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경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행 16:11-12)
네압볼리스라는 이름은 아테네사람들에 의해 주전 5세기경 처음 명명되었다한다. 사도 바울이 트로이에서 마게도니아인의 환상을 보고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이 현재의 까발라 지역이고 성경에는 네압볼리라 적혀있다. 이곳에 있는 성 니콜라스 교회는 사도 바울이 도착한 장소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바울 도착 기념교회이다. 주후 49년 6월 29일 사도 바울이 이곳에 도착했는데, 매년 6월 29일에 바울 도착 기념 행사가 있다. 바울이 도착한 이후로 네압볼리는 빌립보와 같이 정치적, 교회적으로 같이 발달하다가 8세기 이후에는 크리스토폴리스(그리스도의 도시)로 개명되었다. 나중에 터키에 의해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에는 현재의 까발라로 이름이 바뀌었다. 까발라는 '말'이라는 뜻으로 당시 말이 많이 있었고, 그 시대에는 편지나 소식을 전하는데 말이 이용되었다. 다시 말해서 까발라는 오늘날의 중앙 우체국이었던 것이다. 터키의 그리스 지배 이후 까발라는 기독교적으로는 거의 폐허가 되었는데 1671년 주교 원로 법령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눈길을 끈다. '까발라의 메트로폴리스가 오래 전부터 거의 파괴되었고 스스로 주교가 감독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 얼마 안되는 기독교인들이 축도를 받기 위해서는 까발라는 빌립보의 메트로폴리스에 연합해야만 될 것이니...' 그러나 주후 19세기 이후에는 인구가 많아 지면서 자연히 상업적으로 발달하게 된다. 1912년 불가리아가 터키에게 까발라를 빼앗아 잠시 불가리아가 이곳을 점령하게 되나 이후 그리스와 불가리아의 전쟁에서 그리스가 승리하여 영토회복을 하고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성경에서는 네압볼리에 대해서 한차례 이름만 기록하고 있을뿐 다른 언급이 없다. 당시에 네압볼리는 빌립보에 속한 그리 크지 않은 항구였을 것이다. 그리스의 고대도시국가들은 바다와 연하여 발달했다. 그것은 해상무역의 중요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한데, 도시국가들은 해상무역을 통하여 국가적인 부를 쌓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빌립보(필립피)
주후 49년 바울의 2차 전도여행 때, 사도 바울이 실라와 함께 빌립보에 도착했다. 빌립보는 네압볼리에서 비아 에그나띠아 길을 따라 북쪽으로 약 16Km 떨어진 레카니스 산을 중심으로 위치한 도시이다. 그 도시 이름이 본래 '샘' 이라는 뜻의 끄리니데스였는데 필립 2세가 도시를 확장하여 자신의 이름을 따 그 이름을 개칭하였다. 그러나 빠우사니아스의 반역으로 후처의 딸 결혼식 피로연 중 에게에서 주후 336년에 살해당하고, 그 아들 알렉산더가 왕위를 계승한다. 그는 이 도시를 다시 건설하였고 많은 이민단을 이곳으로 보냈다. 그 후 대왕의 요절로 국력이 쇠하더니 주전 167년 마게도냐가 로마에 패한 후, 빌립보는 다른 도시들과 함께 로마의 영토가 되었으며 그 지방의 수도는 암비볼리가 되었다. 그 후 주전 146년에 재 편재되어 수도가 데살로니끼로 바뀌었다. 그런데 주전 42년 로마의 아구스도에게 멸망하게 되었고, 로마의 퇴역군인들로 구성된 이민단에 의해 이 도시는 다시 확장된다. 후에 오랜동안 터키에 속했다가 제 1차 세계대전 후에 그리스에 편입되었다. 토인비는 역사를 바꿔놓은 두 개의 큰 사건이 있었다고 말하는데, 하나는 예수님의 탄생이며 또 하나는 바울의 회심이라고 하였다. 회심한 바울이 유럽에 들어옮으로 서구문명이 기독교문명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원래 바울은 아시아쪽을 선교지로 삼고 있었으나 드로아(트로이)에서 환상을 보고 선교지를 이곳으로 바꾸게 되었다. 사도행전은 또한 이 성이 '로마의 식민지'였음을 밝혀주고 있는데, 이러한 도시들은 로마의 이민도시로써 로마인들이 이주하여 로마법을 사용하였고 본국에서와 똑같은 권한을 행사했으며 주로 군사적 목적으로 로마의 위성도시 역할을 감당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빌립보 입성은 로마 입성을 소원했던 바울의 전주곡인 셈이다.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롬19:21)"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두아디라의 자주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행16:13~14)" 유럽에서 예수를 믿게 된 최초의 결신자, 그녀는 바로 아시아에서 건너온 루디아라 하는 여인이다. 바울 일행은 문밖 강가, 즉 오늘도 흐르고 있는 지각티스(Zigaktis) 강가에서 자주 옷감장사 루디아를 만난 것이다. 그녀는 두아디라(오늘의 터키 지역으로써 터키의 명으로는 아키사르(Akhisar)로 카페트의 산지로 유명하다.) 성에서 자주색 옷감을 가져와 팔았다. 루디아 여인이 히브리 사람들이나 기도하기 위해서 모였던 문밖 강가에 있었던 것도 필시 루디아 여인은 두아디라성에 장사를 하러 자주 왕래하는 연고로 당시 그 지역에 있었던 히브리 사람들과 또 그들이 믿는 유대교를 이미 알고 있던 여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두아디라(Thyatira)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초대교회 가운데 하나이다. 두아디라는 중국의 비단이 유럽으로 건너가는 무역로인 비단길(Silk Road)이 거쳐가는 길목으로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되어 그리스의 도시가 되었다가 주전 190년경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는데, 소아시아의 염색공업의 중심지이다. 자주장사는 바로 중국산 비단을 자주색으로 염색하여 유럽에 판매했던 것이다. 자주색은 열대 뿔고동이나 조개 혹은 특수한 식물의 뿌리에서 채집되는 당시 가장 값 비싼 염료로써 주로 로마 귀족들이나 무사들만이 입을 수 있는 최고의 옷감이다. 바울 사도는 루디아 여인을 만나 그녀의 집에서 머물면서 선교의 일을 감당했던 것이다. "저와 그 집이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행16:15)" 바울이 루디아 여인을 만난 것과 세례준 것을 기념해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1972년에 그녀를 성인으로 추인했으며 같은 해 루디아 기념교회를 세우기로 계획하고 1974년에 마을 사람들이 돈을 모아 완공한 것이다. 정교회에서는 매년 5월 20일 루디아의 축일로 지켜오고 있다.
바울은 또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 하나를 만난다. 그리고 기도하여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행한다. 그 여인은 더러운 질병으로부터 해방받는 은총을 입게 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으로 인하여 바울과 실라는 로마인들로부터 고소당한다.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한 풍속을 전한다.(행16:20~21)" 그리고 영장도 없이 체포 구금된다.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행16:25~26)" 바울과 실라의 감옥터는 바실리카 A의 입구 현관(Propylaea)의 계단 오른쪽 옆에 위치하고 있는데 5세기부터 순례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 빌립보의 최고의 명소이다. 하나님의 사람을 하나님께서 지키시사 머리털 하나도 그을지 않도록 하셨으며 이런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한 바울과 실라는 낯선 마케도니아 선교에 더욱 큰 힘을 얻었을 것이다. 그 이후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선교 사역에 적극 참여했다. 그들은 에바브로디도(Epaphroditus)를 사자로 하여 바울의 쓸 것을 계속해서 도왔다.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빌2:25)"
역사가 람세이(Ramsay)는 누가가 원래 빌립보 출신이었고 이 도시에는 유명한 의학교가 있었다고 했다. 이 의학교는 헬레니즘 세계의 전역에 조합원을 보내는 의사 조합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누가도 이곳에서 의사가 되었다고 한다. 현재 이곳 유적지에는 두 개의 교회 유적지가 있는데, 길 위쪽에 있는 것이 바실리카 A(Basilica A: A교회)로 주전 500년경 디오니소스(Dionysos 포도주의 신)에게 바쳐진 신전이었으나 훗날 기독교인들이 3층 규모의 교회로 지었다. 특별히 데살리아(Thessalia)에서 가져온 회색 대리석으로 화려한 건물이었다. 주후 600년 대지진으로 완전히 붕괴된 후 예전보다 작은 크기로 교회를 재건했다. 그리고 길 아래쪽에 거대한 기둥이 남아있는 곳이 바실리카 B(Basilica B: B교회)로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고 한창 비잔틴 시대가 꽃을 피우던 시기인 주후 550년에 순수하게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 공회당으로 지었다. 둥근 아치의 아름다운 돔 형으로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보다 화려하고 빼어나게 건축되었으나 9세기 불가리아 인들의 침략으로 파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