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의 삶/좋은 상식

개그맨들로 부터 배우는 대화의 기술

예인짱 2007. 4. 12. 11:36


긴장의 요체는 눈치다.

 

한 프로그램을 이끌어나가는 MC들에게 눈치라는 단어는 좀 더 버라이어티한 의미를 담고 있다.

방송 진행 도중 MC들이 눈치를 봐야 하는 대상은 좀 많다.

초대된 게스트 중 배려받지 못하는 사람은 없는지, 혼자 튀려는 사람을 제어해야 할지, 그들의 머릿속은 바쁘다. 방청객이나 카메라 스태프들처럼 즉각적인 리액션을 보이는 사람들이 혹시 지루해하지는 않는지도 신경이 쓰인다. 최종적으로는 부조정실의 연출자처럼 토크의 길이나 수위까지도 걱정해야 한다. 그 모든 상황에 대한 최종 판단을 내리는 사람이 MC다. 멀티플한 눈치가 필수인 것이다.

 

눈치는 저급한 단어 같지만 꽤 복잡한 프로세스다.

배려, 수집, 분석, 판단, 결단, 도전, 장악으로 이어지는 눈치의 전개를 주도할 자신이 없다면, 최소한 남의 눈치를 알아챌 눈치라도 갖춰야 한다.

 

예를 들어 <브레인서바이버> 같은 코너에서 내심 망가지기로 작정하고 나온 낙엽줄의 중년 연예인들을 얼르고 뺨치며 쥐락펴락했던

김용만의 진행은 상호간에 적절히 거래되는 눈치협약의 결과다.

일대일로 진행했다면 못했을 면박이나 놀림을, ‘낙엽줄’이라는 이름의 집단 캐릭터를 부여해 진행하면 하는 사람이나 당하는 사람이나 맘이 편해진다. 그런 분위기를 조성해도 되는 절묘한 시점을 파악하는 것이 눈치다. 부모 자식 연배의 다세대 게스트들을 한마음으로 이끌어야 하는 일대다 커뮤니케이션은 우리 일상에도 흔히 등장한다. 예를 들면 직장회식 자리에서의 사회자 역할 같은 것이다. 개그맨 출신 MC들도 자주 그런 자리의 사회를 맡는다. 물론 규모는 훨씬 크다. 대부분의 개그맨 출신 MC들이 꼽는 기업 사내 행사 진행의 묘수는 ‘사장님 공략하기’다. 평소 권위적일 수밖에 없던 최고 임원진을 (마치 낙엽줄 다루듯) 제일 먼저 고급스럽게 망가뜨림으로써 행사의 분위기는 가장 효과적으로 고조된다고 한다. 물론 적절한 시점과 수위 선정에 눈치는 필수다.  

 

사생활에서도 눈치 철학을 철저히 구현하는 개그맨이 바로 신동엽이다.

그의 눈치는 몸에 밴 습관이다.

회식자리에서 가장 끝자리에 앉은 사람이 이야기를 놓쳐도 반드시 그를 위해 요약을 반복해준다.

대화에서 소외된 사람이 있다면 그의 일상을 물어보며 대화의 중심으로 끌어낸다.

그와 술자리를 갖는 사람들이 결국 먼동이 트는 새벽까지 자리를 뜨지 못하는 데에는 그의 이런 철저한 배려뿐만 아니라 현란한 재담도 한몫한다.

신동엽은 단위 포장된 고급스넥처럼 언제 어느 자리에서든 통할 수 있는 재밌는 체험담을 수십 개쯤 가지고 있다.

그 이야기들은 그의 학창 시절부터 최근까지 많은 모임에서 수없이 반복되며 절차탁마된 것이라 구성도 뛰어나고, 마무리도 매끈하다.

들은 적이 있는 사람이라도 몇 번을 다시 들으며 웃을 수 있을 정도다.

대부분 제목도 붙어 있다.

‘고등학교 때 버스 안에서 자리 탐내는 아줌마 골탕 먹인 이야기’처럼 말이다.

적절히 야한 얘기도 있고, 의외로 순수한 장면도 꽤 등장한다.

그 수많은 일화가 모두 스스로의 체험담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인들은 확신하고 있다.

그래도 상관없다. 듣는 순간은 모두가 몰입하니까.


사실 남 얘기를 내 일처럼 재밌게 얘기하는 것도 능력이다.

이야기의 맥을 꿰뚫을 줄 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맥을 짚고 나면 적절히 주어나 서술어만 유념하면 된다. 더 힘든 것은 몇 번 해준 적이 있는 이야기를 이미 몇 번 들은 적이 있는 사람들에게 해줘야 할 때다. 전개와 결말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시 똑같은 이야기로 웃음을 유도하기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신동엽은 적어도 이런 면에서 천재적 DNA를 타고났다고 할 수 있는데, 그 배경도 역시 눈치다. 듣는 이의 표정, 시선 또는 집중도에 따라 이야기의 속도나 길이, 표현의 과장 등을 자유자재로 조절하려면 역시 눈치가 필수다. 혹시 ‘남이 해준 재밌는 얘기, 내가 해줄 땐 왜 재미없을까?’라는 유명한 딜레마에 빠져 있는 분이라면, 신동엽의 멀티 눈치 시스템을 눈여겨보시라.      

      

대화의 중심에 서는 방법으로 현란한 말발만이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유재석이 가지고 있는 ‘저자세 시스템’도 눈여겨볼 만하다.

앞서 얘기한 ‘사장님 공략하기’에서도 엿볼 수 있었지만 권위를 무너뜨리는 것은 웃음을 유발하는 가장 전통적이며 기초적인 요령이다. 그런데 유재석은 다름 아닌 스스로의 권위를 먼저 무너뜨려버린다. 누군가 자기를 공격하면 말문이 막힌 채 벌건 얼굴로 파안대소하거나, 안경을 벗어 ‘쌩얼’을 보인다. 그러나 이런 행위들이 부담스러운 자기비하로 비춰지지 않는 것은 그가 평소에 철저하게 쌓아온 친화적 이미지 때문이다. 가족이나 이웃 같은 친근한 이미지의 그가 곤란에 빠지는 장면은 동정심을 자아낸다. 그 상황에서 항변이나 반격 대신 편안한 비굴을 택하는 그의 처신은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의 진짜 모습인지 모른다. 주도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는 말재주도 중요하지만, 친화력이 더 우선한다는 반증이 유재석이다. 똑같은 말을 해도 얄미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눌해도 그가 있으면 자리가 즐거워지는 캐릭터가 있다. 후자의 경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대화 이전의 대화, 즉 평소의 이미지 관리에도 전략적으로 신경을 써야만 한다.   

 

김제동도 평소에 준비를 철저히 하는 MC로 유명하다.

그의 준비는 비유로 집약된다.

현란한 그의 비유가 방대한 스크랩과 자료조사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는 관찰력이 매우 뛰어나다.

주변 사람들과 사물, 관계, 정황에 대해 거의 하나도 놓치지 않고 기억해두었다가 평소에 저장해둔 문구나 단어와 적절히 매치시킨다. 그 조합의 절묘함은 초기의 그를 크게 성장시켜주었다. 결국 비유란 분석, 요약하는 능력이다. 거창한 어휘력이나 잡다한 지식보다는 평소의 관찰력이 매우 중요하다. 무릎을 치게 만드는 비유 하나는 긴 묘사보다 훨씬 효과적이다. 물론 이것도 무작정 외우기만 해서 되는 일은 아니다.  

 

최근의 박명수나 지상렬은 조금 색다른 방법을 택했다. ‘뻔뻔하게 우기기’로 요약되는 그들의 전략도 결국은 권위를 무너뜨리는 순간의 눈치로 집약된다.

유재석이 스스로를 무너뜨린다면, 그들은 스스로를 제외한 나머지 세상이 모두 무너져야 한다고 우긴다. 그 막무가내의 강도가 하도 대담해서 우리들의 실소를 자아낸다. 그런데 그 실소에도 절묘한 페이소스가 담겨 있다. 그들의 막소리는, 실은 온갖 사회적 열세와 짜증을 접하는 우리들 마음속의 외침이기 때문이다. 시청자들의 마음속 소심한 절규를 자신들의 캐릭터를 통해 대리로 호통쳐주는 그들의 화법을 일상에서 우리가 그대로 적용하긴 힘들다. 하지만, 어떨 땐 속에 있는 말을 차라리 직설적으로 뱉어내는 편이 더 유리한 커뮤니케이션이 된다는 교훈은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개그맨 출신 MC들의 화법은 모두 철저하게 준비된 전략적 사고의 결과물이다. 흔히 생각하듯 재능이 바탕이 되기는 하지만, 준비와 노력이 훨씬 더 크다. 그래서 만약 그들의 말재주를 본받고 싶다면, 재능을 부러워하기보다 그들의 준비와 긴장을 먼저 공감해야 한다. 거기에 하나 더 있다. ‘감정노동’의 특성이다. 직업상 마음속의 슬픈 감정을 드러내서도, 끝까지 인내심을 잃어서도 안 되는 감정노동 대화법은 그들이 말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이상 하나의 숙명이다. 개그맨처럼 능란하게 말하고 싶다면, 그들처럼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을 분리하는 기술을 연마해야 한다.

 최대한 적게 말하면서 최고의 효과를 내는 경제적인 대화를 위해서는 눈치와 배려, 준비와 분석 같은 전략으로 머릿속이 늘 긴장해 있어야 한다.

출처 : 출처: 아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