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의 삶/기독교 자료

사도 바울

예인짱 2007. 3. 3. 10:26
 

<영> Paul, <히> 파울로스

 

 

그리스도인에 대한 지도급 박해자였으나, 후에 그리스도인이 되어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로 활동했던 인물.  바울의 행적은 사도행전과 그가 기록한 서신서들에 잘 나타나 있다.

 

1. 바울의 생애

 

A. 초기 시절 :

바울은 소아시아의 길리기아 평원에 위치한 다소 출신이었다. 바울 당시의 다소는 매우 번성한 도시였으며, 특별히 교육의 중심지였다(행 9:11 ; 21:39 ; 22:3). 바울의 가족들은 B.C. 4년경에 갈릴리의 기살라에서 다소로 이주해온 것 같다(참조. 제롬. Devir. ill. 5). 바울은 로마공화정 후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부여해 주었던 로마 시민권을 상속 받았으며(22:25-28), 또한 다소의 시민권도 가지고 있었다(21:39). 그는 사울(히. 샤울 - [여호와께] 간구하다)과 바울(헬. '파울로스'에서 파생된 라. '파울루스' Paulus - 작은 자)이란 두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의 특정인 헬라 문화와 유대 문화에 대한 병용의 결과였던 것 같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랍비 교육을 받았다.그러나 그가 얼마나 일찍부터 이 교육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행 22:3의 '이 성'이 다소인지 혹은 예루살렘인지 알 수가 없음). 바울은 '장막을 만드는 직업 '을 가졌는데(18 : 3) , 이는 아마도 그의 가문이 장막과 관련된 무역업을 경영했기 때문인 것 같다. 바울의 선생이었던 가말리엘이 약간 자유주의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 자신의 말에 의하면 그는 바리새인들 가운데서 매우 철저한 엄격주의자였다고 한다(갈 1:14 ; 빌 3:5-6). 이렇게 철저한 그의 열심으로 바울은 교회를 완전히 파괴시키려고 했던 것이다(고전 15:9 ; 갈 1:13,23).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신앙과 사도 직에 대한 회고록에서, 이전에 그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말할 수 있었다(빌 3:6). 그는 율법 준수에 대한 실패 때문에 기독교로 개종한 것이 아니었다. 롬 7:7-25
은 바울의 과거를 반영해 준다기보다는, 율법 아래 매여서 그리스도로 인한 자유함을 얻지 못하는 일반적인 경우를 언급하고 있다.

 

B : 사도 직의 시작 :

바울의 회심과 소명은 수리아의 다메섹성 근처에서 일어났다. 이 사건에 대한 윤곽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행 9:1-9 ; 22:4-16 ; 26:9-1).


(1) 바울은 매우 적극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으며 이와 같은 사건이 일어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다.
(2) 특별히 바울에게만 나타나신 예수님의 계시로 이와 같은 변화가 일어났다.
(3) 이러한 계시가 있은 직후,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난 신자로 인정해 주었던 다메섹
의 한 그리스도인을 만나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4) 바울은 세례를 받은 즉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소명을 예수께로부터 받았다.

 

이러한 사실들은 그의 서신서들에 의해서 여러 번 확증되었다(고전 9:1 ; 15:8-9 ; 갈 1:15-16 ; 참조. 엡 3:1-6).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한 바울의 설교는 그의 소명 직후부터 시작되었다(행 9:20). 그는 아라비아(다메섹 근처의 수리아 광야 지대)로 왔으며, 그 곳에서도 복음을 전파했을 것이다(갈 1:17). 아리비아에서 행한 바울의 전도는 결국 나바티아 왕 아레다 4세의 바울 체포령을 야기시켰다(고후 11:32 ; 아레다 4세는 B.C. 9-AD 40년까지 아리바아를 통치했으며, 후에는 로마 황제로부터 다메섹까지 수여 받았다). 회심 이후 다메섹과 그 근처에서 3년을 지낸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건너가 15일동안 머물렀다(행 9:22-26 ; 갈 1:18). 그는 예루살렘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사귀기를 원했으나 겨우 몇몇 사도들밖에 만나지 못하였다(행 9:26-27 ; 갈 1:18-19). 바울은 예루살렘을 떠나 고향인 다소로 가서 잠시 동안 머물렀다. 그 후 그는 수리아의 안디옥으로 가서 약 일년 동안 머물면서 유대인이 아닌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다. 이것이 그의 첫 번째 이방인 전도였다(행 9:30 ; 11:20-26).


이 시점부터 사도행전에 기록된 사건과 갈라디아서에 기록된 사건 사이의 연관이 약간 명확하지 않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이 일년 사이에 바울과 바나바는 흉년을 돕기 위한 헌금을 가지고 안디옥을 떠나 예루살렘
을 방문하고 돌아왔다고 한다(행 11:27-30 ; 12:25). 그리고 이 일년이 거의 지날 무렵, 안디옥 교회는 바
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선발하여 '제1차 전도 여행'을 떠나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13 : 1-5). 그런데 갈라디아서에 의하면. 바울과 바나바와 디도가 14년 후에(아마도 바울의 개종 이후 14년을 가리키는 것 같다) 예루살렘으로 올라왔다고 한다(갈 2:1). 이 예루살렘 방문은 '계시'에 의하여 인도된 일이었으며, 매우 심각하고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2:2-10). 그런데 바울은 이 방문에서 사도행전 11장에 나타난 예루살렘의 흉년에 대한 언급을 전혀 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모든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갈 2장의 방문은 행 11장의 방문과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등장 인물이나 거론된 문제들 그리고 사건의 경과를 고찰해 보면, 갈 2장의 방문은 오히려 행 15:1-29(예루살렘 총회)의 방들과 일치한다고 보아야 옳을 것 같다.


 

C. 제1차 전도 여행 :

안디옥 교회에 의한 바울과 바나바의 파송은, 바울에게 소아시아와 교회의 복음을 심는 자와 지도자로서의 첫 발을 내딛게 만들어 주었다(행 13:1-3). 이때부터 예루살렘에서 구금당하기까지(21:27 – 22:29), 바울은 세 차례의 전도 여행을 실행하였다. 어떤 의미에서 볼 때 제1차 전도 여행의 본부는 안디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제2차 전도 여행 때는 고린도에서 18개월 동안 머무르면서 그 곳을 본부로 삼았으며(18 : 11), 제3차 전도여행 때는 에베소에서 2년 이상 머무르면서 그 곳을 본부로 삼았다(19 : 8,10).

 
그러나 바울의 전도 여행을 3차로 뚜렷하게 구분하는 것은 후대 사람들이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절대적이라고 할 수 없다. 바울과 바나바와 요한 마가의 전도 사역은, 안디옥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인 실루기아에서 배를 타고 구브로 섬의 살라미에 도착한 후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구브로 섬의 서부 지역인 바보로 들어가 복음을 전파하였다(13:4-12). 바보에서의 사역을 기록할 때는 '바울'이란 이름과 '사울'이란 이름이 동시에 나타났으나(13:9), 이후부터는 '바울'이란 이름으로 불리우기 시작하였다(13 : 13). 사도행전은 작은 사건일지라도 대표적인 사건들은 반드시 기록하였다.
그래서 당시로서는 매우 중요한 것처럼 보였던 사건들도 가끔은 생략되었다. 바보에서 일어난 사건의 기록을 분석해 볼 때, 다음과 같은 중요한 몇 가지 특징들을 발견할 수 있다.

 
(1)바울의 전도 사역은 행정 관리들과의 접촉을 불가피하게 만든다.
(2) 바울이 전도 사역의 주인공으로 부각되었으며, 동역자에 대한 언급은 거의 기록되지 않았다.
(3) 바울은 담대하고 직설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4) 바울의 말은 담대할 뿐만 아니라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대적자들을 굴복시킬 수 있었다.
(5) 일반적으로 바울의 복음 선포 결과로 믿음이 생겨났다.

 

바울과 일행이 배를 타고 소아시아에 도착한 후, 요한 마가는 바울과 바나바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13 : 13). 바울과 바나바는 소아시아의 내륙지방인 비시디아의 안디옥(13 : 1의 안디옥과 다른 곳임)으로 갔다. 이곳에서 일어난 사건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대표적인 사건들 가운데 하나이며(13 : 14~51), 이 사건에서 발견할 수 있는 바울 사역의 전 형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바울은 회당을 이용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했으며, 안식일에 성경을 낭독하면서 그 접촉점을 마련하였다(9 : 20; 13: 5,15-16; 14:1’ 17: 1-2,10,17; 18 : 4, 19; 19 : 8).
(2)바울은 동일한 회당을 다시 방문하여 복음을 선포했는데(13 : 42; 17 : 2; 18: 4;19 : 8) 결국 이러한
재방문은 유대인들의 반발심을 자극하게 되어 회당에서 뿐만 아니라, 그 도시에서까지 쫓겨나는 사태를 야기시키기도 했다( 9 : 23 – 25: 13 -45, 50-51; 14 : 2, 4-6; 17 : 5-10, 13-14; 18 : 6-7 ; 19 : 9).
(3) 복음을 믿는 자들 가운데는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과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들'이 많이 섞여 있었다(13 : 48; 14 : 1; 16 : 14; 17 : 4, 12; 18 : 4, 7).

 

아마도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이 바울의 설교를 듣고 회당에서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에게 가혹한 박해를 가했던 것 같다.

 

루스드라에서는 유대인들보다 헬라의 지방신 신봉자들을 먼저 만나게 되었다(14 : 8-13). 그래서 바울의 설교가 성경으로 시작되지 않고 유다 민족들이 섬기는 '살아계신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라는 말로 시작되었다(14 : 15-17). 행 17 : 22-31과 살전 1 : 9-10에 나타난 바울의 설교 역시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사람들을 대상으로 선포한 것이다. 이러한 설교는 먼저 우주적이신 창조주 하나님만이 참된 신임을 강조한 후에, 예수님의 부활과 다가올 심판을 선포하면서 회개를 권면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루스드라에서 바울의 목회는,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부터 바울을 쫓아나선 유대인들의 방해로 오래 가지 못하였다(14 : 19). 더베를 방문하여 많은 복음의 결실을 거둔 바울과 바나바는, 이전에 그들이 씨를 뿌린 결과로 형성된 기독교 공동체를 다시 한번 돌아보면서 그들의 믿음을 격려하였다(14 : 20-23). 그리고 버가에서 마지막으로 전도한 후 소아시아를 떠나 수리아의 안디옥으로 돌아왔다(14 : 24-26).

 

D. 사도들의 총회 :

유다에서 안디옥으로 내려온 어떤 사람들이(15 :) 이방인신자들도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받
는다고 주장하였다.
이때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않은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사실 이 두 사람은 구브로 섬과 소아시아 지방에서도 이와 비슷한 다툼을 많이 겪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논쟁의 결과로 초대 교회 역사의 중추적 사건인 '예루살렘 총회'가 열리게 되었다(15 : 4-29). 이 총회의 안건은 단순히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유대교로 개종해야 할 것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였다(15 : 1, 5). 결국 이 총회에서는 이방인 성도들이 최소한의 몇 가지만 삼가해 줄 것을 결정하고(15 : 19-21, 28-29), 이 결정 사항을 바울과 바나바, 바사바와 유다와 실라를 통하여 이방 교회에 전달하도록 하였다(15 : 22). 이 일은 또한 유대 지역의 교회와, 수리아나 소아시아나 그리스에 세워진 이방인들의 교회 사이의 단합을 이루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예루살렘 총회가 그 당시에 발생했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준 것은 아니었다.

곧 그 후에도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할례를 받으려는 소동이 계속 일어났으며(갈라디아서; 참조. 롬 2 : 25-29; 빌 3 : 1-2), 유대인 거짓 교사들은 바울의 가르침과 구약을 서로 비교하며 교인들을 계속 이간시켰고(롬 3 : 8; 9 : 1-5; 10 : 1; 11 : 1),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에게만 특별한 권위를 부여하려는 이상
한 풍조까지 발생하였다(고후 11 : 5; 12 : 11; 참조. 고전 15 : 9-11). 바울은 그의 서신서들에서 이 총회
의 결정 사항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단지 후에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에 의하여 바울은 총회의 결정 사항을 다시 한번 다짐받은 적이 있다(행 21 : 25). 비록 바울이 소아시아 교회들에게 이 결정 사항을 전달해 주었으나(16 : 4), 그 결정된 규례들에 대하여 절대적인 권위를 두었던 것 같지는 않디(참조. 골 2 : 15-17).


 

E. 제2차와 3차 전도 여행 :

예루살렘 총회의 결정 사항을 안디옥 교회에 전달해 주었던 바울과 바나바는, 얼마 동안 안디옥에서 함께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쳤다(행 15 : 30-36). 그들은 구브로 섬과 소아시아 남부에 세워진 교회들을 돌아보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전에 버가에서 되돌아 가버린 요한 마가와 동행할 것인가 말것 인가의 문제로 인하여 서로 갈라서고 말았다. 결국 두 개의 전도대가 구성되었는데(15 :36-41), 바나바는 요한 마가를 데리고 자기 고향 근방으로 떠났으며(참조. 4 : 36), 바울 역시 자기 고향 쪽으로 향하였다. 이때부터 바울에게는 새로운 동역자가 생겼는데, 그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온 실라(서신서에서는 '실루아노'라고 불리웠음)였다(15 : 22). 그들은 소아시아의 루스드라에서 디모데와 합류하였다(16 : 1-3; 참조. 고후 1 : 19). 이 세 사람은 소아시아를 지나 마게도냐의 빌립보 성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새로운 교회를 설립할 수 있었다(행 16 : 6-12; 참조. 롬 15 : 19). 행 16 : 12 - 19 : 41은 전혀 낯선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는 바울의 활동이 강조되어 있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도 바울은 이전처럼 유대인들이나 혹은 유대교의 영향을 받은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하여 먼저 복음을 전파하였다(16 : 13; 17 : 1-2, 10, 17; 18 : 4, 19; 19 : 8). 아덴에서는 유대교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아니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으나 거의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17 :18-34).

 
아무튼 바울의 사역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는데(초자연적인 이적으로 인한 관심까지 포함하여;
16:16-18; 19 : 15), 이러한 관심 때문에 자신의 정당함을 입증할 때도 있었으나 그 반대로 극심한 고난을 받아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16 : 19-39; 18 : 12-16; 19 : 29-41; 참조. 17 : 6-9). 사도행전은 20장 서두
부터 그 관점을 약간 달리해서(19 : 21-22) 이미 세워진 교회들 곧 이전에는 간단하게 언급했던 지역들을
(16 : 4-5; 18 : 23; 20 : 2) 바울이 다시 방문했던 일과 연관된 극적인 상황들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바
울의 소아시아와 마게도냐와 그리스의 교회들과 이별을 나누는 사건이 매우 강조되어있다.


에베소 장로들에 대한 마을의 고별 설교(20 : 17-38), 그리고 체포가 예상된 상황에서도(21 : 1-15)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의 여행에 대한 자세한 설명 등은 특별히 이러한 이별의 의미를 더욱 강조해 주었다. 아마도 바울이 마지막으로 그리스를 떠나기 직전 고린도에서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는 롬 15장은(참조. 행 20 : 1-3), 바울이 앞으로 예루살렘과 로마와 스페인까지 가게 될 것이라는 계획이 예시되어 있다(롬 15 : 17-32; 참조. 행 19 : 21). 과거에 마을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자신을 부르셨다고 믿었기 때문에(롬 15 : 18; 참조. 1 : 5), 항상 다른 사람들이 전도하지 않은 지역을 찾아서 복음을 전하였다(롬 15 : 15-21; 참조. 고후 10 : 13-16).
그러나 이제 그는 그리스와 마게도냐의 성도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 모아준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발길을 돌렸다. 바울은 이 헌금을, 그의 사역의 열매이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의미하는 이방 교회들이, 그들의 모교회에게 감사하여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롬 15 : 25-26; 참조. 고전 16 : 1-3; 고후 8-9장). 교회들을 세우고 격려하고 굳세게 하는 일을 하면서도(참조. 롬 1 : 14; 고후 11 : 28-
29). 바울은 서신서들을 꾸준히 기록하였고 또한 개인적으로 직면한 여러 가지 일들도 함께 처리해 나갔다(고후 1 : 23-2 : 4, 9; 13 : 1-2; 빌 1 : 27; 롬 1 : 11-13). 이와 동시에 그는 교회들을 함께 돌보던 동
역자들의 책임자 역할까지 감당하였다(예. 행 17 : 14-16; 19 : 22; 고전 16 : 10-11; 고후 7 : 6-7; 빌 2 : 19-24).


F. 구금과 재판 :

 바울과 그의 전도여행 동료들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형제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행21 : 17). 예루살렘 교회의 형제들은 바울이 이방에 흩어진 유대인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라고 가르쳤다는 사실을 소문을 통하여 알고 있었다. 비록 예루살렘 총회에서 이방인 신자들의 율법 준수에 대한 면제 규정이 확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바울의 이와 같은 소문에 대하여 두려움을 품고있었다(21:20-22, 25). 그래서 그들은 이러한 소문을 무마시키려고 유대인 신자들에게 보여줄 특별한 행동을 행하여야 한다고 바울에게 제안하였다. 바울은 그들의 제안대로, 나실인 서약을 했던 네 명의 유대인들
이 행하는 정결 예식에 참석하여 그 비용을 모두 부담하였다(행 21 : 23-24, 26; 바울도 전에 이와 같은 서약을 한 적이 있다. 행 18 : 18).

 
바울이 율법에 거스르는 교훈을 가르쳤다는 소문이 유대인 신자들 뿐만 아니라(21 : 20-21), 그리스토인이 아닌 유대인들 사이에도 퍼졌던 것 같다(참조. 20 : 18-19; 21 : 27-28).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으며, 바울을 도우려 했던 일들이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래서 행 21 : 26 이후부터는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외관상으로는 바울이 율법과 유대 민족과 성전을 거슬리는 교훈을 가르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이방인 드로비오를 성전 안뜰로 데리고 들어왔다는 말로 선동 당한 성난 폭도들에 의하여 바울은 심한 폭행을 당하였다(21 : 28-29). 이때 성전 뜰 옆에 있는 안토니아 요새를 수비하던 로마군 천부장이 이 소요 사태를 보고받고서, 바울을 이 사태의 주범으로 체포한 후 폭도들로부터 그를 보호하였다.


바울의 해명에 의하여 소요 사태에 대한 진상의 일부를 파악했던 천부장은(21 : 39-22 : 21), 바울에게 채
찍질을 가하여 모든 것을 알아내려 하였다(22 : 24). 그러나 바울에게 로마 시민권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심문을 중지시킨 천부장은 마을이 고발당한 이유를 확실하게 알기 위하여 그를 산헤드린 공회 앞으로 데려갔다. 그러나 그 곳에서도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22 : 30). 바울을 죽이려는 음모가 꾸며진다는 소식을 들은 천부장은, 엄중한 경비를 세워서 바울을 유다 총독이 거하는 가이사랴로 보냈다(23 : 12-33). 대제사장과 몇몇 유대 지도자들은 가이사랴까지 찾아와 총독에게 바울을 고소하였다. 바울이 고소당한 죄명은 성전을 모독했다는 것과 유대인들의 선동을 주도했다는 것이었다(24 : 5-6). 고소에 대한 바울의 변론이 끝나자(24 : 10-21). 벨릭스 총독은 바울을 맨 처음 체포한 천부장이 오면 결정하기로 하고 재판을 연기하였다(24 : 22). 이 재판을 벨릭스 총독이 퇴임할 때까지, 곧 바울이 체포되어 첫 재판을 받은 후 2년이 지날 때까지 연기되었다(24 : 27). 몇몇 유대 지도자들이 벨릭스의 후임인 베스도 총독에게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데려다가 재판해 달라고 요구하자, 총독은 가이사랴에서 재판을 할 것이니 고소장을 가이사랴로 가져오라고 답변하였다(25 : 1-5; 참조. 16절). 가이사랴에서 고소 내용과 바울의 변론을 모두들은 총독 베스도는, 마을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재판을 받겠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로 건너가 네로 황제('가이사' 행 25 : 7-12) 앞에서 재판을 받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19 : 21; 23 : 11; 롬 15 : 23-24). 베스도 총독은 바울 사건에 대하여 황제께 상소할 자료를 작성하기 위하여, 갈릴리와 베레아지역의 왕인 헤롯 아그립바 2세를 불러 도움을 구했다(행 25 : 26-27).

 
아그립바 왕 앞에서 행한 바울의 변론으로 황제에게 보낼 상소문이 작성되었다. 그러나 바울에겐 갇힐 만한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그들도 인정하게 되었다(26 : 30-32). 비록 재판이 로마 관리들 앞에서 이루어지고 있지만, 바울은 서슴없이 유대인들 사이에서 발생한 부활에 대한 논쟁이 이 사건의 발단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23 : 6; 24 : 20-21). 그리고 그의 재판이 로마인들의 손으로 완전히 넘겨져서 유대인들의 직접적인 위협이 악화되자, 바울은 변론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메시지를 선포하였다(26 : 8,22-23; 28 : 33)

 

G. 로마로 가는 여행과 나머지 생애 :

로마로 가는 여행은 항해철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시작되었다.
9월 하순이나 10월 초순경인 속죄일(금식하는 절기)이 지나자, 그레데 섬의 남쪽 항구인 무라에서 출발한 바울의 배는 섬 서쪽 항구인 피닉스에서 겨울을 지내기로 결정하였다(27 : 9-12). 그러나 항해하던 도중 큰 폭풍을 만나 말타 (멜리데) 섬에 상륙하게 되었다(27 : 14-28 : 1). 어쩔 수 없이 말타 섬에서 겨울을 보낸 후, 이듬해 봄이 되자 다시 항해를 계속하여 무사히 로마까지 도착하게 되었다(28 : 11-14). 이 여행을 하는 동안, 바울과 몇몇 다른 죄수들의 호송 책임을 맡은 로마군 백부장 율리오는(27 : 1), '바울에게 친절히 대해 주었으며'(27 : 3, 43) 바울에게 여러 번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28 : 7, 14).


이와 같은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로마로 가는 여행에서 마을이 아리스다고는 물론이고(27 : 2; 참조.
19 : 29; 20 : 4; 골 4 : 10; 몬 1 : 24) 누가와 디도까지(적어도 그레데 섬까지만이라도; 딛 1 : 4) 바울
의 종이라는 명목하에 함께 데리고 다닐 수 있었던 것 같다. 또한 이와 같은 동행이 죄수의 몸인 바울이었지만 존귀한 자로 대접받을 수 있게 만들어 주었던 것 같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자기를 로마로 보내실 것이기 때문에, 바울 자신 뿐만 아니라 그와 동행하는 모든 사람들이 안전할 것이라는 확신을 언제나 가지고 있었다(행 27 : 21-24, 참조.10절). 로마에서 바울은 비록 죄수의 몸이었으나 아주 자유롭게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가르칠 수 있었다. 사도행전은 바울이 로마에 온 후 2년 동안의 기록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만약 바울이 사도행전에 언급된 2년 후에 재판을 받아 유죄 선고를 받고 처형당했다면, 그가 죽은 연대는 A.D. 62년경일 것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그는 황제의 특별 명령에 의하여 사면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초대 교회의 전승에 의하면, 바울은 로마에서 처형당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처형은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된 사도들의 처형과 연관된 것이 아니라, A.D. 64년 네로의 대학살과 연관된 처형인 것 같다. 초대 교회의또 다른 전승에 의하면 바울이 석방되었다가 다시 구금되었다고 하는데. 이것 역시 가능성이 있는 견해인 것 같다. 그 후 바울이 스페인으로 건너가 복음을 전했다는 전설도 있다.

 

II. 바울의 신학

 

바울은 결코 교회 생활과 상관 없는 교리에 대해서는 진술하지 않았다. 그의 서신서들은 언제나 지교회에 다니던 그리스도인들의 필요와 질문 등에 응답하기 위하여 쓰여졌다. 따라서 서신서들마다 서로 다른 어휘와 논리,주장들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그의 논리 전개는 그가 지닌 사상의 특정한 관점들을 간파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마을이 서신서들에 기록한 모든 내용을 종합해 보면 그가 말하는 종말론적 구원의 의미가 초림시의 사건인지 또는 재림시의 사건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그는 특히 목회 신학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곧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이방인들의 율법 준수 문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구원의 지속성 문제, 그리고 구원받은 자의 방탕한 생활 문제 등이 그의 관심사였다.

 

A. 칭의와 화목 :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바울의 가르침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나타나 있는데, 이는 교회 안에서 이방인들의 위치에 관하여 언급할 때 거론 되었다. 하나님께서 모세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거나 인간적인 노력을 다하는 자들을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가진 모든 자들을 의롭다고 인정하신다는 것이 바로 복음이다. 하나님께서 내리신 의롭다는 판정이, 믿음을 가진 자들을 죄로부터 건져준다.


이 의로움은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롬 3 : 21-22)이다.그러나 이와 같은 하나님의 청의가 구약과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의는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의' 이다(3 : 21). 따라서 구약에 나오는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칭의를 받았다(롬 4장; 갈 3 : 6-9). 바울이 쓴 서신서들 가운데 로마서만큼 구약에 대해 많이 언급한 서신이 없다. 구약은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와 교회 안에서 지금도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심을 밝혀주는 가장 확실하고 명백한 증거이다.


이스라엘은 구원 역사의 중심부에 위치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불신앙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완전하게 멸망된 것은 아니다. 언젠가는 이스라엘이 다시 구원의 역사를 인도해 나갈 것이다(롬 11 : 11-26).마을이 '화목'이란 말을 사용할 때는 항상 칭의가 완전히 성취된 결과를 강조할 때다(5 : 10-11; 골 5 : 20-22; 참조. 엡 2 : 1-6).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화목(롬 5 : 11; 고후 5 : 19-20) 그리고 인간들 사이의 화목은 서
로 구분할 수 없는 동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과의 화목이 이루어짐으로 인하여, 교회 안에 불화 요인들이 저절로 제거되며(엡 2 : 14-16),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화목한 관계가 맺어지게 된다(고후 5 : 18-20; 6 : 11-13; 7 : 2)

 

B. 승리 생활과 그리스도인의 윤리 :

종말론적 구원을 이미 얻은 신자일지라도 지나치게 극단적이고 과장된 종말론적 신앙을 갖는 것에 대하여 바울은 매우 엄하게 경고하였다.


바울은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현실적인 도덕이나 윤리를 무시하려는 사람들을 종종 만났다(고전 5 : 1-8; 참조. 4 : 8; 갈 5 : 13). 바울은 모든 것이 내게 가하다(고전 6 : 12),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
을 위한다(6 : 13), 우리가 다 지식이 있다(8 : 1)고 단언한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정결한 생활이나 이
웃을 사랑하는 생활보다 덜 중요하다고 말한다(6 : 12-20; 8 :1, 7-13). 또한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을 양육하시기 위해 선물로 주신 영적인 은사들을 지나치게 높이 추켜세우는 것을 반대하였다(고전 12-14장;특히 14 :12; 고후 11 : 5-6).


그리고 다가올 부활의 소망에 대한 지나친 방종(고전 15 : 12, 19, 23-26; 살후 2 : 2; 딤후 2 : 18)과 그
리스도인들에게는 고난이 닥치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고전 15 : 12; 고후 11 : 23-30; 13 : 4)에 대해서
도 경고하였다. 바울에게 있어서 미래에 대한 소망은 현재 소유한 믿음의 연속이지 결코 현재와 분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구원이 이루어졌으므로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사역도 벌써 시작된 것이다(5 : 17).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것들을 기다려야만 한다(5 : 2-4; 롬 8 :18-25).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방종에 치우치거나 율법주의에 치우쳐서 윤리적인 삶을 훼손시켜서는 안되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한 구원을 더욱 성장 시켜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세워진 하나님의 칭의와 하나님의 영이 거하심으로 말미암은 율법의 성취이다(8 : 8-13; 갈 5 : 13-26).

 

C. 교회 :

교회론에 대한 바울의 가장 커다란 공헌은, 총체로서의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을 밝혀준 것이다(롬 12 : 5; 엡 1 : 23, 2 : 16; 4 : 4). '그리스도의 몸'이 란 말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 동참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연합체를 가리키며(롬 6 : 3-4; 고전 12 : 13; 엡 2 : 5-6, 14-16), 또한 그리스도의 통치가 온 교회 안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전 12 : 5; 엡 1 : 22-23; 4 : 5;골 1 : 18; 2 : 19). 이와 같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은, 교회의 모든 구조와 기능이 획일적이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양한 영적 은사들을 통한 연합을 의미한다(롬 12 : 4-7; 고잔 12 : 4-30; 엡 4 : 4-16).

 
D. 종말론 :

바울에게 있어서는 현재와 영광의 미래 사이에 존재하는 대조의 확실성이 현재 상황들을 이해하는 근거가 되었다(예. 롬 8 : 18-25,고전 15 : 24-25).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성도의 부활에 대한 기대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기대 사이에는 서로 연관성이 있음을 가르쳐주는 첫 번째 서신을 띄운 것으로 미루어 보아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금방 재림하실 것이라는 기대로 인하여 큰 혼란에 빠져있었던 것 같다(살전 4 : 13-17; 참조. 전 15 : 20-28).


데살로니가 교회에 첫 번째 서신을 보내고 얼마 되지 않아 바울은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일어날 사건들에 대하여 그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두 번째 서신을 띄웠다(살후 2 : 1-12). 바울은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재림과 승리, 성도들의 장래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서신서에 기록하였다(고후 3 : 1-3; 빌 1 : 21-26). 아마도 바울의 개인적인 체험, 특히 소아시아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것과 같을 정도의 고난을 체험한 일이, 바울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자기가 살아 있지 못할 것이라는 깨달음을 주었던 것 같다(고후 1 : 9). 그러나 이전에 기록한 서신서들과 달리, 보다 단순하고 직접적으로 그리스도의 영적 체험을 이미 일어난 부활로 간주하는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도(엡 2 : 5-6; 골 3 : 1), 이 세상에서 일어난 일과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을 구별하는 것이 메시지의 핵심으로 나타나 있다(엡 1 :21; 6 : 12; 골 3 : 4).

※ 참고 문헌
J.C.Beeeker, Paul the Apostle(Philadelphia : 1980), F.F.Bruce, Paul : Apostle of the Heart Set Free
(Grand Rapids : 1977) , W.D.Davies, Paul and Rabbinic Judaism, 4th. Ed(Philadelphia : 1980)
H.N.Ridderbos, Paul :An Outline of His Theology(Grand Rapids :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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