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삶/Q.T

지도자의 자세(누가복음17:1-10)

예인짱 2008. 2. 26. 09:52

지도자에게 요청하는 자세는 엄격하기 이를데 없다.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있게 하면 화로다..라고 정의하는 기준은 엄격하다 못해 매몰차게 들린다.

 

지도자에 대한 견해가 얼마나 가혹한가를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도자의 자리를 안다.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자리게 지도자의 자리임을 아시기 때문이다.

 

실족을 방지하는 원칙은 이러하다.

스스로 조심하라.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하루 일곱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번이라도 내가 회개 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이것이 실족에서 부터 벗어나는 길이다.

 

실족의 잣대는 그 사람의 상황이 아닌, 나의 판단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무서운 기준이다. 지도자는 그 사람의 태도와 상태에 따라 대응한다.

그 사람의 행위에 따라 평가하고 처벌한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경계를 주문하면서도 용서를 더욱더 강력하게 요청하신다.

예수님이 보시는 인간 만들기는 어디에 근거하는 것일까?

 

지도자란?

용서하는 자이다.

하루에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는게 지도자라는 것이다.

 

그렇게 할 경우,

그 용서를 받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아마도 하나님은 하나님이 한 인간을 키우고 돕고 계신데,

인간은 자기가 마치 그 사람을 끝까지 책임져야 할 사람인듯이 그 사람을 접근함으로,

그 사람의 길을 막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너무도 깊게 판단하신 일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이 보실 때,

한 인간의 길을 막는 것은 지도자들이라고 보시는 것으로 판단된다.

인간의 잔혹한 판단 기준과 잣대가 인간의 미래를 막고, 인간을 정죄와 죄의식에 빠지게 만든다고 보시는 것 같다.

 

누가복음 큐티를 하며,

하나님의 교육관에 정신이 없을 만큼 포용과 사랑, 관심과 보살핌의 진리가 얼마나 강력한 외침인가를 보게 된다.

인간은 그를 돕는답시고, 오히려 그에게 강박관념과 책임의식과 나쁜 판단기준을 줌으로서 스스로 정죄에 빠지게 만드는 모순과 한계를 갖고 있음을 지적하시는 것 같다.

 

실족에 관한 교훈을 깊게 새겨야 겠다.

실족을 주지 않는  절대기준을 가슴에 담아야한다.

 

교훈.

1. 실족케 말라.

이 주제에 대해선 유구무언이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난 많은 이에게 아픔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회개와 함께 용서를 받는 입장이다.

 

이 말씀이 교훈이 되어,

미래의 삶엔 어떤 경우에도 실족케 하는 일이 없게 하는 자로 살아가길 소망한다.

실족케 하는 일을 막는 길은 경계와 용서를 조화롭게 하는 일이다.

특히 용서의 철학을 깊게 갖고 용서의 삶을 살길 노력해야 한다.

이런 사람이 되도록 훈련해야 한다.

 

2. 하루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

과연 그럴 수 있겠나?

과연 그럴 수 있나?

하나님은 나를 일만달란트 탕감해 주신 것이 맞다.

그런데 난 일곱번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왜 그럴까?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깊게 생각해 봐야 한다.

 

용서하지 못하면 스스로 피곤하다.

남을 피곤하게 하고, 자신을 피곤하게 한다.

무엇이 용서를 막는 걸까?

 

내가 책임지려고 해서 그러나?

그 사람의 책임이라고 판단해서 그러나?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인도하시고, 그 사람에 대한 평가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믿지 못해서인가?

 

깊은 생각을 해봐야 한다.

 

계획.

1. 양육코스 확정

2. 로드십 교재 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