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의 삶/기독교 자료

마틴 루터

예인짱 2007. 3. 2. 20:53
 

말틴루터 [Martin Luther, 1483.11.10~1546.2.18]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독일의 아이슬레벤에서 한스 루더와 마가렛 루더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루터의 아버지는 자영 농민 출신이었고, 어머니는 훌륭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린데만가 출신이었다.
루터는 당시 관습에 따라 출생 다음 날(성 말틴의 날) 세례를 받고 그 날의 성인의 이름을 따라 말틴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루터의 가정은 엄격하면서도 다정다감하였다. 그의 부모는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절약을 강조하였다. 그들은 또한 아이들에게 가족이 하는 모든 일은 존경을 받아야 하며 생산적이어야 한다고 배웠다.
루터는 어릴 적에 어머니가 땔감을 구하러 다른 부인들과 함께 숲으로 들어가시곤 했다고 회상했다.
루터의 부모는 자녀들에 대해서 커다란 야심이 있었다. 저들은 가문의 미래를 위해서 아이들이 잘되기만 한다면 무엇이든지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루터가 다섯 살 되던 해(1488) 만스펠트의 마을 학교에 취학하여 라틴어를 읽고 쓰는 교육과 성가대 찬송을 위한 음악교육을 받았다.
13살 되던 해(1497) 루터는 마그데부르크로 보내어져 성당 학교를 1년간 다녔는데, 교사들은 ‘공동생활 형제단’의 일원이었다. 이렇게 해서 루터는 청소년 시절에 중세시대 전체에 있어서 가장 깊은 차원의 평신도 영성 훈련에 익숙했고 친근해졌다.

이듬 해 루터는 아이제나하로 보내어져 3년간 공부하였다. 루터는 이 학교에서 그의 장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칠 요한 트리보스 교장 선생님을 만났으며, 비간트 겔드누프란 스승과는 평생 계속되는 친교를 여기서 시작하게 되었다. 이 두 스승은 루터의 재능을 알아 보고서 졸업이 다가오자 대학에 가서 계속 공부하라고 추천하였다.

루터는 아이제나하에서 그의 발전에 중요한 이들을 많이 만났다. 그는 경건하고 학식있는 상류층 가문인 샬베와 코타의 집들을 자주 방문하면서 저들의 심오한 경건 생활에서 깊은 감화를 받았다. 이들 가정의 분위기에는 프란시스회의 영성이 물들어 있었으며, 음악성도 계발되었다. 루터는 아이제나하에서 많은 친구들도 사귀는데 이들 중 몇은 평생지기가 된다.당시 루터의 부친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들을 대학에 보낸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지만 그는 아이제나하 선생님들의 대학 진학 계획에 찬성하였다.
루터의 아버지는 아들을 법률가로 만들어 좋은 자리를 얻게 하려고 에르푸르트 대학에 입학시켰다. 루터는 이 대학 교양학부에서 삼학(三學 - trivium. 문법, 수사학, 변증법)과 사학 (四學 - quadrivim. 산술, 기하학, 천문학, 음악)을 각기 마친 후 1502년 9월에 문학사 학위를, 1505년 1월에 17명 중 차석으로 시험에 통과하여 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예비학교를 마친 루터는 5월에 본격적으로 법률 공부를 시작하였다.루터가 대학에서 공부를 계속 하던 중, 집에 갔다가 에르푸르트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7월 2일, 슈토테르하임 근처에서 무시무시한 벼락이 옆에 떨어지는 순간 루터는 땅으로 엎어지면서 광부들의 수호성인을 부르며 소리질렀다. “성 안나여, 나를 도우소서. 저는 수도승이 되겠습니다.”

수도원에 들어가려는 생각이 이미 무르익었던 터라 루터는 뇌우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이는 데전혀 주저하지 않았다.루터는 부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7월 17일, 에르푸르트에 있는 “어거스틴 은둔자 수도회” 소속 “검은 수도원”에 들어갔다.
당시 수도원 서약은 “제2의 세례“라고 불리워 졌으며 종교적 엘리트들을 위한 것으로 여겨졌다. 수도원에서 루터는 기도, 궁핍, 금욕 등의 고행을 진지하게 실천하면서 남보다 열심히 수련을 쌓았다. 루터는 “만일 어떤 사람이 수도승으로서 하늘 나라를 얻을 수 있었다면, 나는 진정으로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회고할 정도로 외적으로는 경건했으나 낱낱이 죄를 고백하는 매일 매일의 고해성사에서 그의 양심은 용서보다는 오히려 더욱 더 하나님의 “영원한 형벌만을 느끼고 마실 뿐이었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네 안에 있는 것을 행하라”라는 조언과 함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부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약속을 주었지만, 루터는 스스로의 힘으로써는 아무리 노력해도 이 조언을 따를 수 없어 절망에 빠졌다.
1507년 5월 루터는 사제로 서품을 받고 부친이 참석한 가운데 첫 미사를 집전하였다. 다음해 겨울 어거스틴파 수도회의 독일 지역 수장인 슈타우피츠의 추천으로 비텐베르크 대학으로 불려와 교양학부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대해 한 학기 강의하였다. 이 때 루터는 어거스틴 수도원에서 묵으면서 자신의 고해신부가 된 슈타우피츠와 개인적으로 친분을 쌓았다.

슈타우피츠는 루터가 영적으로 절망의 문턱에 다다라서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 예정되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자신의 생각에 몰두하기 보다는 그리스도의 상처를 붙잡고서 우리의 죄를 위해 흘리신 그의 가장 고귀로운 피를 보라고 권면했다.

비텐베르크에서 루터는 가르치는 한편 신학 강의를 들으며 분주히 보냈다.
루터는 1509년에 수도사들의 신학교육도 맡고 대학에서 자신의 신학교육을 계속하기 위해 에르푸르트로 돌아와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공부하였다. 다음 해 루터는 종단 내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로마로 파견되었다. 당시 ‘교황의 교설(도그마)에 너무나 깊이 심취해 있던’ 루터는 로마에서 카톨릭 교회의 영적인 공덕에 참여하고자 미사도 집전하고 성당, 사원, 카타콤, ‘거룩한 계단’을 마치 ‘미친 성자처럼’ 방문하였다.

여행을 다녀온 후 그는 회고하기를 이 거룩한 도시를 처음 본 순간 “나도 모르게 땅에 엎드려 ‘오, 로마여! 축복받은 도시여!’라고 외쳤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나중에 “하나님이 교회를 짓는 바로 옆에 마귀는 자신의 제단을 놓는다.”고 한 말은 바로 로마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로마에서 에르푸르트로 돌아온 뒤 루터는 1511년 여름에 다시 비텐베르크로 옮겨와 신학 공부를 계속했다. 그는 1512년 10월 19일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3일 후 슈타우피츠의 뒤를 이어 성경신학 교수가 되었다.

루터는 철학에 이어 본격적으로 성경을 강해하게 되었는데, 스콜라 신학으로부터의 ‘무대의 변화’는 중요한 결과를 가져오는 사건이다. 그는 첫 성경 주해로 시편을 택한(1513 - 15) 뒤 이어서 로마서 강해 (1515 - 16), 갈라디아서 강해(1516 - 17), 히브리서 강해 (1517 - 18)를 계속했다

그 동안 그는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없어 자신의 죄에 절망하지만, 오직 신앙에 의해서만 신으로부터 주어지는 <신의 뜻>을 발견한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인식이라고하는 새로운 신학의 출발점이 된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하여, 성서를 강의하였고, 죄의 사면을 위해 제정된 고백성사(告白聖事)에 의문을 품었으며, 독일 작센지방에서 판매하기 시작한 교황의 면죄증서(면죄부)에 대해서 학문상의 토론을 할 목적으로, 1517년 10월 31일, 유명한 <95개조의 논제>를 당시 대학 게시판이기도 했던 비텐베르크성교회의 문에 게시했다.

[종교개혁]

가톨릭교회는 구원으로 이르는 길은 성사(聖事)에 있다고 하고, 특히 회개(고백)의 성사가 인간을 속죄로 인도하는 출발점이라고 보고 있었다. 그 속죄는 선행으로 얻어지는 데 그것을 쉽게 하기 위하여 면죄부(免罪符)를 고안하기에 이르렀다.
1515년 교황 레오 10세는 로마의 성 베드로성당 건설을 위하여 면죄를 고시하고, 독일에서 면죄부의 판매를 허락하였다.
면죄부는 <상자 속으로 던져 넣은 돈이 짤랑하고 소리를 내는 순간 구원을 받는다>고 선전되어 마구 팔렸다.

루터는 사람들이 면죄부를 삼으로써 모든 벌과 죄책으로부터 해방되며 확실히 구제된다고 믿는 사실에 종교적 위기를 느꼈다.
금전에 의한 면죄부의 구입이라는 안이한 행위에는 <회개>라는 그리스도신자의 기본적 행위가 완전히 무시되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운동의 도화선이 된 <95개조논제(1517)>에서는 로마에 의한 독일의 재정적 착취를 문제삼았을 뿐 아니라, 새로운 신앙원리를 제시하였다.
루터는 이 논제의 제1조에서, 그리스도가 <믿는 자는 일평생 회개하기를 원하였다>고 말하고, 제36조에서 <진실한 회개가 벌과 죄책으로부터의 완전한 사면(赦免)>이라고 주장하였다. 또 제28조에서 하느님만이 구원할 수 있다고 하였으며, 사람은 단지 믿음에 의해서만 의롭게 되며(義認說), 그 믿음의 근거는 성서밖에 없다(성서주의)고 확신하였다.
이 확신은 다시 만인사제주의(萬人司祭主義)를 이끌어 냈다. <독일의 그리스도교 귀족에게 고함(1520)>에서 루터는 <모든 그리스도교인은 진실로 교회적 신분에 속하며 서로간의 직무상의 구별 이외에 어떠한 차별도 없다>고 하여 신과 인간의 중개자로서의 특별한 신분 특권을 가진 성직자 계층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이러한 근원적 주장은 가톨릭교회체제(敎階制度)의 토대를 무너뜨리려는 것이었다.

1519년 가톨릭신학자 에크와 가졌던 라이프치히토론회에서 루터는 교황의 교의상의 권위와 공의회의 무류성(無謬性)을 부정하였고, 20년에는 교황의 파문협박장을 공공연히 태워버렸으며, 21년 보름스국회(제국의회)에서는 황제 카를 5세의 면전에서 행한 심문에도 굴하지 않았으므로 제국추방처분형을 받았다(보름스칙령).
이와 같은 신념에 근거한 루터의 영웅적 행위는 독일국민 각계각층으로부터 지지를 받아 개혁운동은 국민적 운동으로 전개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제국추방처분형을 받은 루터는 작센의 프리드리히 3세의 보호 아래 바르트부르크성에 한때 은신했다.

한편 국민 각계층은 이 무렵부터 루터의 교설을 독자적으로 해석하고 루터로부터 이반(離反)해 나갔다.
비텐베르크에서는 21년 카를슈타트가 교회관습의 구체적 변혁을 지향한 이른바 비텐베르크 소요를 일으켰다.
22년 지킹겐이 이끄는 제국기사가 <기사의 난>을 일으켰으며, 24년에는 독일농민전쟁이 발발하였다.
농민들은 성서를 방패로 촌락에 의한 목사의 임면권, 십일조(十一條) 폐지, 농노제의 폐지, 공조(貢租)·부역의 경감, 공유지의 확보 등을 요구하며 봉기하였다.
당초 루터는 농민의 요구를 전면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다. 부분적으로는 농민편에 서서 영주측의 양보를 요구하고 중재재정적(仲裁裁定的) 해결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뮌처가 튀링겐지방의 농민을 이끌고 사회체제의 변혁을 목표로 활동하자 농민을 철저히 탄압할 것을 제후에게 호소하였다.

<반란을 일으키는 영혼의 소유자에 관하여 작센의 제후에게(1524)>에서는 뮌처의 폭동적 성격을 논하고, <농민의 살인, 강도단에 대항하여(1525)>에서는 영주들을 고무·격려하고 반란농민의 철저한 처형을 주장하기까지 하였다.
루터는 농민들의 주장과 행동이 영적 사항과 세속적 사항을 혼동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였으며 이는 양자의 명확한 구별 위에 세워진 루터의 세계관에 위배되기 때문이었다.

루터는 25년 인문주의자의 대표인 에라스무스와도 갈라섰다. <인문주의 없이는 종교개혁도 없다>고 하듯이 당초 인문주의자는 루터를 지지하고 공동전선을 펴고 있었다.
그러나 루터의 파문이 확정될 무렵부터 인문주의자들은 루터를 지지하는 자와 가톨릭에 머무르는 자로 나뉘면서,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1524)>, 이에 응한 루터의 <노예의지론(1525)>으로 인하여 양자는 결정적으로 갈라섰다.
이처럼 국민 각 계층이 루터의 개혁운동에서 이탈하자 개혁운동은 영방제후(領邦諸侯)와 긴밀하게 밀착되어 갔다.

독일농민전쟁 뒤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하여 개최된 26년의 슈파이어국회에서 <일반공의회 또는 국민회의의 개최까지>라는 조건부이기는 하나, 제후는 <신과 황제에 대해서 책임질 것을 기대하면서, 다만 확신할 수 있도록 스스로 생활하고 통치하며 사태를 처리해야 한다>고 하는 결의를 하였다.
이 결의에 입각해서 루터파 제후는 영내의 종교적 정비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작센선제후령 내에서는 <순찰자를 위한 훈령(1527)>을 발표하고 루터파 신학자 가운데서 순찰자를 임명하여 영내의 종교와 교육사정을 시찰하게 하여 종교적 통일을 꾀하였다.
이 순찰교회제도는 종교적 통일을 꾀하는 동시에 영내의 정치적 안정도 확보한다는 사실상의 영방제후 교회체제의 수립으로 이어져 갔다. 이후 종교개혁은 주로 영방제후들이 담당하여 전개하였다.


이 논제는 순식간에 전독일에 퍼져 종교개혁운동의 발단이 되었다. 그가 소속된 수도회의 총회가, 18년 하이델베르크에서 열려 토론이 이루어졌는데,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교황의 사절인 카예타누스의 심문을 받고 이 95개조의 철회를 요구당하지만, 이를 거부하였다.
1519년에는 라이프치히에서 신학자 에크와의 토론에서 교황도 과실을 범할 수 있음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로마가톨릭과 결별하였고, 20년 교황으로부터 파문칙령을 받았으나 태워버렸다.

1521년 보름스국회에 소환되어 추방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작센 선제후(選帝侯)의 도움으로 바르트부르크성(城)에 숨어, 급진혁명가의 소요를 누르고 복음주의교회의 확립에 노력하였다. 특히 마르부르크회담에서는 성찬에 대해 일치를 얻지 못하고, 스위스 종교개혁자 츠빙글리와도 결별함으로써 프로테스탄트동맹의 꿈이 깨졌다.
루터는 최후까지 설교·강의·권고·저술에 종사하고 귀족들의 분쟁화해를 위해 고향으로 내려갔으며 그곳에서 병으로 죽었다.

수도원의 루터는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 용서의 확신을 얻을 수 없었다. 그러나 롬 1:17의 말씀에서 복음의 참된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인하여 죄인이 의롭다고 칭하시는 의이며,인간은 이것을 복음 안에서 믿음으로 받는다.

루터는 사망하기 1년 전 작성한 라틴어 저작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이 때를 회상하고 있다.

“나는 격렬하고 고통스러운 양심으로 화를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바울의 그 말씀에 끈덕지게 매달렸고 아주 열렬히 성 바울이 원하는 것을 알고자 하였다. 마침내 하나님의 자비로 밤낮으로 묵상하는 가운데 나는 그 단어들이 나오는 문맥에 주의를 기울였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거기서 나는, 하나님의 의는 이 의에 의하여 의인이 하나님의 선물, 즉 믿음으로 살아가는 바 그 의라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 여기서 나는 완전히 새로 거듭나서 열린 문들을 통하여 낙원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느꼈다. …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의’라는 단어를 이전에 미워하였던 것만큼이나 이제 사랑으로 나의 가장 달콤한 단어로 찬양하였다. 이렇게 해서 바울의 바로 그 구절은 내게 진정으로 낙원으로 들어가는 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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