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삶/CEO리더십

링컨의 리더십

예인짱 2007. 5. 4. 18:43
현장에서 사람들을 만나라
 링컨 대통령은 재임 기간 네 해를 병사들 만나는 데 거의 보냈다. 그는 일선 병사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대업을 수행하는 사람이 바로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육군성 전보실에 살다시피 했기 때문에 중요한 정보를 손쉽게 접해, 빠르고도 때에 맞게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그는 장군과 각료를 그들의 집과 사무실과 싸움터에서 만나 그들에게 여러 지침을 내렸다. 해군 조선수와 워싱턴 안팎의 요새를 손수 둘러보고, 새로운 무기의 기능도 꼼꼼하게 살폈다 .무장한 군대의 능력을 정확하게 알아보고자 함이었다. 이렇게 군사 관련 시설을 손수 방문함으로써 그는 다른 사람들의 말에 기대지 않고도 정확한 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한, 몸으로 익히 지식을 갖게 되었다.
 아울러, 링컨은 병원을 방문해 일선 병사를 위로하는 따위로 부상병에게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심지어 대통령으로서는 흔치 않게, 집중포화가 쏟아지는 싸움터를 찾아가 전투 상황을 살피고 손수 지휘하기도 했다.
 
설득으로 이끌어라.
 링컨은 변호사 생활 초기에 설득 기술을 배웠고, 그것을 정교하게 다듬었다. 주의원으로서, 변호사로서, 국회의원으로서 지낸 링컨의 삶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의 정치적 성공 요인이 설득력에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도 링컨은 자신의 원칙을 결코 저버리지 않았다. 대통령으로서 링컨은 열린 자세, 권한 위임, 그리고 코칭을 통해 아랫사람들이 나라에 헌신토록 했다. 그는 능력이 허락하는 한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각료들에게, 나라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가 있을 때에는 모든 부처가 참석한 가운데 논의해야 하며, 해당 부처의 책임자와 협의하지 않은 채 그 부처에 영향을 미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대통령으로서 링컨의 권한과 영향력은 누구보다 강력했다. 그러나 링컨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일을 처리하려면 명령을 내리기보다는 무엇인가를 암시하거나 제안하는 편이 낫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명령하지 않고 요청하는 것에 담긴 참된 값어치를 알았다. 그가 장관과 장군에서 쓴 편지와 전보는 제안, 견해, 권고로 가득하다. 또 그는 잘 알려진 이야기나 일화로 에돌아 상대방을 설득하는 방법을 곧잘 썼다.
 
고난 앞에서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다.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는 연방이 갈라질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북부와 남부의 대립은 극한으로 치닫고 있었고, 어떤 지역에서는 링컨을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나오기도 했다. 그는 아직 변호사 출신의 신출내기일 뿐이라는 평을 듣고 있었다. 그때 링컨은 사람들에게 말했다.
"무엇인가를 처음으로 하는 사람은 보통 그것을 최고로 수행하지는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툭하면 반대에 부딪히고, 얻어터지고, 욕을 먹지요, 욕을 했던 사람은 스스로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야겠다고 생각한 뒤에야 비로소 그를 인정합니다."
 옳고 그름을 가리는 자신의 능력을 굳게 믿었던 링컨은 수많은 부당한 비난을 이겨냈다. 많은 사람이 도덕적으로 부당하다고 공격할 때에도 그는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자신의 믿음을 거칠게 비난하는 것에도 전혀 대응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서 그는 메클렐런 장군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잘못된 것에 대해 비난을 받을까봐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올바른 일을 하려면 그보다 몇 배 더 큰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나아가 언론인인 호레이스 그릴리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비난을 이겨내는 데 진리만큼 뛰어난 원군은 없습니다."
 
결단은 단호하게 내린다.
 링컨은 평소에 다른 사람들의 자발성을 최대한 이끌어내고자 했지만, 결단할 일이 있으면 누가 뭘라 해도 과감하게 결정했다.
 대통령으로 집권하는 동안 링컨은 국회의 공식 승인을 받지 않고 예산을 집행하는 선례를 만들었다. 그뿐 아니라 배 스무 척을 만들라고 해군에 명령을 내리는가 하면, 스텐턴 장군과 수어드 장관에게 출두영장 제도를 중단하는 데 예산을 사용토록 했다. 남북전쟁 때 그는 장군들에게 수많은 명령을 내렸고, 자신의 재가를 받지 않은 장군의 명령과 선언을 무효로 만들기도 했다. 체이스 재무부 장관이 몇 차례나 사임 의사를 밝히면서 이를 자신의 뜻을 이루는 책략으로 활용하자, 링컨은 체이스의 사임을 재빨리 수리하기도 했다.
 이처럼 단호함이 없었다면, 연방이 무너질 듯 위태로운 상황에서 혁신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비전을 완수할 인재를 찾아라.
 1861년 링컨은 북군이 남부 연합과 전쟁을 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깨닫았다. 당시 북군 병사들은 고작 1만 6천명밖에 되지 않았다.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장비도 형편없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사령관이 변변치 않다는 점이엇다. 당시 총사령관윈필드 스콧 장군은 일흔다섯 살이나 되었다. 그리하여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 장군을 찾는 3년 동안의 긴 여정이 시작된다.
 링컨이 알아낸 장군들의 문제는, 그들이 과감하게 전투에 임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스콧 장군은 좀처럼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 후임으로 임명된 어빈 맥도웰 장군 또한 빠른 작전을 펴지 못했다. 그 다음으로 메클렐런 장군이 기용되었다. 나무랄 데 없는 자격과 명성을 가진 인물이었지만, 그 또한 신중을 기할 뿐 행동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 바람에 링컨이 손수 군대에 공격 명령을 내린 적도 있었다.
 다음으로 헨리 할렉 장군, 존 매클러넌드 장군, 윌리엄 로즈크렌스 장군, 엠브로즈 변사이드 장군, 내서니엘 뱅크스 장군을 차례로 기용했지만, 아무도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게다가 총사령관 감이 없어서 싸움터를 나누어서 맡겨야 했다. 그래도 링컨은 포기하지 않고 적임자를 끊임없이 찾았다.
 그러다 마침내 인물이 나타났다. 바로 율리시즈 그랜트 장군이었더. 그랜트 장군은 전투 도중에 술을 마셨다는 까닭으로 많은 사람이 해임을 건의했지만, 링컨은 이렇게 말했다. "그랜트 장군의 지휘권을 뺏을 수 없습니다. 그는 피하지 않고 싸우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총사령과 자리를 맡은 그랜트 장군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총 공격을 감행하여 남부군을 몰아붙였다. 그리고 마침내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부드럽게 대하는 법을 익혀라.
 링컨은 늘 막힘 없이 대화를 이끌어나갔다. 그는 어느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뛰어난 과학자와도, 교활한 정치인과도, 주지사와도, 두메산골에 사는 농부와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는 아주 뛰어난 유머감각이 있었다. 그는 재치 있는 이야기와 일화를 섞어 가면서 대화를 나누고, 상대방을 설득했다.
 그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아무나 백악관을 찾아올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든 일단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는 링컨에게 압도되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주제에 들어맞는 내용을 이야기로 술술 풀어내는 능력이 있었다. 링컨은 상징과 이미지, 이야기와 일화를 마음껏 구사해서 청중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들을 설득했다. 청중은 그의 '아무런 부담 없는'연설에 혼을 빼앗겼고, 대부분은 링컨을 우러르게 되었다.
 
참고 도서: 비전을 전파하라(도널드 필립스, 한스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