습니다. 전세계 불교국가를 두루 다니며 신라와 고려의 흥왕기에 융성했던 불교가 다시 이 나라에 흥왕해야 이 나라가 번창 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날 불교가 기독교에 밀려서 쇠퇴하고 있는 것은 불교 승려들의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이유란 생각에 불교대학설립을 강력 추진했습니다. 나는 불교계의 유명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10억원의 토지도 기증받고 일본 불교에서 10억원 기부 약속도 받아냈습니다.
불교대학 학생이 머리도 기르고 평상복을 입도록하며 의식때만 법복을 입도록해 젊은이의 관심이 유발되고 현실적이고 적극적인 포교를 통한 교세확장을 장담했습니다. 1년에 1천명의 승려를 배출하면 극성스러운 기독교를 물리칠 것이라는 자신감으로 현판식을 했습니다. 이런 중요한 시점에 교단 내부의 정치적 역학관계의 악화로 내가 교도소에 수감되어 대학설립은 수포가 되고 거금시주를 약속한 키로 했던 대기업 회장 역시 부도로 수감되고 말았으니... 돌이켜 보건데 이 역시 불교의 포교를 막으신 하나님의 역사가 아닐까요?
교도소에서의 생활은 염불과 참선 불경공부로 일관되었습니다. 도서관에 있는 화엄경 법화경 승엄경 원각경 등을 빌려보았습니다. 도서대출은 군 복무중인 경비교도대원이 맡아보고 있는데 가끔씩 내가 대출신청한 책은 없고 기드온협회가 발간한 신약성경을 가지고 왔습니다. 나는 그 대원에게 화를 내었지만 "불경은 대출되 없어 심심하실까봐 성경 가지고 왔으니 한 번 읽어 보시죠! 스님 저도 대학생이니 전에 대학강의 하셨던 스님의 꾸중은 교수님의 꾸중이라 생각하면, 나쁘지 않습니다! 전세계에 수억 인구가 믿는 기독교에도 진리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내일 제대합니다. 스님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나는 괘씸하기도 하고 기독교인은 정말 지독하다는 생각과 함께 나 같은 골수 불교 스님에게도 전도를 하는 그들의 열의가 부럽기도 했습니다.
나는 그날부터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 들어가면서 점점 빠져들었고 말로 못할 큰 충격에 놀라고 말았습니다. 마치 고압전류에 감전된 듯 온 몸이 뻣뻣해졌습니다. 성경에는 평소 그렇게 알고자 희원했던 생로병사 문제가 너무나도 쉽게 그리고 분명하게 풀려저 씌어 있었습니다.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수없이 많은 감동과 나의 불교신앙과의 갈등에 몸부림 쳤습니다.
옛날 인도의 구시라성의 시디림에 한 젊은 과부가 애통함에 울부짖을 때 부처는 그 사유를 물었고 과부는 병중의 외아들을 살려달라 애원했습니다. 석가모니는 한번도 사람이 죽은 일이 없는 집의 쌀 한 줌을 얻어다 죽을 끓여 먹이면 살아날 것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이 쌀을 구하러 간 과부는 오후 늦게 빈 손으로 돌아와 부처에게 사람이 한번도 죽은 적이 없는 집을 찾지 못했다고 고했고... 부처는 "자매여 生者必滅(생자필멸)이라 사람이 나면 반드시 죽는 것이며 인연따라 일어나고 인연따라 없어지니 무엇을 슬퍼하랴!"라고 했습니다. 이와같이 해결이나 변화보다는 순리적 사실에 자족토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처방은 전혀 달랐습니다. (눅7:14~15) "나인성 과부의 애통함을 보시고 "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불교와 기독교의 근본적인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같은 과부아들의 죽음 앞에 부처는 죽음=숙명이라 수용하는 인간 한계를... 예수는 생명을 얻는 기쁨을 맛보게 했습니다. 여기서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에게 참 진리가 있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부처님는 인간 생사화복의 문제만 제시할 뿐 해답을 주지 못했고 예수님는 인간 생사화복의 문제뿐 아니라 그 해답도 열어 주셨습니다.
나는 이 진리를 깨달았지만 차마 개종의 길로 들어 설 수는 없었습니다. 나는 이 종단의 지도자 위치에 있었고 수십만 신도들과 승려들이 따르는 것을 생각할 때 그럴 수는 없었으며 차마 부모님 까지도 배반하는 결단을 행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1984년 8월 20일 형기를 마치고 달성군에 있는 장수사에 몸을 의탁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접한 후라 번뇌와 고뇌에 몸부림 쳤습니다. 한편, 나의 불교공부가 부족해 맘이 흔들리는 것이 아닌가해 여기저기 다니며 공부를 더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순천 송광사를 찾아 가던중에 교사시절 동료였던 무신론자 은두기 선생을 찾아가 답답한 마음을 터 놓고 얘기하였는데... "혜경스님, 송광사에 가도 그 번뇌는 사라지지 않지요! 기독교 복음은 한 번 들어오면 좀처럼 버리기 어렵다던데...돌아서려거든 한 나이라도 젊어서 돌아서시오!" 라는 좋은 충고를 주었습니다! 나는 마음이 가벼워졌고 용단을 내려 개종키로 결심하였습니다!
내 인생 3분의 2를 달려가다 개종하기 까지는 말 못할 아픔이 컸지만... 이것은 나 자신의 양심의 해방이자 자유를 찾은 획기적 결심이었습니다! 1984년 9월 29일 수요예배에 처음 참석했습니다! 찬송가를 부르면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제 진정한 평안과 영생이 있는 곳이라 느껴졌고 내 맘은 날아갈 듯 가벼웠습니다! 신학대학원에 진학해 하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 동안의 삶을 참회하는 뜻으로 불교의 비 진리성과 개종경위를 밝히는 [극락의 불나비] [나는 예수를 이렇게 믿게 되었다]등의 책을 썼습니다! 내가 이 간증을 쓰는 것은 바른 진리를 전하지 못하고 거짓된 도를 전해왔기에 그것을 밝히려는 것이며 이 글을 읽는 많은 사람들이 참 진리인 예수께 돌아오게 하고픈 마음에서 입니다.예수그리스도 이 분만이 우리의 답을 주실 "유일한 분" 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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