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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남이 장군 혜성과 함께 사라지다

예인짱 2017. 12. 12. 14:55

[조선] 남이 장군 혜성과 함께 사라지다


세조가 죽기 6일전 긴 꼬리의 혜성이 나타난다. 하늘의 뜻을 무너뜨리는 불길한 징조라 여겨지던 불이다. 그리고 한달 뒤, 남이 장군이 역모죄로 끌려왔다. 새로운 왕 예종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려했다는 것이다
혜성이 오래 머무르면 장군이 반역하고 큰 변란이 있다고 했습니다
거사를 하고자하는데 너의 생각이 어떠하냐고 묻기에...
대역죄인의 누명을 피할 수 없게되자 남이 장군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그것이 역모라면 옳소이다
내가 세조대왕의 유명을 받들어 간신배들을 모두 죽이지 못했으니 내가 대역 죄인이외다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고 여진족을 정발한 공으로 28살의 젊은 나이에 파격적으로 병조판서의 자리까지 올랐던 남이 장군. 끌려온지 3일만에 급하게 제거됐다.
조선의 청년 장군 남이. 혜성처럼 나타나 혜성과 함께 사라졌다.
최원정: 하늘의 예언자 혜성은 등장만으로 설레고 긴장감을 주는데 혜성과 함께 사라진 남이의 이야기 들어보겠습니다. 오늘의 주인공 남이장군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시나요?
이해영 ㅣ 영화감독: 남이섬이 남쪽에 있는 이국적인 섬이라고 생각했는데 남이장군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류근 ㅣ 시인: 제가 자랄때만 해도 남이장군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어간 소년 장수로 유명했습니다. 요즘은 잘 모르는것 같아요. 똘이장군은 알아도 남이장군은 모른다는 거에요.
이해영 ㅣ 영화감독: 제가 똘이장군세대거든요. 세대차이에요.
류근 ㅣ 시인: 특이하게도 남이장군은 무속신앙의 대상이 되는 중요한 인물이에요. 장군신을 모시는 무속인들이 많은데 대표적인 경우가 최영장군, 임경업장군인데 억울하게 죽어간 장수의 경우에 영험하다는 속설이 있죠.
신병주 교수 ㅣ 건국대학교 사학과: 그 장군이 뛰어난 능력을 가졌지만 모함에 의해 좌절된 것이 죽고나서 현재 우리에게 장군의 능력과 힘을 부여받을 수 있을거라는 희망때문에 최영, 임경업, 남이 장군까지 장군들을 많이 모십니다. 19살에 무과에 급제했고 1467년 이시애의 난이 일어났을때 진압해서 적개공신 1등공신에 책봉되고 건주여진족 정벌에서도 뛰어난 무공을 발휘해서 1468년에 병조판서에 임명되는데 임명된지 15일만에 자신의 후견인이던 세조가 돌아가시고 유자강이 일으킨 역모 고변으로 사형을 당합니다. 그래서 성공도 빨랐지만 추락도 빨랐던 인물입니다.
류근 ㅣ 시인: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네요. 잉게보르크 바하만이라는 오스트리아 시인이 쓴 거에요. 모든 추락하는 것은 날개를 가진다.
김용철 교수 ㅣ 부산대학교 정필제연구소: 조선 역사의 1등을 보면 덕에는 퇴계, 전술에는 이순신이고 무용에는 남이장군을 뽑습니다.
최원정: 17세에 무과에 합격했다는게 가늠은 안되지만 빠른거죠?
김용철 교수 ㅣ 부산대학교 정필제연구소: 소년 장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과 급제자의 평균연령이 30세 정도입니다. 말 그대로 너무도 빠르죠.
이해영 ㅣ 영화감독: 보통 30살에 취업하는데 혼자 17살에 취업한거네요
최원정: 이순신 장군도 늦게 급제한걸로 알고 있어요
류근 ㅣ 시인: 더구나 재수까지 했어요.
신병주 교수 ㅣ 건국대학교 사학과: 말타기에서 떨어졌어요. 무인전에 보면 발을 동여매고 다시 출전합니다. 얼마전에 소치올림픽에서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난 박승희 선수도 있었잖아요.
이해영 ㅣ 영화감독: 무과에서 뭘 시험보는거죠?
최원정: 조선시대 활을 준비했는데 당겨보세요.
이해영 ㅣ 영화감독: 쉬울거 같은데요? 활시위가 귀까지 가야하나요? 아, 쉽지 않네요.
최원정: 활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분이 만물각에 오셨습니다. 활시위 당기는 법을 좀 보여주세요.
박금수 박사 ㅣ 체육학,전통무예십팔기보존회: 실제로 화살을 쏠때는 깍지를 끼고 잡지만 화살 없이 시위를 당길때는 네 손가락으로 합니다. 화살이 없을때는 에너지가 나갈 곳이 없어서 활이 망가지기때문에 꼭 네손가락으로 당기는 연습을 합니다.
최원정:조선의 무과에 대해 알려주세요.
박금수 박사 ㅣ 체육학,전통무예십팔기보존회: 무과는 조선시대 태종 2년에 비로소 실시됩니다. 공정한 시험을 통해 물리적 기반을 형성하는 무인을 뽑는 시험입니다. 왕자의 난 등 혼란의 원인으로 꼽힌 사병제도를 혁파하고 관제개혁과 군제개혁을 이끌어내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세조대에도 쿠데타로 집권한 정권인만큼 민심무마와 체제안정을 위해서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많은 수의 무인들의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무과생들을 문과생에 비해 많이 뽑았는데 세조의 경우 문과는 20명인데 비해 무과는 1,813명을 뽑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박금수 박사 ㅣ 체육학,전통무예십팔기보존회: 무과 시험에서는 목전, 철전, 편전, 기사, 기창, 격구를 보았는데 목전의 경우 나무로 만든 가벼운 촉을 쓰는 화살로서 240보 이상을 날려야 점수를 받을 수 있었고 철전은 육량에 해당하는 무거운 쇠촉을 날리는데 80보 이상을 날릴 수 있어야 합니다. 총렬에 넣어서 쓰는 편전이 있는데 130보 거리에 있는 표적을 정확히 맞춰야 하고 기사는 다섯개의 표적으로 50보 간격으로 놓고 말을 타고 달려나가면서 차례로 맞추는 종목이고 기창은 말을 타고 창을 쓰는 무예인데 격구의 경우 승마술, 기마술을 몸에 익히기 위한 서양의 폴로같은 것으로 공을 치는 구기종목입니다.
이해영 ㅣ 영화감독: 최종병기 활에서 박해일씨가 쏜 활이 편전이죠?
박금수 박사 ㅣ 체육학,전통무예십팔기보존회: 조선의 비밀병기였습니다. 크기가 작고 낮게 날아옵니다. 보이지도 않는데 큰 타격력을 줄 수 있어서 치명적인 무기였습니다. 편전의 사용법이 북경을 접하는 여진족에게 넘어가는 것을 조선정부에서 염려해서 국경지역에서는 편전의 연습을 금할 정도였습니다.
류근 ㅣ 시인: 기사의 경우 명중율을 보는거죠? 천천히 달리면서 쏘면 명중률이 높아지지 않을까요?
박금수 박사 ㅣ 체육학,전통무예십팔기보존회: 저렇게 꼼수를 부리는 분이 조선시대에도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물시계로 시간을 재서 제한시간 안에 못 들어오면 감점이었습니다.
최원정: 대부분 활시험인데 칼이나 창 쓰는 시험은 없나요?
박금수 박사 ㅣ 체육학,전통무예십팔기보존회: 무과의 응시생 정도면 칼, 창은 능숙히 다룰 수 있었고 활쏘기를 중요시한 이유는 화살의 경우 맞았다, 안 맞았다로 객관적 평가를 줄 수 있고 무과에 통과한 무관은 전장에 나서면 일대일로 싸우기보다 진법에 의해 지휘하는게 우선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문화의 차이도 있는데 중국은 창, 일본은 무사하면 칼 이런식으로 조선의 무관들은 활을 선호했습니다.
이해영 ㅣ 영화감독: 사극을 보면 삼지창 들고 질퍽하게 싸우던데 그런건 시험 안봤나요?
박금수 박사 ㅣ 체육학,전통무예십팔기보존회: 무관이 거기까지 가면 전쟁의 막장이라고 할 수 있죠. 이순신 장군이 싸울 정도면 패망한거고 삼지창의 경우 세날이라고 해서 삼지창이라고 하는데 정식명칭은 당파라고 합니다. 적의 무기를 걸어 제껴서 뺏을 수도 있고 찌를 수도 있어서 방어와 공격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우수한 창법입니다. 로켓형 신기전을 쏘는 틀로도 사용됐습니다. 이 당파는 임진왜란 이후였기 때문에 조선전기에는 당파가 보이지 않습니다.
최원정: 사극에서 전기부분에 나오면 고증이 잘못되었다는 얘기네요.
류근 ㅣ 시인: 남이장군이 고문받는 장면에 당파가 나왔어요. 옥에 티! 사극보면 군졸 나오면 무조건 삼지창이잖아요.
박금수 박사 ㅣ 체육학,전통무예십팔기보존회: 시대별 무기가 다 다릅니다. 좀 더 고증에 신경 써주시면 현장감있는 작품이 나올 것 같습니다.
이해영 ㅣ 영화감독: 무과는 실기시험만 보고 필기시험은 안 보나요?
신병주 교수 ㅣ 건국대학교 사학과: 초시가 있고 복시 그리고 임금 앞에서 치루는 전시가 있습니다. 초시는 무예실기인데 복시에는 강서라 해서 기본적 학습내용을 외워오게 합니다. 사서오경 중에 한 과목, 무경칠서 중 한 과목, 통감 등 역사책, 여대병요, 장감박의 무경 소학, 경국대전을 다 시험관이 뽑아서 외우게해서 시험봅니다. 무인들이 힘만 잘쓰고 전투만 잘 하는게 아니라 상당한 교양을 요구했습니다.
김용철 교수 ㅣ 부산대학교 정필제연구소: 무인을 뽑는게 아니고 장교를 뽑는 겁니다. 병법을 굉장히 중요시했어요. 전쟁이 무슨 요인때문에 일어났고 어떻게 전개되서 끝나는지 아는게 중요합니다.
이해영 ㅣ 영화감독: 정말 쉽지 않은 시험이네요. 17살에 남이장군이 급제했다는게 더 대단한데요. 채점은 어떤 식으로 하나요?
김용철 교수 ㅣ 부산대학교 정필제연구소: 통, 약, 조, 불 이렇게 4개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A, B, C, F 죠.
최원정: 강경패라고 해서 조선시대 채점도구를 가져와봤습니다.
김용철 교수 ㅣ 부산대학교 정필제연구소: 남이 장군의 시 북정가를 아시는지요.
류근 ㅣ 시인: 시인은 시를 외우는 사람이 아니라는걸 꼭 알아주시고요. 그런데 이 시는 너무 유명하니까 압니다. 무인의 기개가 잘 드러나는 엄청난 수작이에요.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다하고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없앴네
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평안케 하지 못하면
훗날 누가 대장부라 이르리
신병주 교수 ㅣ 건국대학교 사학과: 그런데 저 미평국이라는 부분에 유자강이 고변을 할때 글자를 바꿔버립니다. 평자를 득이라고 해서 사나이 스무 살에 나라를 얻지 못하면 누가 대장부라 이르리오라는 시를 읊으면서 반역의 증거로 삼습니다.
최원정: 글자 하나로 너무 많은 오해의 여지를 남겼네요.
이해영 ㅣ 영화감독: 한 끝 차이이긴 하는데 완벽하게 의미가 달라지고 화자의 태도까지 다르게 만들어버리는 거네요. 이 모함은 정말 억울했을 것 같아요.
류근 ㅣ 시인: 저렇게 필화를 겪는 이유가 있죠. 저 정도 호방함과 기개니까 병조판서까지 되는거 아닙니가. 최근 역사에도 보면 6.25 전후에 우리나라 합참의장들이 거의 다 30대 초중반이었어요. 국군이 어려울 때라 사람이 없었기도 했지만 조선시대 승진은 파격적 승진이죠.
신병주 교수 ㅣ 건국대학교 사학과: 당연히 전공을 세웠죠.
세조 13년, 함경도주 이시애가 북방압박정책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다. 남이장군은 27세의 젊은 나이로 출정, 단 3개월만에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다.
곧이어 남만주를 장악해 국경을 위협하던 건주여진정벌에 나섰다. 뛰어난 지혜로 조선군을 이끌며 승승장구 마침내 건주여진의 우두머리 이만주 부대를 참살한 남이장군. 이 두 전투로 남이장군은 조선의 영웅이 된다.
신병주 교수 ㅣ 건국대학교 사학과: 이시애의 난이 남이 장군을 스타로 만들어줍니다. 또한 함경도는 수양대군 시절 계유정난 직후 이정옥이란 사람이 반란을 일으켰던 곳이고 거슬러 올라가면 태조 이성계까지 함경도 지역은 무장세력이 강했습니다. 진압을 하지 안된다는 판단에서 엄청나게 많은 군사, 최정예 부대를 편성해서 반란 진압에 나서는데 뛰어난 활약을 해서 세조의 신임을 받게 됩니다.
류근 ㅣ 시인: 아무리 그래도 남이는 20대였을텐데 장수로 뽑아 보낸다는 것도 특이한것 아닌가요?
김용철 교수 ㅣ 부산대학교 정필제연구소: 남이 장군이 자원해서 앞장서기를 원했어요. 출전시 군관 중 서열이 남이장군은 28번째였는데 출정 후 돌아올때 남이장군 이름이 다섯번째로 올라옵니다.
신병주 교수 ㅣ 건국대학교 사학과: 남이는 전형적인 돌격형 장군이었던 것 같아요. 남이를 비판하는 글을 보면 너무 성질이 거칠고 사납다고 하는데 결국 그게 전장에서는 유리한 조건이에요. 세조실록에 북청전투를 기록하는걸 보면 남이는 사력을 다해 싸워서 가는 곳마다 적이 쓰렸다고 해요. 과장된것 같은 내용도 있어요. 몸에 4,5개 화살을 맞았어도 낯빛이 태연했다라고 하죠.
북청전투에서 남이가 사력을 다해 싸우니 가는 곳마다 적이 마구 쓰러졌다
몸에 4,5개의 화살을 맞았으나 태연했다
- 세조 13년 7월 14일 -
이해영 ㅣ 영화감독: 누가 가서 화살 개수를 센건가요? 다섯 개네? 이렇게 센건가요?
김용철 교수 ㅣ 부산대학교 정필제연구소: 실제로는 그것보다 더 많이 맞지만 갑옷이 두껍기 때문에 상처를 입힌게 그 정도였다는 거죠.
신병주 교수 ㅣ 건국대학교 사학과: 몸에 4,5개의 화살을 맞았으나 태연했다 관우도 팔에 박힌 화살촉을 뺄때 아무렇지 않게 빼잖아요. 남이의 캐릭터는 무장으로서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최원정: 여진족과의 싸움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면서요?
김용철 교수 ㅣ 부산대학교 정필제연구소: 건주여진족은 여진족 중 가장 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고 명나라와 조선의 변경을 침범했습니다. 건주여진 정벌의 의미는 정벌 이후 100년 이상 여진족에 강력한 추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만주족의 정세를 완전히 뒤바꾼 큰 전투였기 때문에 남이장군의 평판이 높아진 것도 당연합니다.
류근 ㅣ 시인: 그 당시 남이 장군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이런 영웅담도 있습니다. 두만강 쳐서 요동 땅 700리를 차지했고 제주도를 차지해서 제주도 여왕에게 원한을 사서 저주로 인해 죽었다고 하더라구요.
신병주 교수 ㅣ 건국대학교 사학과: 그 당시 제주도는 우리 땅이었고 또 왕이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그만큼 대단했다라는걸 보여주는거죠.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는 이야기. 남이에 대한 재밌는 전설이 있다. 친구들과 어울려놀던 소년 남이. 우연히 한 요정과 마주치는데 남이의 눈에만 하얀 소복을 입은 귀신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괴상하게 여긴 남이는 뒤를 몰래 따라가고 귀신을 머리에 인 요정은 대궐같이 으리으리한 기와집으로 사라진다. 그런데 별안간집안에서 들어오는 곡소리, 귀신이 한 낭자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썩 물렀거라
남이가 호통을 치자 귀신은 달아났고 낭자는 숨을 몰아쉬며 살아났다.
자네가 내 딸을 살렸네
알고보니 낭자의 아비는 영의정 권남. 귀신에게서 딸의 목숨을 구해준 인연으로 남이는 당대 최고 세도가의 사위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류근 ㅣ 시인: 제가 이 이야기를 조금 알고 있어요. 아까 권남 머리 위에 앉은 분 바른 귀신은 홍시 귀신이라고 합니다. 보자기를 따라간 홍시 귀신이 권남 딸을 죽음으로 몰고간 거겠죠. 귀신도 조심하셔야해요. 아무거나 먹으면 안되요.
신병주 교수 ㅣ 건국대학교 사학과: 홍시에 있는 하얀 가루가 몸에 좋다고 하는데 말이죠.
류근 ㅣ 시인: 그게 분 바른 귀신으로...
이해영 ㅣ 영화감독: 현실적으로 본다면 권남의 딸이 홍시를 먹다 목에 걸려서 막힌걸 남이 장군이 심폐소생술을 해준게 아닐까요? 이 정도면 결혼해야하는 거죠.
최원정: 마치 백설공주 이야기 같아요. 권남이면 최고 권력가인데 제대로 가서 제대로 된 딸을 구했네요. 고마운 홍시귀신이네요.
신병주 교수 ㅣ 건국대학교 사학과: 그래서 남이장군이 권남의 사위가 되는데 권남이 엄청난 권세가였습니다. 세조때 계유정난 이후 정난공신 1등, 세조가 즉위한 이후 좌익공신 1등입니다. 막강한 세력가의 사위라는 점이 또 다른 후광으로 작용했을 거고 남이의 알머니가 태종의 넷째 딸인 정선공주였기 때문에 태종의 외종손에 해당합니다. 결국 집안도 좋아서 전형적인 엄친아 인물이죠.
권남: 세조의 공신으로 좌의정, 우의정을 거친 권세가
최원정: 권남은 사위를 마음에 들어했나요?
김용철 교수 ㅣ 부산대학교 정필제연구소: 점쟁이를 불러다가 권남에게 점을 치게 했어요. 이 사람은 높은 지위에 오르나 다만 나중에 죄에 걸려 죽을겁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따님께서 이 사위보다 더 일찍 돌아가십니다 라고 해서 혼인했다고 해요. 실제로 먼저 죽습니다.
이해영 ㅣ 영화감독: 결국 딸이 단명하는 운명을 바꿀 수 없으니 살아있는 동안 행복을 누리다 가는 걸 바래서 승낙한거네요.
최원정: 딸 입장에서는 부귀영화만 누리다 간거네요. 못 볼 꼴은 안보고 간거네요. 그런데 이렇게 능력도 있고 가문도 든든한 장군이 혜성때문에 옥사를 치뤘다니...
신병주 교수 ㅣ 건국대학교 사학과: 이 무렵 혜성이 떨어지는데 유자광이 “남이가 혜성이 흰 빛을 띠면 장군이 반역을 하고 큰 병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구절에 의미심장한 모습을 보였다” 라고 고변합니다. 남이는 “다만 묵은 것이 없어지고 새 것이 일어나는 징조라고 말했을 뿐, 유자광의 모함이다” 라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 유자광의 의도대로 흘러갑니다.
류근 ㅣ 시인: 이상하네요. 그 정도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거 아닙니까? 동서를 불문하고 혜성은 불길한 징조였던게 분명하거든요.
이해영 ㅣ 영화감독: 그런데 언제까지 혜성이 불길한 징조였나요? 요즘은 조금 좋은 징조, 신비로운거 아닌가요?
류근 ㅣ 시인: 하늘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빛이 밤마다 나타나니까 공포스러웠겠죠.
김용철 교수 ㅣ 부산대학교 정필제연구소: 긴 꼬리를 달고 날아가지 않습니까? 마치 군대가 깊숙하게 침투해 들어오는 것 같아요. 하늘에 이상한 별이 나타났다는건 질서의 교란자죠. 혹시 지상에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최원정: 별은 역사의 흐름 속에 많은 의미가 부여되고 오늘날까지도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갖고 계시는데요. 우리에게 역사속 혜성 이야기를 들려주실 분을 초대했습니다.
이해영 ㅣ 영화감독: 일단 혜성이 자주 볼 수 있는게 아닌데 조선시대에 혜성이 얼마나 관측되었는지 알고 싶어요.
안상현 박사 ㅣ 천문학자, 역사전문학자: 조선시대에는 혜성에 대해서 1300건 정도의 기록이 남아있고 삼국시대, 고려시대에는 60여개의 혜성이 남아있습니다. 왜 이렇게 혜성을 유심히 관측했냐면 혜성이 의미하는 바가 전쟁이라든지 반란, 전염병 이런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혜성이 나타나면 조치를 취하는데 궁궐의 수비를 강화하고 한양의 경비, 국경의 수비를 강화하고 왕 자신이 반찬 가짓수를 줄이고 정전을 피한다든가 행동을 합니다. 혜성이 색깔에 따라 의미가 다릅니다.
파란혜성: 왕과 제후가 패한다
붉은혜성: 도적이 일어난다
노란혜성: 후비가 권력을 빼앗다
흰색혜성: 장군이 반역한다
검은혜성: 강물이 끊어지고 도적이 나타난다
이해영 ㅣ 영화감독: 그럼 남이장군 혜성의 색깔은 뭔가요?
안상현 박사 ㅣ 천문학자, 역사전문학자: 평범한 혜성색깔로 푸르스름한 흰색입니다.
류근 ㅣ 시인: 그런데 푸른색이든 흰색이든 예로부터 병란이 날 조짐이라는게 알려져있는거잖아요. 남이장군은 안 해도 될 말을 해서 화를 입은 거네요.
안상현 박사 ㅣ 천문학자, 역사전문학자: 당시 예종이 창덕궁에 머무는데 담이 취약했는지 한명회가 경비를 건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반대편인 남이장군도 혜성이 나타나니 한명회같은 간신들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죠. 그래서 혜성이 나타나서 신구세력의 갈등, 왕권이 취약한 상황에서 그러한 갈등이 표면화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최원정: 듣기로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당했을때 실제로 혜성을 봤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우리나라도 누군가 죽거나 반란이 있었을때 혜성이 나타난 실제 예가 있나요?
안상현 박사 ㅣ 천문학자, 역사전문학자: 많이 있습니다. 신라시대때 장보고가 난을 일으킬때도 혜성이 나타났었고 그걸 가지고 민중을 선동했죠. 홍경래의 난때도 혜성이 등장하는 등 많은 사례가 있습니다.
류근 ㅣ 시인: 혜성이 나타났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 아니고 그걸 이용한거네요. 1468년 9월에 나타난 이 혜성의 이름이 없나요?
안상현 박사 ㅣ 천문학자, 역사전문학자: 주기 혜성일 경우에는 이름을 붙이는데 130여년 주기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분이 있지만 아직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름이 아직 없습니다. 만약 제가 나중에 찾아내게 된다면 남이 장군 혜성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싶네요.
신병주 교수 ㅣ 건국대학교 사학과: 공교롭게도 9월 2일에 혜성이 나타나고 예종이 9월 7일에 왕으로 즉위해요. 그리고 그 다음날 세조가 돌아가시죠. 엄격히 말하면 예종은 세조가 돌아가시기 전에 즉위한거에요. 남이라는 인물은 세조가 키워준 인물이라 예종이 즉위하자마자 남이를 병조판서에서 해임을 시킵니다.
류근 ㅣ 시인: 아버지가 승하를 했는데 어떻게 이런 인사발령을 바로 내는지 의아해요.
신병주 교수 ㅣ 건국대학교 사학과: 벼르고 있었던 거죠. 예종이 왜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이해영 ㅣ 영화감독: 싫어했네요. 아버지가 남이장군을 너무 이뻐하니까 질투심도 있지 않았을까...
신병주 교수 ㅣ 건국대학교 사학과: 지금도 기업체에서 오너가 바뀌면 임원 인사이동도 있죠. 아버지는 나름 경험도 있어서 남이가 감히 어쩔 수 없지만 예종을 밟고 올라갈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을 했을때 유자광이 고발을 했고 혜성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꺼낸것 같아요.
최원정: 유자광의 이름은 배웠지만 더 자세히 알아볼까요?
신병주 교수 ㅣ 건국대학교 사학과: 역사시대 간신의 대표적인 3인방이 한명회, 유자광, 임사홍이잖아요.
김용철 교수 ㅣ 부산대학교 정필제연구소: 유자광은 머리가 좋았을 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장점도 있습니다. 제조가 유자광을 등용하면서 사람들에게 유자광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주는데 대궐의 섬돌 몇개를 뛰어넘어서 곧바로 기둥을 잡고 지붕 위로 올라갑니다.
이해영 ㅣ 영화감독: 거의 원숭이 수준이네요.
신병주 교수 ㅣ 건국대학교 사학과: 옛날에 황비홍이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거의 그 수준입니다.
이해영 ㅣ 영화감독: 야마카시라고 해서 영화로 치면 와이어 액션이죠.
최원정: 그때 정말 인정을 받았겠네요. 퍼포먼스가 먹힌거네요.
김용철 교수 ㅣ 부산대학교 정필제연구소: 임금말고도 구공신 계열도 남이장군이 권력의 핵심으로 오니까 그것도 마음에 걸렸구요.
신병주 교수 ㅣ 건국대학교 사학과: 이시애의 난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사람이 바로 남이장군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적개공신에 책봉되면서 세조 후반기에 새로운 세력으로 떠올라요. 구공신 입장에서 남이같은 인물은 제거해야할 대상이라고 판단할때 이 상황을 포착한 유자광이 정국이 돌아가는 판을 읽은거죠.
류근 ㅣ 시인: 역시 남이는 정치적 희생양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한거 아닙니까?
최원정: 유독 조선시대에는 역모죄로 인생이 훅 가는 사람이 많아요.
신병주 교수 ㅣ 건국대학교 사학과: 역모가 성공한 사례도 있어요. 조그마한 역모사건은 바로 조사에 들어가요. 철저합니다. 역모고변도 일어나자마자 바로 그 다음날 남이의 체포령이 떨어집니다. 고문도 심했다고 해요.
류근 ㅣ 시인: 다리가 부러졌다고 해요.
신병주 교수 ㅣ 건국대학교 사학과: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이 일어났을때도 세조가 불에 달군 인두로 성삼문을 고문합니다.
김용철 교수 ㅣ 부산대학교 정필제연구소: 보는 사람에게 겁을 줘서 역모를 못하게 해야겠다는 방비책이기도 해요. 국문에서 나온 증언은 전무 효력을 가집니다. 같이 한 사람 세명만 이야기하면 풀어줄게 이런식으로 하는 겁니다.
신병주 교수 ㅣ 건국대학교 사학과: 몇명 불어라, 연루자 있지 하니까 남이장군이 이시애 난을 진압할때 같이 출정했고 건주여진때도 같이 공을 세운 장군인 영의정 강순을 지목합니다. 근데 그 당시 강순은 79세로 고령이었어요. 그래서 강순이 “제가 어려서부터 곤장을 받아본 적이 없는데 이 나이에 맞으려니 견딜 수가 없습니다”라고 합니다.
김용철 교수 ㅣ 부산대학교 정필제연구소: 남이 장군이 봤을 때는 자기가 누구를 지목하면 끝나는지를 생각한거죠. 이제 구공신들이 정국을 이끌어나갈테고 자기나 강순, 신공신 계열은 사라지는 구나 그게 지금 이 자리의 의미라고 안거죠.
신병주 교수 ㅣ 건국대학교 사학과: 신숙주는 계속 일등공신이고 신공신은 그야말로 혜성처럼 반짝 빛났다가 사라지죠.
류근 ㅣ 시인: 역모는 약이 없어요. 누구를 역모로 걸면 피해갈 수가 없어요.
이해영 ㅣ 영화감독: 역모 앞에 장사 없죠.
신병주 교수 ㅣ 건국대학교 사학과: 병조판서가 된지는 약 2달 정도 되고 고변 후 3일만에 죽습니다. 남이를 빠른 시일에 죽였다는 것 자체가 역모에 신빙성이 없죠.
류근 ㅣ 시인: 거열형이었다고 하잖아요.
거열형: 팔, 다리, 머리에 수레를 연결해 달려 찢어 죽이는 형벌
세조 말년, 새로운 권력의 핵심으로 떠올랐던 남이 장군의 허무한 죽음. 오랜 세월 한명회를 중심으로 조선의 권력을 장악해온 구공신 세력은 젊은 남이가 결코 넘어설 수 없는 거대한 벽이었다.
류근 ㅣ 시인: 산전수전 다 겪은 구공신 세력을 상대하기에는 너무나 경험이 일천했던 남이 장군이었어요.
최원정: 9선 의원에게 맞짱 뜨는 초선의원의 이미지네요.
신병주 교수 ㅣ 건국대학교 사학과: 남이의 성급한 면이 실록에 많이 나옵니다. 성격이 급하다, 거칠다라고 하는데요. 남이가 역모로 연루되었을때 “국상 중에 소고기를 먹었다”라는 이야기까지 나와요. 그리고 남이의 집에는 소고기가 엄청나다라는 내용이 나와서 비판의 대상이 됩니다. 이때 남이의 말이 “제가 몸이 약해서 어머니가 소고기를 먹으라 해서 먹었습니다”라고 합니다. 결과적으로는 너무 자유분방한거에요. 규율에 얽매이지 않는 모습이 왕실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경계가 되고 심지어 세조 앞에서도 이런 저런 건의를 하거든요.
류근 ㅣ 시인: 일찍 출세한 사람들일 수록 주변을 둘러보는 처세가 필요한건데 이 분이 신중하지 못해서 “혜성”에 꼬투리 잡히는거 아닙니까? 주변 살필 주변머리가 없어서 저는 출세를 꾹 참고 있어요.
신병주 교수 ㅣ 건국대학교 사학과: 가늘고 길게 사는 것도 괜찮은 것 같아요.
한류 열풍의 원조 겨울연가의 촬영지이자 아름다운 풍경으로 유명한 남이섬.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관광명소다. 그런데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남이섬 이름의 유래를 알고 있을까?
파한 ㅣ 말레이시아 관광객: 아마도 남쪽에 있기 때문에 남이섬이 아닐까요? 남이라는 것은 남쪽을 의미하니까요.
남자가 살아서 남이섬인가? 남씨 가문이 살아서 남이섬인가요?
뜻밖에도 그 이유를 알고 있는 외국인이 있었다.
왕야페이(28) ㅣ 중국관광객: 남이장군의 묘가 있어서 남이섬이라고 알고 있어요. 드라마 겨울연가의 촬영지로 유명해서 알게 됐습니다.
남이섬 이름의 비밀은 섬 한쪽에 숨겨진 묘 이름에 있었다. 남이장군의 무덤이 있는 곳, 대장군의 기개가 느껴지는 유명한 그의 시도 적혀있다.
전소현(26) ㅣ 남이섬 고객지원팀 주임: 남이장군을 모실때 머리 부분이 없다보니까 금으로 머리 부분을 만들었다고 해요. 새해마다 제사를 지내고 있고 관리를 하고 있고 섬 이름 자체가 남이섬이기 때문에 진묘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남이장군의 묘라고 주장하는 곳은 한군데가 아니었다. 경기도 화성의 작은 산, 이곳에도 남이장군의 묘가 있다는데 정확히 남이장군의 묘라고 적혀있는 비석. 이곳은 경기도 기념물 13호로 지정되어 있다.
노대석 ㅣ 화성시 학예사: 남이장군의 묘에는 문인석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문인석의 의복이나 양식, 문인석의 크기 등이 당시 양식입니다. 현재 문중에 있는 족보에서도 남이장군의 묘가 여기에 있다는 기록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남이장군의 족보에 올라있다는 화성시 묘. 남이장군의 이름을 따서 만든 남이섬 묘. 과연 남이장군 묘의 진실은 무엇일까?
최원정: 어디가 진짜 묘일까요?
신병주 교수 ㅣ 건국대학교 사학과: 당연히 남이섬이죠. 일단 이름 자체가 남이장군에게 따왔고 역모죄로 처형당한 사람 묘를 육지에는 못만들게 했을 것 같아요. 물이 있으니 음습한 섬에 묘를 쓸 수 있었을 것 같아요. 그리고 남이섬 물안개가 남이하게 펼쳐져 있어요. 명백한 증거죠.
최원정: 정말 안개가 남이하게 피어난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봅니다만 그게 증거라니까...하하
류근 ㅣ 시인: 화성에 있는건 남이 장군 부부의 무덤이에요. 족보에도 기재되어 있다고 하면 화성이 더 신빙성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신병주 교수 ㅣ 건국대학교 사학과: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남이가 처형당할때 거열형을 당해서 사지가 찢어졌기 때문에 그 시신을 수습해서 무덤을 만드는 것자체가 어려웠을 거에요. 남이섬이나 화성에서 남이의 묘라고 서로 주장하는데 DNA로 유전자 검사를 해야할지... 아까 중국관광객이 남이섬 유래를 아는걸 보고 놀랐는데 우리가 관광과 겨울연가라는 것뿐만 아니라 남이장군의 역사가 함께 더해진다면 남이섬의 가치가 높아질 것이기 때문에 전 두군데 다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류근 ㅣ 시인: 지금 실제 서울시 연건동 지금의 대학로 남단에 가면 남이장군의 옛 집터 표지가 있구요. 서울 사근동에는 남이장군이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았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최원정: 용산에 남이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는거 아세요? 후세들에게 많이 회자되고 있는데 그 이유가 뭘까요? 남이장군을 아직도 애틋한 마음을 담아서 이야기하잖아요.
신병주 교수 ㅣ 건국대학교 사학과: 이시애의 난, 건주여진정벌에서는 무인이 필요한 시대인데 성종때부터는 정국이 안정되면서 무인이 그렇게 필요하지 않았어요. 그런 시대의 희생자라고도 생각됩니다. 역사에서 무인은 활용만 당하다가 토사구팽 당하는 경우가 많아요. 일부 학계에서는 이순신 장군도 전쟁 이후 쓰임이 없는 상황속에서 최후를 맞이했다는 견해가 있어요. 최고의 장군이 정국의 희생자라는 측면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하죠. 그게 계속 민담과 설화로 이어지면서 우리에게 남아있죠.
최원정: 남이장군의 죽음으로 구공신과 신공신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새로운 역사를 쓰게되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패러디해서 “남이 장군 혜성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제목으로 시작했는데요. 오늘의 소회를 이렇게 제목을 패러디해서 하면 어떨까요?
이해영 ㅣ 영화감독: 움베르트 에코가 쓴 책 중에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이 있어요. 그 책 제목이 떠오르더라구요. “세상의 바보들에게 죽어서도 화내는 방법”, 재능이 있었기에 왕의 총애를 받았고 왕의 미움을 받았고 시대에서 버려진 그 정서적인 느낌이 남아있고 그의 관련된 전설들까지도 계속 이야기하게 되는걸 보면 허황되었다기 보다 남이장군이 죽어서도 가르침, 화를 내는게 아닌가...
김용철 교수 ㅣ 부산대학교 정필제연구소: 남이장군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신병주 교수 ㅣ 건국대학교 사학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남이장군이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반란이라는 진압의 최선봉에 섰고 여진정벌이라는 대외국가사업에서 한 길만을 보고 혼자 가는 거죠. 그 과정에서 적절하게 타협을 하지 않고 구공신 세력에게 철저한 비판의식을 가지고 자신을 끌어주는 세조에게도 쓴 소리를 하는 모습은 “남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갔다”라고 하고 싶습니다.
김용철 교수 ㅣ 부산대학교 정필제연구소: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를 패러디해서 “남이와의 전쟁, 나쁜분들 전성시대”라고 하고 싶습니다. 남이장군에게는 비극적이고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구공신에게는 해피엔딩이죠. 그들은 오랫동안 죽을때까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나쁜분들 전성시대였죠.
최원정: 젊은 나이에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남이장군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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