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의 삶/역사,추억이야기

폐비 윤씨

예인짱 2007. 10. 31. 09:49

판봉상시사 윤기견의 딸이며 연산군의 어머니이다.

1473년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면서 숙의에 봉해졌고, 성종의 총애를 받다가 1474년 공혜왕후 한씨가 죽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왕비로 책봉되던 해에 세자 융(연산군)을 낳았는데, 투기가 심해 성종을 난처하게 하는 일이 잦았다.

1477년에는 극약인 비상을 숨겨두었다가 이 일이 발각되어 왕과 왕 주위의 후궁들을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고 빈으로 강등될 뻔 했으나 성종의 선처로 무마되었던 적이 있다.

이어 1479년에는 왕이 규방 출입이 잦고 자신을 멀 리 한다 하여 왕의 얼굴에 손톱 자국을 내게 된다.

 

이 일로 성종과 모후 인수대비의 격분을 유발하여 폐비되고 만다

세자의 친모라는 이유로 대신들이 폐비를 반대하였으나 인수대비와 성종의 입장은 단호했다.

그래서 윤씨는 친정으 로 쫓겨난 뒤 바깥 세상과 접촉이 금지되었다.

 

하지만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그녀는 자신의 행위를 뉘우치고 근 신하며 지냈다.

그런데 1482년 조정에서는 그녀의 거처 문제가 새로운 정치 현안으로 떠올랐다.

즉, 왕이 될 세자의 친모를 일반 백성처럼 살게 해서는 안된다는 상소가 이어졌고, 한 편에서는 이를 반대하는 무리들이 윤씨를 비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비를 옹호하는 자들은 그녀에게 조정에서 따로 거처할 곳을 마련하여 주고 생활비 일체를 관부에서 지급해야 한 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를 반대하는 측의 태도도 완강했다. 특히 성종의 모후 소혜왕후(인수대비)와 계비 정현왕 후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성종도 쉽게 폐비에 대한 거처를 마련해 줄 수 없었다.

 

하지만 성종은 세자가 성 장함에 따라 이미 폐비 윤씨에 대한 동정심을 갖고 있던 터였다.

그래서 내시와 궁녀들을 시켜 그녀의 동정을 살펴 오라 하였다.

그런데 이들 나인들과 내시들은 인수대비의 명에 따라 왕에게 폐비 윤씨가 전혀 반성의 빛을 보이지않는다고 허위 보고를 하였다.

 

성종은 이 말을 듣고 대신들에게 폐비 윤씨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게 하여 사약을 내리기로 결정하고 그녀를 사사하였다.

사사한 이 후 폐비 윤씨의 묘에는 묘비도 세우지 않았다. 하지만 성종은 세자의 앞 날을 고려해 '윤씨지묘'라는 묘 비명을 내렸다. 그리고 장단도호부사로 하여금 절기마다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성종은 자신이 죽은 뒤 100년까지는 폐비 문제에 관해 논하지 말라는 유명을 남겼다.

그러나 연산군은 이를 어기고 결국 갑자사화를 일으키고 말았다. 연산군은 즉위한 지 몇 달 되지 않아 윤씨의 폐비사건을 알게 되었고, 신원을 모 색했다.

 

그래서 1497년 그녀의 묘를 개장하고, 1504년에는 성종의 유명을 어기고 제헌왕후에 추승했으며 묘도 회릉 으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윤씨의 관작도 추탈된 뒤 다시는 신원되지 못했다

 

폐비 윤씨는 세자를 낳은 왕비이면서도 투기심과 부덕함으로 인해 폐비당했다가 결국 참극을 당하고 말았고, 이 폐 비 윤씨 사건은 연산군의 폭정으로 이어져 급기야 조선 조정에 엄청난 살생극을 불러일으킨 원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