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의 삶/역사,추억이야기

라스트 프린세스 - 덕혜옹주

예인짱 2007. 12. 7. 13:08

 

1989년 4월 21일 11시 40분에 낙선재 내 수강재에서 덕혜옹주께서는 춘추 77세를 일기로 한많은 일생을 끝마치셨다. 옹주께서는 고종황제의 고명한 따님으로 후궁 복녕당(福寧堂) 양귀인(梁貴人)의 소생으로서 1912년 5월 25일에 태어나셨다. 이때는 이미 고종황제께서 황위에서 물러나 덕수궁에 은거하고 계실 때이다.

옹주가 여섯 살 되던 해의 봄에 고종께서는 함녕전 별당인 즉조당(卽祚堂)에다 유치원을 만들어 이경구(李京口)라는 교사로 하여금 가르치게 하셨다. 이때 왕조가 존재하고 있었기는 하나 이미 조선총독부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을 때이다. 왕자 왕녀도 총독부의 인정이 없으면 황적(皇籍)에 입적이 안되었다. 그리하여 덕혜옹주는 여섯 살 때까지 황적에 오르지를 못했던 것이다.

그해 여름 어느날이었다. 데라우찌 총독이 고종황제께 의례적인 배알차 덕수궁에 들렀을 때 고종께서는 이때라는 생각으로 데라우찌 총독에게 「나는 망년에 아이들을 모아놓고 유치원에게 천진난만하게 놀고 있는 것을 보고 같이 즐기는 것이 나의 유일한 일과이다」하시며 옹주를 불러 데라우찌 앞에 세워놓고 인사를 시켰다. 어린 귀여운 아기의 재롱과 웃음 띤 얼굴의 인사를 받고는 그 무뚝뚝한 무표정의 군인 데라우찌도 어린 아이 앞에서는 웃음을 띠우면서「이 아이가 누구입니까」하고 여쭈었다. 고종황제께서는「이 아이가 바로 내가 망년에 은거하면서 유일한 낙을 삼고 사는 나의 딸인 덕혜옹주요」라고 하셨다. 그러자 데라우찌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엉겁결에「참 귀여운 옹주이군요」하며 인사를 올렸다. 그리하여 데라우찌는 총독부에 돌아가서「나 데라우찌가 오늘은 고종에게 당했구나」하고 그후 바로 일본 궁내청에 이 사실을 보고하고 민병석 이왕직 장관에게 명하여 덕혜옹주를 정식으로 황적에 입적하게 하였다. 이때가 1917년, 옹주의 나이 여섯 살 때다.

그후 옹주는 일출소학교를 다니게 되었고, 황제께서는 덕혜옹주가 커 갈수록 걱정이 앞섰다. 이 무도한 일본 놈들이 언제 또 옹주를 인질로 끌어갈 것을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았다. 하루는 밤중에 주무시다말고 별안간 일어나서 옆방에서 자는 김황진 시종을 불러 「김시종 너는 자식이 몇이나 있느냐」하며 물으셨다. 밑도 끝도 없이 자다말고 일어난 김시종은 경황을 몰라 「저는 자식이 없습니다. 딸만 둘이 있습니다. 저 조카들은 여럿 있습니다만 너무나 미천한 것들이라 아룁기 황송합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황제께서는「그 애들이 몇 살 몇 살이냐」고 물으셨다. 네 몇 살 몇 살입니다 라고 아뢰었더니 「됐다. 그럼 그중 나이가 비슷한 그 아이를 몇 일 후에 덕수궁 뒤 담 너머로 데리고 오너라, 내가 그 아이를 한번 봐야겠다」고 하셨다.

그 아이가 바로 김장한(金章漢)이란 소년인데 고종황제께서는 왜놈에게 옹주를 뺏기기 전에 약혼을 정해야겠다고 말하여 밀약을 했던 것이다. 이 눈치를 알아차린 이왕직에서는 김황진 시종을 내려놓고,

그후 한창수 이왕직장관이 앞장서서 옹주를 1925년 4월 30일 일본유학을 명분으로 볼모로 데려갔다. 그때 옹주의 나이가 겨우 13살이었으며 기구한 운명은 시작되었다.

일본에 끌려간 옹주는 학습원을 다녔고 18살 되던 해인 1930년 봄부터 몽유증 비슷한 병이 발병하여 오라버니 영왕 댁에 거처를 옮겨 치료를 받았으나 차도가 없었다. 증세는 조방성 치매증으로 진단되었다. 이듬해 봄이 되어 병 증세는 좋아졌다. 그러자 이왕직 장관 한창수가 일본에 건너와 본격적으로 옹주의 결혼을 서둘렀다. 속담에 "때리는 남편보다 말리는 시어머니가 더 밉다"고 했는데 정작 일본 놈은 별 말이 없었는데 내 민족이 앞장서서 일본에 아첨하여 결국은 대마도 반주 아들인 소다케시 백작과 강제 결혼을 시켰다.

이때 옹주의 나이 19살이던 1931년 5월 8일이었다. 영왕께서는 한탄하며 「너까지 끌려와 이 지경이 되는구나」하며 눈물을 흘리셨다고 한다. 병이 회복되 덜된 상태에서 더욱이 강제결혼의 생활이 좋을리가 없었고 딸을 하나 났으나 이 또한 불행하게도 가출하여 영영 돌아오지 않고 말았다.

일본황실 법전에는 황족과 귀족은 이혼을 못하게 되어있어 해방이 된 후에야 이혼을 하셨고 이미 지병인 정신질환 때문에 전연 사람마저 몰라 보았으며 명이 붙어 있으니 살아있는 몸이지 죽은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 영왕께서는 당신의 생계도 잘 꾸려 나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으나 한달에 당시 월 1만엔씩의 병원비를 대어주고 있었다.

해방이 되자 이나라 국민들의 광복의 기쁨을 누렸으나 자유당 정부는 이분들을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게 막았고, 국적마저 회복해 주지 않았다. 원래 일본 황족들은 호적이 없었고, 해방이후 민주국가로 일반 국민화되어 몇 안되는 의왕(義王) 자손들은 여기저기 호적을 만들다보니 그 내용이 엉망이었으며 영왕가는 그나마도 호적이 없었다. 그래서 덕혜옹주는 지난 1982년에야 겨우 외무부. 법무부, 법원, 종로구청 등 관계기관과 협의하여 호적을 만들었으나 그동안 많은 곤욕을 치렀다.

세상이 바뀌어 5.16이후 김을한(金乙漢)씨가 군사혁명 정부 당시 최고회의 박정희의장 정치담당 고문인 민병기 교수를 만나 빨리 일본에 억류중인 영왕과 덕혜옹주 일가족을 환국시켜 줄 것을 앙청하도록 교섭하였다. 이리하여 민병기 교수가 박정희의장에게 덕혜옹주의 환국요청을 했던 바 덕혜옹주가 누구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우리 국민들 사이에서 소외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근세의 쓰라린 침해의 산 역사를 국민들이 망각하고 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는 일이다.

민교수로부터 그 이야기를 심각하게 듣고 있는 최고회의 의장은 무릎을 탁치며 「그거 안되지, 빨리 가서 영왕 가족과 덕혜옹주를 환국토록하시오. 자유당 민주당이 다 못해도 나는 해야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민교수는 그날 밤 12시가 넘어 김을한씨댁을 찾아와 이 사실을 전했다. 그 후 박의장 특사 자격으로 엄주명씨와 김을한씨 두분이 일본으로 건너가 환국절차를 밟았다.

1962년 1월 6일 덕혜옹주가 먼저 환국하여, 곧바로 서울대병원에 입원하였다. 이날 근 40년 동안 헤어졌던 옹주의 유모 변복동씨가 찾아와 옹주 병을 간병하였고, 퇴원후 낙선재 내 수장재에 거처를 옮긴후에도 그가 돌아가실때까지 옹주 곁에서 시중을 들었다.

환국후 1975년 경부터 나는 1년에 몇번씩 덕혜옹주를 차에 뫼시고 시내 나들이를 시켜드렸는데 어느날 덕수궁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무심코 옹주의 얼굴을 쳐다 보았더니 양쪽 눈이 충혈되어 있었고 양쪽 볼에는 두줄기 눈물이 흘러내려 있었다. 같이 탄 시종 아주머니에게 눈물을 닦아드리도록 했다. 아무리 기억상실증 환자인 옹주이지만 이때는 옛날 어린시절 이곳 덕수궁 안에서 있었던 갖가지 일들이 떠오르고, 맑은 정신이 들어 과거를 회상하는 눈물이 아니었겠는가 싶었다. 


지난 1962년 1월에 귀국하여 27년, 기나긴 세월을 오직 말 한마디 못해본 채 병석에서만 누워계시던 가련하신 옹주는 가셨다. 따지고 보면 여자는 출가외인인데 이분이 무슨 죄가있어 친정살이 신세가 되었으랴. 이 모두가 우리나라 근세사의 슨픈 진영이요, 민족의 비운이었다. 우리 종약원이 주관하여 덕혜옹주의 장례를 5일장으로 치루어 지난 4월 25일, 금곡 홍유능 경내에 안장해 드렸다.

목숨이 붙어 있었으니 산 몸이지, 죽은 목숨만 같지 못한 안타까운 일생, 어쩌면 망국의 한을 한몸에 품고 아예 함묵당언(含默當言)하라는 하늘의 뜻으로 순종하던 인간 덕혜옹주의 비운이 곧 한말(韓末) 이 나라, 이 민족의 비운을 대표 했을는지도 모른다.

 참고:http://blog.naver.com/micro21c?Redirect=Log&logNo=200030666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