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삶/Q.T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누가복음18:31-43)

예인짱 2008. 3. 3. 13:15

이제 예수님의 죽음은 임박한 현실이 되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예언하신다.

그런데 제자들의 표정은 전혀 달랐다.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추였으므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이 얼마나 황당하고 어처구니 없는 일인가?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했다..

이 엄청난 일이 왜 일어난단 말인가? 이런 일 이면에 인간속에 자리하는 신앙적 기준은 무엇이란 말인가?

 

성경을 읽으며,

가장 큰 맥락은 인간을 고칠 것인가?

아니면 인간을 바꿀 것인가?의 주제이다.

 

인간은 고치려고 한다.

고치면 될 거라고 생각한다.

고치면 축복도 받고, 고치면 천국도 가고, 고치면 인정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당시의 사람들의 생각이었고, 제자들도 이런 의식에 근거하여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다.

 

인간을 바꾸는 것이 신앙의 자리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예수의 죽음은 전혀 생명력을 가질 수 없다.

죽을 이유가 없다. 죽음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결한단 말인가? 아무것도 해결될 것이 없는 것이다.

 

성경의 주제는 거듭남이다.

인간이 거듭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이 영이니,

너희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되어야 죽음의 인간을 죽이는 길이 무엇인지에 대한 관심을 기울인다.

그 인간만이 죽음의 인생을 떨쳐내고 영생안에서의 삶을 살아가는 변화의 삶을 살아간다.

이런 삶을 만드는 것이 신앙의 자리임을 깊게 각인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죽으심은 전혀 보이지 않은 신앙적 난제가 되고 마는 것이다.

 

오늘날의 기독교도,

원초적인 주제에 충실한 교회는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

그런데 인간의 표면을 상대로 그 인간을 고치려고 하는 교회는 고치기는 커녕 결국은 죽이고 마는 결과를 만드는 것이다.


제자의 눈을 떠야 한다.

이것이 떠진 교회가 되어야 한다.

이런 노력을 기울여가는 교회가 되길 기도하고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