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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선교의 중심지-'수리아 안디옥' (Antioch, Syrian)'
-수난의 동굴교회와 수많은 비밀통로-
안디옥 지도
※ ‘안디옥’이란 이름은 ‘병거’, ‘전사’라는 뜻이다.
♣ 수리아 안디옥 교회는, 초대교회들 중에서 복음선교의 중요성을 제일 먼저 인식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을 이방의 선교사로 선발하여 파송하였고, 이후 안디옥교회는 그의 해외선교 거점이 되었다.
안디옥은 한때 로마,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로마 제국의 3대 도시 중의 하나로 손꼽히던 대도시였다. 또한 이 곳은 아름다운 도시로도 유명해서 '동양의 여왕', '동양의 왕관'이라고 불렸던 곳이다.
안디옥 교회는 '피난민' 교회로 시작되었다. 예루살렘에서 스데반이 순교당하는 등 교회에 많은 핍박오자, 많은 기독교인들은 500km 떨어진 안디옥으로 피신하였다. 그래서 그 곳에는 초대 교회가 형성되었고, 교인들은 교회 역사상 최초로 크리스천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영예를 안게 되었다.
안디옥 크리스천들이 모여 예배드리던 곳은, 의외로 실피우스(Silpius)산 중턱에 있는 동굴교회였다. 안디옥 도시의 동편변두리에 있는 실피우스 산은 나무가 거의 자라지 않는 돌산으로, 크고 작은 동굴들이 수없이 많이 있다.
안디옥의 크리스천들은 그 동굴 중의 한 곳에 모여 기도하며 예배를 보았던 것이다. 어떤 동굴은 수십명이 함께 예배드릴 수 있을 만큼 커 보였다. 한쪽 구석에는 동굴에 떨어지는 물로 세례를 주던 세례터가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동굴의 안쪽 한편 구석에는, 허리를 굽히고 들어 갈 수 있는 통로의 입구가 있었다. 예배 도중 교회를 핍박하는 적들이 나타나면 몸을 숨겼던 비밀통로이다.
길이 4km나 되는 이 비밀통로는 중간에 여러 갈래로 갈라져서, 산 반대편으로 나가게 되어 있다고 한다. 추적이 거의 불가능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환난과 핍박을 이겨내며 신앙을 지켰던 믿음의 선진들의 발자취이며, 초대교회의 생생한 현장이다.
오늘날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가 된 데에는 사도 바울의 공로가 크다. 그러나 그의 뒤에는 동굴 속에 숨어 예배 드리면서도, 그의 선교활동을 도왔던 안디옥 교회의 크리스천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 현재명은 안타캬(Antakya)이다. 행정 구역상 수리아 지역의 지중해에서 약 32Km 내륙 오론테스 강가에 위치한 도시로서,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480Km의 거리에 위치해 있다.
안디옥이라는 지명은 여러 곳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며, 성경에서는 비시디아 안디옥과 수리아 안디옥 두 곳이 언급되어 있다(13:14).
수리아 안디옥은 기원전 300년경에 셀류쿠스 니카토르 1세(Seleucus Nicator I)에 의해 세워졌고, 그의 아버지 `안티오쿠스'(Antiochus)의 이름을 따라 도시의 이름을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디옥은 A.D.1세기에, 로마 제국 안에서 로마와 알레산드리아에 이어 인구 약 50만에 달하는 큰 도시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Josephus). 셀류시드 왕조 때는 수도로, 로마시대에는 아시아 수도로 이용되었다. 빌립보와 같은 로마 도시로, 집정관이 다스린 로마시대 동쪽 제1의 도시이다.
지역의 위치상, 안디옥은 동 서 문화가 혼합되어 상존했으며, 전체 인구 중 1/7정도가 유대인들로 구성되었다. A.D.37~41년에는, 로마황제 갈리굴라(Caligula) 통치 아래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당했던 무서운 도시로도 알려져 있다.
신약성경에서 안디옥은 외국 선교의 전진기지로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행 13:1~3), 처음으로 기독교인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졌던 곳이며(행 11:26), 이방인 개종자의 할례 문제에 관한 논쟁이 처음 있었던 곳이다(행 15:1,2;갈 2:11~21).
이와 같이, 이방 지역 선교를 위한 중요한 기능을 담당했던 안디옥 교회는, 초기에 바나바와 바울, 그리고 베드로에 의해 지도 되었고, 2세기에는 익나티우스와 데오빌로, 3,4세기에는 루시안, 데오도르, 크리소스톰(407년 사망) 등의 유명한 지도자들에 의해 지도되었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 로마와 함께 중요한 신학적 본산(本産)이 되었다.
서기 526, 528, 529, 540년에 있던 지진으로 폐허가 되었던 도시는 페르시아에게 넘어갔으나, 유스티안 비잔틴 황제에 의하여 탈환되었다가, 636년 아랍인에게 넘어갔다. 그후 셀�, 십자군, 아르메니안에 의해 침공을 받았으나, 이 중에서도 그 중요성은 유지되어 실크, 유리세공, 비누, 구리가공 등이 번성하였다.
그러나 마물국 술탄이 1268년 황폐화시킨 후 다시 회복하지 못하고, 1516년 터키가 차지했을 때는 작은 도시로 남았다.
주전 300년 5월 22일 도시가 세워질 때부터 많은 신전과 공공건물이 장식되었고, 아폴로신전에서 열린 경기와 연회의 화려함과 극치는 동쪽 모두에 잘 알려졌다.
안디옥 고고학 박물관에는 로마 모자이크 바닥이 남아있고, 실피우스(Silpius) 산 정상에는 감히 접근할 수 없는 망대가 위치하고, 그 망대는 몇 번 재건되었다.
산 기슭에 있는 성 베드로 동굴은 초대 안디옥 성도들이 모였던 장소로 여겨진다. 동굴 안에는 매우 낡은 아마 비잔틴 시대 것으로 보이는 모자이크가 있다
안디옥 실피우스 산 중턱에 남아있는 동굴교회들 1
안디옥 실피우스 산 중턱에 남아있는 동굴교회들 2
베드로 기념교회
베드로교회 내부
교회 안의 베드로 동상
스테반 집사의 순교이후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이 각지로 흩어지면서, 시리아 안디옥 지역에 정착하여 안디옥 교회를 형성하였다. 누가에 의하면, 안디옥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했던, 처음으로 그리스도인 들이라고 불리던 곳이며(행11:25-26), 초대교회 선교의 출발지라 할만큼 중요한 곳이었다.
성서 시대 이후에도, 상당 기간 동안 안디옥은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근거지였다.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안디옥에 파견하였는데, 바나바는 먼저 고향인 다소에 피신해 있는 바울에게 찾아가서, 그와 함께 1년간 안디옥에 머물며 선교 활동을 한다. 그 후 이곳은 이방인 선교사인 바울의 선교 활동의 거점이 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AD 45~47년 팔레스티나에 기근이 들어 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워 지자, 안디옥 교회는 성금을 모아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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